완벽한 만원
처음 다닌 회사에는 야근 식대 제도가 있었습니다. 포괄임금제였기 때문에 야근을 하더라도 수당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야근은 오후 여섯 시를 기준으로 그 이후 3시간을 추가로 일하면 야근으로 인정했는데 이 때 저녁 식사 비용을 보전해 주는 제도였습니다.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 몇 년에 걸쳐 야근 식대는 7천원이었고요.
당시 회사는 압구정 근처에 있었는데 그 근처에서 7천원으로 먹을 수 있는 식사는 꽤 제한적이었습니다. 주로 회사에서 멀지 않은 백반집과 돈가스집, 부대찌개집, 제육볶음집 정도가 고정 메뉴였는데 이들도 일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7천원으로는 먹을 수 없는 가격에 진입했습니다.
포괄임금제를 유지하는 회사의 당연한 특성 상 노동시간을 기록할 어떤 체계도 없었습니다. 특히 시간이 지나며 비공식적으로 출근 시각이 늦춰졌고 퇴근 시각은 더 늦춰집니다. 하지만 오전 아홉 시에 출근해 오후 여섯 시에 퇴근하는 일정에 맞춰 설정된 조건에 따라 오후 아홉 시에 회사에 있기만 하면 실제 노동 시간에 관계 없이 저녁 식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저녁 식대는 먼저 본인이 현금으로 지출한 다음 ‘야근 식대 담당’에게 제출하면 야근 식대 담당은 한 주 동안 야근식대 지출을 정해진 엑셀 양식에 맞춰 작성한 다음 그 뒤에 영수증을 붙여 본사의 ‘이사님’께 직접 제출해 결제를 받아 재무에 제출해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전임자가 하던 대로 엑셀 양식을 인쇄해 손으로 작성하다가 - 거짓말 아님 -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서 영수증을 보고 엑셀에 작성해 사람 별, 기간 별 합계를 자동으로 계산하게 한 다음 자동으로 인쇄되고 또 사람 별로 얼마 씩 받아야 하는지, 또 이를 각자에게 현금으로 전달하려면 돈을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 계산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가끔 오타를 내거나 숫자를 틀리곤 했는데 빨간펜을 든 - 거짓말 아님 - 이사님은 그런 걸 귀신같이 찾아내 다시 써 오라고 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서류를 재무에 제출하면 바로 ‘현금으로’ 모두의 식대를 받았는데 그걸 가져와 각자 자리를 돌아다니며 돈을 나눠줬습니다. 이런 역할은 여기서 끝일 줄 알았는데 나중에 다른 회사에서 야근 택시 요금을 이런 식으로 정산해서 비슷한 일을 또 하게 됩니다.
이 야근 식대의 핵심은 실제 일상적으로 지출할 것으로 예상되는 비용보다 더 낮은 비용을 지불함으로써 스텝들이 본인들의 핵심 업무 이외의 쓸모없는 일에 집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규칙을 만든 회사는 스탭들이 그런데 신경 쓰기를 원하지 않을 테고 또 고작 야근 식대 가지고 그런 결과를 초래할 거라고 상상하지도 않을 겁니다. 하지만 스탭들은 그날 그날 어느 가게에서 7천원 한도로 밥을 먹을 수 있는지, 또 지금 밥 먹는 가게에서 7천원을 초과하면 얼마를 내가 더 내야 하는지, 또 혹시나 7천원보다 적은 돈만 지출하려던 스탭들에게는 손해보는 느낌을 줘 7천원에 딱 맞추는 묘기에 도전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한번은 포괄임금제를 채택하면서 동시에 저녁 식대 제도를 운영하는 회사에서 일한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도 퇴근시각 이후 세 시간 동안 일하면 저녁 식대를 지원해 주는 방식이었는데 여전히 포괄임금제를 운영하는 회사 답게 노동시간을 기록할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녁 식대는 좋게 말해 상당히 느슨하게 운영되곤 했습니다.
짜장면이 두 배 넘게 오르는 긴 세월이었지만 저녁 식대는 먼 옛날과 비교해 3천원 오른 1만원이었고 오랜 옛날과 전혀 다르지 않게 회사 근처에서 1만원으로 먹을 수 있는 밥은 상당히 제한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사람들은 1만원으로 밥을 먹을 수 있는 가게를 공유하는 등 핵심 업무 이외에 정신을 쏟았지만 이번에도 회사는 이런 상황을 문제로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이번에도 1만원보다 적은 금액을 지출할 계획이었던 사람들이 두뇌를 풀 가동 해 저녁 식대 1만원에 정확히 맞춘 지출을 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고 여러 사람이 같은 가게에서 동시에 결제할 때는 더더욱 각자가 서로 다른 메뉴를 선택했음에도 합계가 정확히 1인당 1만원을 정확히 맞추도록 하기 위해 합법적인 범위 안에서 온갖 묘기를 부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서 모든 사람이 매일 저녁 정확히 1만원 지출에 맞춘 지출 기록을 제출하면 이를 본 다른 부서에서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서로 다른 가게에 가면서도 금액을 정확히 맞추는 거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이 ‘완벽한 만원’은 회사의 부족한 지원과 그럼에도 야근은 해야 하는 상황과 합쳐져 일종의 스포츠가 되었고 이 스포츠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이를 핵심 업무와 무관하게 즐기게 되었습니다.
아마 회사는 이런 상황을 알지도 못할 테고 회사 주변 밥집들의 밥값에 훨씬 못 미치는 돈을 저녁 식대로 제공하는 것이 문제라고도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덕분에 우리들은 ‘완벽한 만원’을 맞출 때마다 모두 함께 기뻐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근처에 비슷한 회사가 우리의 세 배도 넘는 돈을 저녁 식대로 제공한다는 말을 들으며 회사가 우리들에게 충성하지 않는 이상 우리들 역시 회사에 충성할 이유가 없음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돌아오는 저녁 식사 때 또 다시 ‘완벽한 만원’에 도전하며 기뻐하거나 시무룩해 하는 감정을 느끼겠지만 이 감정과 무관하게 회사를 향한 감정은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