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저니 오브 뭐?
게임 이름을 정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이름을 고객들에게 올바르게 전달하기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직업 프로그래머가 아니어서 그 어려움의 본질을 깊이 이해한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들이 어려워 하는 일 중 하나가 뭔가의 이름을 짓는 일이라는 이야기를 접한 적 있습니다. 여러 가지 대상의 이름을 잘못 지었다가 두고 두고 어려움을 겪거나 이름으로 인해 본질이 의도와 달리 전달되어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직업 프로그래머가 아니더라도 게임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프로젝트에 그들과 함께 일하면서 종종 그런 어려움을 느낄 수 있는 순간에는 그들이 영문 개발명을 직접 만드는 대신 우리들에게 영문 개발명을 제안해 달라고 요청할 때, 그리고 주니어 프로그래머님들이 분명 오랜 세월에 걸쳐 영어를 공부했을 것이 분명한데도 알파벳으로 구성되기는 했지만 완전히 이상한 단어들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명령어를 알려주실 때 등이 있습니다. 게임에 어떤 기능이나 컨텐츠를 개발할 때 개발명을 따로 쓰는 대신 고객에게 나갈 거라고 예상하는 이름을 영어로 옮겨 개발명으로 사용할 때가 있습니다. 전에는 이런 상황에 딱히 신경 쓰지 않았지만 몇 번인가 고객에게 나갈 거라고 예상한 이름이 개발에 어려움을 가져오는 사례를 접한 다음부터는 영문 개발명을 결정할 때 실제 고객에게 나갈 거라고 예상하는 이름을 기반으로 결정하지 않게 됩니다. 가령 어떤 게임에 등장할 계속해서 난이도가 증가하며 반복되는 탑 모양의 던전을 개발 중 팀 내에서 ‘오만의 탑’이라고 불렀다고 해 봅시다. 이 컨텐츠의 영문 개발명 역시 ‘오만의 탑’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설정 상의 이유로, 고객들이 이미 이 이름에 대해 가진 의견 때문에, 라이브 상황에서 이미 출시된 다른 컨텐츠와 관계를 고려하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이름이 바뀌어야 할 수 있는데 이 때 고객에게 전달되는 이름은 변경되겠지만 코드에서는 여전히 오만의 탑이라는 개발명을 사용하고 있어 우리 모두를 상당히 헛갈리게 만들 수 있습니다. 때문에 처음부터 개발명과 고객에게 전달될 이름을 분리하고 서로 의존성을 가지지 않도록 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게임 이름을 정하는 것도 상당히 골 아픈 일입니다. 회사에 프로젝트를 제안하고 승인을 받아 팀을 세팅하기 전에 이미 프로젝트 이름이 결정되어 있을 때가 많습니다. 사실 프로젝트 이름은 본격적으로 외부에 공개되기 전까지 이 팀이 정확히 뭘 하고 있는지 공개되기를 원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아 일부러 알파벳 한 두 글자로 결정하곤 합니다. 그나마 알파벳 두 글자라면 그나마 각 글자가 어떤 단어의 약자일 테니 이를 추측할 수 있긴 합니다. 하지만 알파벳 한 글자로 된 프로젝트 이름은 이들이 뭔지 프로젝트 이름만으로는 추측하기 아주 어렵습니다. 게다가 회사가 커지고 한 모회사 안에 서로 다른 자회사들이 있을 경우 종종 자회사들이 서로의 프로젝트 이름을 거려하지 않은 채 프로젝트를 시작했다가 서로 겹치는 프로젝트 이름 때문에 어느 한 쪽의 프로젝트 이름을 바꿔야만 할 때도 있습니다. 보통 이 시점은 회사로부터 예산을 승인 받을 때인데 예산을 프로젝트 단위로 집행하기 위해 시스템에 프로젝트 계정을 등록하려고 보니 이미 같은 이름의 계정이 있으면 어쩔 수 없이 나중에 등록되는 쪽이 계정 코드를 변경하는 김에 그에 맞춰 프로젝트 이름을 변경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개발 도중에는 프로젝트 이름이 딱히 문제를 일으키지 않지만 슬슬 고객을 만날 시점이 가까워지면 고객에게 전달될 이름이 필요해집니다. 오랫동안 게임 이름 없이 프로젝트 이름으로만 불러온 나머지 게임 이름을 정하려고 할 때 상당한 어려움이 따르는데 가장 곤란한 점은 지금까지 프로젝트 이름으로 부르는데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실제 게임 이름을 붙이려고 온갖 이름들을 나열해 노고 살펴보면 이 모든 이름이 전부 다 마음에 들지 않고 또 다른 게임처럼 보이게 된다는 점입니다. 어차피 최종 결정은 회사의 높은 분이나 퍼블리셔의 높은 분이 결정하게 되겠지만 그 전에 마치 자신이 제안한 이름이 게임 이름이 될 수 있을 것처럼 굴며 개발팀으로부터 이름을 공모 받기도 하는데 여기에는 온갖 멋들어진 이름이 의미 없이 제출되어 도무지 이 게임이 고객들에게 나갈 때 어떤 이름으로 나가게 될 지 가늠할 수 없기도 합니다.
흔히 넷플릭스 같은 스트리밍 서비스를 OTT 서비스라고 부르는데 개인적으로 처음 이 단어를 들을 때 저 약자로부터 서비스의 형태를 전혀 예상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들 그렇게 부르니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저도 그렇게 사용하다가 어느 날 저 약자의 의미를 검색해 보고 한국인 입장에서 정말 와 닿지 않는 단어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아직 KBS에 수신료를 지불하고 또 공중파 방송 채널을 주로 보던 시대에 마지막으로 TV를 사용하던 관점에서 별도의 요금을 지불해야만 하던 케이블 TV를 사용하지 않다 보니 셋탑박스를 사용해볼 일이 없었고 또 그 장치를 ‘탑'이라고 부르지도 않았기 때문에 '탑’을 뛰어넘는 서비스라는 의미의 OTT는 그게 영상 스트리밍 서비스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기는 했지만 동의하기는 어려웠습니다. 한번은 전작이 있는 후속작을 만들며 전작을 뛰어넘는 게임을 만들자는 의미로 전작 이름 앞에 OTT의 O를 붙인 이름의 프로젝트에서 일한 적이 있습니다. 앞서 프로젝트 이름이 알파벳 한 두 글자로 만들어진다고 했었는데 이 경우 프로젝트 이름은 알파벳 두 글자보다 훨씬 길었습니다. 회사 내에서 다른 프로젝트 이름보다 더 긴 그 이름을 부르는데 딱히 어려움을 겪지 않아 다들 그 이름을 잘 불렀지만 결국 예산을 집행하기 위한 회사 시스템에는 이를 줄여 알파벳 두 글자로 된 계정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게 됩니다. 한편 이 게임도 출시가 가까워 오자 고객에게 어떤 이름으로 나갈 것인지 결정해야만 했고 팀 내에서 온갖 이름이 제출되었습니다. 팀으로부터 이름 공모를 받으면 다들 자신이 알고 있는 여러 매체에서 본 여러 이름 중 가장 멋진 것들을 끌고 와 나열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그런 힘을 꽉 준 이름이 나열된 페이지를 보고 있으면 여기가 바로 천하제일무술대회 회장인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여태까지 아무도 이야기한 적 없는 이상한 부제목을 포함한 소위 ‘가오’가 줄줄 흘러넘치는 이름들은 그 이름을 쥐어 짜내느라 힘들었겠지만 선정될 일은 확실히 없을 것 같다는 강한 확신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런데 결국 이 게임은 프로젝트 이름 그대로 전작 이름에 OTT의 O를 붙인 그 프로젝트 이름 그대로 나갔습니다.
제품 이름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이제 우리가 만든 소프트웨어 제품은 고객들에게 어떤 이름으로 전달될 예정이며 이 이름으로 광고가 집행되어 이 이름이 버스 광고판에 붙고 유튜브 영상으로도 퍼지며 이 이름의 도메인을 구입하거나 회사 게임 서비스 도메인의 서브도메인을 만들고 또 이 이름으로 주요 커뮤니티 서비스에 이름을 선점하는 등 온갖 작업을 수행해야 합니다. 만약 제품이 고객들에게 널리 퍼져 감사하게도 좋은 평가를 얻는다면 이제 이 이름은 수많은 고객들에게 기억되고 또 이 게임의 성과를 보고 이 게임의 여러 가지 요소를 복제하려는 수많은 프로젝트의 내부 문서에 끊임 없이 언급되며 이를 실행할 때 수행할 것이 분명한 온갖 다른 회사에서 일어날 회의에서도 끝없이 불리게 될 겁니다. 운이 좋아 이런 이름의 약자에도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이를 또 다른 마케팅 포인트로 사용하거나 이를 기반으로 로고를 디자인할 여지도 있을 겁니다. 이런 폭넓은 활용을 위해 이름은 단순해야 하고 너무 길어서도 안되며 전 세계에 통용되어야 하기에 금지하지는 않지만 한국어로만 만들어져 있다면 이를 회피하려는 성향이 있으며 이와 동시에 일단 한국 내에 서비스 해야 하기에 한국 사람들 기준으로 너무 복잡한 영어를 사용해서도 안됩니다. 영어를 모국어로 구사하지 않는 한국인의 특성 상 이들이 아무리 오랜 기간에 걸쳐 학교에서 영어를 공부해 왔다 하더라도 잘 틀리거나 익숙해지지 않는 단어들이 있는데 이런 단어가 포함되지 않도록 주의하기도 해야 합니다. 속설에 의하면 한국어 화자 입장에서 어떤 언어로 게임 이름을 결정하더라도 부르기 쉽게 만들기 위해 한글로 표현할 때 받침이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든지, 몇 글자를 넘으면 안된다든지 하는 여러 조건들이 있었습니다. 그나마 현대에 가까워질수록 주요 고객들이 이전 시대에 비해 교육을 더 많이 받은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아져 사용 가능한 영어 단어의 폭이 넓어지고 또 이름에 대한 여러 제약도 점점 희미해져 라노베 제목 같은 게임 이름도 별 무리 없이 부제목 자리 대신 제목 자리를 차지해도 서비스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시대가 됩니다.
아. 그리고 회사에 따라 제목을 좀 더 가볍게 만들더라도 딱히 문제 삼지 않는 회사가 있는 반면 또 다른 회사는 제목에 소위 ‘가오’를 중요시 하기도 합니다. 뭔가 시각적으로 중세 판타지를 모티브로 삼고 있으면서 중후한 느낌을 주고 또 그 이름이 가볍지 않은, 마치 양쪽 어깨에 힘 꽉 주고 목을 빳빳하게 들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게임 제목이 있다면 분명 어느 회사 게임인지 예상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사실 그 회사 사장님이 그런 소위 ‘가오’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사실은 업계에 꽤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어서 그 회사 게임 역시 내부에서 개발할 때 프로젝트 이름이 뭐였는지에 관계 없이 힘을 꽉 준 묵직한 이름으로 공개된다면 ‘아 이번에도 다르지 않구나’ 하는 느낌을 받기에 충분합니다. 만약 다른 회사에서 점점 더 길어지는 라노베 제목 비슷한 이름을 게임 이름으로 결정했다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 있지만 만약 그 회사에서 그런 이름으로 게임을 출시하는데 성공한다면 모르긴 몰라도 회사에 아주 복잡한 사정이 있었을 거라는 예상을 해도 딱히 이상하지 않습니다.

한편 저는 평일 아침마다 출근을 위해 2호선과 신분당선을 환승합니다. 두 노선은 깊이가 서로 상당히 다르기 때문에 꽤 긴 계단을 올라야 하는데 긴 계단 뿐 아니라 꽤 긴 환승 통로를 지나야 합니다. 물론 통로 길이가 종로 3가 환승 마냥 한 역 길이 전체만큼 긴 것은 아니지만 오직 환승만을 위해 설치된 통로 치고는 짧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침마다, 그리고 저녁마다 그 통로를 서로 반대 방향으로 아주 빨리 지나가려고 노력하는데 저와 비슷한 의도를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세찬 강물처럼 서로 반대 방향으로 그 통로를 지나는 모습을 보고 또 그 안에 섞여 통로를 지나고 있으면 이게 바로 대도시의 출퇴근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대도시 출퇴근의 끝판왕은 지하에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대도시 출퇴근의 최상위 난이도는 지하가 아닌 지상에 길게 늘어선 광역 버스를 기다리는 줄, 그리고 정차 위치를 지키기 위해 목적지에 거의 도착했지만 아직 사람들을 내려줄 수 없이 길게 늘어선 광역버스의 행렬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강남역에서 짧지는 않은 환승 통로 이야기를 하려고 강남역 구조도를 가져왔는데 막상 제가 아침마다 빠른 걸음으로 지나다니는 통로는 이 커다란 역사 전체를 나타낸 그림에서 제 모니터 상으로는 고작 2센티미터 남짓의 크기로 나타날 뿐이어서 되게 긴 통로라고 말하려고 한 제 의도와 완전히 빗나가고 있습니다. 어쨋든 저는 아침마다, 그리고 저녁마다 두 노선을 환승하기 위해 두 역사 사이의 환승 통로를 지나치며 지난 몇 년에 걸쳐 단 한번도 가동되는 모습을 본 적 없는 무빙워크 옆을 지나며 그 좌우에 길에 붙어 있는 광고를 봅니다. 오래 전에는 이 기나긴 광고판에 서로 다른 광고주들이 광고판의 일부를 점유해 여러 광고를 보여주곤 했지만 언젠가부터는 이 기나긴 광고판 전체를 한 광고주가 점유해 처음부터 이 기나긴 광고판에 한 번에 나타날 것을 고려해 만들어진 광고가 표시되고 있습니다. 사실 가로 방향으로 아주 긴 영상 광고를 만드는 일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에 주로 가로 방향으로 아주 긴 모니터 전체를 반 정도로 나눈 크기에 재생할 수 있을 법한 여전히 가로로 긴 영상을 두 번 중복해서 틀거나 그 사이에 영상 속의 브랜드를 정지화면으로 전달하는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제 환승 통로 전체에 걸쳐 설치된 아주 긴 스크린 전체를 한 광고주가 한 제품의 광고를 위해 한 번에 사용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어느 날 출근하느라 또 다시 두 노선 사이에 놓인 환승통로를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지나치는데 거대한 스크린에 어떤 남성 캐릭터가 말을 타고 탁 트인 들판을 가로 방향으로 달리는 모습을 약간 흔들리는 카메라를 통해 멋들어지게 잡은 영상이 재생되는 모습을 봅니다. 아무래도 말을 타고 달리는 캐릭터의 모습이 중요했기에 좌우로 굉장히 긴 스크린 전체에 걸쳐 들판을 보여주고 그 위에 캐릭터 한 명이 말을 타고 달리도록 구성하는 대신 긴 스크린을 반으로 나눠 같은 영상을 재생하고 있었는데 그래도 여전히 스크린은 좌우로 길었고 좌우로 넓게 펼쳐진 들판에 말을 타고 달리는 캐릭터의 모습은 인상적이었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정확히 이 장소에 영상이 재생될 거라는 사실을 고려해 만들어진 영상이 분명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영상이 좌우로 두 번 중복으로 재생되고 난 다음 스크린의 한쪽 끝에는 아마도 이 게임의 이름으로 추정되는 어떤 단어가 적혀 있었고 그 아래에는 애플 앱스토어 로고와 구글 플레이스토어 로고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빠르게 지나가느라 제 머리 속에는 그 드넓은 들판을 달리는 캐릭터가 인상적으로 자리 잡았는데 영상을 처음 본 날은 다른 날과 똑같이 그 통로를 최대한 빨리 지나가는데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들판, 말 타는 사람 정도가 머리 속에 남았을 뿐 그래서 저게 정확히 무슨 광고인지 인식하는데는 실패합니다. 그나마 애플 앱스토어, 구글 플레이스토어 로그를 통해 저게 뭔가의 게임일 가능성이 높고 또 주요 모바일 플랫폼에서 구동되는 게임일 가능성 역시 높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는 있었습니다. 환승을 마치고 열차가 출발하면 주머니에 있던 폰을 집어 들고 방금 본 것이 어떤 게임의 광고인지 검색해볼까 싶기도 했지만 제가 본 것은 그저 들판을 달리는 사람일 뿐이었기 때문에 검색하기가 좀 애매했습니다. ‘들판 달리는 사람 광고 게임’ 같은 식으로 검색해 운이 좋으면 결과를 얻을 수 있을른지도 몰랐지만 대부분은 어이 없는 결과를 얻고 끝날 가능성이 높았기에 환승을 마치자 저는 다시 이전에 듣던 책을 이어서 들으며 이내 광고에 대해, 그리고 광고로 인한 궁금증을 잊어버리고 출근해 하루를 시작합니다.
이 주제를 완전히 잊어버렸다가 다시 퇴근하는 길에 강남역 환승 통로를 지나게 됐고 아침에 봤던 그 광고가 여전히 재생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런데 통로 양쪽에는 각각 광고할 수 있는 영역이 있었는데 한 쪽은 아침에 본 좌우로 아주 긴 스크린을 통해 영상을 직접 재생할 수 있었고 반대쪽은 역시 좌우로 길었지만 스크린이 아닌 인쇄물을 설치할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인쇄물을 설치할 수 있는 쪽에는 ‘카피바라 GO’라는 게임 광고가 집행 되고 있었는데 이들 역시 좌우로 아주 긴 공간에 광고가 집행될 거라는 사실을 알고 광고를 제작한 것 같았습니다. 영상은 아니었지만 연결되는 긴 이미지에 귀여운 카피바라 캐릭터, 이 게임의 영상 광고에 등장할 것 같은 실제 광고 모델, 한글로 적힌 게임 이름 등이 연달아 지나갔습니다. 게임 이름은 나름 귀여운 모양으로 글꼴을 꾸미기는 했지만 워낙 가독성이 좋아 광고 옆을 빠르게 걸어 지나가는 동안 한글로 적힌 게임 이름을 세 번 이상 봤고 이런 게임이 서비스 중이고 또 광고 중이라는 사실을 완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한편 통로가 끝나갈 때 반대쪽 벽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그 곳에는 여전히 아침에 봤던 게임 이름이 영어로 적혀 있었는데 디플로마 계열의 글꼴로 멋들어지게 적혀 있기는 했지만 디플로마 계열의 글꼴을 사용했을 뿐 아니라 그 이름 자체를 일종의 로고로 활용할 생각이었는지 글자 사이의 간격을 의도적으로 좁힌 것 같은 느낌이어서 뭐라고 적혀 있는지 잘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광고 옆을 마지막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며 가장 큰 첫 글자가 ‘T'인지 'J’인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둘 다일 지도 몰랐습니다. 마침 그 회사 사장님을 그 두 알파벳으로 부르곤 했으니까요.
그 후 몇 주에 걸쳐 그 통로를 빠르게 걸어 지나가며 제 관심사는 몇십 초 사이에 도대체 저 광고에 적힌 게임 이름이 뭔지 유추해 내는 것이 제 출퇴근 루틴이 됩니다. 여전히 반대쪽이 걸린 카피바라 GO 광고는 너무 잘 알아볼 수 있어 비교 될 수밖에 없었는데 그 반대쪽 광고는 여전히 뭔가 어두컴컴하고 중후한 느낌의 멋진 영상을 재생하고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그래서 이 게임 제목이 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엔 드넓게 펼쳐진 들판을 달리는 멋진 영상으로 시작해 중세 사람들이 서로 칼 끝을 모으기도 하고 또 그 시대에 어울릴 법한 착장을 하고 서로를 멋지게 바라보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여전히 그 영상 끝에 붙은 로고이자 게임 이름만은 아무리 봐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나마 힌트는 그 로고 구석에는 회사 이름이 적혀 있다는 점과 로고보다 훨씬 더 시인성 좋은 표현으로 애플 앱스토어와 구글 플레이스토어 로고가 나타나 있어 이것이 모바일 게임 광고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시간이 지나자 거의 같은 표현에 한글로 ‘사전 예약 중’이라는 메시지가 추가되었는데 이를 본 저는 이제 슬슬 이 상황이 웃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잖아도 같은 기간 동안 이 역에는 광고를 보는 사람들의 궁금증을 대놓고 자아내기 위한 다른 광고가 집행 중이었는데 아무리 봐도 이 게임 광고는 궁금증을 자아내기 위한 의도는 아닌 것처럼 보였습니다. 게임 이름과 이 게임의 멋진 영상을 보여주고 사전 예약을 받기 위한 용도일 것 같았는데 저는 지난 몇 주 동안 하루 두 번 이 통로를 빠르게 지나가며 게임 이름 또는 로고를 보고 게임 이름을 알아내려고 노력했지만 도저히 게임 이름을 알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게임 이름을 알아낼 방법을 알고는 있었습니다. 회사 이름이 구석에 적혀 있었으니 그냥 앱스토어에서 그 회사 게임 목록을 살펴보면 바로 게임 이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는 첫 검색에 이 게임의 정확한 이름을 입력해 검색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몇 주에 걸쳐 하루 두번씩 그 광고 앞을 지나치며 저는 결국 이 게임의 첫 글자가 처음 생각한 ‘T'가 아니라 'J’라는 결론에 도달하는데 그칩니다.
그리고 그 광고를 몇 주에 걸쳐 보던 어느 날 문득 머릿속에 섬광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처럼 디플로마 계열의 글꼴로 적힌 첫 번째 단어가 ‘Journey’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는 광고에 적힌 글자를 보고 읽어낸 것이 아니라 도저히 뭐라고 써 있는지 이해할 수 없던 거의 글자로 인식되지도 않는 글자 무더기를 몇 주에 걸쳐 하루 두번씩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살펴본 끝에 깨달은 것에 가까웠습니다. 한 번 첫 단어가 ‘저니’라는 사실을 깨닫자 이제 그 앞에 정관사 ‘the’가 붙어 있고 또 아직은 알 수 없지만 그 아래 적힌 다음 단어 사이에 ‘of'가 끼어 있다는 사실 역시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저는 몇 주 동안 같은 광고를 하루에 두 번 빠르게 지나가며 살펴보며 유추한 끝에 게임 이름의 앞부분이 ‘더 저니 오브’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 이제 이 광고에는 처음에 없던 ‘사전 예약 중’이라는 한글로 된 눈에 잘 띄는 문구가 추가되었지만 여전히 저는 이 게임 제목을 정확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또 시간이 흘러 ‘of’ 다음에 있는 단어의 첫 글자가 'M'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지만 계약 기간이 끝나서인지는 몰라도 어느 날 아침에 보니 몇 주 동안 제 궁금증을 유발하던 그 광고는 사라지고 다른 광고로 바뀌어 있어 더 이상 로고를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쳐다보고 도대체 저 M으로 시작하는 단어는 무엇일지 궁금해할 수 없게 됩니다. 사실 저는 오늘 이 글을 타이핑하기 시작하면서 구글에 제가 지금까지 몇 주에 걸쳐 저 광고를 보고 추측한 단어들인 ‘ncsoft, journey of’까지 입력해 그 다음 단어가 ‘모나크’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지하철 광고에 걸려 있던 빠르게 지나가며 도무지 뭐라고 적혀 있는지 인지할 수 없었던 그 같은 로고라 제가 모니터를 통해 정지된 상태로 볼 때는 꽤 잘 알아볼 수 있다는 사실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디플로마 계열의 글꼴은 사실 비 영어권 사람 입장에서 알아보기 좀 어렵기는 하지만 정지 상태에서 보면 그렇게까지 못 알아볼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저는 아침에 이 광고 앞을 아주 빨리 걷고 있었기 때문에 몇 주에 걸쳐 이 광고를 아침, 저녁으로 봤음에도 광고가 내려가는 순간까지 ‘더 저니 오브’ 까지만 추측해낼 수 있었을 뿐입니다.
‘더 저니 오브 어쩌구' 광고가 내려가고 그 자리에는 연애인 광고가 붙었고 그 반대쪽에 있던 카피바라 GO 광고 역시 궁수의 전설 게임 광고로 바뀌었습니다. 연애인 이름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반대쪽에 걸린 궁수의 전설 광고는 지난 카피바라 GO 광고만큼 딱 보는 순간 이름을 바로 인지할 수 있었고 또 그게 뭔지, 확실히 알 수 있었을 뿐 아니라 통로를 지나는 동안 게임 이름을 몇 번에 걸쳐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제가 궁수의 전설 신작에 관심이 있다면 환승 직후 바로 검색해서 다운로드 하거나 사전예약을 할 수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비슷한 시기에 2호선 쪽에 걸려 있던 ‘나혼렙 어라이즈’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이들 역시 멋들어진 폰트로 게임 이름을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뻔뻔할 정도로 확실한 시인성을 보이는 명조체로 ‘나 혼 렙’이라고 적어 놓은 덕분에 아무리 잠깐 동안 본다 하더라도 이를 인식하지 못할 가능성은 낮았습니다. 게다가 환승 통로에서 아주 빨리 걸어가며 봐야 하는 광고와 달리 플랫폼의 스크린도어 위에 붙은 광고는 그 자리에 서서 열차가 들어올 때까지 정지 상태로 지켜볼 수 있었기 때문에 시인성이 조금 떨어지는 멋을 부린 글꼴을 사용했더라도 게임 이름을 인지할 수 있었을른지도 모릅니다.
이제 첫 글자가 ‘T'인지 'J'인지 구분하기도 어려웠던 그 광고는 내려갔고 아침마다 도대체 저게 무슨 게임인지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지만 한편으로는 게임 이름을 어떻게 지어야 할 지, 또 그 이름을 광고할 때 어떤 전략을 사용해야 할 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앞서 게임 이름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회사의 높은 분, 퍼블리셔의 높은 분이기는 하지만 이분들이 선택할 이름의 목록에는 팀원들 각자의 힘을 꽉 준 온갖 거창한 이름 수 십 개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이름이 아무리 거창하고 멋들어지고 또 소위 ‘가오’가 사는 이름이라 하더라도 잠재고객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다면 그게 과연 의미 있는 이름인지, 올바른 이름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 제가 광고가 내려가는 순간까지 게임 이름 전체를 인지하는데 실패한 그 게임은 로고만 볼 때 뭔가 멋져 보이고 또 그들 스스로 게임 이름에 두 단어 이상을 사용하며 그들 사이를 ‘and’와 ‘of' 등으로 연결하는 시도를 국내에서는 거의 처음 했던 장본인들로써 이번에도 그들의 원칙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멋들어진 로고를 그에 어울리는 글꼴을 통해 표현했다 하더라도 적어도 이 광고가 사람들이 아주 빨리 지나다니는 환승 통로에 설치된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이상 저처럼 디플로마 글꼴을 잘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감안해 어디 구석에 작게라도 게임 이름을 한글로 적어 주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이 게임은 저에게 그 다음 단어가 뭔지 알게 된 지금도 ‘더 저니 오브 뭐쩌구’로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