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이 서서히 바뀌어 가는 이야기
규모가 큰 프로젝트는 오랜 기간에 걸쳐 개발합니다. 여기서 오랜 기간은 최소 연 단위인데 때로는 같은 단위로 두 자릿수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큰 프로젝트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어느 지원 안내든 우대 사항에 프로젝트 런칭을 경험해 본 사람을 요구하는 것을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규모가 클수록 개발에 오랜 시간이 걸리며 런칭을 가로막는 원인이 너무 많습니다. 이런 실상에도 불구하고 큰 프로젝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수행한 경험은 용기와 운이 결합한 대단한 성취입니다. 개인적으로 지원 우대 사항에 런칭 경험을 요구하는 것은 지원자의 운을 시험하는 장치라고 생각합니다. 런칭은 개인의 능력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개인이 런칭을 막을 수는 있겠지만 런칭을 시킬 수는 없습니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마다 이전까지 호흡을 맞추던 팀이 익숙하게 수행하던 온갖 시스템을 다시 구축해야 하는 상황을 한탄한 적이 있습니다. 같은 팀이 여러 프로젝트에 걸쳐 호흡을 맞춰 초반에 ‘뻔한’ 시스템을 다시 구축하고 운용하는데 드는 비용을 줄이면 개발 기간을 단축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새로운 프로젝트를 새로운 팀으로 시작하는 상황 뿐 아니라 같은 팀이 같은 프로젝트를 계속하는 환경에서도 똑같이 뻔한 시스템을 재구축하고 유지하는데 지속적으로 비용이 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프로젝트와 팀이 유지되더라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 프로젝트와 팀 모두 지속적으로 변해 가며 단위 기간이 흐를 때마다 프로젝트와 팀 둘 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어 있습니다.
태세우스의 배와 인간의 세포 이야기는 이런 현상을 빗대어 이야기하기에 좋은 소재입니다. 조각 조각 교체되기 시작한 태세우스의 배는 시간이 흘러 배를 구성하는 모든 조각이 처음과 달라졌지만 여전히 태세우스의 배라고 불립니다. 일정 시간이 지날 때마다 인간을 구성한 모든 세포가 새로 만들어지지만 그 결과는 여전히 나이가 조금 더 들었을 뿐 같은 인간으로 인식됩니다. 하지만 이런 결과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작은 변화가 누적되어 구성원들이 인지할만한 큰 변화를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외부에서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시작과 끝의 스냅샷만을 봤다면 배와 인간이 단위시간 이전과 이후 사이에 같다고 판단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프로젝트와 그 개발팀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조금씩 변해 갑니다. 프로젝트는 처음 피칭할 때 조사하고 예측한 시장 상황이 변해 가고 리퍼런스로 설정한 게임이 서비스를 거치며 다른 모양으로 변하거나 이 게임의 상위 호환 게임이 출시될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응하며 프로젝트의 목표는 조금씩, 때로는 크게 변하고 전과 후를 비교하면 프로젝트 이름이 같을 뿐 완전히 다른 프로젝트가 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팀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이 흐르며 구성원들의 정신력은 서서히 고갈 되어 갑니다. 정신력이 완전히 고갈 되면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프로젝트와 팀에 여전히 헌신하지만 어느 순간 영혼을 잃고 일상적인 업무를 우직하게 수행해 가거나 영혼을 다할 수 있는 새로운 자리를 찾아 이동합니다. 팀의 정신력이 고갈 되기 전에 프로젝트를 런칭해 정신력을 회복 시키는 방법이 가장 이상적이지만 현실은 프로젝트 수준에서 이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죽어가는 영혼을 뒤로 한 팀원들이 어떤 선택을 하든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팀은 물리적으로 다른 인원들로 채워져 갑니다. 이 과정을 반복해 단위 기간이 지나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팀이 됩니다.
왜 긴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세월 동안 같은 시스템을 다시 구축하고 운용하고 또 다시 이전에 겪은 문제들을 반복해서 해결해 가야 할까요. 프로젝트와 팀 모두 느리지만 확실한 변화를 겪으며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결론에 다다르면서 새로운 프로젝트와 새로운 팀으로 시작할 때 이전에 경험한 여러 시행착오에 기반한 시스템 재구축에 불만을 가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는 같은 팀이 여러 프로젝트를 수행할 때도 똑같이 일어날 일이기 때문입니다. 한동안은 정신력의 고갈이 높은 노동강도와 상관이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높은 노동강도는 정신력을 담는 육신을 망가뜨려 빠르게 정신력을 고갈 시키는 것이 맞지만 이런 상황이 아니더라도 뚜렷한 성취 없이 오랜 세월에 걸쳐 같은 프로젝트를 계속하는 상황 자체가 정신력을 고갈 시킨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직까지는 오랜 세월에 걸친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겪는 정신력의 고갈에 개인 차원에서, 팀 차원에서, 또는 회사 차원에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 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상황은 일어나고 있고 팀과 프로젝트는 시간이 흐를 때마다 이전과 완전히 달라지며 문제를 일으키고 런칭에 다가가는 속도를 늦춥니다. 이런 상황을 인식하고 같은 상황이 일어날 때 불편하지 않는 정도가 일단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