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구 광신도
회사마다 프로젝트에 반드시 필요할 거라고 예상하는 소프트웨어가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모든 회사에서 윈도우 OS와 오피스 스위트를 처음부터 구입했습니다. 윈도우는 업계에서 개발 환경으로 가장 널리 사용되는 것 같습니다. 또 오피스는 주로 엑셀과 파워포인트가 사용됩니다. 아웃룩 역시 한동안 널리 사용되곤 했지만 요새는 이전보다는 훨씬 덜 사용되는 분위기입니다.
이밖에 필요한 소프트웨어는 구매 요청을 하게 되는데 회사가 필요성을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직군에 따라 필요하지 않은 소프트웨어라고 판단해 버리면 기안할 때 필요성을 어필하는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소설을 쓰거나 이걸 사주지 않는 너는 팀의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바퀴벌레보다 못한 존재라는 말을 예쁘게 돌려서 쓰곤 합니다.
종종 고위의사결정권자들이 선호하는 소프트웨어가 팀이나 회사 전체의 표준이 되기도 합니다. 남들이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이상한 이슈관리도구가 이미 높은 비용에 구매가 끝나 있어 어쩔 수 없이 적응하고 사용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기도 합니다. 팀의 업무 스타일을 이 소프트웨어의 형태에 맞춰 바꾸는데 몇 마일스톤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또 다른 직군이 주로 사용하는 도구에 포함된 상대적으로 생산성이 떨어지는 간이 기능을 보고 비슷한 기능을 필요로 하는 또 다른 직군에도 활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간이 기능을 대신할 도구를 사 주지 않기도 합니다.
한번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웹 개발 업계에서 주로 사용한다고 알려진 힙한 프로토타이핑 도구를 팀 전체에 구입해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이미 기획팀의 프로토타이핑에는 다른 도구를 사용하고 있어 이 도구가 왜 우리들에게까지 라이선스가 부여됐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도구에서 제공하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기능은 초보적인 수준으로밖에 지원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도구를 무시했습니다. 이후 고위 의사결정자로부터 도구 활용이 미비하다는 이야기가 지속적으로 내려왔습니다. 기획서에 이 도구를 사용해야 할 것 같은 부분에 다른 도구가 사용되었는데 이유가 뭐냐는 내용이었는데 이 이야기를 직접 실무자들에게 전달하지 않았지만 조금만 더 있으면 본인이 뛰어 내려와 사람들마다 멱살을 붙잡고 이유를 물을 기세입니다. 뭐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제가 작성하는 문서에 단순한 드로잉을 첨부할 때 하는 수 없이 그 도구를 사용했고 시간이 흐르자 더 이상 이야기가 나오지 않게 됐습니다. 물론 여전히 잘 사용되지 않는 소프트웨어에 높은 비용을 지불하고 있습니다.
실무에 동떨어진 사람이 의사결정권한을 가지고 실무에서 사용할 도구를 직접 결정해서는 안됩니다. 당연하지만 실제로는 이 당연함이 잘 통용되지 않습니다. 특히 의사결정권자가 이전 다른 프로젝트에서 특정 도구가 사용된 경험을 가지고 있으면 머릿속에 뚜렷한 확신을 남기는 것 같습니다. 아마 MRI로 찍어보면 전두엽에 소프트웨어 이름이 음각 되어 있을 겁니다. 이들은 도구의 특징, 프로젝트 별 차이, 사용 용도 따위를 고려하지 않습니다.
이런 자세는 팀에 악영향을 끼칩니다. 비슷한 역할을 하는 익숙하고 더 본격적인 소프트웨어를 구입할 수 없게 됩니다. 또는 구입하려면 상당한 감정적 지불을 해야 합니다. 시간이 흐르며 그 도구에는 자잘한 편의기능이 추가되어 더 많은 소프트웨어를 구입할 수 없게 만듭니다. 한번은 웹 프로토타이핑 도구를 플로우차트 드로잉 도구와도 헛갈리고 산업 시뮬레이션 도구와도 헛갈리는 일도 있었습니다. 특정한 도구에 좋은 경험을 가진 사람이 고위 의사결정권을 가지고 자신의 관점으로 팀에서 사용할 소프트웨어를 제어하기 시작하면 생산성에 영구적인 피해를 끼칩니다. 지금으로는 이를 해결할 마땅한 방법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