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업 회의가 게임디자이너 처형식으로 변하는 이유
그 회의에서 게임디자이너가 그렇게 공격적인 참여자들의 의견을 홀로 받아내며 만신창이가 되어야만 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현대에 물리적으로 시간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론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는 시간여행이 가능한지, 정확히는 과거로 시간여행이 가능한지 여부에 대한 논쟁을 아득히 뛰어넘어 버리는데 미래로 가는 시간여행은 적당한 범위 안에서 이미 현대 기술로 충분히 가능하지만 그 반대는 애초에 시간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논쟁의 여지조차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현대 이론물리학의 연구 성과를 애써 무시한 다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 오래 전 참여했던 한 프로젝트의 어떤 회의가 일어나던 그 회의실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 행동은 비록 현대 물리학의 연구 결과를 무시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사고실험처럼 제 머리 속에서만 일어난다는 점에서 물리 법칙에 위배되지 않습니다. 다만 아인슈타인은 그의 사고실험을 수학적으로 기술하고 이론적으로 이를 증명해냈지만 저는 이 모든 생각을 머리 속으로만 한 다음 이를 글자로 타이핑 할 뿐이라는 점이 다릅니다. 실은 그냥 다른 정도가 아니라 엄청나게 다릅니다. 지난 얼마 동안 쓴 글들을 살펴보다가 제가 대부분의 이야기를 과거에 일어난 일로부터 시작한다는 점을 눈치 채고 옛날 사람이라는 사실을 지나치게 티 내고 있지 않은가 고민한 적이 있는데 과거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더라도 결국 현대에 도달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방법이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적절한 방법인지는 이론의 여지가 있습니다. 이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오직 제 머리 속에서 현대적인 물리 이론을 무시한 채 과거로 돌아간 다음 지금은 출입 권한이 제거되어 결코 들어가 볼 수 없을 그 회의실로 달아가 제가 앉아 있던 길다란 테이블 한쪽 끝 자리에 앉아 보겠습니다.
당시 우리들은 흔한 모바일 수집 게임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게임은 성장 구간으로 여러 캐릭터들의 이야기와 전투 경험을 차례대로 해 나갈 수 있는 경로를 제공했는데 여느 MMO 게임에 비슷한 경험을 구축할 때 마을과 이를 둘러싼 여러 사냥터를 만들고 이들 사이를 오갈 때 퀘스트를 통해 이야기를 제공해 왔던 것과는 달리 좀 더 이 경험의 실체에 접근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어 개인적으로 굉장히 재미있는 경험이었습니다. 여느 MMO 게임에서 성장 구간의 경험을 구축하기 위해 마을에 보상을 운용할 수 있는 상인 같은 장치를 구축해 놓고 마을 바깥에는 마을에 가까운 순서대로 약한 몬스터에서 강한 몬스터, 필드 컨텐츠와 필드 보스 컨텐츠, 그리고 쉬운 던전에서 어려운 던전, 그 너머의 엔드 컨텐츠에 이르는 여러 장치들을 게임 속 가상 세계의 공간 개념에 맞춰 배열하곤 했습니다. 간단히 마을에서 가까운 곳은 더 쉬운 대상이, 멀어질수록 더 어려운 대상과 컨텐츠가 늘어서 있었습니다. 이런 접근은 이를 만드는 우리들도 이해하고 쉽고 또 이를 접하는 고객들도 이해하기 쉬웠습니다. 특히 공간에 따라 배치된 컨텐츠는 실제 세계의 규칙과 거의 일치했기에 고객들에게 다른 설명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던전을 플레이 하기 위해서는 그 던전 입구가 있는 곳까지 이동해야 하는데 이는 실제 세계에 있는 어떤 시설을 이용하기 위해 해야 하는 행동과 완전히 똑같습니다. 다만 게임 상에서는 그 던전 입구까지 매번 이동을 반복하기는 좀 귀찮으니 다양한 방법으로 이동 과정을 단순하게 만들어주는데 실제 세계에서는 아무리 빨리 이동하더라도 시간이 필요하지만 가상 세계에서는 그 시간을 하드웨어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시간을 무시하면 완전히 제거해 버릴 수 있다는 점 정도가 다릅니다. 하지만 이런 단순화된 이동 방식을 게임적 허용 관점에서 제공한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이런 이동 과정 자체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프로그래스 퀘스트라는 오래된 소프트웨어가 있습니다. 이걸 게임이라고 해야 할지 좀 고민스러운데 일단 게임이라고 해 보겠습니다. 실제 세계의 규칙을 모방해 게임 컨텐츠를 가상 공간에 기반해 제공하던 여느 MMO 게임은 본질적으로 플레이어캐릭터가 핵심 메커닉인 전투 행동을 반복하며 그 캐릭터의 성장 수준에 맞는 컨텐츠를 플레이하기를 반복하는 것 이외에는 강함에 의미를 가지는 행동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다른 플레이어들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상호작용 할 여지가 있기 때문에 강함에 영향 받지 않는 경험이 일어나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MMO 뒤에 RPG가 붙는 순간 그런 경험은 부수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프로그래스 퀘스트는 그런 게임의 근본적인 경험에 집중해 실제 세계의 규칙을 모방한 공간의 개념을 완전히 제거해 플레이어캐릭터를 성장 시키는 행동 그 자체만을 남겼습니다. 이 게임을 - 여전히 이걸 게임이라고 부르기 좀 거북하지만 - 시작하면 전통적인 롤플레잉 경험에 기반해 캐릭터를 만들 수 있는데 일단 캐릭터를 만들어 게임을 시작하고 나면 더 이상 유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저 이 프로그램이 계속해서 실행되도록 놔 두는 일 정도를 할 수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 게임이 실행되는 화면을 살펴보면 우리들이 높은 개발비용을 들여 아름다운 배경과 캐릭터를 만들고 복잡한 던전을 만들어 배치하고 복잡한 전투연산공식을 만드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던 그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1메가도 안되는 실행파일은 캐릭터 이름과 클래스, 레벨, 여덟 가지 핵심 스테이터스, 이 캐릭터가 장착한 장비 목록, 진행 중인 퀘스트 이름과 퀘스트를 포함한 챕터 이름, 가지고 있는 마법책 목록, 인벤토리에 아이템 목록 모두가 표시되고 현재 어떤 몬스터와 싸우고 있는지, 퀘스트를 얼마나 진행했는지 따위를 모두 보여줍니다. 아무리 화려한 최신 롤플레잉 게임이라도 그 모든 시청각적 요소를 한계까지 제거하고 나면 그 마지막에는 프로그래스 퀘스트가 나타납니다. 이런 게임을 설계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입장에서 프로그래스 퀘스트는 단순히 비슷한 게임을 패러디한 소프트웨어가 아닌 우리가 설계하는 소프트웨어의 본질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를 볼 때마다 무척 유쾌한 감정을 느끼게 해 줍니다.
같은 관점에서 모바일 수집형 게임은 비록 그 구성요소를 프로그래스 퀘스트 수준까지 본질에 근접할 수는 없었지만 이전에 개발하던 MMO 게임들에 비해서는 훨씬 더 본질에 근접한 여러 가지 특징 때문에 개발에 참여하는 과정 내내 굉장히 재미있었습니다. 일단 게임을 진행하며 여러 캐릭터를 수집해 더 강한 파티를 구성해야 하는 목표는 마치 과거 JRPG 게임에서 한 번에 파티 전체를 조작하고 또 전투에 참여할 파티원을 결정하는 행동과 비슷하지만 이들을 스토리에 따라 획득할 뿐 아니라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획득할 수 있도록 한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또 여느 MMO 게임에서 플레이어 캐릭터를 직접 움직여 마을 밖에 나가 전투하고 보상을 획득한 다음 마을에 돌아와 이를 처리하고 더 강한 무기를 획득하고 다음 필드로 이동하는 행동은 과감히 이들의 공간적 맥락을 제거한 채 그저 ‘스테이지 3-1’과 같이 표현해 버렸는데 이 역시 이전에는 이름과 배경이 서로 다른 여러 필드를 만들어야 하고 또 이들 각각의 사실상 의미 없는 레벨디자인을 한답시고 엑셀 파일에 구글에서 대충 찾아낸 이미지를 컨셉이라며 만들어내던 절차를 완전히 생략하게 만들었습니다. 남은 것은 성장 구간을 나타내는 스테이지의 나열, 그리고 이들을 아예 번호로 표시해 버린 단순하고도 그 실체에 한없이 근접한 메뉴의 나열 뿐이었는데 이는 어쩌면 주사위를 굴려 말판 위에서 한 칸씩 전진해 가는 플레이와 비슷하면서도 이전 같으면 각 레벨을 만드는데 한없이 높은 비용을 소모해야만 했던 개발 과정의 불필요함을 비꼬는 것 같은 느낌도 들게 해 줍니다. 또한 플레이어가 전투에 관여하는 과정 역시 극도로 단순하게 만들었는데 여러 캐릭터가 실시간으로 전투를 진행하기 때문에 이들 각각의 행동에 직접 개입하도록 만들 방법은 사실 없다고 봐도 무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는 자동으로 전투 하게 만들되 제한된 방법으로 전투에 개입할 수 있게 만들었는데 이런 방식을 MMO 장르에 사용하면 목소리가 큰 고객들로부터 욕을 얻어먹기 십상이지만 이 장르에서는 이렇게 만드는 것이 당연했고 똑같은 메커닉을 만들어도 욕을 먹지 않는 신기한 상황에 놓입니다.
그렇게 이 게임은 ‘프로그래스 퀘스트’보다는 한없이 복잡하고 또 화려한 시청각 효과를 동반하며 높은 개발 비용을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여느 MMO 게임에 비해 훨씬 단순한 레벨디자인과 훨씬 단순한 플레이 방식에 기반해 개발되었고 엔드컨텐츠 역시 기존 MMO 게임에서 하던 것과 비슷한 대규모 전장, PvP 컨텐츠, 거의 공식 용어처럼 굳어진 무한 던전을 지칭하는 ‘오만의 탑’ 비슷한 것 등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이들 모두가 공간적 맥락에 기반하지 않기에 있을 것은 모두 있으면서도 훨씬 단순한 모양으로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이 게임이 이 모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리라 예상했고 이는 개발 후반까지 틀리지 않았습니다. 과거의 어느 회의실에 들어가보자고 해놓고 다른 이야기를 한참 했는데 그 회의실에서 일어났던 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방금 설명한 맥락을 조금 알고 있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모바일 수집형 게임을 만들고 있었고 이는 마치 프로그래스 퀘스트만큼 여러 모로 극단적으로 단순화된 요소에 기반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이 날 회의실에서 일어난 브리핑은 우리들이 지금까지 모바일 수집 게임을 만들며 극단적으로 무시한 공간의 맥락을 가져온 기능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고 이런 계획의 존재를 미리 알고 있지 않았던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지금까지 개발해 온 모바일 수집형 장르 게임은 여느 MMO 게임이 실제 세계의 규칙을 모방하기 위해 반드시 갖춰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공간적 맥락을 극단적으로 제거함으로써 게임을 단순하게 만들고 캐릭터를 수집하고 이들을 성장 시키며 밀도 있지만 통제된 전투 경험을 통해 성장 체감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공간적 맥락이 완전히 제거된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기에 게임은 멀티플레이가 제공되는 퍼시스턴트 월드, 동기화 개념, 열려 있는 세계에서 행동하기 위한 몬스터 인공지능 같은 기능을 만들 필요가 없었고 이런 코드는 게임 전체에 걸쳐 전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회의실에서 진행된 브리핑은 바로 이 모든 기능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브리핑이 진행되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저는 이 계획의 존재를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프로젝트의 최고 의사결정자로부터 이 기능에 대한 요구사항이 기획팀에 도착했고 우리가 지금까지 개발해 온 게임의 특성 상 그 요구사항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높은 개발 비용 뿐 아니라 협업 부서들의 저항을 받게 될 거라고 경고했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수집형 게임을 만들며 여느 MMO와 비슷한 경험을 제공하기 위한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들이 갑자기 단기간 안에 의미 있는 수준의 경험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도 의심스러웠습니다. 분명 회사에 있는 다른 스튜디오에서 MMO 장르를 개발하고 있었지만 갑작스레 그들의 코드를 가져와 사용할 수 있을 가능성은 없었습니다. 또 분명 우리들 중 거의 대부분은 이전에 MMO 프로젝트에 참여해본 적 있었지만 수집형 게임을 만들다 말고 갑자기 MMO에 가까운 요구사항을 수집형 게임에 기반해 의미 있게 정의해낼 가능성 역시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들 스스로 이 요구사항이 우리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 과연 정말 필요한지, 이 기능을 개발하기 위해 투입되어야만 할 이전에 비해 훨씬 높은 제작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지, 또 이 높은 제작 비용이 이 기능에 근거해 회수될 가망이 있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우리들은 개발비를 내는 입장이 아니라 개발비에 의해 급여를 받아 생계를 지탱하는 입장이기에 거의 회사의 결정에 가까운 고위 의사결정자의 결정을 실행하는데 필요할 개발비를 걱정할 입장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전에도 잘못된 요구사항에 기반해 개발하다가 개발 비용을 낭비하다가 회사가 더 이상 기다려 주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 경험은 다들 가지고 있었기에 우리들이 고위 의사결정자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이 일을 수행해야만 하는 우리들 스스로를 설득하기는 아주 어려웠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 일은 저와 제거 속한 부서에 할당되지 않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불행하게도 이 일을 할당 받기에 적당한 부서에 할당됨과 동시에 이 일을 감당하기 결코 쉽지 않을 것 같아 보이는 주니어 디자이너님께 할당되었습니다. 사실 요구사항 자체만 놓고 생각하면 주니어 디자이너님이 맡아도 크게 어려울 것은 아니었습니다. 풀 스케일 MMO 게임을 만들 요구사항은 아닙니다. 그저 이전까지는 MMO 게임의 공간적 맥락을 완전히 무시한 채 ‘스테이지 6-3’과 같은 제한된 공간에 나타나 전투 행동을 자동으로 수행하던 캐릭터들을 좀 더 MMO 환경에 가까운 필드에 나타냄으로써 고객들로 하여금 자신이 애써 수집한 캐릭터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게임 상에서 공간적 맥락에 기반해 실체화되는 경험을 주는 것이 핵심 목적입니다. 때문에 MMO에 있을 거라고 여겨지는 모든 기능을 정의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최소한의 공간적 맥락을 제공하고 그 안에서 캐릭터들이 이전까지 본 적 없는 여느 MMO 게임과 비슷한 방식으로 실체화되어 다른 플레이어들과 동기화된 상태로 같은 장소에서 최소한의 상호작용을 일으키는 메커닉을 설계하면 됐습니다. 우리는 풀 스케일 MMO를 만드는 대신 MMO처럼 보이는, 거의 MMO 흉내를 내는 뭔가를 만들기만 하면 됐기 때문에 이 요구사항을 정의하는 일 자체는 어렵지 않을 거라고 예상합니다. 그래서 얼마 동안 이 계획을 명령한 의사결정권자에 저항하기를 그만 두고 월급 받는 회사원의 본분으로 돌아가 설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업무는 앞서 말한 대로 저와 제가 포함된 조직에 할당되지 않았기에 한동안 이 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애써 모른 척 하고 다른 일에 집중합니다.
사실 저와 제가 포함된 부서는 이 일에 할당되지 않았기에 이 업무를 브리핑 하는 자리에 참여할 계획도 없었습니다. 아웃룩을 통해 제가 그 브리핑 일정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주최자에게 “아니 저는 필요 없지 않나요? 그냥 문서 읽어보면 되는데요.”라고 말했지만 어쩌다 보니 저는 게임 구석구석에 사용되는 기반을 설계한 사람이었고 또 협업 조직들이 모인 회의에서 서로의 의사소통에 상당한 지분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회의에 안 들어갈 방법은 없었습니다. 아마 제가 이 모든 상황을 무시하고 회의 시간에 화장실에 들어가 숨어 있더라도 “우진님 오실 때까지 기다리죠” 하며 회의가 진행되지 않았을 겁니다. 제가 이 회의에 아예 들어가고 싶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이 회의의 진행이 이미 눈에 선했기 때문입니다. 각 부서의 높은 분들은 이런 계획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고위 의사결정권자로부터 어렴풋이, 그리고 전혀 구체적이지 않은 모양으로, 또한 이 계획의 목적에 대한 설명을 전혀 듣지 못한 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주로 그런 모호한 계획의 존재를 각자의 부서 내에 전파하지 않곤 했고 이 회의는 각 협업 부서의 주요 구성원들 대부분이 이 계획의 존재에 대해 처음 접하는 자리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준비한 요구사항은 지금까지 수집형 게임을 만들며 단 한 순간도 고려한 적 없는 여느 MMO와 비슷해 보이는 기능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저 이 사실만으로도 회의실에 모인 사람을 당황 시키고 또 분노하게 만들 것이 분명합니다. 그 꼴을 옆에서 보는 것 만으로 이미 감정을 소모하기에 충분한데 저를 포함한 게임디자인 조직이 일방적으로 난타 당하는 과정에 끼어들어 어떻게든 그들 사이에 서로 다른 언어로 인한 잘못된 이해를 바로 잡고 분노에 찬 협업 부서 구성원들이 최소한 이런 요구사항의 존재를 인정하도록 만들어여 했기 때문에 차라리 장염에라도 걸리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때는 아직 코비드가 창궐하기 전이어서 회의를 무난히 빠질 방법으로 코비드를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직접 진행하거나 제가 포함된 부서가 진행하는 회의라면 회의실 앞쪽에 삐딱하게 화면을 등지고 앉아 회의에 들어온 나머지 사람들을 바라보는 자세로 회의를 진행하지만 저나 저를 포함한 부서가 직접 진행하지 않는 회의는 회의실 맨 뒤에 앉아 나머지 사람들과 같은 방향을 보고 앉아 있곤 합니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존재를 드러내고 싶지 않은 의도도 있지만 본격적으로 일방적인 난타전이 시작되면 제가 앞쪽에 앉아 있으면 저도 쳐 맞는 사람의 일부가 되기 쉽지만 반대쪽 끝에 앉아 있으면 상황에 개입함에 따라 앞을 보고 분노를 내뿜던 사람들이 뒤를 돌아보고 제 이야기를 듣게 만들어 일시적으로나마 이미 만신창이가 된 주니어 디자이너님으로부터 모든 사람의 주의를 돌릴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 날도 저는 스무 명 이상이 둘러 앉을 수 있는 긴 회의실 테이블의 반대쪽 끝에 마치 보스 마냥 자리를 잡았고 제 앞으로 협업 부서 사람들, 그리고 반대쪽 끝에 불쌍한 게임디자이너들 몇 명이 앉은 모양이 됩니다. 브리핑이 시작되자 맨 뒤에 앉아 있어 사람들의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사람들의 뒤통수로부터 피어오르는 가상의 스팀을 쳐다보고만 있어도 잠시 후 시작될 일방적인 난타전을 피할 도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는데 이는 딱히 놀랍지는 않았습니다. 분명 이 자리는 두어 시간에 걸쳐 요구사항을 준비해 온 사람이 정신적으로 완전히 무너질 때까지 계속될 거라는 사실을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브리핑이 마무리되고 협업 부서 구성원들 중 가장 영향력이 큰 누군가가 발언하기 시작했는데 안타까운 점은 이 분은 이미 고위 의사결정자로부터 이런 계획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을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이 요구사항을 거부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었을 텐데 그럼에도 계획에 비협조적인 자세로 말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여러 모로 짜증이 나는 감정을 느낍니다.
사실 그 분의 발언 전체는 틀린 곳이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앞서 설명한 대로 우리는 지금까지 수집형 게임을 만들고 있었는데 우리들이 이 정도 단계까지 빠른 속도로 개발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여느 MMO 게임을 개발할 때 가정하고 갖춰야 할 기능들을 대거 무시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기화가 일어나는 공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기에 관련 기능을 완전히 생략할 수 있었고 각 스테이지 별 전투 공간은 완전히 통제된 모양으로만 만들어졌으므로 열린 공간을 이동하는 각 개체의 인공지능이나 이런 움직임을 동기화하고 네트워크 레이턴시를 고려한 예측 동기화 같은 본격적인 MMO 게임에 필요한 기능을 전혀 고려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또한 캐릭터를 직접 조작해 이동하는 개념 자체가 없었기에 비록 훨씬 단순한 모양이기는 했지만 이들 중 상당수 기능을 필요로 하는 이 요구사항은 여기에 필요한 개발 비용 만큼 의미 있는 기능이어야만 하며 게임이 서비스를 시작한 다음 충분히 매력적으로 보여야만 하고 이를 통해 개발 비용의 회수에 일조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이 발언은 주니어 디자이너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이미 벗어납니다. 주니어 디자이너는 그저 고위 의사결정자로부터 출발한 요구사항이 리드그룹을 무력하게 통과해 자기 부서에 도착한 업무를 회사원 입장에서 구체화하고 이를 브리핑 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첫 발언은 이 요구사항이 이 프로젝트에 근본적으로 필요한지, 이 기능에 개발 비용을 투입함으로써 그 효과를 얻을 가능성이 있는지, 이 요구사항이 사실상 지금까지 우리들이 여느 MMO 게임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 기능 여럿을 완전히 무시한 결과 꽤 빠른 개발을 할 수 있었던 장점을 완전히 무력화 할 거라는 사실을 이해하는지에 대한 것들이었고 그저 위에서 내려온 업무를 진행한 담당자가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브리핑에 초대 받은 그 순간부터 예상했던 상황들이 그대로 펼쳐집니다. 이쯤 되면 로또 번호라도 예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단히 부정적이고 또 주니어 디자이너님의 업무 범위를 한참 초과한 의사결정 그 자체에 대한 부정적 우려로 가득한 발언으로 시작된 협업 부서들의 질문은 이상적인 협업 회의에서 나올 법한 이 요구사항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궁금한 점을 묻고 답하려는 의도 보다는 브리핑 한 내용의 헛점을 집요하게 드러내 요구사항 자체를 무력화하려는 의도가 짙게 깔려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모든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완벽한’ 기획서를 작성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 것을 작성할 수 있었다면 우리들은 굳이 한국어로 요구사항을 작성하며 개발팀의 먹이사슬 최하위에 위치해 갖은 수모를 감당하며 일하고 있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여기 있는 이유는 그럴 수 없기 때문이고 사실 이상적인 조직에 가깝지 않더라도 그나마 개발을 지속할 의사가 있는 조직이라면 이 사실을 인정하고 요구사항의 목표를 달성하는데 집중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아슬아슬하게 목표를 달성할까말까 한 것이 현실이지만 시작부터 요구사항을 받아들일 의사가 없는 발언이 계속되자 요구사항을 수행할 구체적인 방법 보다는 요구사항 자체의 불완전함만이 계속해서 부각되었고 결국 여러 사람들의 시간을 낭비한 끝에 오늘 나온 결함을 보완한 다음 다시 브리핑을 진행하기로 하고 회의가 마무리됩니다. 맨 뒤에 앉아 있던 저는 두 시간에 걸쳐 일방적으로 날카로운 말을 쏟아낸 사람들이 회의실 문이 열리고 문을 향해 뒤로 돌아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평온한 표정으로 바뀌는 모습을 지켜보며 어느 정도 일부러 그들이 이 방을 빠져나가는데 걸리적거리며 그 자리에 계속해서 앉아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프로젝트의 먹이사슬 맨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지만 왜 이딴 상황이 일어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고 또 아무도 문제를 제기할 수 없는지 납득하기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
이후 개발에 착수하고 또 그 결과에 도달하는 동안 마치 자신들이 여전히 첫 브리핑 회의실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독설을 내뿜던 그 역할을 계속해도 된다고 착각한 것 같은 사람들을 설득 아닌 설득을 통해 자신이 할 일을 하게 만드는데 굉장한 에너지를 소모해야 했지만 어쨌든 일은 진행되어 실제 서비스에 기능이 추가되는 순간에 도달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기능이 추가되거나 말거나 이제 이 일에 더 이상 관여할 일이 일어나지나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능은 고객들로부터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았고 이 기능으로 인해 플랫폼 프로바이더의 앱 소개에도 무난히 등장했으니 실패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개발팀 내에서 우리들이 이 요구사항을 협업 부서에 전달하고 개발이 진행되는 내내 근본적으로 부정적인 상태를 전혀 벗어나지 않는 사람들을 통솔해 완결된 기능에 도달하는 과정은 별로 다시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습니다. 우리들이 받은 스트레스를 비용으로 환산할 수 있다면 이 프로젝트는 아무리 오래 서비스 된다 하더라도 손익 분기에 도달할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 날 첫 이 요구사항에 대한 첫 브리핑이 일어나던 그 회의실에서 처음으로 꽤 진지하게 왜 이런 협업 회의가 쉽게 게임디자이너 처형식으로 변하는지 생각하기 시작했는데 한동안 이유를 잘 설명하기 어려웠습니다. 문제의 원인을 그 회의실 안에 있는 사람들로 한정해 추측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카메라를 조금만 뒤로 더 빼 좀 더 많은 것들을 조망하기 시작하면서 근본적으로 이런 문제가 왜 일어나는지, 왜 주니어 디자이너가 아무런 이유 없이 정신적으로 완전히 무너지도록 방치되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먼저 고위 의사결정자들의 상당수는 엔지니어 출신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종종 강한 카리스마를 가진 아티스트가 고위 의사결정자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는 사례를 보곤 하지만 이런 적은 사례를 제외하면 고위 의사결정자들 대부분은 실제로 엔지니어 출신인데 이들은 그들 스스로 동작하는 결과를 만들어낼 능력과 권한이 있기 때문에 항상 프로젝트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그 결과 프로젝트에 대해 가장 큰 기여를 인정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기여가 쌓이면 고위 의사결정자가 될 기회가 더 많이 찾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게임디자이너들은 스스로 아주 강한 비전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 프로젝트에 대한 기여를 인정 받기 어려우며 이들 스스로 동작하는 결과를 만들어낼 능력 또는 기능이 없기에 완성된 프로젝트에 대한 영향력이 제한됩니다. 때문에 고위 의사결정자가 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낮습니다. 이런 이유로 고위 의사결정자들은 주로 엔지니어들을 더 잘 이해하고 게임디자인 부서는 요구사항을 구체화하는 역할 정도로 치부하곤 하는데 이런 접근은 고위 의사결정자 본인 뿐 아니라 이 사람의 과거 역할과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는 같은 직군 사람들에게 전파되곤 합니다. 그래서 여러 상황에서 엔지니어가 아닌 직군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불리한 입장에 처하기 쉽습니다.
다음으로 고위 의사결정자들은 자신의 요구사항을 프로젝트 전체에 설득할 생각이 거의 없습니다. 높은 분들은 높은 분들을 주로 대하며 일하기에 이들을 설득하면 프로젝트의 나머지 구성원들을 설득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단지 결정할 뿐 실제 개발은 프로젝트의 나머지 구성원들에 의해 수행되기에 요구사항을 원활히 개발하기를 원한다면 항상 프로젝트 구성원들을 최대한 많이 설득해야 합니다. 판교 방언으로 ‘얼라인 한다’고도 하는데 이는 고위 의사결정자의 프로젝트 구성원 전반에 걸친 설득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저항이 예상되는 꽤 무리한 요구사항을 관철할 때 종종 고위의사결정자들은 그들 사이에 의견을 교환한 다음 이후 진행을 게임디자인 부서에 일임하고 그 다음에 일어나는 일을 완전히 무시하곤 하는데 이 요구사항이 고위 의사결정자로부터 나왔음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당장 오르는 혈압은 이 요구사항을 브리핑 하는 게임디자이너를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들은 종종 메신저를 처형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역사를 통해 배우곤 하지만 쉽게 그저 메신저에 불과한 게임디자이너를 회의실에서 말로 처형하곤 합니다. 무리하거나 도전적인 요구사항은 이 요구사항의 필요를 느낀 고위 의사결정자로부터 시작되어 그의 권한과 권위에 기반해야 합니다. 하지만 아마도 그들 스스로 이미 자신의 요구사항이 프로젝트 구성원들에게 무리하게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음을 아마도 이해하고 있을 것 같은데 이 때문에 의도적으로 요구사항을 내려보낸 다음에 일어나야만 하는 설득의 과정에 거의 개입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결과 이제 너무 자주 반복되어 식상하기까지 하지만 여전히 그 방 안에 있는 게임디자이너들에게 깊은 정신적 상처를 주는 폭력적인 설득 과정이 반복됩니다.
왜 협업 회의가 게임디자이너 차형식으로 쉽게 변할까요. 게임디자이너들은 앞서 설명한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프로젝트의 먹이사슬 최하위에 위치하면서도 그들 스스로 결정 권한이 없는 요구사항을 받아 이를 구체화 해 자신들보다 먹이사슬 상 더 위에 있는 구성원들에게 업무를 진행하도록 해야 하는 처지에 있기 때문입니다. 게임디자인을 제외한 나머지 구성원들은 자신들이 프로젝트 구성원들의 먹이사슬 상에서 게임디자이너들보다 항상 더 위에 있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이해하고 있기에 본능적으로 무리하고 또 도전적인 요구사항에 대해 느껴지는 분노를 그 자리에서 쉽게 표출하면서도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합니다. 이 자리가 협업을 위한 브리핑 자리가 아니라 게임디자이너 처형식이라는 점은 그들이 자신에게 아무런 의사결정 권한이 없는 주제에 대해 말하면서도 이 주제에대한 모든 불만을 받아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의사결정 권한이 있는 고위 의사결정자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훨씬 더 부드럽게 진행될 뿐 아니라 쓸모 없는 감정 소모, 비용의 낭비 없이 진행될 수 있었던 일이 여러 사람들에게 깊은 마음의 상처를 남기고 또 선택적 분노조절장애를 부추기는 모양으로 수행될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왜 협업 회의가 게임디자이너 처형식으로 변할까요. 고위 의사결정자가 자신이 할 일이 의사결정에서 끝난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고위 의사결정자는 조직 전체, 그리고 이들이 개발해 내는 결과에 대한 책임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고위 의사결정자는 결과를 도출해 내기 위해 자신의 권한으로부터 비롯된 요구사항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힘을 실어줌으로써 더 낮은 비용으로 원활하게 개발이 이루어지도록 여러 과정에 개입할 책임이 있습니다. 만약 고위 의사결정권자가 오직 의사결정에만 집중하고 그 의사결정으로부터 프로젝트 구성원들 전체에 걸쳐 일어나는 상황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비록 비슷한 결과를 얻겠지만 이와 함께 불필요한 이탈, 사기 저하, 선택적 분노조절장애의 확산을 함께 얻게 될 겁니다. 회의를 하면 되는 상황을 굳이 처형식으로 만드는 건 그 자리에 없어 자신의 역할을 하지 않는 고위의사결정권자의 모호한 행동이 가장 큰 원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