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서는 어떤 맥락 하에서만 유효하다. 그래서 기획서 쓰기 강좌를 만들기는 아주 어렵다.

인턴십 시즌인 모양입니다. 평소에 프로젝트에서 제가 맡은 일 이외에 회사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본사에서 일어나는 일 따위에 아무 관심 없이 살다 보니 가끔 회사 차원에서 일어나는 이벤트에 당황할 때가 있습니다. 이번 인턴십 프로그램 역시 회사의 규칙적인 행동을 생각하면 당연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워낙 프로젝트 그 자체에만 집중해 일하다 맞닥뜨려 보니 조금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느 새 시간이 흘러 인턴십 시즌이 된 것이었습니다. 회사의 입장과 전혀 다를 수 있지만 제 입장에서 인턴십 프로그램은 본격적인 구직 시즌 이전에 구직하시는 분들께 일종의 회사 체험 프로그램이나 튜토리얼과 같은 형식으로 정보를 제공해 구직에 도움을 드리고 또 이 과정에서 의미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분을 만나면 재빨리 채용해 버리는 것입니다. 사실 처음 일하기 시작하시는 분을 다른 채용과 똑같이 서류와 면접에 기반하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경험이 있는 분들과 만나 서로 꾼과 꾼의 입장에서 이야기한 다음 상호 협의 하에 채용하는 것과 달리 처음 일하시는 분들과는 그런 관계나 그런 방법을 사용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함께 일했던 제 상사는 신입 채용은 퍼포먼스를 전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거의 가능성에 거는 도박에 가깝다고 표현하신 적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도박에 가깝다는 이 표현에 동의합니다. 처음 일을 시작하시는 분의 서류와 인터뷰는 온갖 원인에 의해 오염되어 있어 이를 기반으로 정상적인 채용은 불가능합니다. 거의 우리들의 쎄이다(쎄함 + Radar)를 통과하면 일단 걸어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언젠가 팀에 일하기 시작하신지 아주 오래 되지는 않은 분과 이야기하다가 자기 주변에 취준 하시는 분들이 검증되지 않은 강좌나 개인 교습에 예상보다 훨씬 큰 돈을 지출하는 사례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실 서류를 살펴보면서 이 분들 중 상당수가 전문적인 교육기관에서 가이드를 받고 있음을 알고는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만들어진지 상당히 오래 된 유명한 교육기관의 과정을 이수하신 분들이 업계에 부드럽게 진입하고 계시다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듣고 있었습니다. 게임 관련 교육기관에서 한 학기 전체를 투자해 팀 프로젝트를 수행한 다음 그 경험을 기반으로 서류를 작성하시거나 실제 런칭 경험을 갖추신 분들이 나타나시곤 했는데 이런 분들을 마주할 때마다 과연 이 분들을 우리들 같은 진짜 뭣도 없는 사람들이 평가해 함께 일할지 여부를 결정하는 이 과정 자체에 의미 없지 않은지 심각하게 고민하곤 했습니다. 한편 이런 교육기관의 가이드는 서류를 살펴볼 때 사람들을 큰 혼란에 빠뜨리기도 했습니다. 서류를 살펴볼 때 여러 사람들의 서류를 연달아 살펴보게 될 때가 많습니다. 절대로 헛갈려서는 안되니 한 번에 같은 사람의 서류만을 확인할 수 있도록 디렉토리를 잘 만들어 서류를 분리해 놓고 한 분의 서류를 확인한 다음에는 실수하지 않도록 다시 다른 한 분의 서류만 확인할 수 있도록 디렉토리를 정리하고 나서 다음 서류를 검토하곤 합니다. 그런데 종종 여러 지원자님들에 걸쳐 내용이 조금씩 다르지만 구성이 완전히 똑같은 문서가 나타나면 헛갈리기 시작합니다. 이 문서를 이전에 본 것 같은 착각이 들어 실수하지 않기 위해 한 번에 한 분의 서류만 살펴보는 규칙을 깨고 앞서 본 다른 분의 서류를 열어 살펴봅니다. 그렇게 연속으로 똑같은 서류 몇 개를 보고 나면 이 사태를 도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할 지 혼란에 빠지고 맙니다.
개인적으로 이 업계는 산업의 생애주기 상 성숙기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업계를 창조해 낸 천재들은 이미 업계를 떠나 그들이 하고 싶은 다른 일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산업이 성장한 덕분에 저 같은 아슬아슬하게 평범하다고 억지로 주장할 수 있을 것 같은 경계에 있는 사람들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 업계에서 일하는 동안 업계에 새로 들어오는 서류에 기대하는 수준이 서서히 줄어들었고 몇몇 해에는 이런 변화가 급격히 일어났습니다. 이전에는 감히 제가 이 서류들을 보고 판단을 하는 것이 합당한 일인지 고민하게 만들었다면 현대에 가까워질수록 그래도 앞으로 얼마 동안은 더 일할 수 있을 것 같은 근거 없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런 변화는 산업이 성숙기에 접어들어 그 성장이 둔화됨에 따라 다른 시대와 비교할 때 자신이 원하는 일을 선택할 수 있는 수준의 사람들은 이미 다른 분야를 선택하고 그 다음의 사람들이 이 업계를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은 아주 잠시 뿐이고 인턴십 프로그램이나 신규 채용 프로그램에 참여하느라 여러 지원자님들의 서류를 살펴보다 보면 저금은 충분한지, 만약 지금의 저금으로 먹고산다면 앞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생각하지 않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서도 어떤 분들은 정보를 얻기 위해 검증되지 않은 강좌나 개인 교습에 예상하지 못한 커다란 금액을 지출했으면서도 기대했을 정보나 기술에 접근하지 못하는 사례들이 있는 모양입니다. 분명 검증되고 또 유명한 교육 기관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들의 자리는 분명 한정되어 있을 테니 이 자리를 잡지 못한 분들의 다음 선택은 이런 검증되지 않은, 어쩌면 위험한 것들 뿐일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할 수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도대체 그 분들이 얻고 싶은, 또는 얻어야 하는 정보가 무엇이기에 검증되지 않은 뭔가에 예상보다 훨씬 큰 돈을 지불하는 결정을 하게 만드는지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계속하면서 저는 정말 아무 것도 모른 체 어쩌다 운 좋게 업계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그 다음에는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채용 서류를 살펴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그냥 이런 서류들이 당연하겠거니 생각하고 서류를 살펴본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서류들 뒤에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 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 어떤 아주 작은 도움이라도 될 정보에 접근하기 위해 썩 좋지는 않은 방법을 선택하도록 압력을 받는 상황이 일어나고 있다는 말을 들은 다음부터는 대체 무엇을 하면 좋을지 고민해봤습니다. 하지만 고민은 별로 오래 가지 못했는데 제 입장에서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구직을 하시는 분들이 원하는 정보를 상상해내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구인 공고에 제출할 서류가 나열 되어 있을 테고 그 중 자기소개서나 포트폴리오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글을 사람이 쓸 일이 줄어들어 어지간한 자기소개서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유려한 문장으로 가득합니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포트폴리오일 것 같습니다.
하지만 포트폴리오 문서는 처음 취업을 시도하시는 분 관점에서 경력을 요구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처음 일하려 하는데 경력이 없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아직 일한 적 없는데 포트폴리오에 무엇을 표현해야 할 지 알기 쉽지 않습니다. 교육기관에서 한 학기를 투자해 수행한 프로젝트 경험이 있다면 이를 기반으로 뭔가 의미 있는 문서를 작성할 가능성이 훨씬 높을 겁니다. 프로젝트 수행에 실패했더라도 이 경험은 의미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례가 아니라면 기입할 경력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포트폴리오에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할 지 알 수 없을 겁니다. 제 스스로도 포트폴리오 준비하기 어려움을 느끼고 합격한 포트폴리오 모아 놓은 곳이 있느냐는 질문에 꽤 동의하는 입장이기도 합니다. 또 종종 알려진 교육기관에서 필요 이상으로 혹독하게 행동하시는 분들의 프로젝트 경험에 기반하지 않은 단지 문서를 위한 문서에 의미를 두지 않는 경우도 있어 문제를 훨씬 더 어렵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전에 이런 사례를 보고 포트폴리오 기획서는 의미 없지 않아요라고 주장한 적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문서를 작성하지만 주로 ‘기획서’라는 문서를 작성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입장에서 문서를 작성하는 일이 의미 없지 않다고 말한다면 대체 무엇이 의미 있는 일일지 의심스러웠습니다. 결국 직접 일하고 있는 우리들도 아직 존재하지 않는 제품에 대한 기획서를 쓰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험들을 하다 보니 포트폴리오에 넣을 만한 기획서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썩 잘 되지 않았고 어영부영 아무것도 안 한 채 몇 년이 지나버렸습니다.
한편 얼마 전 메일을 하나 받았는데 그럭저럭 알려진 온라인 강좌 사이트에서 게임 기획서 작성 강좌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메일로 받은 강좌의 개괄을 살펴보니 분명 이 분들도 강좌를 준비하고는 있지만 자신들이 강좌를 준비하는 분야에 대한 이해도가 거의 없음을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커리큘럼을 감수해줄 사람, 나아가 강좌를 직접 할 수 있는 사람을 섭외하려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이 업계 밖에서 기획서를 작성해본 적이 없어 제가 아는 기획서라곤 게임 기획서 뿐이지만 분명 커리큘럼 초안은 다른 업계에서 일반적인 ‘기획서’를 작성하는 방법을 거의 그대로 가져온 것처럼 보였습니다. 또 커리큘럼 이름들은 하나같이 제 관점에서 상당히 선정적인 것들 뿐이었는데 가령 ‘한 번에 입사가 확정되는 기획서 쓰기’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거의 모든 커리큘럼이 이런 형식의 제목이어서 눈을 어디에 둬야 할 지 판단하기 어려웠고 또 만약 제가 커리큘럼을 감수한다면 이미 커리큘럼 제목부터 거짓말을 하는 셈이 되니 난처했습니다. 또 그런 강좌 끝부분에는 뜬금없이 널리 사용되는 인터프리팅 언어 강좌가 딸려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엔지니어가 아닌 사람이 프로덕션 코드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 자체가 뭔가 잘못된 상황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일 뿐 아니라 실제 그 인터프리팅 언어를 활용할 일도 없거나 거의 없었습니다. 프로덕션 코드가 아니라는 전제 하에 기껏해야 엑셀 스크립트나 루아스크립트, 윈도우 인터페이스 자동화 스크립트 따위를 사용하곤 했지만 커리큘럼 초안에 있는 특정 인터프리팅 언어를 사용하는 사례를 적어도 국내에서 본 적이 없습니다. 실은 해외에서도 딱 한 사례가 유명하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생각한 다음 커리큘럼을 감수해줄 수 있지만 취업규칙 상의 겸업금지조항, 그리고 비밀유지서약을 어길 가능성이 높아 강좌를 수행할 수는 없다고 회신했습니다. 예상 대로 그 이후 아무런 메일도 없었습니다.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하면 그 순간 연락을 끊어 버리는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이 일을 겪고 또 취준 하시는 분들이 검증되지 않은 곳에 큰 돈을 내고서도 별다른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보니 문득 우리들이 왜 기획서 작성 과정을 명확히 설명하기 어려워하는지, 또 이전에 제 스스로도 공개할 수 있는 기획서 샘플을 만들어볼 생각을 했다가 결국 포기했는지 돌아봤습니다. 사실 이렇게까지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고 또 정보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상황이라면 한정된 교육기관 뿐 아니라 좀 더 다양한 곳에서 정보를 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 같을 뿐 아니라 제 스스로도 포트폴리오 문서를 어떻게 작성해야 하는지, 기획서를 어떻게 작성해야 하는지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기껏해야 지난 이직 때 제출했던 문서를 공개하는 수준일 뿐입니다. 대체 왜 문서를 쓰는 방법을 일관된 모양으로 설명하기 어려운지 고민해본 끝에 크게 두 가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하나는 널리 알려진 대로 어떤 주제를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기 어렵다면 아직 제 스스로가 그 주제를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저 역시 새로운 문서를 작성하려고 할 때 어떻게 써야 할 지 잘 모르겠어서 이전에 제가 작성했던 다른 문서를 열어 살펴본 다음 새 문서에 주요 구조를 반영해 시작하곤 합니다. 이런 행동으로 미루어 저 자신이 아직 문서를 쓰는 방법을 잘 모를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 글의 제목과 같이 기획서는 이 문서를 요구하는 어떤 상황과 맥락 안에서만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그 문서로부터 맥락을 제거하면 문서는 이해할 수 없는 가정과 설명으로 가득한 이상한 문서로 보일 겁니다.
게임 팰월드에 나오는 건설 기능을 만들기 위한 기획서를 작성한다고 해 봅시다. 팰월드의 건설 기능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미 모양이 결정된 건물을 설치하기만 하는 일종의 완성형 건물과 바닥, 벽, 지붕을 제각기 만들어 한정된 범위 안에서 다양한 건물을 만들 수 있는 일종의 조립식 건물이 있습니다. 만약 이들 중 완성형 건물을 개발하려 한다면 먼저 전체 게임에 비추어 이 기능의 활용처를 소개하는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아마도 게임의 핵심 플레이는 이미 다른 기능이 충분히 언급하고 있을 테니 이 기능이 필요한 목적, 게임에서 차지하는 위상, 이 기능이 게임에 포함된 다음에 게임의 변화한 모습에 대한 일종의 청사진을 제시해야 합니다. 만약 별다른 청사진을 제공하지 못하면서도 그저 기능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면 협업 부서들로부터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한 채 컨플루언스 어딘가에 처박혀 아무도 읽지 않은 문서로 끝날 겁니다. 하지만 이 기능은 앞으로 고객들이 여기에 게임으로부터 획득한 재화를 투입하고 또 자신들의 광기를 투영하게 만들 수 있을 뿐 아니라 게임의 목표와 설정에도 잘 어울린다고 주장한다면 여러 사람들을 설득해 결코 순탄치 않을 개발 과정에 지원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을 작성하기 위해서는 건축 기능 이전에 이 기능이 포함될 게임 전체에 대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게임 전체에서 이 기능이 포함될 위치와 위상, 전체 게임 플레이시나리오 상에서 이 기능이 사용될 위치, 고객들이 이 기능에 접근하는 방법, 기존 인게임 경제시스템과의 연관 관계와 연결 방법 따위를 설명해야 하는데 만약 특정 기능에 대한 기획서를 작성하려고 할 때 이 기능이 포함될 게임에 대한 정보가 없다면 문서를 시작하기도 전에 어려움에 빠질 겁니다. 개인적으로 이 상황에 추천하는 방법은 그냥 아무 게임을 하나 선택하는 겁니다. 그럼 그 게임에 새로운 기능을 넣을 작정이라고 설명하며 문서 첫 부분을 무사히 작성할 수 있을 겁니다.
본격적으로 기능의 동작을 설명해야 합니다. 팰월드에서 여러 건물은 이미 완성된 채로 제공됩니다. 가령 알 부화기, 온천, 거점 단말기 같은 건물들은 이미 모델과 애니메이션이 완성되어 있습니다. 비용을 지불한 다음 이를 바닥에 내려 놓으면 되는데 바닥에 내려놓을 때 다른 물체와 충돌하지 않아야 하고 너무 급한 경사에는 배치할 수 없습니다. 배치할 수 있을 때와 없을 때 서로 다른 색상의 오버레이를 통해 이 정보를 알려줍니다. 이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 먼저 건물 각각의 이름, 외형, 용도를 설명해야 합니다. 이름과 외형은 적당히 둘러댈 수 있지만 용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 기능을 둘러싼 게임의 나머지 부분에 근거해야만 합니다. 가령 알 부화기는 이 게임에 알이 있고 이를 부화 시키는 메커닉이 이미 있거나 이런 메커닉을 추가할 계획이 있다면 쉽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또 팰들이 활동함에 따라 지쳤을 때 온천에서 쉴 수 있다고 설명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면 팰들이 활동함에 따라 지치고 또 배고파진다는 설정이 필요하고 가능하면 이미 이에 기반한 동작이 게임 상에서 일어나고 있으면 설명하기 쉬워집니다. 이번에도 만약 이런 근거가 될 게임이 없다면 기획서 작성을 시작하자마자 냅다 부화기, 거점 단말기가 있다고 선언해야 하는데 어떤 게임의 맥락에 근거하지 않고 이를 한 번에 설명하기는 어렵거나 거의 불가능합니다.
본격적으로 건물을 만들기 위한 기술적인 사양을 제안하는 단계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개발 중인 게임이 어떤 방식으로 데이터를 입력 받게 되어 있는지 예상하려면 이미 게임이 하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실제 팰월드처럼 언리얼 엔진에 기반해 만들고 데이터 입력 방식 대부분이 언리얼 데이터 에셋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멀티플레이는 언리얼 데디케이트 서버에 기반해 동작한다면 데이터 에셋에 기존 아트 에셋을 연결하고 이들의 설정을 변경하고 체크박스나 텍스트박스를 사용해 옵션을 설정할 거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만약 전통적인 엑셀을 사용해 데이터를 입력하고 있다면 높은 확률로 엑셀 데이터를 근거로 서버와 클라이언트가 각각 자신이 사용할 데이터를 변환하고 있을 겁니다. 이 경우 언리얼 데이터 에셋을 사용할 때와 달리 에셋을 연결하기 어렵고 엑셀 쪽에서는 에셋의 유효성을 검증할 수 없으며 막상 게임을 테스트 해 보기 전에는 잘못된 에셋을 지정하는 등의 문제를 미리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에셋을 약속한 경로에 위치 시킨 다음 에셋 이름만 입력하게 하거나 전체 경로를 언급하게 하는 등의 본격적인 요구사항을 제안하려면 이 역시 그 근거가 되는 게임 뿐 아니라 그 게임의 에셋 및 데이터 파이프라인에 대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정확히는 이들에 대한 맥락에 근거해 문서를 작성해야만 실제 사용 가능한 기획서를 작성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 회사와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공개 가능한 기획서 뭉치를 작성해 공개하고 유지보수 할 시도를 했다가 도통 문서를 작성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 채 아무것도 안 하고 끝났던 경험이 있습니다. 지금에 와서 왜 그랬을지 생각해보면 회사에서 기획서를 작성할 때는 이미 이 기획서가 근거로 삼을 게임이 이미 있거나 최소한 이를 개발할 계획이라도 있는 상태이기에 이를 기반으로 문서를 작성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회사와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기획서를 작성하려 하면서도 그 기획서가 근거로 삼을 게임이 없는 상태에서는 의미 있는 기획서를 쓸 수가 없습니다. 만약 이미 공개된 게임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 그 동작을 쉽게 가정하고 또 인하우스 툴을 포함한 개발 환경을 임의로 정의한 다음 시작했다면 과거와 같은 어려움을 훨씬 덜 겪었을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미 공개된 게임을 기반으로 하는 것도 만만치는 않습니다. 그 게임은 이미 공개되어 고객들로부터 평가를 받아 성공적인 기능과 그렇지 않은 기능에 대한 평가가 이미 끝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성공적이지 않은 부분에 해당하는 기획서를 포트폴리오 문서로써 준비하거나 공개 가능한 기획서로 작성하고 싶어하고 또 이를 참고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두 가지 이야기를 하고 마무리할까 합니다. 먼저 과거에 회사와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공개 가능한 기획서를 쓰려고 했다가 아무 것도 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기획서가 근거로 삼을 게임이 아예 없었기 때문입니다. 기획서는 특정 프로젝트나 게임의 맥락에 근거할 때만 의미 있습니다. 문서로부터 이 맥락을 제거하면 이는 평가하기 아주 어려운 기획서가 됩니다. 사실 포트폴리오로 접수 받는 문서들 거의 전부가 이런 상태입니다. 문서 자체는 쓸모 없지만 이로부터 개인의 문서 작성 스킬, 논리 전개 스타일 등을 아주 조금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나마 앞서 소개한 교육기관으로부터 가이드를 받은 문서들은 오히려 그런 차이와 흔적을 지워 버려 평가를 아주 어렵게 만들기도 하지만요. 다른 한 가지 이야기는 취준이 급하더라도 검증되지 않은 뭔가에 함부로 지출하는 건 썩 좋은 아이디어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회사와 보안 계약을 맺고 있지만 말할 수 없는 것은 회사의 영업 비밀, 그리고 회사의 프로젝트에 대한 정보입니다. 그 외에 그저 문서를 작성하는 방법, 문서를 작성하다가 마주한 특정 상황을 처리하는 방법 같은 것들은 그저 요령에 불과합니다. 이를 말한다고 해서 딱히 문제 되지도 않을 겁니다. 그래서 뭔가 널리 공유되지 않는 어떤 정보나 스킬이 존재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뭔가 그런 정보에 돈을 지불하고 접근해야 한다면 높은 확률로 그리 유용하지 않을 겁니다.
개인적으로 회사에서 전화를 받거나 ‘귀하의 건승을 기원합니다’로 시작하는 무서운 서류를 받지 않을 범위 안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메일을 통한 등록은 필요하지만 돈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페이지 맨 위에서 커피를 사 주실 수는 있지만요. 만약 구직 하시는 과정에 궁금한 점이나 문서를 작성하는 요령 같은 굳이 비밀도 아닌 정보가 필요하다면 제가 아는 범위 안에서, 그리고 제 생각에 기반한 뭔가를 알려드리고 또 게시물로 만들어둘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 따라오신 분이 계실른지, 또 이런 정보를 원하시는 분이실지는 알 수 없지만 검증되지 않은 뭔가에 돈을 지불하기 전에 저에게 그냥 물어보셔도 최소한 손해는 아닐 겁니다. 돈을 받지도 않습니다.
아참. 이 글의 결론은 기획서는 어떤 게임이나 프로젝트의 맥락에 기반할 때만 유효합니다. 그래서 맥락을 제거한 형태가 되기 쉬운 포트폴리오 기획서는 쓰기 굉장히 어렵고 또 이런 맥락에 기반하지 않은 기획서 작성 강좌를 만들기는 더더욱 어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