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의 묘사

지옥을 묘사한 다양한 게임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둠 시리즈만큼 서구권에서 바라보는 지옥의 넓은 층위를 살펴볼 수 있는 사례도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둠 다크에이지를 끝낸 김에 서구권의 지옥에 대한 묘사와 둠 다크에이지 사이의 관계를 살펴봅시다.

지옥의 묘사

둠 다크에이지

2025년에 출시된 둠: 더 다크 에이지(DOOM: The Dark Ages)는 2016년 둠 리부트의 프리퀄입니다. 게임 내 연대순으로 따지면 이 작품은 시리즈 전체에서 가장 앞선 시점을 다루고 있습니다. 둠 64 이후 지옥에서 탈출한 둠가이가 이방의 행성 아전트 드누르(Argent D'Nur)에 도착한 직후가 배경이며 이 시기에 둠가이는 메이커(Maykr)의 신성 기계(Divinity Machine)를 통해 슬레이어로 강화된 상태입니다[^Where Doom: The Dark Ages Takes Place On the Timeline]. 전체 타임라인에서 더 다크 에이지가 다루는 시기는 수백 년에 걸친 불성전(Unholy Crusade)으로서 아전트 드누르의 나이트 센티넬이 지옥의 군대와 벌인 기나긴 전쟁의 시대입니다. 이전 작품들에서는 코덱스 항목으로만 암시되던 이 공백이 처음으로 게임플레이로 재현된 셈입니다[^The lore of Doom The Dark Ages explained]. 더 다크 에이지 이후의 사건을 간략히 짚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슬레이어는 나이트 센티넬들과 함께 지옥 정벌을 이어가다 결국 카딩기르 성소의 석관에 봉인됩니다. 그 석관을 둠 2016에서 UAC가 발견하면서 슬레이어가 깨어나고 화성 기지의 악마 침공에 맞서 싸우게 됩니다. 이어서 둠 이터널에서는 지구 전체를 침공한 지옥 군세와 메이커의 음모에 맞서며 에인션트 갓즈(The Ancient Gods) DLC에서 다보스(Davoth)와의 최후 결전으로 현대 3부작이 마무리됩니다[^Doom: The Dark Ages].

아전트 드누르는 원소 정령인 렛스(Wraiths)를 신으로 숭배하는 전사 문명이었습니다. 나이트 센티넬이라 불리는 엘리트 전사 카스트가 왕 직속으로 국가를 수호했고 메이커가 거짓 신으로 군림하면서 이 문명은 점차 메이커의 지배 아래 들어갔습니다[^Argent D'Nur]. 슬레이어는 이 전장에서 압도적인 전투력을 보여주었지만 메이커와 노빅(Novik) 왕은 그 힘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슬레이어의 갑옷에 의지를 억제하는 장치인 테더(Tether)를 부착해 그를 통제했습니다. 게임은 이 상태의 슬레이어가 칼리임(Khalim) 마을을 공격하는 지옥 군대를 격퇴하는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이번 작의 핵심 빌런은 지옥의 왕자 아즈락(Ahzrak)입니다. 그는 코스믹 렐름(Cosmic Realm)의 마녀(the Witch)와 동맹을 맺고 아전트의 심장(Heart of Argent)이라는 유물을 탈취해 지옥 의회 전체를 지배하는 신에 가까운 힘을 얻으려 합니다. 아즈락은 슬레이어와의 직접 대결을 피하며 부하들을 앞세우는 교활한 전술가로 묘사됩니다[^Ahzrak], 헤베스(Hebeth)와 아라툼(Aratum) 등 아전트 드누르 각지에 공격이 이어지면서 아즈락은 심장이 봉인된 성채를 함락시키려 합니다. 노빅 왕은 기폭 장치로 도시 자체를 무너뜨려 탈취를 막고 직접 심장을 몸에 지닙니다. 노빅은 심장을 슬레이어에게 넘기길 거부합니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배신자 크리드 메이커(Kreed Maykr)가 아즈락과 손을 잡습니다. 아즈락은 노빅을 제압하고 심장을 빼앗지만 내용물이 텅 비어 있음을 발견합니다. 심장의 실제 동력원은 티라(Thira) 사령관의 몸 안에 깃든 최후의 렛스 영혼이었기 때문입니다[^Doom The Dark Ages ending explained]. 아즈락은 티라를 납치해 그 영혼을 심장에 담아 신성의 힘을 얻습니다. 슬레이어는 크리드를 처치하고 아즈락과 대결하지만 마녀와 올드 원(Old Ones)의 협공으로 코스믹 렐름에 갇히게 됩니다. 코스믹 렐름에서 슬레이어는 테더를 자폭시켜 자신을 가두는 올드 원 세 명을 죽이고 그 폭발로 자신도 목숨을 잃습니다. 그러나 슬레이어는 지옥의 첫 번째 층인 영혼의 항구(Harbor of Souls)에서 깨어납니다. 이곳은 저주받은 영혼들이 강을 건너 각자의 층으로 이송되는 장소로서 뱃사공에게 대가를 치러야 건널 수 있습니다[^Harbor of Souls]. 슬레이어는 뱃사공을 폭파하고 직접 배를 몰아 지옥을 탈출합니다. 살아 돌아온 슬레이어는 아전트 드누르로 귀환해 아즈락의 심장을 빼앗고 그를 지옥으로 몰아낸 뒤 역침공으로 최종 처치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티라는 렛스의 힘을 각성하고 슬레이어는 빼앗은 메이커 함선을 점령해 떠납니다. 이 함선이 둠 이터널에서 등장하는 둠 요새(Fortress of Doom)가 됩니다. 슬레이어는 이후 나이트 센티넬들과 지속적인 지옥 정벌을 이어가다 결국 석관에 봉인되고 둠 2016에서 UAC에 의해 발견됩니다.

둠 세계관 속 지옥의 본질

둠 세계관에서 지옥의 공식 이름은 젝카드(Jekkad)입니다. 코덱스에 따르면 젝카드는 원래 모든 피조물 이전에 존재하던 낙원이었습니다. 창조의 첫 존재인 다보스(Davoth)는 자신의 백성에게 불멸을 주고자 했고 이를 위해 메이커와 아버지(the Father)를 창조했습니다. 그러나 메이커들은 불멸의 비밀을 얻은 뒤 다보스를 배신하고 젝카드를 봉인했습니다. 배신에 분노한 다보스는 다크 로드로 변모했고 젝카드의 쾌락의 호수는 피의 늪으로 변하며 강은 화염으로 바뀌어 지옥이 되었습니다[^Hell]. 이 타락의 서사는 에덴 동산의 낙원 상실과 닮아 있지만 작동 방식은 전혀 다릅니다. 에덴의 타락이 인간의 불복종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젝카드의 타락은 창조자 자신이 피조물에게 배신당한 결과입니다. 죄를 지은 쪽이 인간이 아니라 신의 위치에 있는 메이커들이며 지옥은 그 배신의 피해자가 분노로 만들어낸 공간입니다. 이 역전 구조 자체가 둠 세계관이 기독교 신화를 단순히 빌려오지 않고 체계적으로 전복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둠의 지옥은 두 개의 층위가 중첩된 구조를 가집니다. 겉으로 보이는 시각 언어는 서구 기독교 전통의 지옥 이미지에서 거의 전부 가져왔습니다. 용암과 불꽃이 흐르고 역십자와 펜타그램이 성소 내부를 장식하며 고문당하는 영혼들이 곳곳에 존재합니다. 둠 2016의 헬 아티스트 라이언 왓킨스는 공식 아트 코멘터리에서 컬러 팔레트가 불과 유황이라는 고전적인 지옥 테마를 기반으로 했다고 밝혔습니다[^Doom: A New Vision Of Hell].

그러나 이 표층 아래에는 전혀 다른 SF 구조가 작동합니다. 아전트 에너지(Argent Energy)는 지옥에서 죽은 영혼을 고문해 추출하는 에너지로서 렛스가 이를 정제하면 지옥 군세의 연료가 되고 메이커 문명의 동력이 됩니다[^Argent Energy]. '영혼이 곧 에너지 자원'이라는 등식은 전통적인 도덕적 처벌 공간으로서의 지옥 개념을 완전히 해체합니다. 기독교의 지옥이 죄인을 처벌하고 선인을 배제하는 도덕적 심판의 공간이라면 둠의 지옥은 죄의 경중과 무관하게 모든 영혼을 원료로 취급하는 착취 구조입니다. 이 이중 레이어가 가능한 이유는 둠 세계관의 핵심 설계 철학에 있습니다. 코덱스가 제시하는 기본 전제는 "지옥은 실재하며 그것이 바로 신화의 원천이었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종교적 지옥 개념이 허구가 아니라 다차원적 실체를 고대인들이 불완전하게 관찰하고 신화화한 결과물이라는 뜻입니다. 둠 이터널 코덱스에 따르면 지구 종교에서 천국으로 불리는 개념은 메이커의 본거지 우르닥을 본 인류의 불완전한 기억에서 비롯되었습니다[^Codex/Story of the Maykrs]. 이 메타 구조 덕분에 이드는 어느 하나의 종교나 신화를 특권화하지 않으면서 기독교의 역십자도 그리스 신화의 카론도 단테의 아홉 원도 모두 동시에 차용할 수 있습니다. 이제 둠이 차용한 서구 지옥 표현의 원천들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이 전통은 수천 년에 걸쳐 층층이 쌓인 구조이며 메소포타미아에서 출발해 그리스와 히브리 전통을 거쳐 기독교 중세를 통과하고 근대와 현대까지 이어집니다.

메소포타미아의 이르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