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역사가 사라지는 자리에서

한국에서 주로 통용되던 '시스템기획자'라는 직군은 이제 그 수명을 다했습니다.

통역사가 사라지는 자리에서

판교의 한 사무실 풍경을 떠올려 봅니다. 모니터에는 엑셀 시트가 펼쳐져 있고 한 사람은 그 안에서 변수의 자료형을 잡고 있습니다. 옆자리에서는 다른 시트에 캐릭터의 능력치 곡선을 만드느라 엑셀 함수를 길게 늘어놓고 있습니다. 회의실 화이트보드에는 상태 전이도가 그려져 있고 그 옆 책상의 모니터에는 워드 문서가 떠 있는데 거기에는 '스태미너가 0이 되면 차지 공격을 사용할 수 없다'와 같은 문장들이 빽빽하게 채워져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작성하는 모든 것은 게임에 직접 들어가지 않습니다. 시트도 문서도 다이어그램도 그 자체로는 게임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이 쓴 자료는 누군가가 한 번 더 읽고 옮겨 적어야만 비로소 게임이 됩니다. 그 누군가는 프로그래머이고 옮겨 적는 행위는 코드입니다. 이 풍경은 한국 게임업계의 어느 회사를 가도 비슷한 모양으로 반복됩니다. 회사의 규모가 다르고 게임의 장르가 다르고 사용하는 도구가 조금씩 다르더라도 누군가가 자연어와 표로 무언가를 그려 내고 그것을 다른 누군가가 코드로 옮기는 두 단계의 흐름은 거의 모든 한국 게임 프로덕션의 공통 구조였습니다. 이 구조의 첫 단계에 자리 잡은 사람들이 이 글의 주인공입니다.

한국 게임업계에서는 이 사람들을 시스템디자이너 또는 시스템 기획자라고 부릅니다. 디렉터나 프로듀서가 만들어낸 요구사항을 마일스톤이나 개발계획에 따라 분리한 다음 각 단위 개발 계획을 세부 기능으로 쪼개어 각각의 요구사항을 정의하는 것이 이 직군의 핵심 업무로 알려져 있습니다[^시스템 기획은 뭐 하는 직군인가요]. 이 설명에는 한 가지 묘한 사실이 숨어 있습니다. 시스템디자이너가 작성하는 '세부 기능의 요구사항'은 실제로는 코드와 거의 같은 것입니다. 변수가 있고 조건이 있고 분기가 있고 상태가 있고 엣지 케이스가 있습니다. 다만 그 표현 도구가 자연어와 표일 뿐입니다. 자연어와 표로 작성된 코드를 프로그래머가 다시 진짜 코드로 옮기는 구조. 이 구조 안에서 시스템디자이너는 코드를 쓰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코드를 쓰지 않는 사람이라는 모순적인 정체성을 가져 왔습니다. 이 글은 그 모순이 형성된 역사와 그것이 떠받쳐 온 직군의 현재 그리고 인공지능 도구가 등장한 이후의 가까운 미래를 차례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결론을 미리 밝히자면 이 직군이 지금까지 쌓아 온 거의 모든 전문성이 의미를 잃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들어설 새로운 요구는 결코 더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이 결론이 가벼운 무게로 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한국 시스템디자이너로 일해 온 한 사람이 자기 직업적 정체성의 절반 이상을 잃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일은 그 자체로 무거운 작업이고 이 글은 그 작업을 회피하지 않는 자세에서 출발합니다. 위로의 어조 안에서 변화의 충격을 작게 보이게 만드는 표현은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고 '기회가 위협보다 크다'는 식의 균형 잡힌 화법은 한국 시스템디자이너가 자기 미래에 대해 깊게 고민할 동기를 약하게 만들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은 자주 단호한 어조를 택할 것이고 때로는 잔인하게 들릴 수 있는 결론을 그대로 적을 것입니다. 그 잔인함이 한국 시스템디자이너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다음 자리를 더 정확히 그릴 수 있는 출발선이 되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직군이 형성되던 풍경

한국 게임 산업이 직군 분화의 압력을 처음 받기 시작한 시점은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입니다. 1998년에서 2000년 사이에 PC방의 확산과 초고속통신망의 보급 그리고 스타크래프트의 인기가 동시에 폭발하면서 한국 게임 산업은 짧은 기간에 산업적 대격변을 겪었고 이 대격변기를 통과하면서 이전까지 안정적으로 형성되지 못했던 게임 개발 인력이 빠르게 온라인 게임으로 흡수되었습니다[^한국 온라인 게임 산업의 기원 : ‘나비들’의 네트워크]. 이 시기의 한국 온라인 게임은 대부분 한 명의 프로그래머 또는 프로그래머에 가까운 소수의 인원이 모든 결정을 내리며 만들어졌습니다. 단군의 땅 같은 초기 텍스트 머드 게임은 기획자가 따로 없이 사실상 프로그래머에 의해 설계와 구현이 동시에 진행되었고 이 흐름은 1990년대를 거쳐 200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습니다[^1990년대 한국 PC 게임 산업: PC 게임 개발자들의 도전과 응전]. 게임을 만든다는 것은 코드를 짠다는 것과 거의 같은 의미였고 게임 디자인은 그 코드를 짜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문제는 게임이 커지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바람의 나라가 1996년에 출시되어 한국 첫 상용 온라인 게임 자리를 잡고 1998년에 리니지가 등장해 1세대 온라인 게임 시대를 열었습니다[^MMORPG의 역사: 와우부터 로스트아크까지]. MMORPG의 규모가 커지면서 한 사람의 머릿속에 모든 게임 요소를 담아두는 방식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캐릭터는 수십 명에서 수백 명으로 늘어났고 아이템은 수천 종에 이르렀고 스킬은 수백 가지로 분화되었으며 던전과 맵의 구조는 점점 복잡해졌습니다. 누군가는 이 모든 것의 수치를 잡아야 했고 누군가는 그것을 일관성 있게 관리해야 했습니다.

그 일을 프로그래머가 계속 맡는 것이 비효율적이라는 사실은 자명했습니다. 프로그래머는 코드를 쓰는 데 시간을 써야 하는데 데이터 시트를 잡고 밸런스 곡선을 그리느라 그 시간을 빼앗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임이라는 산업이 고도로 발전하고 대형화되면서 기존의 프로그래머와 그래픽 디자이너 그리고 경영자들이 맡던 업무에서 분화되어 등장한 직업이 게임 기획자라는 정리는 이런 배경을 짚습니다[^게임 기획자]. 즉 시스템디자이너는 처음부터 독립적으로 설계된 직군이 아니라 다른 직군의 업무 일부를 떼어내어 만들어진 자리였습니다. 이 출생의 비밀이 직군의 모호함을 결정했습니다. 자기 고유의 산출물을 게임에 직접 넣는 직군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프로그래머는 코드를 짜고 그 코드는 게임에 들어갑니다. 아티스트는 모델과 이펙트를 만들고 그것이 게임에 들어갑니다. 시스템디자이너의 산출물은 어떻습니까. 엑셀 시트와 워드 문서와 다이어그램이 모두 다른 사람의 손을 통과해야만 게임이 됩니다. 세대 간의 차이도 이 직군의 정체성에 흥미로운 결을 더했습니다. 1세대 시스템디자이너는 리니지 같은 1세대 MMORPG의 운영을 맡으며 데이터 테이블 설계의 기초를 닦았고 2세대는 와우 이후의 글로벌 표준 MMORPG가 한국에 도입되는 시기에 더 정교한 시스템 설계 기법을 받아들였으며 3세대는 모바일 게임의 폭발적인 성장 안에서 빠른 출시 사이클과 BM 설계의 통합을 일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세 세대가 만든 게임이 다르고 사용한 도구가 다르고 일하는 속도가 달라서 같은 회사의 같은 시스템 기획팀 안에 세 세대가 함께 있을 때 같은 단어가 세 사람에게 조금씩 다르게 해석되는 풍경이 일상이었고 이 풍경 안에서 시스템디자이너라는 호칭의 뜻이 한국 게임업계 안에서 한 번도 통일되지 못한 채로 남았습니다.

분화된 직군의 모습

2000년대 중반에 이르러 게임 기획 직군은 한국 안에서 더 잘게 쪼개졌습니다. 시스템 기획, 콘텐츠 기획, 시나리오 기획, 레벨 디자인, 밸런스 기획. 회사마다 분류 방식은 조금씩 달랐지만 큰 윤곽은 비슷했고 이 분류는 한국 게임업계 안에서 거의 표준에 가까워졌습니다[^게임기획자에 대하여 알고 싶습니다]. 이 안에서 시스템 기획자는 다소 특수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게임 시스템과 룰을 짜는 일을 맡았고 데이터 테이블의 구조를 정의했으며 UI의 동작 명세를 작성했습니다. 콘텐츠 기획자가 그 시스템 위에 올라갈 캐릭터와 아이템과 퀘스트를 채워 넣는 일을 한다면 시스템 기획자는 그 모든 것이 동작하기 위한 뼈대를 설계했습니다. 시스템 기획이 끝나야 콘텐츠 기획과 레벨 디자인이 시작될 수 있다는 작업 순서는 한동안 한국 게임 프로덕션의 표준 흐름이었습니다[^DAY1 게임시스템기획과 컨텐츠 기획의 차이 개념 잡기]. 이런 작업 순서는 시스템 기획자의 어깨 위에 막중한 책임을 올려놓았습니다. 시스템 기획이 잘못되면 그 위에 올라간 콘텐츠와 레벨이 모두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한국 게임업계에서 시스템 기획자가 매우 노련하고 숙련된 경력자들이 면밀하게 해야 하는 자리이며 잘못된 결정과 결함으로 인해 기술적인 문제가 누적되면 프로젝트 자체가 폐기될 수도 있다는 인식이 만들어진 것은 이 책임의 무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게임 개발자]. 시스템 기획자라는 직군이 이렇게 자리를 잡는 동안 한국 게임 산업은 1세대 리니지 세대에서 2세대 와우 세대를 거쳐 3세대 모바일 세대까지 빠르게 진화했습니다. 각 세대마다 게임의 형태와 규모가 달라졌고 그에 따라 시스템 기획자가 다뤄야 할 시스템의 종류도 달라졌습니다. 와우 이후의 한국 MMORPG는 대부분 성장 구간을 퀘스트로 채워야 한다는 새로운 표준을 따르게 되었고 그 흐름은 시스템 기획자가 다루는 시스템의 복잡도를 한 단계 끌어올렸습니다[^한국 MMORPG의 흐름 – 리니지 전후, 그리고 와우 이후]. 모바일 시대가 열리면서는 캐릭터 가챠와 BM이 시스템 기획의 핵심 영역으로 들어왔고 이 영역에서 잘못된 선택은 게임의 흥행 자체를 결정하는 무게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책임이 무거워질수록 직군의 정체성은 역설적으로 모호해졌습니다. 책임은 시스템 전체에 미치는데 산출물은 여전히 다른 사람의 손을 거쳐야만 게임이 되는 구조였기 때문입니다. 분화된 직군의 가장 큰 비용은 한 사람의 시야가 좁아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시스템 기획만 5년을 한 사람은 콘텐츠 기획자가 어떤 일에 시간을 쓰는지 잘 모르고 콘텐츠 기획만 5년을 한 사람은 시나리오 기획자의 작업 흐름을 잘 모르며 그 셋이 같은 회의실에 앉아 같은 게임에 대해 이야기할 때조차 서로 다른 어휘로 다른 우선순위를 말하는 풍경이 일상이었습니다. 분화의 효율 뒤편에 분화의 좁은 시야라는 비용이 따라왔고 그 비용을 회사 안에서 지불한 자리는 보통 디렉터의 자리였습니다. 디렉터가 분화된 각 영역의 결과물을 통합하지 못하면 게임 전체가 흩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통합의 부담이 한국 게임업계에서 시니어 시스템 기획자에게 점점 더 많이 옮겨졌습니다. 디렉터 한 사람이 모든 분화된 직군의 결과물을 통합하기 어려워지면서 시스템 기획팀의 시니어가 콘텐츠 기획팀과 시나리오 기획팀의 결과물 사이의 일관성을 함께 챙기는 일이 일상이 되었고 이 부담은 평가에 반영되지 않은 채로 시니어의 시간만 깎아 갔습니다. 분화된 직군의 비용을 분화된 직군의 시니어가 자기 시간으로 메우는 구조가 한국 게임업계의 라이브 서비스 운영 안에서 오래 지속되었고 그 구조가 인공지능 시대에 들어서면서 다시 통합의 방향으로 돌아가는 풍경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평가축이 두 개인 직군

시스템 기획자가 짠 설계가 좋았는지 나빴는지를 평가하려면 두 개의 서로 다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첫 번째 질문은 그 설계 자체가 좋았느냐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그 설계가 다른 직군에게 잘 전달되었느냐는 것입니다. 이 두 질문은 같은 것이 아니지만 한국 게임 프로덕션에서 시스템 기획자는 두 가지 모두에 대해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같은 게임의 같은 시스템을 두고도 시스템 기획자에 따라 그 설계가 프로그래머에게 도달하는 모습이 달라졌습니다. 어떤 시스템 기획자의 문서는 프로그래머가 즉시 작업에 착수할 수 있는 형태로 작성되었고 어떤 시스템 기획자의 문서는 프로그래머가 다시 회의를 잡아 의도를 캐물어야 하는 형태로 작성되었습니다. 전자의 경우라도 프로그래머가 그 문서를 잘못 해석하면 결과물은 의도와 다르게 나왔고 그러면 시스템 기획자는 다시 그것을 잡기 위해 시간을 써야 했습니다. 이 구조에서 발생하는 오류는 단순히 의사소통의 실패가 아닙니다. 한국 게임 산업 현장에서 시스템 기획자는 게임 메카닉스 시스템을 데이터 구조적 설계 방법으로 창조적 디자인 관점에서 초기적으로 설계하는 일을 하는데 프로그래머는 그것을 객체지향적 방법으로 공학적 디자인 관점에서 설계하므로 이 두 작업 방식의 차이로 인해 의사소통 과정의 오류와 결과물의 미스매칭 오류가 발생할 가능성이 본질적으로 높다는 분석이 학술적으로도 정리되어 있습니다[^기획자를 위한 객체지향적 게임시스템 기획 방법]. 두 직군이 서로 다른 언어로 같은 시스템을 사고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사이를 통과하는 모든 정보는 변환의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평가축이 두 개라는 사실은 시스템 기획자의 커리어에 독특한 풍경을 만들었습니다. 디자인이 뛰어난데 전달이 미숙한 사람은 사내에서 답답한 사람이 되었고 전달이 뛰어난데 디자인이 얕은 사람은 결과물의 퀄리티가 가벼워 보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두 가지 모두를 갖춘 시스템 기획자는 어느 회사에서나 환영받았지만 그 수는 많지 않았고 그 결과 시스템 기획자라는 직군의 노동 시장은 만성적인 인력 부족 상태에 있었습니다.

채용 과정에서 회사가 묻는 질문도 이 모호함을 반영했습니다. 채용 공고에는 흔히 '엑셀 능숙'이라는 한 줄이 들어갔는데 이것은 정말로 엑셀 함수를 묻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엑셀이라는 도구는 시스템 기획자가 데이터 구조를 설계하고 그것을 표 형태로 표현하는 작업의 대표 도구일 뿐이었고 회사가 실제로 묻고 싶었던 것은 데이터 구조 설계 능력이었습니다. 하지만 채용 공고가 그렇게 적혀 있다 보니 지원자 중 상당수가 엑셀 함수 시험 준비를 하고 면접장에 들어왔다가 데이터 구조 설계 질문 앞에서 무너지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직군이 묻는 진짜 능력과 채용 시장이 묻는 표면 능력 사이의 격차는 이 직군의 모호함을 가장 잘 드러내는 풍경이었습니다. 평가축이 두 개라는 사실의 더 깊은 함의는 시스템 기획자의 자기 학습 곡선에서도 드러났습니다. 어떤 시스템 기획자가 자기 약점이 '디자인의 깊이'에 있다고 판단해 그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게임의 본질에 대한 책을 읽고 다양한 장르의 게임을 깊이 플레이해 보고 시스템의 상호작용을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하는 훈련에 시간을 들이면 그 사람의 결과물의 깊이는 분명히 좋아졌습니다. 그러나 같은 시간을 '전달의 좋음'에 약점이 있는 사람이 들였다면 그 시간은 기획서를 쓰는 기법을 익히고 회의를 매끄럽게 끌고 가는 정치적 감각을 다듬고 프로그래머의 입장에서 자기 문서를 다시 읽어 보는 훈련에 사용되었을 것이고 그 사람의 회사 안 평가는 분명히 좋아졌습니다. 같은 시간을 들였는데 한 사람은 결과물의 깊이가 좋아지고 다른 한 사람은 회사 안 평가가 좋아지는 풍경. 이 풍경이 한국 게임업계의 시스템 기획자라는 직군을 두 갈래로 갈라 놓았습니다. 두 갈래로 갈라진 자리에서 어느 쪽을 택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답은 회사마다 달랐습니다. 깊이를 중시하는 디렉터가 있는 회사에서는 디자인의 깊이가 보상받았지만 일정과 협업을 중시하는 디렉터가 있는 회사에서는 전달의 좋음이 보상받았고 같은 시스템 기획자가 두 회사를 옮겨 다니면 자기 가치가 회사마다 다르게 평가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경험이 한국 시스템 기획자의 자기 정체성을 더 흔들리게 만들었고 자기가 정확히 무엇으로 평가받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답하기 어려운 것으로 남았습니다.

엑셀이라는 일터

시스템 기획자의 일상에서 엑셀이 차지하는 비중을 정확히 짚어 둘 필요가 있습니다. MMORPG의 경우 한 게임 안에서 사용되는 데이터 테이블이 최소 40개를 넘는 것이 일반적이고 각 테이블에는 캐릭터의 능력치, 스킬의 효과, 아이템의 속성, 몬스터의 행동 패턴, 퀘스트의 분기 같은 정보가 행과 열의 조합으로 채워집니다[^데이터 테이블 설계 완전 가이드]. 이 모든 테이블의 구조를 잡고 컬럼의 자료형을 정의하고 다른 테이블과의 참조 관계를 설계하는 것이 시스템 기획자의 핵심 업무 중 하나였습니다. 테이블 구조를 잡는 일이 단순한 표 그리기가 아니라는 점은 실무에서 일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압니다. 어떤 시스템 기획자가 새로운 시스템을 추가하면서 데이터 테이블을 만들 때 그 테이블의 구조에 따라 서버 개발자가 짤 데이터베이스 테이블이 결정되고 그 데이터베이스 구조에 따라 클라이언트가 받게 될 데이터의 형태가 결정됩니다[^(기획/신입)테이블 이야기]. 잘못 잡힌 테이블 구조는 라이브 서비스 단계에서 발견되어 긴급 점검과 롤백을 부르고 그 비용은 항상 일선 시스템 기획자가 떠안았습니다. 테이블 작업에서 가장 곤혹스러운 협업 상대는 테이블 개념 자체를 잘 이해하지 못한 채로 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과 일할 때 개발자는 기획자의 의도를 추측해야 했고 그 추측이 빗나가면 게임은 의도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만들어졌으며 결국 이런 일이 반복되면 개발자들 사이에서 '우리는 기획자 없어도 게임 만들 수 있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개발자, 기획자, 테이블].

이 말이 가지는 함의는 시스템 기획자라는 직군의 존재 이유 자체에 대한 물음입니다. 이런 협업 비용을 줄이기 위해 일부 회사는 자체적인 도구를 만들었습니다. 엔씨소프트의 리니지M 캠프 인프라팀은 닷넷의 공통언어와 공통언어 런타임에서 영감을 받은 '공통포맷'이라는 디자인 언어를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기획자가 모델링한 내용을 엑셀이든 데이터베이스든 자유롭게 변환할 수 있는 게임 리소스 스튜디오라는 도구를 개발했습니다[^게임 리소스 스튜디오: 기획자를 위한 원스톱 프로세스]. 이 도구의 등장은 시스템 기획자가 자신의 모델링 결과를 더 직접적으로 게임에 반영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지만 동시에 그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시스템 기획자라는 새로운 요구사항을 만들었습니다. 도구가 발전할수록 시스템 기획자가 갖춰야 하는 도메인이 넓어졌고 그 도메인은 점점 프로그래머의 도메인과 겹치기 시작했습니다. 데이터 구조, 자료형, 참조 관계, 정규화, 트랜잭션. 이 단어들은 원래 데이터베이스 엔지니어링의 어휘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시스템 기획자의 일상 어휘가 되었습니다. 시스템 기획자가 코드를 쓰지는 않지만 코드와 같은 사고 구조를 머릿속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점점 명확해졌고 회사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채용 공고에 정확히 적는 회사는 거의 없었습니다.

여기에 또 한 가지 짚어 둘 사실이 있습니다. 데이터 테이블을 잘 설계하고 그 테이블의 변경이 라이브 서비스에 미치는 파급을 머릿속에서 미리 그려 보는 능력은 매우 높은 인지적 비용을 요구하는 숙련이었지만 그 숙련이 한국 게임업계 바깥의 산업에서 그대로 인정받는 경우는 많지 않았습니다. 같은 자료형을 다루고 같은 참조 관계를 다루더라도 일반 IT 업계의 데이터베이스 엔지니어와 게임 시스템 기획자는 서로의 이력을 동일한 가치로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시스템 기획자가 라이브 서비스 도중 데이터 테이블의 컬럼 하나를 잘못 추가해 세이브 데이터의 호환성이 깨지고 긴급 점검에 들어가는 경험을 통해 배운 '함부로 추가하지 못하게 된 감각' 같은 것은 한국 게임업계 안에서만 통화로 작동하는 화폐였고 그 화폐의 시세는 회사를 옮길 때마다 다시 평가받아야 했습니다. 시스템 기획자라는 직군이 한국 게임업계 안에서 자기 가치를 쌓아 올리는 일은 그 자체로 일종의 잠금 효과를 만들어 냈고 이 잠금이 직군의 정체성을 더 좁고 더 깊은 방향으로 굳혀 갔습니다. 데이터 테이블 설계의 무게는 라이브 서비스 단계에서 더 직접적인 모습으로 드러났습니다. 한국 대형 MMORPG에서 패치 한 번에 수십 개의 테이블이 동시에 변경되는 일이 일상이고 그 변경 사이의 의존 관계를 머릿속에서 미리 그려 보지 못한 시스템 기획자가 패치 노트에 작은 컬럼 하나를 추가했다가 세이브 호환성을 깨거나 던전 입장 조건에 영향을 주는 데이터의 캐스팅 오류를 만들어 긴급 점검에 들어가는 일은 라이브 서비스 운영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자기 자신 또는 동료의 일로 마주한 풍경이었습니다. 이런 사고가 한 번 발생하면 게임의 신뢰가 가장 직접적으로 깎이는 자리에서 그 비용이 청구되었고 그 청구서를 받는 자리는 늘 시스템 기획자의 책상이었습니다.

라이브 서비스의 무게가 만들어낸 또 한 가지 풍경이 있습니다. 시스템 기획자가 새로운 컬럼을 추가하기 전에 기존 컬럼과의 상호작용을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하고 그 시뮬레이션이 충분히 안전하다고 판단되었을 때만 변경을 진행하는 보호 기술입니다. 이 감각은 한국 게임업계 안에서 시니어 시스템 기획자가 신뢰를 얻는 가장 직접적인 근거 중 하나였고 신입 시스템 기획자가 이 감각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채로 라이브 서비스 작업에 투입되었을 때 발생하는 사고의 비용이 너무 커서 회사들이 신입 시스템 기획자에게 라이브 작업을 맡기기를 꺼리는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한국 게임업계의 시스템 기획 직군 채용에서 신입을 거의 뽑지 않고 경력 3년 이상을 우대하는 공고가 늘어선 풍경은 이 감각이 회사 안에서 길러지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의 직접적 결과이고 같은 직군의 채용 게시판에서 늘 자주 비어 있는 자리가 시스템 기획이라는 사실은 그 회사 내부에서 이 감각을 가진 시니어를 잃었을 때 그 자리를 채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 줍니다. 이 잠금 안에서 시스템 기획자라는 직군은 자기 자신을 재생산하는 구조를 만들어 갔습니다. 시니어가 라이브 서비스를 안전하게 굴리기 위해 신입의 진입을 제한하는 풍경, 신입이 진입할 자리가 없어 다른 회사로 옮겨 갈 때까지 어시스턴트 위치에서 머무는 풍경, 어시스턴트 위치에서 5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함부로 추가하지 않는 감각'의 첫 번째 단계를 통과한 사람이 되는 풍경. 이 모든 풍경은 한국 게임업계의 시스템 기획자라는 직군이 도구의 한계 위에 자기 정체성을 쌓아 올렸고 그 도구가 바뀌면 그 정체성이 함께 흔들릴 수밖에 없는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밸런싱이라는 직관과 수학

시스템 기획자의 또 다른 핵심 업무인 밸런싱은 데이터 테이블 작업과는 또 다른 결의 전문성을 요구했습니다. 캐릭터의 공격력 곡선, 경험치 곡선, 보상의 분배 비율, 직업 간 DPS 균형, 가챠의 확률 분포. 이 모든 수치를 잡는 일은 한쪽 끝에서는 직관의 영역이었고 다른 쪽 끝에서는 수학의 영역이었습니다. 대형 MMORPG의 밸런스 기획 직군 채용 공고를 보면 이런 특성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보상 디자인 영역에서는 특정 콘텐츠를 담당하면서 의도한 동작을 위해 보상을 디자인하고 수치 밸런스를 적용하는 일이 핵심이었고 경제 밸런스 영역에서는 게임 내 재화의 가치를 산정하고 생산과 소모의 균형을 맞추는 일이 핵심이었으며 성장 밸런스 영역에서는 플레이어의 성장에 필요한 경험치를 산정하고 분배하며 의도한 플레이타임이 작동하는지 테스트하는 일이 핵심이었습니다[^게임 기획자/입문]. 우대 사항에는 수학과 통계학 또는 경제학 관련 전공이 들어가 있었고 이 한 줄은 밸런스 기획자라는 직군이 어떤 머리를 가진 사람을 필요로 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줍니다. 수학적 사고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밸런스 기획자는 시스템 기획자 중에서도 특수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신입 채용 공고가 거의 없는 직군이었고 공채에서 감 있는 사람을 키워서 만드는 직군에 가까웠습니다[^(📝기획) 게임기획 2년차가 주는 게임 기획자 진입을 위한 팁]. 이 직군에 들어간 사람은 엑셀에서 시작해 R로 옮겨 가고 R에서 머신러닝으로 옮겨 가는 식으로 자기 도구를 진화시키는 길을 자주 택했습니다. 넥슨코리아의 카운터 스트라이크 온라인 시리즈를 담당하던 한 기획자는 엑셀에 한계를 느낀 후 R을 익혀서 게임 맵에서 킬이 더 많이 발생하는 지역을 시각화하고 사용자 이탈을 예측하는 머신러닝 모델까지 만들었는데 이런 진화의 경로는 밸런스 기획자가 데이터 분석가로 변신하는 자연스러운 흐름을 보여줍니다

이 흐름은 시스템 기획자라는 직군 안에서 수학과 데이터 분석 능력이 점점 더 중요해진다는 사실을 의미했습니다. 도메인은 게임이지만 사용하는 도구는 분석 언어와 통계 모델이 되었고 좋은 시스템 기획자가 되기 위해 갖춰야 하는 능력의 목록은 점점 더 늘어났습니다. 게임에 대한 깊은 이해, 시스템 설계 능력, 데이터 구조 설계 능력, 수학적 직관, 통계적 사고, 데이터 분석 도구의 숙련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다른 직군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정리해 전달하는 의사소통 능력. 이 목록은 한 사람의 머리 안에 다 들어가기 어려울 정도로 길었고 한국 게임업계는 이 모든 것을 갖춘 시니어 시스템 기획자에게 의존하는 구조로 진화했습니다. 이 의존 구조 안에서 시니어 시스템 기획자가 가지던 권위는 단순한 경험의 누적이 아니라 '이 모든 능력의 목록을 한 사람의 머리에 담아낸 사람'이라는 희소성에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회사가 이런 사람을 뽑기 어려웠고 한 번 뽑은 다음에는 잃지 않으려 했으며 그 사람이 회사를 떠나면 그 사람이 머리에 담고 있던 게임의 일관성과 밸런스의 감각이 함께 떠나는 것이라 그 자리를 다른 사람으로 채우는 일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한국 게임업계의 시니어 시스템 기획자가 회사 안에서 가지던 정치적 무게는 이 희소성에 뿌리를 두고 있었고 그 뿌리가 인공지능 시대에 들어서면서 천천히 흔들리고 있습니다. 수학적 직관과 통계적 사고는 인공지능과의 협업 환경에서 형태가 달라집니다. 시스템 기획자가 직접 R로 분석 모델을 짜고 머신러닝으로 사용자 이탈을 예측하는 흐름이 한 시대의 모범 답안이었다면 이제는 시스템 기획자가 도메인 지식과 가설을 자연어로 던지면 인공지능이 그 가설을 검증할 수 있는 분석 코드를 즉시 작성하고 결과를 시각화해 주는 흐름이 새로운 표준이 됩니다. 도구를 다루는 손기술의 비중은 줄어들고 무엇을 어떻게 물어볼지에 대한 사고력의 비중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이 변화는 한국 시스템 기획자가 데이터 분석가로 옮겨 가던 길의 풍경을 다시 그려 내는데 그 길은 도구를 익히는 길이 아니라 도구에게 좋은 질문을 던지는 길이 됩니다.

프로그래머라는 문턱

시스템 기획자가 자기 산출물을 게임으로 만들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 프로그래머와의 협업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협업은 한국 게임업계에서 좀처럼 부드럽지 않은 관계로 이어져 왔습니다. 프로그래머에게 시스템 기획자가 자주 듣는 답변은 '안 돼요'였습니다. 이 말은 게임 기획자뿐 아니라 다른 직군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답변 1순위였고 그 이유는 명확했습니다. 기획이 실체화되려면 코드가 필요한데 그 코드를 짜는 사람이 '안 돼요'라고 말하면 그 기획은 종이 위에서 끝나기 때문입니다[^프로그래머에게 사랑받는 게임 기획서 작성법]. '안 돼요'의 진짜 의미가 '싫어요'인 경우가 많다는 사실은 한국 게임업계에서 시스템 기획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현실이었습니다. 프로그래머는 자기가 짠 코드에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아티스트가 자기 작품에 애착을 갖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한 번 짜 놓은 코드를 너무 많이 변경해야 하는 기획이 들어왔을 때 프로그래머는 '안 돼요'로 답하고 그것이 사실은 '지금 이 코드를 다 뜯어 고치고 싶지 않아요'라는 의미인 경우가 적지 않다는 분석은 한국 게임 프로덕션의 현장 감각을 정확히 짚습니다. 이 풍경에서 시스템 기획자가 살아남는 방법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안 돼요'의 문턱을 낮출 수 있는 기획서를 쓰는 법을 익히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프로그래밍을 배워서 그 문턱을 직접 넘어가는 것이었습니다. 후자의 길을 택한 사람들은 한국 게임업계에서 점점 늘어났고 시스템 기획자가 시스템 기획을 하기 위해 스스로 프로그래밍을 배우거나 관련 리소스를 습득하게 되며 실제로 코딩을 하지는 않더라도 작업 스케줄을 만들 정도의 해박한 경험이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1세대와 2세대의 고학력자나 프로그래머 출신이 PD나 메인 기획자를 맡는 경우가 많아진 것도 이 흐름의 결과입니다. 이 길이 부담스러웠던 시스템 기획자들에게 대안은 '전달의 좋음'에 집중하는 것이었습니다. 프로그래머가 일하기 좋은 형태의 기획서를 쓰는 법, 사용자 스토리를 활용해 모든 문장을 '플레이어'로 시작하도록 하는 법, 한 문서를 주 문서로 만들고 다른 문서가 그것을 참조하게 하는 법, 애매한 표현을 금지하고 단계별 사양을 명확히 분리하는 법. 이런 기법들이 한국 게임업계 안에서 한동안 '좋은 기획서 쓰기'의 표준으로 통용되었고 그 기법을 잘 익힌 시스템 기획자가 좋은 기획자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쩌는 게임 기획서, 이렇게 쓴다(How to write great design documents) from GDC 2008 (Korean)].

이 흐름이 가르치는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한국의 시스템 기획자라는 직군은 프로그래머라는 문턱을 어떻게 넘어가느냐의 문제로 자기 정체성의 절반을 이루어 왔다는 것입니다. 그 문턱이 사라지면 이 직군의 절반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이미 그 안에 잠복해 있었습니다. 이 문턱 위에서 시스템 기획자가 들이던 시간 중 적지 않은 부분이 코드와는 무관한 감정 노동이었다는 사실도 함께 짚어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프로그래머와 같은 회의실에 앉기 전에 어떤 표현을 써야 '안 돼요'를 '해 봅시다'로 바꿀 수 있을지 머릿속에서 시나리오를 미리 돌리고 어떤 순서로 요구사항을 꺼내야 거부감이 가장 작을지 계산하고 어떤 동료를 회의에 함께 부르는 것이 의사결정에 유리할지 정치적으로 따지는 일. 이런 노동은 한국 게임업계의 시스템 기획자가 일상적으로 들이던 보이지 않는 비용이었고 그 비용은 자기 시간뿐 아니라 자기 자존감의 일부도 함께 청구하는 종류의 것이었습니다. 이 보이지 않는 비용이 특히 무거웠던 이유는 그것이 시스템 기획자라는 직군의 평가 체계 안에서 거의 보상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회의에서 프로그래머의 '안 돼요'를 '해 봅시다'로 바꾸는 데 성공한 시스템 기획자는 '설득력 있는 사람'이라는 모호한 평가를 받았지만 그 설득에 들어간 사전 준비와 정치적 계산과 감정 관리는 자기 평가 자료에 적을 수 있는 항목이 아니었습니다. 그 결과 한국의 시스템 기획자는 자기 가장 중요한 노동의 상당 부분을 자기 평가 안에 담지 못한 채로 평생을 일해 왔고 그 비대칭이 직군의 자기 정체성에 깊은 그림자를 만들었습니다. 이 그림자 위에서 인공지능 도구의 등장이 가지는 함의는 단순한 작업 자동화가 아닙니다. 협상이 필요 없는 도구 위에서 시스템 기획자가 들이던 감정 노동의 상당 부분이 사라진다는 사실은 자기 일의 가벼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일의 핵심이 더 분명히 드러난다는 의미입니다. 협상에 가려져 있던 자기 진짜 능력 즉 어떤 게임을 만들고 싶은지에 대한 비전과 그 비전을 시스템으로 표현하는 사고력과 그 시스템이 작동하는 모습을 미리 그려 보는 시뮬레이션 능력이 협상이라는 뿌연 막을 거쳐 평가받지 않고 자기 결과물 안에서 직접 평가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변화가 두려움이면서 동시에 해방인 이유는 분명합니다.

두꺼운 문서에서 위키로

문서의 형태도 시스템 기획자의 일상을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였습니다. 한국 게임 프로덕션의 초기에는 수백 페이지짜리 단일 문서 파일에 게임 개발에 필요한 모든 항목을 작성해 넣은 두꺼운 바이블 형식이 표준이었습니다[^게임 기획서 – 바이블형에서 위키형으로 바뀐 이유]. 워드 프로세서로 작성된 이 문서들은 챕터 제목을 폰트 크기로 구분하고 들여쓰기로 위계를 표현하는 방식이었고 그것이 정보의 구조를 표현하는 적절한 방법이었는지에 대한 깊은 고민은 자주 빠져 있었습니다. 이 형식의 문제는 게임의 규모가 커지면서 명확해졌습니다. 수백 페이지의 문서 안에서 같은 시스템에 대한 설명이 여러 챕터에 걸쳐 조금씩 다르게 기술되는 일이 늘어났고 변경 사항이 어느 챕터까지 반영되었는지 추적하기가 점점 어려워졌으며 서로 상충하는 요구사항이 같은 문서 안에 공존하는 일까지 발생했습니다. 이 모든 일관성 문제를 사람이 모든 페이지를 다시 읽으며 잡아야 하는 비용은 게임의 복잡도가 커질수록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이 한계가 명확해지면서 한국 게임업계는 위키 기반 문서 도구로 옮겨 가기 시작했습니다. 컨플루언스가 가장 널리 채택된 도구였고 유비소프트와 징가 그리고 EA 같은 글로벌 대형 개발사들도 사내 위키를 적극 도입하면서 위키가 글로벌 게임 프로덕션의 표준에 가까워졌습니다[^대규모 문서지옥에서 살아남아 게임 만들기]. 도구가 바뀐 것은 분명한 진전이었지만 도구만 바꾼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습니다. 한국 게임 프로덕션에서 컨플루언스를 도입한 후에도 비슷한 주제를 여러 페이지에 걸쳐 조금씩 다르게 서술하는 습관, 다른 사람이 작성한 문서의 오타를 발견해도 직접 수정하지 않고 저자에게 알려 주는 문화, 위키의 하이퍼링크 구조를 살리지 못하고 워드 시절의 페이지 단위 사고에 머무는 작성 방식이 이어졌습니다. 위키가 무엇인지는 알지만 위키가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적 이해는 별도의 것이었고 이 이해의 부재는 위키를 두꺼운 페이지의 묶음으로 만들었습니다.

위키 시대로 들어서면서 시스템 기획자에게 새로운 부담이 추가되었습니다. 비정형 데이터를 다루는 위키에 구조화된 데이터까지 통합해 사용해야 한다는 시대의 요구가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컨플루언스 데이터베이스나 노션 데이터베이스 같은 기능이 그 요구의 결과물이고 이런 도구들은 위키 페이지 안에서도 데이터 테이블의 구조를 설계하고 그 데이터를 페이지에 임베드하는 작업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위키에 구조화된 데이터 요구사항에 대한 컨플루언스 데이터베이스와 노션 데이터베이스]. 시스템 기획자는 이제 엑셀에서 데이터 구조를 잡는 능력에 더해 위키의 정보 아키텍처를 설계하는 능력까지 갖춰야 했습니다. 해야 할 일의 목록은 계속 길어졌고 그 길이는 시스템 기획자가 게임 자체에 대해 사고할 수 있는 시간을 점점 줄였습니다. 이 직군이 본래 무엇을 하기 위해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질문이 일상 업무의 무게에 가려져 자주 잊혀졌습니다. 위키 시대의 한국 게임 프로덕션 안에서 더 깊은 문제가 따로 있었습니다. 위키라는 도구가 가진 하이퍼링크 구조의 진짜 가치가 한국 게임업계 안에서 충분히 활용되지 못한 채 남았다는 사실입니다. 좋은 위키는 페이지들 사이의 연결망이 풍부하고 한 페이지에서 다른 페이지로 이어지는 길이 자연스럽게 정리되어 있어서 읽는 사람이 자기에게 필요한 정보를 따라가며 이해의 깊이를 더해 갈 수 있어야 하는데 한국 시스템 기획자가 작성한 위키 페이지들은 자주 그 연결망을 만들지 못한 채로 각각 독립된 두꺼운 페이지의 묶음으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 모양은 위키라는 도구의 형태만 빌려 쓴 워드 문서의 묶음에 가까웠고 그래서 위키 도입의 효율 향상이 기대만큼 크지 않았습니다. 이 문제의 근본 원인은 도구의 한계가 아니라 시스템 기획자가 위키라는 도구를 통해 사고하는 법을 익힐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한국 게임 프로덕션의 일상 업무 속도 안에서 시스템 기획자가 자기 정보를 어떻게 구조화할지 어떤 페이지를 다른 페이지로 어떻게 연결할지를 차분히 고민할 여유는 거의 없었고 그래서 위키는 도구의 표면만 빌려 쓴 채로 그 안에 담긴 정보 아키텍처의 이상을 실현하지 못한 채로 한국 게임업계의 일상에 자리잡았습니다. 인공지능 도구가 이 빈틈을 메우는 새로운 방식이 가능해진 것은 한국 시스템 기획자가 정보 구조화에 들이지 못했던 시간을 도구가 대신 들여 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고 이 보완이 위키 시대의 마지막 한계를 풀어 가는 변화의 중요한 한 면입니다.

만들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들

지금까지 살펴본 풍경은 한 가지 공통된 가정 위에 서 있습니다. 게임 개발은 기획서가 먼저 완성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구현이 진행되는 선형적 프로세스라는 가정입니다. 요구사항 분석에서 기획서 작성으로, 기획서 작성에서 개발로, 개발에서 테스트로, 테스트에서 출시로 이어지는 흐름. 이 워터폴식 프로세스는 한국 게임 프로덕션에서 오랫동안 표준의 지위를 유지했고 시스템 기획자가 짊어진 부담의 상당 부분이 이 프로세스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가정의 약점은 게임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느 시점에서 깨닫게 됩니다. 게임 디자인의 고전인 The Art of Game Design은 이것을 단호하게 정리합니다. 게임 기획은 즉각적인 결정을 내리고 번복하는 행위이며 플레이테스트 이후 내용을 개선하고 조정하는 반복 자체가 게임 제작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고 이 순환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절대적 진리라는 것입니다[^The Art of Game Design (제 3판) -5- [Chapter 8]]. 이 진리가 뜻하는 바는 명확합니다. 완벽한 사전 기획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시스템 기획자의 능력 부족 때문이 아니라 창의적 결과물을 만드는 일의 본질적 특성에서 비롯됩니다. 실제로 동작하는 시스템을 보기 전까지는 어떤 시스템 기획자도 모든 경우의 수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전투 시스템은 기획서로만 볼 때는 깔끔해 보이다가 실제로 플레이해 보면 의외의 문제가 발견되고 경제 시스템의 밸런스는 문서에서는 완벽해 보이다가 실제 플레이어의 행동 패턴 앞에서 예상과 다르게 반응합니다. 좋은 게임은 진공 속에서 만들어질 수 없으며 많은 디자이너들이 간단한 프로토타입을 먼저 만들고 실제 테스트를 거쳐 반복적으로 개선하는 이터레이티브 프로세스를 주창해 왔다는 정리도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How Design Students are Taught to Prototype on their Own]. 시드 마이어가 했다고 전해지는 '먼저 하루 동안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을 만들고 그 다음 10일 그 다음 1년'이라는 조언은 직관적이고 작동하는 것을 먼저 만들고 그것을 기반으로 확장해 가라는 가르침이며 이 순서는 기획서에서 구현으로 이어지는 워터폴이 아니라 구현에서 이해로 이해에서 확장으로 이어지는 이터레이티브 흐름입니다[^Iterative process: focus on small iterations or big?].

이 방법론이 옳다는 것은 한국 게임업계에서도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습니다. 다만 그것을 실행할 도구가 충분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시스템 기획자가 자기 설계의 결과를 보려면 프로그래머의 구현을 기다려야 했고 그 구현이 끝난 뒤에 발견된 문제는 다음 마일스톤까지 기다려서 수정해야 했습니다. 피드백 루프가 스프린트 단위 또는 그 이상이었고 이 긴 루프는 이터레이티브 방법론의 가장 큰 적이었습니다. 애자일 디자인에서 프로토타입은 빠르고 상호작용 가능한 모델로서 실제 사용자와 함께 아이디어와 가정을 테스트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정리는 게임 산업뿐 아니라 모든 소프트웨어 디자인의 공통 인식이지만 한국 게임업계에서 이 정리가 시스템 기획자에게까지 유효한 도구가 되었던 적은 드물었습니다[^How To Use Prototypes In Agile Design]. 시스템 기획자는 종이 위에서 시뮬레이션하고 머릿속에서 검증하고 엑셀로 수치를 굴려 보고 그 모든 결과를 종이에 적어서 프로그래머에게 넘기는 일을 반복했고 그 종이가 실제로 동작하는 것을 보기까지의 시간은 늘 길었습니다. 한국 게임업계 안에서도 이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일부 회사는 시스템 기획자가 직접 프로토타입을 만들어 볼 수 있도록 비주얼 스크립팅 도구를 도입했고 일부 회사는 그래픽 자산이 들어가기 전 단계에서 그레이박스 빌드를 빠르게 굴리는 프리프로덕션 단계를 명문화했으며 또 다른 일부 회사는 시스템 기획자에게 게임 엔진의 기본 사용법을 의무 교육으로 시켰습니다. 이 시도들은 모두 좋은 의도에서 출발했지만 한국 게임 프로덕션의 일반적 풍경을 바꾸기에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프로토타입을 만드는 데에도 결국 프로그래밍이라는 문턱이 있었고 그 문턱을 넘어선 시스템 기획자는 점점 프로그래머의 영역으로 옮겨 갔으며 넘어서지 못한 시스템 기획자는 여전히 종이 위의 시뮬레이션으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도들이 가르친 것은 프로토타이핑이라는 방법론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 방법론을 한국 시스템 기획자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결합할 수 있는 도구가 그동안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시스템 기획자가 마우스 한 번을 더 클릭하지 않아도 자기가 가진 도메인 지식만으로 동작하는 프로토타입을 빠르게 만들 수 있는 도구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이터레이티브 방법론이라는 모범 답안이 한국 시스템 기획자에게는 닿지 않는 거리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그 거리가 인공지능 도구의 등장으로 갑자기 좁혀졌고 그 좁혀짐이 한국 시스템 기획자라는 직군의 일상에 미치는 충격이 지금 시작되고 있습니다.

변화의 신호가 도착하기 시작했다

이 풍경에 균열을 만든 것이 인공지능 도구의 등장입니다. 그 균열의 신호는 처음에는 작았지만 2025년에서 2026년에 걸쳐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크기로 자라났습니다. 2026년 초에 한국 SNS에서 갑자기 화제가 된 웹 미니게임이 있었습니다. 대기업 근로자의 시선으로 직장 생활을 시뮬레이션하는 이 게임은 출시 당일 일일 페이지뷰 5만 회 이상을 기록하며 서버가 다운되었는데 더 화제가 된 것은 제작 배경이었습니다. 게임 개발 경험이 전혀 없고 코딩 기초도 없는 평범한 대기업 직원 두 명이 오로지 인공지능 도구에 의존해 업무 외 시간인 단 7일 만에 개발을 완료한 것입니다[^코딩 몰라도 7일 만에 '서버 폭주'... AI로 게임 만들어 돈 버는 시대]. 이 사례가 가지는 의미를 시스템 기획자의 시선에서 다시 읽어 보면 달라지는 것이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이 가지고 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직장 생활의 리얼리티에 대한 깊은 이해와 그것을 게임으로 만들 수 있다는 아이디어 그리고 그것을 인공지능에게 시켜서 동작하게 만든 능력이었습니다. 이 능력 목록은 시스템 기획자가 평생 갈고닦아 온 능력 목록과 정확히 겹칩니다. 도메인 이해, 게임 디자인 판단, 요구사항 정의, 그리고 결과물 검증. 비슷한 사례는 한국과 해외에서 잇따라 등장했습니다. 한국의 한 IT 기획자는 개발 경험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약 1.5개월 만에 캐주얼 소울라이크 액션 모바일 게임을 구글 플레이에 정식 출시했고 그가 사용한 도구는 챗GPT, Claude, Cursor, GPT 이미지 생성 모델, Suno였습니다[^Show GN: (개발일지) 비개발자가 바이브코딩으로 소울라이크 게임을 개발해보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핵심 통찰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AI는 잘 시켜야 잘하며 단순 요청은 효과가 낮고 프롬프트 설계가 반 이상이며 아이디어 기획력과 프롬프트 구성 능력이 핵심 역량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잘 시켜야 잘한다'는 한 줄은 한국 시스템 기획자라면 즉시 알아볼 수 있는 풍경을 묘사합니다. 좋은 요구사항을 정의해야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것은 시스템 기획자가 프로그래머와 일하면서 늘 경험해 온 진리이고 그 진리가 인공지능을 상대로도 그대로 작동한다는 사실이 이 사례에서 확인되었습니다. 다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그 '시키는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인공지능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인공지능은 '안 돼요'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용자의 요청이 모호하면 모호한 결과를 내놓고 명확하면 명확한 결과를 내놓을 뿐입니다.

스팀 게임 개발자 커뮤니티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보고되었습니다. 백엔드 개발자이지만 게임 개발 경험이 전무했던 한 사람이 Claude Code를 통해 스팀 게임 Infinite Night을 출시했는데 그가 직접 한 일은 게임 디자인, 설계 문서 작성, 게임플레이 밸런싱, 아트 디렉션, QA였고 코딩 관련 작업은 전부 Claude Code가 처리했으며 그는 한 줄도 직접 작성하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A backend developer with zero game dev experience shipped a Steam game using only AI — I didn't write a single line of code]. 그가 수행한 일의 목록은 한국 시스템 기획자의 직무 기술서와 거의 구분되지 않습니다. 조금 더 야심찬 사례도 있습니다. BigDevSoon이라는 한 개발자는 8개의 Claude Code 에이전트를 병렬로 운영하면서 10일 만에 173개의 스크립트와 29,000줄의 C# 코드와 88개의 테스트 파일과 5종의 적 유형과 15개의 파워업 카드와 보스 전투를 갖춘 게임 Void Balls를 완성했습니다. 아키텍처 에이전트, 구현 에이전트, 게임 밸런스 에이전트, 테스트 에이전트가 동시에 같은 코드베이스에서 작업했고 한 명의 인간이 8명의 개발자를 디렉팅하는 구조였습니다[^Solo developers are shipping real games, not just prototypes]. 이 사례에서 인간이 한 일은 정확히 무엇이었습니까. 큰 그림을 어떻게 나누고 각 에이전트에게 어떤 책임을 맡길지 정하고 게임 밸런스가 의도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판단하는 것이었고 이것은 한국 게임 프로덕션의 시스템 기획자가 수십 년 동안 해 온 일과 본질이 같습니다.

자연어가 코드가 되는 순간

이 사례들이 공통으로 보여 주는 것은 한 가지입니다. 자연어로 작성된 요구사항이 인공지능을 통과하면서 실행 가능한 코드로 직접 변환된다는 것입니다. 이전까지 자연어와 코드 사이에 반드시 존재해야 했던 사람의 손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 변화가 시스템 기획자라는 직군에게 갖는 의미는 깊습니다. 한국 게임 프로덕션에서 시스템 기획자의 산출물은 늘 자연어로 작성된 코드였습니다. 변수와 조건과 분기와 상태 전이를 자연어와 표로 표현한 것이지만 그 본질은 코드였습니다. 다만 그 코드를 실행 가능한 형태로 변환하기 위해 프로그래머라는 사람의 손을 통과해야 했고 그 통과의 비용이 시스템 기획자라는 직군의 모호함을 만들어 왔습니다. 인공지능 도구는 이 변환의 손을 가능한 한 짧게 만듭니다. 시스템 기획자가 작성한 자연어 명세가 인공지능에게 직접 전달되어 실행 가능한 코드로 변환되는 흐름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시스템 기획자는 더 이상 자기 설계를 다른 사람의 언어로 다시 번역해야 하는 통역사가 아니라 자기 언어 그대로 작동하는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생산자가 됩니다. 생산자로의 전환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단순히 도구의 발전이 아닙니다. 인공지능 도구가 시스템 기획자가 늘 해 오던 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시스템 기획자가 작성하던 시나리오 문서, 옵션 분석 문서, 엣지 케이스 정의 문서, 테스트 시나리오 문서는 그 자체로 인공지능에게 전달할 수 있는 좋은 컨텍스트가 됩니다. 좋은 시스템 기획서를 쓰던 사람은 좋은 프롬프트를 쓰는 사람이 됩니다. 시스템 기획자가 평생 갈고닦은 '요구사항을 구조화하는 능력'이 새로운 도구 위에서 새로운 형태의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게임 개발자 90%가 어떤 형태로든 인공지능을 개발 워크플로우에 활용하고 있다는 구글 클라우드의 설문 결과나 게임 개발자 79%가 게임 개발에서 인공지능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는 유니티 게이밍 리포트의 응답은 이 흐름이 일부 얼리어답터의 실험이 아니라 산업 전체의 표준으로 빠르게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신년기획③) 게임과 생성형 AI,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한국 안에서도 같은 흐름이 진행되고 있어서 콘텐츠 산업 전체에서 게임 분야가 인공지능 도입률이 가장 높은 41.7%를 기록했고 그중 43.8%는 전사적으로 인공지능을 도입하고 있다고 응답했습니다[^게임업계 생성 AI 도입 41%, 콘텐츠 분야 중 가장 높다]. 대형 게임사의 움직임은 더 단호합니다. 크래프톤은 약 1000억 원을 투자해 GPU 클러스터를 구축하고 2026년 하반기까지 AI 플랫폼과 데이터 통합 기반을 완성해 에이전틱 AI 관리 플랫폼과 데이터 표준화 체계를 포함한 전사 AI 운영 인프라를 확립한다는 로드맵을 공개했고 2026년부터는 매년 약 300억 원의 예산을 편성해 구성원이 다양한 AI 툴을 직접 활용할 수 있도록 지원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크래프톤, ‘AI First’ 기업 전환 선언… 1,000억 원 이상 투자 단행]. 이 발표는 단순한 기술 투자 발표가 아니라 'AI 퍼스트' 기업으로의 전환 선언이었고 그 발표 직후 회사는 전사적으로 자발적 퇴사 선택 프로그램을 시행하면서 자발적 퇴사를 택한 직원에게 근속 햇수에 따라 최대 월급 36개월 치를 지급한다는 조건을 내놓았습니다[^인력 줄이고 GPU 1000억원 투자…'AI 퍼스트' 속도내는 크래프톤]. 이 두 발표가 같은 회사에서 같은 시기에 나왔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인공지능에 대한 투자는 단순히 도구를 추가하는 일이 아니라 인력의 구성을 다시 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짜이는 인력 구성에서 어떤 직군이 어떻게 자리하게 될지에 대한 질문은 이미 한국 게임업계 전체에 던져져 있습니다.

사라지는 전문성의 목록

여기서부터의 이야기는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폭력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마주하는 것이 변화에 준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대로 적습니다. 시스템 기획자가 지금까지 쌓아 온 전문성의 상당 부분이 의미를 잃고 있고 그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첫 번째로 의미를 잃어 가는 것은 두꺼운 사전 기획서를 작성하는 능력입니다. 한국 게임 프로덕션에서 시스템 기획자가 시간을 가장 많이 쓰던 일이고 자기 가치를 입증하는 가장 중요한 산출물이었지만 인공지능 도구가 가능하게 한 빠른 이터레이션 환경에서는 이 두꺼운 문서가 오히려 비효율의 원인이 됩니다. 만들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은데 그것들을 모두 사전에 정의하려는 시도 자체가 잘못된 가정 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동작하는 프로토타입을 먼저 만들고 그것을 통해 학습한 것을 정리하는 흐름이 더 정확한 결과를 내는 시대에 사전 기획서의 두께는 더 이상 노력이나 전문성의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두 번째로 의미를 잃어 가는 것은 프로그래머에게 잘 전달되는 기획서를 쓰는 능력입니다. 한국 게임업계에서 좋은 시스템 기획자의 가장 중요한 자질로 여겨졌던 항목이지만 인공지능이 자연어 명세에서 코드를 직접 생성할 수 있는 환경에서는 이 능력의 전달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인공지능이 됩니다. 프로그래머의 '안 돼요'라는 답변을 어떻게 '해 봅시다'로 바꿀 것인지에 대한 협상 기술이 가지던 가치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는데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인공지능에게는 협상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명확한 요구사항을 던지면 그 요구사항대로 결과물을 만들 뿐이고 그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던지면 됩니다. 협상에 들이던 시간과 감정 노동은 다른 곳에 쓸 수 있게 됩니다. 세 번째로 의미를 잃어 가는 것은 데이터 테이블의 구조를 설계하는 능력 그 자체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 능력의 한 단계 아래의 작업 영역인데 컬럼의 이름을 어떻게 지을지, 자료형을 어떻게 잡을지, 정규화를 어디까지 진행할지, 참조 관계를 어떻게 표현할지에 대한 미시적 결정들이 그것입니다. 이 모든 미시적 결정은 시스템의 의도와 도메인 지식이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다면 인공지능이 충분히 잘 생성할 수 있는 영역에 들어와 있고 시스템 기획자가 이런 미시적 결정에 시간을 쓰는 비율은 빠르게 줄고 있습니다. 데이터 테이블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테이블을 손으로 짜야 한다는 가정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의미를 잃어 가는 것은 특정 게임 엔진이나 특정 프로그래밍 언어에 대한 깊은 지식입니다. 한국의 IT 기획자가 게임 엔진을 배우지 않고 HTML5와 자바스크립트로 모바일 게임을 만든 사례나 어떤 프레임워크도 어떤 엔진도 사용하지 않고 인공지능이 순수 자바스크립트를 작성한 사례는 어떤 언어로 구현되었는지보다 무엇을 구현했는지가 더 중요해지는 방향을 보여 줍니다. '언리얼 엔진을 3년 이상 다뤄 본 사람'이라는 우대 사항이 채용 공고에서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그 항목의 가중치는 '플레이어 경험을 설계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항목에 비해 빠르게 낮아지고 있습니다. 다섯 번째로 의미를 잃어 가는 것은 마이크로 PM 능력입니다. 시스템 기획자가 자기 담당 파이프라인의 상태를 파악하고 문제 발생 여부를 감시하면서 여러 단위 기능 파이프라인이 동시에 진행될 때 그것을 조립하기 위한 타이밍을 잡는 능력은 한국 게임 프로덕션에서 시스템 기획자가 갖춰야 할 자기 보호 기술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작업의 큰 부분을 처리하고 그 작업의 사이클이 분 단위로 줄어드는 환경에서는 마이크로 PM이 다루어야 했던 인간 동료들 사이의 타이밍 문제가 상당 부분 사라집니다. 동료의 작업이 언제 끝나는지 추적하고 조립을 시작할 시점을 잡는 일이 인공지능 에이전트의 작업 큐를 관리하는 일로 바뀌면서 그 형태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여섯 번째로 의미를 잃어 가는 것은 위키 위에 두꺼운 페이지를 정성스럽게 작성하는 습관 그 자체입니다. 인공지능 도구가 문서 사이의 일관성 문제, 오래된 정보의 자동 갱신 문제, 같은 주제의 분산 서술 문제 같은 위키 운영의 고질적 문제들을 빠르게 해결해 가면서 시스템 기획자가 문서의 형식과 정합성에 들이던 시간이 다른 일에 쓰일 수 있게 됩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조사에서 게임 산업의 인공지능 활용 범위가 개발 과정과 서비스 전후의 QA 단계까지 확대되었고 2024년에는 기획 영역의 스토리 구성과 시나리오 작성에서도 개발 기간 단축과 품질 향상이 가능해졌다는 내용이 게임백서에 정리된 것은 이 흐름의 한 단면입니다[^AI가 韓 게임업계에 미친 영향은?…게임백서 살펴보니].

이 목록은 시스템 기획자가 무능해진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시스템 기획자가 가치를 만들어 내던 자리가 옮겨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 옮겨감의 폭이 작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위 여섯 가지 중 어느 하나도 시스템 기획자라는 직군의 정체성에서 작은 부분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 게임업계에서 시니어 시스템 기획자가 가지는 권위의 상당 부분이 위 여섯 가지 영역의 숙련도에서 나오는 것이었고 그 숙련도가 단기간에 가치를 잃는다는 사실은 그 권위가 흔들린다는 사실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 변화에서 가장 곤혹스러운 위치에 서 있는 사람은 시니어 시스템 기획자입니다. 주니어가 아직 익히지 못한 것을 잃는 일은 익히지 못한 것을 익히지 않는 것에 가까운 일이지만 시니어가 평생 갈고닦은 것을 잃는 일은 자기 정체성의 핵심 부분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상에서 마주하는 일입니다. 한국 게임업계에서 '이 사람 없으면 이 시스템 못 돌린다'는 평가를 받던 시니어들이 자기 자리가 흔들리는 풍경을 한 번에 마주해야 하는 시점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고 그 풍경 앞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스스로 다시 정의하는 일이 가장 무거운 숙제로 남았습니다. 이 숙제는 회사가 대신 풀어 줄 수 없고 인공지능이 대신 풀어 줄 수도 없으며 그것을 마주하는 일 자체를 피할 방법도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형태로 살아남는 것

이 변화의 풍경을 똑바로 마주한다고 해서 시스템 기획자가 한 일이 모두 헛수고였다는 결론으로 가는 것은 아닙니다. 살아남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짚어 두는 일이 그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살아남는 첫 번째 것은 도메인의 깊이입니다. 게임의 어떤 시스템이 왜 그렇게 동작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 버프의 스택이 왜 곱연산이어야 하고 덧셈이면 안 되는지, PvP에서 CC 면역 시간이 왜 점증적으로 증가해야 하는지, 재화 획득 공식에서 희소성 가중치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도메인 전문성은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인공지능은 이 전문성이 명세로 표현되었을 때 그것을 코드로 변환할 수 있을 뿐 그 명세 자체를 만들어 내지는 못합니다. 도메인이 없으면 프롬프트만 남고 프롬프트만으로는 좋은 게임을 만들 수 없습니다. 살아남는 두 번째 것은 요구사항을 구조화하는 능력입니다. 단순히 '전투 시스템 만들어 줘'가 아니라 현재 상태의 한계를 명시하고 옵션을 분석하고 각 옵션의 트레이드오프를 정리하고 권고안의 근거를 명시하고 결정이 필요한 항목과 결정이 필요하지 않은 항목을 분리하는 작업. 이 구조화 능력이 좋은 인공지능 협업의 핵심이고 이것은 시스템 기획자가 수년간 갈고닦아 온 바로 그 능력입니다. 도구는 바뀌었지만 능력의 본질은 같고 오히려 그 능력의 가치는 이전보다 더 직접적으로 결과물에 반영됩니다. 살아남는 세 번째 것은 아키텍처를 이해하는 능력입니다. 단순히 어떤 시스템을 만들지가 아니라 그 시스템이 다른 시스템과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지, 어떤 원칙으로 코드 모듈을 나눌지, 어떤 안티패턴을 피해야 하는지에 대한 큰 그림의 이해는 인공지능이 만들어 낸 결과물의 품질을 평가할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8개의 인공지능 에이전트를 병렬로 운영해서 게임을 만들었던 사례에서 인간이 한 가장 중요한 일이 '아키텍처를 어떻게 나눌지' 결정하는 것이었다는 점은 이 능력의 가치를 보여 줍니다. 인공지능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의 규모가 커질수록 그것을 설계할 수 있는 능력의 가치는 더 커집니다.

살아남는 네 번째 것은 결과물의 품질을 판단하는 감각입니다. 인공지능은 요청한 것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그것이 재미있는지 플레이어가 의도한 감정을 느낄지를 판단하지는 못합니다. CODEX MORTIS라는 게임이 데모 출시 기준 10,500명의 플레이어와 71분의 평균 세션 시간을 기록한 것은 인공지능의 코드 생성 능력 덕분만이 아니라 개발자가 게임플레이 루프와 난이도 곡선과 파워업 시스템의 밸런스를 판단하고 반복적으로 수정한 결과였습니다. 71분이라는 평균 세션 시간은 플레이어가 게임을 충분히 즐겼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 즐거움을 만들어 낸 것은 인간 디자이너의 감각입니다. 살아남는 다섯 번째 것은 빠른 이터레이션을 통해 가설을 검증하는 능력입니다. 인공지능 협업 개발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가 피드백 루프의 압축인데 기존 방식에서 기획에서 구현으로, 구현에서 테스트로, 테스트에서 수정으로 이어지는 사이클이 수주에서 수개월 단위였던 것이 이제 하루 안에 수십 번 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속도를 활용하려면 빠르게 가설을 세우고 빠르게 테스트하고 빠르게 결론을 내리는 능력이 필요한데 '이 게임 메커닉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직관을 실제로 확인하는 사이클을 빠르게 돌리는 역량은 기술적 능력보다 게임 디자인 감각과 실험적 사고방식에 가깝습니다. 시스템 기획자가 시뮬레이션과 검증을 반복하는 동안 길러 온 직관과 실험 정신은 이 새로운 환경에서 더 큰 가치를 발휘합니다. 살아남는 여섯 번째 것은 크리에이티브 비전의 명확성입니다. 인공지능이 잘 처리하지 못하는 것들인 복잡한 내러티브와 감정적 페이싱과 레벨 디자인의 미묘한 리듬은 모두 명확한 비전에서 출발합니다.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구체적으로 답할 수 있는 사람이 더 좋은 게임을 만들고 인공지능이 처리할 수 있는 영역이 넓어질수록 인공지능이 처리하지 못하는 영역인 비전과 감각과 인간적 판단의 가치는 역설적으로 더 높아집니다. 솔로 개발자들이 실제로 게임을 출시한 사례들을 분석한 한 보고서는 인공지능이 잘 처리하는 장르들이 가장 시스템화할 수 있는 것들이고 아직 등장하지 않은 것은 복잡한 내러티브 게임과 깊은 전략 게임 그리고 레벨 디자인에 인간의 직관인 페이싱과 감정적 호가 필요한 게임들이라고 정리합니다. 이 정리는 인공지능 시대의 한계에 대한 고백이면서 동시에 게임디자이너가 어디에 시간을 써야 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지도입니다.

살아남는 일곱 번째 것은 결과물의 품질을 끝까지 끌어올리는 인내입니다. 인공지능 협업 환경에서 동작하는 프로토타입을 만드는 일이 빨라졌다는 사실이 곧 좋은 게임을 만드는 일이 빨라졌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빠르게 만든 첫 버전과 출시 가능한 마지막 버전 사이에는 여전히 큰 거리가 있고 그 거리를 좁히는 일은 한국 시스템 기획자가 평생 라이브 서비스 운영 안에서 길러 온 '끝까지 가는 감각'의 영역입니다. 첫 데모가 동작한 후 그 데모의 어떤 부분이 부족한지를 알아보고 그 부족함을 한 번에 한 단계씩 줄여 가는 일, 플레이어 피드백을 받고 그 피드백 중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절할지 판단하는 일, 출시 임박 시점에 마지막으로 잘라낼 콘텐츠와 마지막으로 추가할 콘텐츠를 결정하는 일은 모두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없는 인내와 판단의 영역입니다. 인공지능이 첫 80%를 빠르게 만들어 줄 때 마지막 20%의 가치는 오히려 더 분명해지고 그 마지막 20%를 끝까지 가는 일은 한국 시스템 기획자가 라이브 서비스 운영 안에서 가장 깊이 갈고닦은 능력 중 하나입니다. 이 일곱 가지를 살피면 한 가지 패턴이 보입니다. 살아남는 능력들은 모두 시스템 기획자가 본래 게임 디자이너로서 가지고 있어야 했던 능력들입니다. 도메인 깊이, 구조화, 아키텍처, 품질 판단, 가설 검증, 비전, 그리고 끝까지 가는 인내. 이 목록은 시스템 기획자라는 직군이 한국 게임업계에서 분화되기 전 게임 디자이너가 가지고 있어야 했던 핵심 역량의 목록과 거의 같습니다. 사라지는 것은 그 사이에 끼어 들어와 있던 통역사로서의 부수 역량들이고 살아남는 것은 처음부터 게임 디자이너로서 가져야 했던 본질적 역량입니다. 이것을 잘 보면 어떤 의미에서 시스템 기획자는 본래 게임 디자이너의 일부 책임을 떼어 받아 왔다가 도구의 진화로 인해 그 떼어 받은 부분을 다시 게임 디자이너로 통합해야 하는 자리에 와 있는 것입니다.

만들면서 배운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시스템 기획자가 처음 이 직군에 들어왔을 때 받은 가르침 중 가장 끈질긴 것 하나가 '기획서를 잘 써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잘 쓴 기획서는 프로그래머와의 마찰을 줄이고 결과물의 품질을 높이며 시스템 기획자의 가치를 입증하는 가장 직접적인 증거였습니다. 그러나 도구가 바뀐 지금 이 가르침을 다시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좋은 기획서를 쓴다는 것이 좋은 게임을 만든다는 것과 같은 일이 아니라는 사실은 게임 프로덕션 현장에서 이미 많이 알려져 있었습니다. 마일스톤이 완료되었을 때 두 개의 결과물 즉 문서와 빌드가 일치할 확률이 매우 낮다는 정리는 그 사실을 가장 솔직하게 짚는 표현이고 많은 개발팀이 문서화에 많은 시간을 쓰지만 그 문서가 실제 빌드와 일치하는지에 대한 검증은 자주 빠진다는 분석은 한국 게임 프로덕션의 일상적 풍경을 정확히 그려냅니다. 이 풍경이 가르치는 것은 명확합니다. 문서는 만들어 보기 전의 가설일 뿐이고 그 가설이 진실에 가까워지는 길은 만들어 보고 학습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만들어 보는 일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면 학습의 사이클이 길어져서 가설이 진실로부터 점점 멀어집니다. 한국 게임 프로덕션에서 시스템 기획자가 자기 가설을 검증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수개월에서 수년 단위였다는 사실은 이 직군이 만들어진 가설들이 종종 진실과 크게 어긋난 채로 게임에 들어가 버린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빠른 이터레이션을 가능하게 만드는 도구의 등장은 이 가설과 진실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결정적인 변화입니다. 37게임즈는 명월궁심이라는 미니게임 시리즈를 인공지능 전 공정으로 제작하면서 전통적인 개발 공정에서 한 달이 걸릴 게임을 10일 만에 완성했고 파이프라인이 성숙하면 이 주기를 1~2일로 단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동시에 이 회사는 '앞으로 미니게임 시장에서 부족한 것은 생산력이 아니라 오직 창의성뿐'이라는 진단을 내놓았는데 이 진단이 가지는 무게가 한국 시스템 기획자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생산력이 남아도는 시대에 희소해지는 것은 무엇을 만들지에 대한 판단입니다. 한국 게임 프로덕션에서 시스템 기획자가 평생 갈고닦아 온 '어떤 게임을 만들 것인가에 대한 판단'과 '무엇이 재미있는지에 대한 감각' 그리고 '플레이어 경험을 설계하는 능력'이 바로 이 희소해질 것들의 목록이고 그 목록은 시스템 기획자가 자기 정체성으로 삼아 온 능력의 목록과 정확히 겹칩니다. 단지 그 능력을 둘러싸고 있던 부수적 작업들이 사라질 뿐입니다. 이 변화에 적응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은 사전 기획서에 매달리는 습관을 내려놓고 동작하는 프로토타입을 먼저 만드는 흐름으로 자기 일하는 방식을 옮기는 것입니다. 인공지능 도구는 요구사항이 완전히 정의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동작하는 프로토타입을 빠르게 만들 수 있고 그것을 실제로 써 보면서 새로운 요구사항을 발견하고 그것을 다시 즉시 반영할 수 있게 합니다. 만들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었던 것들을 만들고 나서 발견하면 그것을 그 자리에서 구현하면 되고 다음 마일스톤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이 방식은 단지 효율적인 것만이 아니라 더 정확합니다. 만들어 보고 나서 작성한 문서는 만들어 보기 전에 작성한 문서보다 실제에 가까울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 게임 프로덕션에서 시스템 기획자가 만들어 온 사전 기획서들은 우리가 아직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한 가정이었지만 만들고 나서 정리한 문서는 실제로 동작한 것의 기록이 됩니다. 두 종류의 문서가 같은 형태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의 진실성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릅니다.

이 차이를 한 번 받아들이면 시스템 기획자가 자기 일을 바라보는 시선이 근본적으로 바뀝니다. 사전 기획서를 '완벽하게 쓰려고' 노력하던 자세가 '먼저 만들어 보고 알아낸 것을 정리하는' 자세로 바뀌고 그 변화는 단순한 작업 순서의 변경이 아니라 자기 직업의 본질에 대한 인식의 전환입니다. 한국 시스템 기획자가 평생 '예측의 전문가'로 자기 가치를 쌓아 왔다면 이제는 '학습의 전문가'로 자기 가치를 다시 정의해야 한다는 뜻이고 예측이 학습으로 옮겨가는 이 전환이 인공지능 시대의 가장 깊은 적응 과제 중 하나입니다. 학습의 전문가가 된다는 것은 한국 시스템 기획자가 평생 익혀 온 '미리 잡아 두는 감각'을 일정 부분 내려놓는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라이브 서비스 운영 안에서 길러진 '함부로 추가하지 않는 감각'의 일부가 빠른 이터레이션 환경에서는 오히려 학습의 사이클을 끊는 장벽이 될 수 있고 그 장벽을 어디까지 유지하고 어디부터 풀어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이 새로운 시대의 시스템 기획자에게 가장 미묘한 숙제로 남습니다. 모든 것을 다 시도해 본다고 해서 좋은 게임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시도해 보지 않은 것을 미리 차단하는 습관도 좋은 게임의 적이라는 사실을 동시에 받아들이는 균형 감각이 필요해진 것입니다.

문서의 부담을 내려놓을 때

시스템 기획자가 문서 작성에서 완전히 편안함을 느낀 적이 많지 않았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해도 좋습니다. 한국 게임업계에서 게임디자이너로 일하면서 수백 페이지의 문서를 써 왔지만 그 문서들이 어떻게 잘 쓰여야 하는지 즉 테크니컬 라이팅의 원칙이나 정보 아키텍처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본 사람의 비율은 그리 높지 않았습니다. 워드 프로세서에서 챕터 제목을 폰트 크기로 구분하던 습관이 컨플루언스로 도구가 바뀐 뒤에도 그대로 이어졌고 위키가 무엇인지는 알지만 위키가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적 이해는 별도의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게으름이나 무능함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한국 게임업계에서 시스템 기획자라는 직업 자체가 테크니컬 라이팅 교육과 거의 접점 없이 성장해 왔고 그런 이해 없이도 프로젝트는 어떻게든 굴러갔습니다. 문서는 프로그래머나 아티스트가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이해해야 할 최소한의 정보를 담은 매개체였고 그 형식의 정교함보다는 내용의 존재 자체가 더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이 풍경에서 문서의 진짜 무게는 분량이 아니라 일관성에 있었습니다. 수십 명이 수년에 걸쳐 작성한 문서들 사이에서 같은 시스템에 대한 설명이 문서마다 조금씩 다르게 기술되어 있는 상황을 피하기 거의 어려웠고 어제의 회의 결과가 오늘의 기획서에 반영되었는지 추적하는 일에는 별도의 관리 노력이 필요했으며 서로 상충하는 요구사항이 같은 문서 안에 공존하는 경우도 있었고 그것을 발견하는 일은 대개 구현이 시작된 뒤였습니다. 요구사항의 불일치가 완화되지 않으면 반복되는 시행착오가 쌓이고 이는 결국 프로젝트 전반의 품질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시스템 기획자들이 이 문제를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해결할 도구가 충분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문서 일관성을 검토하는 일은 사람이 모든 페이지를 다시 읽어야 하는 시간이 많이 드는 작업이었고 그래서 한국 게임업계의 시스템 기획자들은 이 문제 위에 살면서도 그것을 본격적으로 해결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인공지능 보조 도구들이 글쓰기와 문서 작업에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이 오랜 문제가 조용히 풀리고 있습니다. 한 문서 안에서 상호 배타적인 요구사항이 공존하는 문제, 여러 문서에 걸쳐 같은 개념이 다르게 서술되는 문제, 지난주 회의 결과가 기획서에 반영되지 않은 채 구현이 시작되는 문제는 인공지능이 식별하고 지적하는 데 능숙한 영역들입니다. 언어의 패턴을 읽고 논리적 모순을 찾아내고 참조 관계를 추적하는 일은 인공지능이 특히 잘하는 영역이고 시스템 기획자가 평생 사람의 손으로 해 오던 검토 작업의 상당 부분이 이 도구로 옮겨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테크니컬 라이팅을 몰라도 괜찮다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의미를 가집니다. 인공지능은 테크니컬 라이팅의 원칙들인 일관성과 정확성과 추적 가능성을 실현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테크니컬 라이팅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도 인공지능과 함께하면 그 원칙들이 실제로 구현된 문서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됩니다. 도구가 지식의 일부를 보완해 주는 것입니다. 이 변화는 역설적으로 기대 수준을 낮추지 않고 높입니다. 인공지능의 도움으로 문서 품질이 전반적으로 향상되면 그것이 새로운 기준이 되고 일관성 없는 요구사항과 추적되지 않는 변경 이력과 서로 다른 페이지에서 충돌하는 설명 같은 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던 시절은 지나갑니다. 이전에는 용인되었던 문서의 허술함이 더 이상 기본값이 되지 않으며 시스템 기획자가 만들어내야 하는 문서의 품질은 그만큼 더 올라갑니다. 그러나 그 올라간 품질을 달성하기 위해 시스템 기획자가 들여야 하는 노력은 오히려 줄어들 수 있고 줄어든 그만큼의 시간은 다른 일에 쓰일 수 있게 됩니다. 문서의 부담이 내려놓아진 자리에 무엇이 들어와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그 다음에 이어집니다.

게임디자이너로 돌아간다는 것

한국 게임업계에서 시스템 기획자로 일해 온 사람들에게 가장 솔직하게 던져 보고 싶은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 무엇을 하고 싶었습니까. 대부분의 답은 비슷할 것입니다. 재미있는 게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어떤 게임을 만들지 결정하고 싶었고 플레이어가 어떤 감정을 느끼길 원하는지 정의하고 싶었으며 시스템이 왜 재미있어야 하는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처음에는 이 답이 게임디자이너라는 직업의 정의와 거의 같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 게임업계의 분업 구조 안에서 이 답이 '시스템디자이너의 일' 또는 '디렉터의 일'로 분리되었습니다. 분업 구조 안에서 시스템디자이너는 '재미있는 게임을 만든다'는 핵심 질문 대신 '이 시스템을 어떻게 명세할 것인가'라는 부수 질문에 시간을 쓰게 되었습니다. 부수 질문이 가치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한 작업이 너무 무거웠다는 뜻입니다. 데이터 테이블을 잡고 엑셀 매크로를 짜고 프로그래머와 협상하고 위키를 갱신하고 마이크로 PM을 하는 일들의 합계가 시스템디자이너의 하루 대부분을 차지했고 '재미있는 게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사고는 그 사이의 짧은 틈에 끼어들어야 했습니다. 인공지능 도구가 가져오는 변화의 가장 깊은 의미는 이 부수 작업들의 무게가 가벼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무게가 가벼워지면 시스템디자이너는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 하고 싶었던 일에 더 많은 시간을 쓸 수 있게 됩니다. '어떤 게임을 만들 것인가'에 대한 판단, '플레이어가 어떤 감정을 느끼길 원하는가'에 대한 정의, '이 시스템이 왜 재미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설명. 이 세 가지 질문은 인공지능이 대신 답할 수 없는 영역이고 시스템디자이너가 자기 정체성으로 다시 끌어와야 하는 영역입니다.

이 회귀가 자연스럽게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한국 게임업계에서 시스템디자이너로 오래 일한 사람일수록 이 회귀가 더 어려울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동안 자기 가치를 입증하던 모든 도구와 기술이 일순간 의미를 잃은 자리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게임 산업 현장에서 게임업계 전문가들이 인공지능은 인간을 대체하는 창작자가 아니라 창의성을 증강시키는 도구라는 철학을 제시한 것은 이 회귀를 응원하는 메시지였지만 그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실제로 자기 일하는 방식을 바꾸는 일은 별개의 문제입니다[^"AI는 창작자 아닌 도구"…게임업계, AI 시대 역할론 제시]. 크리에이티브 디렉팅에 가까운 역할로 게임디자이너가 옮겨간다는 한국 게임 전문가들의 진단이 이 회귀의 새로운 좌표를 제공합니다. 방대한 반복 작업은 인공지능이 담당하고 인간은 무엇을 만들지와 왜 만드는지를 결정하는 역할에 집중한다는 그림은 시스템디자이너가 시스템을 디자인하는 사람에서 게임의 비전을 설계하고 그 비전이 실제로 동작하도록 인공지능 협업을 디렉팅하는 사람으로 옮겨가는 길입니다. 이 길의 끝에서 시스템디자이너라는 호칭 자체가 의미를 잃을 가능성이 큽니다. 시스템과 콘텐츠와 레벨과 밸런스를 분리해서 다른 사람들이 맡던 한국 게임 프로덕션의 분업 구조 자체가 빠른 이터레이션 시대에 효율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비전을 잡고 인공지능과 함께 그 비전을 구현하고 결과를 평가하고 다시 잡는 흐름이 더 효율적이고 그 흐름 안에서 한 사람은 시스템과 콘텐츠와 레벨과 밸런스 모두에 대해 책임을 집니다. 이것은 옛날 1세대 한국 게임 개발자들이 한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하면서 게임을 만들던 풍경과 닮아 있습니다. 다만 그때 한 사람의 머리에 들어 있던 코드가 지금은 인공지능에게 옮겨졌을 뿐입니다.

이 회귀가 한국 시스템디자이너의 일상 풍경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더 구체적으로 그려 보아도 좋겠습니다. 아침에 출근해서 어떤 시스템의 명세를 잡고 그것을 다음 주 회의에서 프로그래머에게 전달하는 일정을 짜던 시스템디자이너의 풍경은 아침에 출근해서 어제까지 인공지능과 함께 만든 프로토타입을 직접 플레이해 보고 그 안에서 발견된 문제를 그 자리에서 수정한 새 버전을 점심 먹기 전에 빌드해 두는 풍경으로 옮겨 갑니다. 일주일을 단위로 일하던 흐름이 한나절을 단위로 일하는 흐름이 되고 그 흐름 안에서 시스템디자이너는 더 이상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결정하는 사람'이 됩니다. 결정하는 사람이 된다는 변화는 시스템디자이너의 책임을 무겁게 만듭니다. 통역사로 일할 때는 자기가 짠 명세가 잘못된 결과로 이어졌을 때 '전달이 안 되어서 그렇게 됐다'는 핑계가 늘 한 손에 있었지만 자기 손으로 만들어진 결과 앞에서는 그런 핑계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게임이 재미없으면 그것은 자기 비전이 부족했다는 뜻이고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으면 그것은 자기 설계가 부족했다는 뜻이며 플레이어가 의도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면 그것은 자기 디렉팅이 부족했다는 뜻입니다. 이 무거운 책임이 시스템디자이너에게 지금까지 익숙하지 않았던 종류의 부담이고 이 부담이 새로운 시대의 게임디자이너에게 가장 큰 적응 과제입니다.

한국 게임 산업이 가는 길

대형 게임사들의 행보는 이 회귀가 산업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2026년 게임산업의 가장 큰 변화로 이용자 트렌드 변화와 콘텐츠 환경의 급변이 꼽히는 가운데 대형 게임사들은 AI 전담 조직을 강화하고 신작에 AI NPC와 AI 협업 캐릭터 같은 기술을 실제로 적용할 계획이며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표한 2025년 게임종사자 노동환경 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내 게임업계 종사자의 72.0%가 업무에 AI 기술을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2026 게임산업 이끌 주요 이슈는?]. 이 수치는 한국 게임업계의 시스템 기획자가 이미 인공지능 도구의 일상 사용자가 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산업 구조의 재편도 함께 진행됩니다. 글로벌 보스턴컨설팅그룹은 앞으로의 게임 산업이 소수의 초대형 IP와 장기 서비스 역량을 갖춘 기업 그리고 특정 장르와 플랫폼에 특화된 중소 개발사로 양극화될 가능성이 크다는 진단을 내놓았고 비용 상승과 기술 경쟁과 규제 강화가 동시에 작용하며 기존 성장 공식이 흔들리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았습니다. 이 양극화 안에서 시스템디자이너의 자리는 예전처럼 명확하지 않습니다. 초대형 IP의 라이브 운영을 맡는 시스템디자이너의 일과 특화된 중소 개발사의 1인에 가까운 게임디자이너의 일이 점점 다른 직업처럼 분기하고 있고 같은 호칭으로 묶기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특화된 중소 개발사의 흐름에서는 비프로그래머가 인공지능 도구로 게임을 만들어 출시하는 사례가 빠르게 늘고 있습니다. 한 포럼에서 정리된 사례에 따르면 과거 10명이 1년 넘게 매달려야 완성할 수 있었던 프로젝트가 이제는 한 명의 개발자가 인공지능을 통해 일주일 만에 완성할 수 있게 되었고 이 변화는 세탁기나 농기계의 발명에 비유되었습니다[^"AI로 쉽고 빠르게 게임 개발"...'2026 AI & 게임산업 포럼' 집중조명]. 이 비유의 함의는 명확합니다. 단순 반복 작업에서 인간이 기계를 이길 수 없게 되면서 인간은 더 가치 있는 창의적인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대기업의 흐름에서는 조금 다른 풍경이 펼쳐집니다. 글로벌 게임 산업이 인공지능을 비롯한 신기술 중심으로 빠르게 변화하는 가운데 한국의 대형 게임사들은 신입 채용에서도 AI 활용 역량을 핵심으로 삼고 있고 채용은 프로그래밍, 기획, 게임사업, PM, AI 등의 부문에서 진행되며 프로그래밍과 AI 직무는 코딩 테스트를 추가하는 방식으로 검증을 강화하고 있습니다[^신입 채용 나선 K-게임사들···인재 투자 늘려 재도약 노린다]. 기획 직군에서도 AI 활용 역량이 평가의 일부가 되었다는 사실은 시스템디자이너 채용의 기준이 이미 바뀌었음을 보여 줍니다.

전체 글로벌 시장에서도 같은 흐름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게임 개발에서의 AI 시장은 2024년 58억 5000만 달러에서 2034년 378억 9000만 달러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되었고 올해 스팀 플랫폼에 등록된 약 11만 4000개 게임 중 7%가 생성형 AI를 활용하고 있으며 신규 출시 게임의 20%가 AI 기술을 적용하고 있어서 1년 사이 8배 증가한 수치를 기록했습니다[^게임 산업, AI 도입 가속…개발·창작 방식 바꾼다]. 글로벌 대형 게임사들의 AI 도구 통합도 빠르게 진행되어 유비소프트는 자체 AI 도구 고스트라이터를 통해 NPC 대사 생성을 자동화하고 있고 일렉트로닉 아츠는 텍스트나 음성 입력만으로 3D 공간과 캐릭터를 자동 생성할 수 있는 스크립트 투 씬 기술을 개발했으며 EA는 개발 프로세스의 60%가 생성형 AI의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산업의 양극화와 도구의 보편화가 동시에 진행되는 환경에서 한국 시스템디자이너의 자리가 어디로 옮겨질지를 단순하게 답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지금까지 자리하던 그 자리는 더 이상 그대로 남아 있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입니다. 한국 게임업계의 특수한 조건들이 이 변화의 모양을 더 가파르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첫 번째 조건은 한국 게임 산업이 글로벌 평균보다 라이브 서비스 비중이 훨씬 높다는 사실입니다. 한국의 시스템 기획자가 평생 라이브 서비스 운영 안에서 길러진 직군이라는 점이 그 결과인데 이 라이브 서비스 영역에서 인공지능 도구의 도입은 한 사람이 처리할 수 있는 콘텐츠 양을 크게 늘리고 그것이 회사가 같은 라이브를 더 적은 인원으로 굴릴 수 있게 만든다는 의미입니다. 한국 게임업계 전반에서 라이브 서비스 운영 인력이 점진적으로 줄어드는 흐름은 이미 시작되었고 그 흐름의 첫 번째 영향이 시스템 기획자에게 닿고 있습니다.

두 번째 조건은 한국 게임 산업이 모바일 게임 비중이 매우 높다는 점입니다. 모바일 게임의 콘텐츠 제작 사이클은 PC 콘솔에 비해 짧고 그 짧은 사이클 안에서 인공지능 도구가 가져오는 효율 향상의 효과가 더 빠르게 누적됩니다. 한국 모바일 게임 회사들이 인공지능 도구 도입에 적극적인 이유 중 하나가 이 사이클의 짧음이고 그 적극성이 한국 시스템 기획자에게 닿는 변화의 속도를 더 빠르게 만들고 있습니다. 세 번째 조건은 한국 게임 산업의 인력 구성이 시니어 비중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신입 채용이 줄어들고 경력자 위주의 채용이 일반화된 한국 게임업계의 풍경은 그 자체로 익숙한 이야기지만 인공지능 시대에 이 풍경이 가지는 새로운 함의는 시니어들이 자기 경력을 다시 정의해야 하는 압박을 동시에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신입이 진입하지 못하는 채용 시장에서 시니어가 자기 자리를 잃으면 갈 곳이 마땅치 않다는 사실이 시니어들의 적응을 더 절박한 일로 만들고 있고 그 절박함이 한국 게임업계의 변화 속도에 새로운 압력을 더하고 있습니다.

짧지만 솔직해야 할 이야기

한 가지 솔직한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문서 작업이 쉬워진다고 해서 시스템디자이너의 일이 전체적으로 쉬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일 수 있습니다. 문서화의 부담이 줄어들면 더 이상 문서를 잘 쓰는 것으로 일을 잘한다는 인상을 줄 수 없게 되고 '전달의 좋음'으로 평가받던 시절은 지나가며 더 본질적인 질문이 남습니다. 당신이 만든 이 게임은 왜 재미있는가, 이 시스템 설계의 근거는 무엇인가, 플레이어는 당신이 의도한 감정을 실제로 느끼게 될까. 이 질문들은 문서 도구와 무관합니다. 인공지능이 도울 수 있는 영역의 바깥에 있고 어쩌면 한국의 시스템디자이너라는 직업이 처음부터 주목해야 했던 핵심이 바로 이것들이었습니다. 기획서 안에서 글자 크기로 구조를 만들었던 시절을 돌이켜 보면 그것이 최선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시절에도 시스템디자이너들이 만들고자 했던 것 즉 재미있는 게임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것을 위한 모든 노력 중 일부가 엉뚱한 곳에 소모되었을 뿐입니다. 이 변화에서 가장 큰 부담을 느낄 사람은 '전달의 좋음'에 자기 가치의 절반 이상을 기대 왔던 시스템디자이너들입니다. 한국 게임업계에서 이 자리는 결코 작지 않았고 시스템디자이너의 상당수가 이 자리에 자기 직업적 자부심을 두어 왔습니다. 좋은 기획서를 쓰는 일에서 자기 실력을 입증해 왔는데 그 실력의 가치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은 직업적 정체성에 대한 위협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이 위협을 작게 만들거나 미화하지 않는 것이 변화에 적응하는 첫 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위협은 실재하고 그 무게는 가볍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무게를 정확히 이해해야만 다음 단계로 옮겨갈 수 있습니다. 다음 단계로 옮겨갈 때 가져갈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솔직해야 합니다. 한국 시스템디자이너가 평생 쌓아 온 도메인 지식, 게임에 대한 깊은 이해, 시스템들의 상호작용을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하는 능력, 무엇이 재미있는지에 대한 직관, 플레이어 행동에 대한 패턴 인식, 협업 안에서 자기 의견을 관철하는 정치적 감각. 이것들은 모두 이 직업이 평생을 들여 만들어 온 자산이고 새로운 환경에서도 가장 가치 있는 것들로 살아남습니다. 다만 그것들을 둘러싸고 있던 부수적 작업들이 사라지고 그 자산이 직접적으로 결과물에 반영되는 시대가 왔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본질로 돌아가는 일이 가장 어려운 이유

한국 시스템디자이너에게 본질로 돌아간다는 일이 어려운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 본질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한 합의가 한국 게임업계 안에서 한 번도 명확히 만들어진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국 게임 기획 직군은 게임이라는 산업이 고도로 발전하고 대형화되면서 기존의 프로그래머와 그래픽 디자이너 그리고 경영자들이 맡던 업무에서 분화된 직업이며 몇 년 이상 배워야 하는 전문 영역들을 조금씩 떼어서 짬뽕시킨 직군이라는 정리는 이 직군의 출생을 정확히 설명합니다. 이 출생의 결과는 게임 기획자가 모든 것에 완벽한 수준의 전문가가 아니라 적당한 지식만 갖춰도 되지만 최대한 많은 분야를 폭넓게 알아야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복잡한 직군이 된 것입니다. 이 '복잡한 직군'의 정체성은 한국 게임업계 안에서 늘 표류해 왔습니다. 시스템디자이너인지 콘텐츠 디자이너인지 시나리오 라이터인지 밸런스 디자이너인지의 분류부터 시작해 어떤 게임을 만들어 본 사람이 어떤 자리에 적합한지에 대한 평가까지 모든 차원에서 이 직군은 명확한 합의를 가져 본 적이 없습니다. 시스템디자이너로 일하다가 콘텐츠 디자이너의 자리로 옮겨가는 것, MMORPG에서 일하다가 캐주얼 게임으로 옮겨가는 것, 모바일 게임에서 PC 콘솔로 옮겨가는 것이 각각 다른 직업으로의 이직처럼 여겨지는 일이 한국 게임업계의 일상이었습니다[^커리어패스]. 이 표류 안에서 한국 시스템디자이너 각자가 가진 '본질'에 대한 이해는 서로 달랐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본질은 좋은 시스템 설계였고 어떤 사람에게 본질은 좋은 협업이었으며 어떤 사람에게 본질은 좋은 게임이었습니다. 이 셋이 같은 것이 아니었음에도 같은 직업의 다른 표현인 것처럼 사용되어 왔고 그 결과 시스템디자이너로 일하면서 자기가 정확히 무엇에 가치를 두는지 한 번도 정리해 본 적 없는 사람이 적지 않았습니다.

본질로 돌아간다는 일이 어려운 이유는 정확히 여기에 있습니다. 돌아갈 본질이 처음부터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공지능 시대는 그 본질을 다시 정의해야 한다는 요구를 한국 시스템디자이너에게 강하게 던지고 있습니다. 본질을 다시 정의한다는 것은 추상적인 일이 아니라 구체적인 작업입니다. 자기가 만들고 싶은 게임이 무엇인지 한 줄로 적어 보는 일, 그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느꼈으면 하는 감정을 한 단어로 표현해 보는 일, 그 감정을 만들어내기 위한 시스템을 종이가 아니라 동작하는 프로토타입으로 빠르게 만들어 보는 일, 그 프로토타입을 다른 사람에게 직접 플레이시켜 보는 일. 이 작업들은 한국 시스템디자이너가 평생 다른 사람을 거쳐서 했던 일들이고 이제 자기 손으로 직접 할 수 있게 된 일들이며 그러므로 자기 본질이 무엇인지를 도구의 도움 없이 가장 솔직하게 마주하게 만드는 일들입니다. 본질을 다시 정의하는 작업이 어려운 또 한 가지 이유는 한국 게임업계의 평가 문화 안에서 이런 작업이 '업무'로 인정받지 못해 왔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회사 안에서 자기가 만들고 싶은 게임을 한 줄로 적어 보거나 자기 비전을 동작하는 프로토타입으로 만들어 보는 일은 '업무 외 시간에 알아서 하는 자기 계발'의 영역으로 분류되었고 그 시간을 들이는 것은 회사가 평가해 주지 않는 일에 자기 시간을 쓰는 셈이 되었습니다. 한국 게임업계의 시스템디자이너가 가장 자기다운 작업에 시간을 들이지 못하고 가장 통역사다운 작업에 평생을 들이게 된 구조의 한 원인이 여기에 있고 그 구조가 인공지능 시대에 들어서면서 빠르게 비효율의 원인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회사도 이 전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시스템디자이너가 회사 안에서 자기 비전을 빠르게 시도해 볼 수 있는 시간과 도구와 권한을 주는 것이 새로운 시대의 회사가 그들의 역량을 끌어내는 방법이고 '업무 외'로 분류되어 있던 자기 비전 시도를 '업무 내'로 다시 정의해 그 시도의 결과를 평가에 포함하는 흐름이 자리잡지 않으면 한국 게임업계는 자기가 가진 시스템디자이너의 잠재력을 끌어내지 못한 채로 인공지능 시대의 경쟁력 경쟁에서 밀려날 가능성이 큽니다. 이 위험을 알아본 회사들이 이미 사내 해커톤이나 게임잼이나 프로토타이핑 스프린트 같은 형태로 시스템디자이너에게 자기 비전을 시도할 시간을 만들어 주고 있고 그 시간 안에서 만들어진 작은 결과물들이 회사의 다음 IP의 씨앗이 되는 사례도 늘고 있습니다.

작동하는 것이 곧 포트폴리오인 시대

한국 시스템디자이너의 본질을 다시 정의하는 작업이 끝나면 그 다음에 오는 것은 그 정의를 외부에 보여 주는 일입니다. 이 단계에서도 큰 변화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한국 게임업계에서 시스템디자이너의 포트폴리오는 오랫동안 기획서로 구성되어 왔습니다. 시스템 기획서, 콘텐츠 기획서, 레벨 디자인 기획서, 보스 몬스터 디자인 기획서. 이 문서들은 디자이너가 어떤 시스템을 어떻게 구성할지 어떤 방식으로 사고하는지를 보여 주는 자료였고 면접관은 이 문서들을 읽으며 디자이너의 사고력을 평가해 왔습니다[^게임 기획 포트폴리오로 역기획서는 별로인가요?]. 문서 기반 포트폴리오의 한계는 명확합니다. 좋은 문서가 좋은 게임을 만들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한국 게임업계의 베테랑 채용자들은 포트폴리오 안에 단지 문서를 펼쳐 놓고 '이 시스템을 개선했다'고 적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인상을 줄 수 없으며 경험의 맥락과 시도한 방법과 결과와 교훈을 포함하는 과학적 설명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해 왔는데 그 강조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표준이 '작동하는 것을 보여 달라'입니다[^면접]. 그 작동하는 것이 라이브 게임이든 사내 프로토타입이든 개인 프로젝트이든 형태는 상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디자이너가 자기 손으로 무언가를 동작하게 만든 경험이 있는지 그리고 그 경험에서 무엇을 배웠는지를 직접 설명할 수 있는지입니다.

인공지능 도구는 이 새로운 표준을 한국 시스템디자이너에게도 가능한 것으로 만듭니다. 이전까지는 시스템디자이너가 동작하는 게임을 만들기 위해 프로그래머와 아티스트와 함께해야 했고 그래서 개인 프로젝트로 게임을 출시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인공지능 도구는 이 장벽을 크게 낮춥니다. 한국의 IT 기획자가 1.5개월 만에 구글 플레이에 게임을 출시한 사례가 보여주는 것처럼 비프로그래머도 자기 게임을 동작하게 만들 수 있게 되었고 그 게임은 시스템디자이너의 새로운 형태의 포트폴리오가 됩니다. '이것이 내 설계입니다'라고 말하던 시절이 '이것이 내 설계이고 실제로 동작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시절로 옮겨가고 있다는 표현은 이 변화를 정확히 짚습니다. 한국 게임업계의 채용 시장에서 이 변화는 이미 진행되고 있고 인공지능 도구를 사용해 직접 만든 작은 게임이나 시스템 프로토타입이 두꺼운 기획서보다 더 강력한 채용 자료가 되는 흐름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시스템디자이너는 이제 자기가 만든 게임을 들고 면접장에 들어가는 직업이 됩니다. 이 흐름이 한국 게임업계 안에서 자리잡으면 시니어 시스템디자이너의 권위 구조도 다시 짜이게 됩니다. 오래 일했다는 사실, 큰 회사에서 일했다는 사실, 유명 IP에 참여했다는 사실 같은 것들이 가지던 권위가 이전만큼 강하게 작용하지 않게 되고 '이 사람이 지금 무엇을 만들고 있는가'와 '이 사람이 만든 것이 동작하는가'라는 질문이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이것은 시니어에게도 새로운 부담이고 한국 게임업계에서 시스템디자이너로 오래 일한 사람일수록 이 새로운 표준에 적응하기 위한 학습의 곡선이 가파를 수 있습니다.

이 권위 구조의 재편은 채용 시장의 풍경도 바꿉니다. 한국 게임업계의 시스템디자이너 채용에서 오래 통용되어 온 '경력 3년 이상'이라는 기준이 '출시한 작품이 있는가'라는 기준으로 옮겨가고 그 '출시한 작품'의 정의가 회사 안에서의 라이브 서비스 운영 경험에서 자기 손으로 만든 동작하는 게임 한 편이라는 가벼운 기준으로 넓어지는 흐름. 이 흐름은 신입 시스템디자이너에게는 진입의 새로운 길을 열어 주지만 시니어 시스템디자이너에게는 자기 경력의 가치를 다시 증명해야 하는 새로운 시험을 안깁니다. 큰 회사에서 라이브 서비스 운영을 5년 한 시니어가 자기 손으로 만든 게임이 한 편도 없다면 그 시니어는 출시한 게임 한 편을 가진 신입과 같은 출발선에 서게 되고 그 출발선의 평등이 시니어에게 부담스럽게 다가올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새로운 출발선의 평등을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한국 시스템디자이너 각자에게 던져진 무거운 질문입니다. 평생 쌓아 온 경력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경력 위에 자기 손으로 만든 작은 결과물 하나를 더하는 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새로운 시대에 더 빠르게 적응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자기 경력이 자기 발목을 잡는 역설 안에서 길을 잃을 위험이 커집니다. 시니어 시스템디자이너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자기 경력을 한 번 내려놓고 신입의 자세로 작은 게임을 만들어 보는 것이고 그 행위가 가장 큰 적응의 첫 걸음이 됩니다.

\시스템디자이너라는 호칭이 사라진다면

이 모든 변화의 끝에서 한국 시스템디자이너라는 호칭 자체가 살아남을지에 대한 질문이 남습니다. 솔직한 예측을 한다면 이 호칭이 지금의 형태 그대로 살아남기는 어렵습니다. \호칭은 직업의 분업 구조를 반영합니다. 한국 게임업계에서 시스템디자이너라는 호칭이 만들어진 것은 게임 기획 안에서 시스템 영역과 콘텐츠 영역과 시나리오 영역이 별도의 전문성을 요구하는 작업으로 분화될 만큼 게임의 규모와 복잡도가 커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분화의 전제는 한 사람의 머리에 모든 영역을 담을 수 없다는 것이었고 그 분화의 결과는 각 영역이 다른 사람의 손으로 옮겨가면서 발생하는 통역과 협업의 비용이었습니다. 인공지능 도구는 이 전제를 흔듭니다. 한 사람이 인공지능과 함께 시스템과 콘텐츠와 시나리오와 레벨을 동시에 다룰 수 있는 환경이 가능해지면 그 한 사람의 머리에 들어가지 않는 부분을 인공지능이 보완하면서 한 사람의 게임디자이너가 작은 규모의 게임 한 편을 처음부터 끝까지 만드는 그림이 가능해집니다. 한국 게임업계의 1세대 개발자들이 한 사람의 손으로 게임을 만들던 풍경이 다시 가능해지는 것이고 다만 그 한 사람의 옆에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동료가 있다는 점이 다릅니다. 이 그림에서 시스템디자이너라는 분화된 호칭은 의미를 잃습니다. '게임디자이너'라는 더 통합적인 호칭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그 게임디자이너는 시스템과 콘텐츠와 시나리오와 레벨을 모두 책임집니다. 한국 게임업계 바깥에서 게임디자이너라는 호칭이 더 통합적으로 사용되어 온 사실은 이 흐름의 방향성을 미리 보여 줍니다. 분화된 호칭의 시대가 한국적인 특수성이었고 그 특수성이 끝나가는 풍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형 라이브 서비스의 영역에서는 분화된 호칭이 좀 더 오래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수백 명이 동시에 일하는 라이브 운영 환경에서는 한 사람이 모든 영역을 다루는 것이 여전히 어렵고 분업이 효율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영역에서도 시스템디자이너의 일하는 방식은 크게 바뀝니다. 인공지능과 함께 일하는 라이브 운영의 시스템디자이너는 더 많은 일을 더 빠르게 처리하면서 동시에 더 본질적인 질문에 답할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하루에 수십 개의 콘텐츠 패치를 자기 손으로 직접 검증하면서도 그 모든 패치가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느꼈으면 하는 감정'에 부합하는지를 다시 묻는 일을 동시에 할 수 있는 환경입니다.

호칭이 살아남든 사라지든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의 정체성이 어떻게 변하는지가 더 중요한 질문입니다. 한국 시스템디자이너가 자기 정체성을 '시스템을 명세하는 사람'으로 정의해 왔다면 이제 그 정의를 '게임의 비전을 만들고 그 비전이 동작하도록 인공지능과 함께 디렉팅하는 사람'으로 옮겨야 합니다. 이 옮김은 단순한 호칭의 변경이 아니라 자기 일에 대한 사고방식의 근본적인 전환이고 그 전환이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호칭의 변화가 가져오는 또 한 가지 풍경은 한국 게임업계의 조직 구조 그 자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입니다. 시스템 기획팀, 콘텐츠 기획팀, 시나리오 기획팀, 레벨 디자인팀 같은 전통적 분업의 경계가 흐려지면 회사 안의 의사결정 흐름도 바뀝니다. 시스템 기획팀장이 콘텐츠 기획팀장과 시나리오 기획팀장과 회의를 잡고 그 회의의 결과를 디렉터에게 보고하던 흐름은 한 명의 게임디자이너가 직접 비전을 만들고 그 비전을 인공지능과 함께 구현해 디렉터에게 동작하는 데모로 보고하는 흐름으로 바뀌고 그 안에서 '팀'이라는 단위 자체가 작아집니다. 큰 회사가 가지고 있던 분업의 효율이 작은 팀의 통합된 빠른 의사결정 효율에 자리를 내주게 되는 것이고 이 변화가 한국 게임업계의 조직 구조에 미치는 영향은 시스템디자이너 한 사람의 일하는 방식이 바뀌는 일보다 훨씬 큰 무게를 가집니다. 이 조직 구조의 재편은 한국 게임업계의 기존 권력 구조에도 미세한 균열을 만듭니다. 큰 팀을 이끌던 팀장 직급의 권위가 작은 팀이 더 빠르게 돌아가는 환경에서 이전만큼 명확하지 않게 되고 '좋은 게임을 빨리 만드는 사람'이라는 평가 기준이 '큰 팀을 잘 운영하는 사람'이라는 평가 기준을 일부 대체하게 되며 그 결과 회사 안에서 누가 자원을 배분받고 누가 의사결정의 중심에 서는지에 대한 기준이 다시 짜이게 됩니다. 이 변화의 풍경 안에서 한국 시스템디자이너 각자가 자기 자리를 어디에 두고 자기 가치를 어떻게 증명할지가 새로운 시대의 가장 직접적인 질문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여기까지의 이야기가 너무 추상적으로 들렸을 수도 있어서 마지막으로는 한국 시스템디자이너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들을 짚어 두려고 합니다. 만들어 보는 일을 늦추지 않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 한국의 IT 기획자가 '일단 해 보자'는 마음으로 1.5개월 만에 게임을 구글 플레이에 출시한 사례가 보여주는 것처럼 인공지능 도구를 이론적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직접 프로토타입을 만들어 보는 경험이 훨씬 더 빠른 이해를 가져옵니다. 게임 아이디어가 있다면 지금 인공지능에게 시작을 요청해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손으로 동작하는 무언가를 만들어 본 시스템디자이너와 그렇지 않은 시스템디자이너 사이의 격차는 빠르게 벌어지고 있고 그 격차를 좁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그냥 만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프롬프트 설계를 핵심 역량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두 번째입니다. 한국 게임업계의 시스템디자이너에게 '좋은 시스템 기획서를 쓰는 능력'과 '좋은 프롬프트를 쓰는 능력'은 사실상 같은 것입니다. 두 작업 모두 자연어로 코드를 쓰는 일이고 그 차이는 독자가 사람이냐 인공지능이냐 정도입니다. 시스템디자이너가 평생 갈고닦은 그 능력을 새로운 도구 위에서 다시 사용하는 법을 익히는 일은 새로운 직업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진 직업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일에 가깝습니다. 아키텍처 결정에 시간을 더 쓰는 것이 세 번째입니다. 인공지능 협업 개발에서 인간이 가장 가치를 발휘하는 영역이 큰 그림을 어떻게 나누고 조직할지 결정하는 일이라는 사실이 여러 사례에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시스템디자이너가 세부 명세에 시간을 쓰던 비율을 줄이고 전체 구조를 어떻게 설계할지에 더 많은 에너지를 투자하는 것이 새로운 환경에서의 가장 큰 가치 창출입니다. 한국 게임업계의 시니어 시스템디자이너가 이 영역에서 쌓아 온 경험은 새로운 환경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가치를 발휘하는 자산입니다. 검증하고 판단하는 습관을 갖는 것이 네 번째입니다.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것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능력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기술적 정확성은 인공지능이 스스로 어느 정도 검증할 수 있지만 게임으로서 재미있는지 플레이어에게 의도한 경험을 주는지에 대한 판단은 인간 디자이너의 감각이 필요합니다. 한국 시스템디자이너가 시뮬레이션과 검증의 반복 안에서 길러 온 직관이 이 영역에서 가장 큰 가치를 가집니다.

작동하는 게임으로 포트폴리오를 채우는 것이 다섯 번째입니다. 기획서가 아닌 작동하는 게임이 시스템디자이너의 역량을 증명하는 더 강력한 증거가 되는 시대가 이미 왔고 이 흐름은 더 강해질 것입니다. 큰 게임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작은 시스템 프로토타입, 한 시간 분량의 미니게임, 특정 메커닉을 검증하는 짧은 데모. 이런 것들이 모여 시스템디자이너의 새로운 포트폴리오가 됩니다. 자기 본질을 정의하고 그 정의를 자주 갱신하는 것이 여섯 번째입니다. 한국 게임업계에서 시스템디자이너로 일해 온 사람이 자기가 정확히 무엇을 만들고 싶은지를 한 번도 명확히 정리해 본 적이 없을 수 있습니다. 분업 구조 안에서 '주어진 시스템을 잘 명세하는 일'이 자기 정체성의 대부분이었을 수 있고 그 분업 구조 자체가 흔들리는 지금 자기가 만들고 싶은 게임이 무엇인지 자기가 가치 있게 여기는 게임 경험이 무엇인지를 다시 정리하지 않으면 새로운 환경에서의 자리를 잡기가 어렵습니다. 마지막은 동료들과 이 변화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한국 게임업계에서 시스템디자이너의 변화에 대한 솔직한 대화는 아직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회사 안에서는 인공지능 도구를 사용해 본 경험을 자랑처럼 공유하지만 그 도구가 자기 직업의 미래에 갖는 의미에 대한 깊은 대화는 자주 회피됩니다. 이 대화를 회피하는 것이 직업적 안정감을 일시적으로 유지하는 데는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는 환경에서는 오히려 가장 큰 위험이 됩니다.

작은 출시를 자기 일정에 정기적으로 끼워 두는 것이 일곱 번째입니다. 회사 일과 별개로 자기가 만들고 싶은 작은 게임을 분기에 한 번 정도 출시 가능한 수준까지 끌고 가 보는 흐름을 자기 일정에 고정해 두면 인공지능 도구의 변화 속도를 자기 손으로 직접 따라잡을 수 있게 됩니다. 출시라는 단어가 부담스럽다면 친한 동료 다섯 명에게 보여 줄 수 있는 수준의 빌드를 만드는 것으로 시작해도 좋습니다. 한국 시스템디자이너가 회사 안에서 평생 해 온 일과 비교하면 이런 작은 출시는 보잘것없어 보일 수 있지만 자기 손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끌고 간 게임이 한 개라도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인지적 격차는 1년만 지나도 회복하기 어려울 만큼 벌어집니다. 읽고 분석하는 시간을 의식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여덟 번째입니다. 인공지능 도구가 게임 산업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분석은 매주 새로운 자료가 쏟아져 나오고 있고 그 자료들 사이에는 진짜 신호와 단순한 노이즈가 섞여 있습니다. 한국 시스템디자이너가 자기 직업의 미래를 정확히 그리려면 이 자료들 안에서 신호를 가려내는 안목이 필요한데 그 안목은 한 번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주 일정 시간을 들여 자료를 읽고 자기 의견을 정리하는 습관에서 자라납니다. 출퇴근 시간에 한 편의 글을 읽고 그 글에 대해 자기 한 줄 평을 적어 두는 정도의 가벼운 루틴이라도 1년이 지나면 50편 이상의 분석 자료를 자기 머릿속에 쌓아 둔 사람이 됩니다. 이 자산이 회사 안에서의 기술적 권위가 흔들리는 시기에 자기 자리를 다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자산이 됩니다. 이 여덟 가지를 모두 한꺼번에 시작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느 하나라도 시작하면 다른 일곱 가지가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다만 시작을 너무 늦추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통역사가 사라지는 자리에서

한국 시스템디자이너는 오랫동안 통역사였습니다. 게임디자이너의 비전을 프로그래머의 코드로 옮기는 자리, 디렉터의 요구사항을 데이터 테이블의 행과 열로 옮기는 자리, 플레이어의 욕망을 시스템의 변수로 옮기는 자리. 이 통역의 자리에서 한국 시스템디자이너는 자기 직업의 모든 가치를 만들어 냈습니다. 통역이라는 일에는 그 자체로 깊은 가치가 있었습니다. 두 언어 사이에서 한쪽의 의미를 다른 쪽으로 옮기는 일은 단순한 변환이 아니라 두 언어 모두를 깊이 이해해야만 가능한 일이고 그래서 좋은 통역사는 양쪽 세계의 시민이 됩니다. 한국 시스템디자이너는 게임디자인의 언어와 프로그래밍의 언어 그리고 데이터의 언어와 비즈니스의 언어를 동시에 이해하는 사람이 되어야 했고 그 다중 시민권이 이 직업의 깊이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인공지능 도구가 자연어와 코드 사이의 통역을 직접 수행하는 시대가 도래하면서 통역사의 자리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사라진다는 표현이 너무 강하다면 '통역사라는 정체성으로 자기를 정의하는 일이 어려워지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 사라짐이 두려운 이유는 단순합니다. 한국 시스템디자이너가 평생 들여 온 모든 노력이 통역사라는 자리에 쌓아 올린 것이었고 그 자리가 사라지면 그 노력이 모두 헛수고였던 것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두려움은 정당하고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 것이 변화에 적응하는 첫 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통역사의 자리가 사라진다는 것이 통역사가 가지고 있던 모든 능력이 사라진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두 세계를 깊이 이해하는 능력은 어디에서나 가치가 있고 그 능력은 통역이라는 작업의 형태로만 발휘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환경에서 한국 시스템디자이너는 통역사가 아니라 두 세계의 통합 시민으로서 자기 자리를 다시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게임디자인의 언어로 비전을 만들고 프로그래밍의 언어로 그 비전이 동작하는지 검증하고 데이터의 언어로 그 동작이 의도와 부합하는지 확인하고 비즈니스의 언어로 그 모든 것이 어떤 가치를 만들어내는지 정리하는 일을 한 사람이 동시에 하는 직업. 이 직업에는 아직 적당한 호칭이 없습니다. 게임디자이너라는 호칭이 가장 가깝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국 시스템디자이너가 평생 쌓아 온 도메인 깊이와 시스템 사고력을 다 담지 못합니다. 어쩌면 한국 게임업계가 새로운 호칭을 만들어내야 할지도 모르고 그 호칭을 만들어내는 일 자체가 한국 시스템디자이너들이 새로운 자리를 정의하는 작업의 일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변화가 잔인하게 느껴진다면

여기까지 읽으면서 이 변화가 잔인하게 느껴졌을 수 있습니다. 한국 시스템디자이너가 평생 쌓아 온 전문성의 상당 부분이 의미를 잃는다는 사실, 그동안 자기 가치를 입증해 온 도구와 기술이 빠르게 가치를 잃고 있다는 사실,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기 정체성을 다시 정의해야 한다는 사실. 이 사실들은 어느 하나도 가벼운 무게가 아닙니다. 이 잔인함을 미화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변화는 위협이면서 동시에 기회라는 식의 균형 잡힌 표현은 변화의 무게를 너무 가볍게 만들 수 있고 한국 시스템디자이너 각자가 자기 직업적 미래에 대해 깊게 고민할 동기를 약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변화는 잔인합니다. 그리고 그 잔인함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이 그 잔인함을 줄이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다만 이 잔인함이 한국 시스템디자이너만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함께 짚을 수 있습니다. 글로벌 게임 산업 전체에서 같은 변화가 진행되고 있고 모든 국가의 모든 게임디자이너가 같은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한국이라는 시장의 특수성 안에서 발달해 온 시스템디자이너라는 분화된 직군이 가장 뚜렷하게 변화의 충격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충격이 한국에만 오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이 변화가 시스템디자이너에게만 오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프로그래머도 같은 변화의 한가운데에 있고 아티스트도 같은 변화에 직면해 있으며 사운드 디자이너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게임업계의 모든 직군이 동시에 자기 정체성을 다시 정의해야 하는 시기에 들어와 있고 그 안에서 시스템디자이너만 외로운 것은 아닙니다. 동료들과 솔직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이 변화의 무게를 함께 들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변화가 가져오는 새로운 기회의 모양도 함께 짚어 둡니다. 한국 시스템디자이너가 평생 만들고 싶었지만 만들지 못했던 게임을 이제 자기 손으로 만들 수 있게 된다는 사실, 회사 안의 분업 구조가 정해 준 자기 자리를 벗어나 자기가 진짜로 가치 있게 여기는 게임 경험을 직접 디자인하고 구현하고 출시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 통역사로서의 한계 안에서 갈증을 느꼈던 시간들이 통합 시민으로서의 자유 안에서 풀릴 수 있다는 사실. 이 가능성들은 모두 같은 변화의 다른 면이고 그 면을 외면하지 않고 마주하면 변화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글의 끝은 위협이 아니라 초대로 마무리합니다. 한국 시스템디자이너로 일해 온 모든 분들에게 자기가 처음 이 일을 하고 싶어졌을 때를 떠올려 보시기를 권합니다. 그때 만들고 싶었던 게임이 무엇이었는지, 그때 플레이어에게 주고 싶었던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그때 자기가 가장 가치 있게 여겼던 게임 경험이 무엇이었는지를 정리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만들기 시작하시기를 권합니다. 도구는 이미 준비되어 있고 그것을 사용할 능력은 이미 여러분 안에 있습니다. 시스템디자이너라는 분화된 직군의 호칭이 그 안의 사람들의 본질을 다 담지 못한 채로 떠나가더라도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이 가진 본질은 새로운 호칭과 새로운 자리에서 더 큰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이 글이 마지막으로 남기는 한 마디가 있다면 한국 시스템디자이너가 그동안 통역사로 일하면서 쌓아 온 모든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시간 동안 익힌 도메인 깊이와 시스템 사고력과 게임에 대한 안목이 새로운 자리에서 더 직접적으로 결과물에 반영될 것이고 통역의 단계가 사라진 만큼 그 결과물은 한국 시스템디자이너가 평생 갈고닦은 본질에 더 가까운 형태로 세상에 나오게 됩니다. 통역사가 사라지는 자리에서 우리가 잃는 것은 통역의 행위 자체일 뿐이고 그 자리에 들어서는 것은 우리가 처음부터 만들고 싶었던 바로 그 게임입니다. 오늘의 결론을 한 줄로 다시 적으면 한국 시스템디자이너가 평생 통역사로 일하면서 쌓아 온 모든 자산은 새로운 시대에도 가치 있게 남고 다만 그 자산을 둘러싸고 있던 통역이라는 행위 자체가 사라지면서 자산이 결과물로 더 빠르게 옮겨가는 풍경이 펼쳐진다는 것입니다. 이 풍경 안에서 한국 시스템디자이너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손으로 만들고 싶은 게임을 만드는 일이 가능해지고 그 가능성이 한국 게임업계 전체의 다음 풍경을 결정합니다. 통역사가 사라지는 자리에서 우리는 두 세계의 통합 시민으로 자리를 바꾸어 앉을 수 있고 그 자리에서 만들어 갈 게임의 모양이 어떨지는 우리 손에 달려 있습니다.

이 글이 한국 시스템디자이너 각자에게 닿아 자기 직업의 미래에 대한 솔직한 대화의 작은 시작이 될 수 있다면 이 글은 충분히 자기 일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변화의 무게는 가볍지 않고 그 변화 앞에서 우리 모두가 겪을 흔들림은 정직합니다. 그러나 흔들림 안에서 자기 본질을 다시 마주하는 일은 이 직업을 처음 선택했을 때의 그 마음으로 돌아가는 일과 다르지 않고 그 돌아감이 가장 큰 자산이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 글을 닫습니다. 오늘의 문장 너머에는 한국 시스템디자이너 각자가 자기 손으로 쓰게 될 다음 글이 있습니다. 그 글이 자기가 만든 작은 게임의 출시 노트가 되었으면 좋겠고 자기가 새롭게 정의한 직업적 정체성에 대한 짧은 메모가 되었으면 좋겠고 동료에게 보낸 솔직한 편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