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에 오래된 리비전에 의미가 있을까?
업무용으로 노션을 사용하면서 엔터프라이즈 섭스크립션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요금제가 히스토리를 이전 30일어치만 유지하는 것을 보고 상당히 당황했었습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과연 올바른 동작인가 하는 생각을 했는데 이전 위키 같은 문서관리도구에서 이전 리비전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또 리비전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계기가 되었습니다. 노션의 리비전 관리 동작을 잠깐 설명하면 월 20달러 짜리 엔터프라이즈 섭스크립션을 제외한 나머지 섭스크립션에서는 히스토리를 30일 까지만 보관합니다. 반대로 말하면 지난 30일 이전 히스토리는 사라집니다. 퍼스널 프로나 팀 버전은 최대 월 8달러를 내는데 이 요금제에서는 30일 이전 리비전에 영구적으로 접근할 수 없습니다.
노션을 사용하기 이전에 어떤 문서관리도구에서도 이런 제한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위키 모양이 아니더라도 구글문서도구, 오피스 365 등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문서 히스토리가 사라지는 동작을 상상해본 적도 없어서 유난히 당황했습니다. 어쩌면 현대에는 이런 동작이 당연한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너무 과거에 얽매여 있나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또 노션에서 이런 동작을 처음 봐서 더욱 당황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근본적으로 노션을 위키 범주에 두는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노션 자체가 전통적인 위키와 거리를 두는 제품일 수도 있습니다. 노션의 몇몇 특징을 보면 어떤 강한 의지에 의한 기능 제한이 있습니다. 가령 의도적으로 부실하게 만든 테이블이 있습니다. 내 스스로도 어느 정도 테이블 순수론자라고 생각하지만 가끔 노션 테이블을 사용하다 보면 빡칠 때가 있습니다. 또 의도적으로 펼쳐지지 않게 만든 사이드바의 계층형 구조도 있습니다. 계층형 구조를 지원하기는 하지만 적극적으로 편리하게 사용하기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하위 문서를 사이드바 계층구조 대신 단일 페이지 내의 링크 모양으로만 보여줍니다. 때문에 의도하지 않게 문서를 삭제할 가능성이 높은데 이런 동작을 유지하는 것을 보면 이렇게 사용하지 말라는 의도처럼 읽힙니다.
이전에는 문서관리도구에 전체 히스토리가 남는 동작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전체 히스토리를 남기는 것은 상당한 낭비이기는 합니다. 문서가 오래되어 생긴 수많은 리비전은 현재 유의미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스토리지를 차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전 리비전에 큼직한 미디어 파일이 포함되어 있었고 현재 리비전에는 사용되지 않는다면 이 스토리지를 영원히 낭비하는 것입니다. 종종 게임 스크린샷을 위키 문서에 포함해 놓곤 하는데 요즘 세상에 아이패드에서 아무 게임 스크린샷도 20메가 전후입니다. 문서를 수정하며 이 스크린샷을 삭제하면 앞으로 거의 조회 되지 않을 20메가가 영원히 낭비되는 셈입니다.
이전에 도쿠위키를 몇 년 동안 사용했는데 이 때는 스토리지를 직접 관리하는 환경이었습니다. 오래된 리비전을 기간 단위로 합쳐 주는 플러그인이 있었습니다. 3년 된 문서의 리비전이 수 백 개라면 이들을 지난 3년 동안에 6개월 단위로 합치고 합칠 때 사라지는 리비전에서 사용되었고 합쳐진 리비전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리비전을 제거해 줬습니다. 스토리지를 직접 관리해야 해서 이런 기능은 종종 큰 미디어 파일이 자주 업데이트 되는 페이지에 꽤 쓸모 있었습니다. 이 정도가 개인적으로 납득하는 이전 리비전 유지와 스토리지 관리 사이에 기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노션에서는 30일이 지난 이전 리비전은 그냥 사라집니다. 위키 문서는 계속해서 수정되어 가장 최신 문서가 가장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위키에서는 최신 문서와 함께 이 문서가 만들어져 온 과거의 맥락이 함께 보존되는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위키위키의 태동기로 돌아가 보면 위키위키의 핵심은 히스토리가 아니라 빠른 공동작업에 의한 문서 도출이라는 점을 알고는 있습니다. 그런데 빠른 공동작업에 생기는 문제해결을 위해 히스토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위키위키 태동기의 핵심이 아니라고 하더라도요.
한편으로는 히스토리를 자주 찾아볼 일이 없긴 합니다. 내가 위키를 사용하는 스타일의 99%정도는 현재 문서를 수정해서 새 리비전을 만드는 것입니다. 개인용으로 사용하는 컨플루언스는 에디트 모드와 뷰 모드가 별도인데 관련 문서를 찾아보면 드래프트를 작성해 놓고 작성을 마칠 때까지 유지하다가 공개하는 것을 의도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사용하기 보다는 문서에 작업중 상태를 걸고 집중적으로 저장해 가며 수정합니다. 문서를 짧게 자주 수정하고 자주 저장해 리비전이 많이 생깁니다. 집중적으로 작업하는 문서는 하루에 수 십 개 리비전을 만들 때도 있습니다. 이렇다 보니 더더욱 이전 리비전을 찾아 지금은 삭제된 내용을 볼 일이 드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런 행동이 1년에 몇 번은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게 해줍니다.
컨플루언스 위키는 이전 리비전을 제한 없이 보관해 줍니다. 같은 문서에 히스토리가 보존될 거라는 신뢰가 있으니 문서의 구성요소들을 미련 없이 제거해 가며 편집할 수 있습니다. 문제가 생겨도 조금 귀찮겠지만 망할 일은 없습니다. 반면 업무용으로 사용하는 노션에서는 문서로부터 뭔가를 제거할 때 신경이 쓰입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본격적으로 수정, 삭제하기 전 리비전을 복제해 개인공간에 날짜를 붙여 남겨 놓을 때가 있습니다. 올바른 사용 습관은 아닐 것 같습니다. 또 직접 관리해야 하니 불편하기도 하고요. 특히 복제된 문서는 ‘다른 문서’이므로 이전 문서와 기계 비교를 할 대상도 아닙니다. 노션은 문서의 리비전 간 비교 기능이 없어 한 문서의 리비전이든 다른 문서로 분리되어 있든 별로 다르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위키가 아니더라도 본격적인 문서관리도구라면 이전 리비전을 제한 없이 보관해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스토리지를 과도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은 이해합니다. 직접 관리하던 도쿠위키에서는 위키 전체 크기를 라이트세일 인스턴스 60기가 이내로 유지하기 위해 리비전 관리를 직접 해야 했습니다. 완전관리되는 컨플루언스에서는 스토리지에 완전히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컨플루언스 스스로가 전체 스토리지 사용량을 표시하는 인터페이스가 없습니다. (원래 있었는데 없어짐.) 전체 백업을 뽑아보면 이전에 비해 엄청난 용량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웬만한 저용량 하드디스크에는 백업을 저장할 수 조차 없게 됐습니다. 이런 제한 없는 리비전과 리비전 간 비교 기능을 통해 문제 상황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스토리지가 비싼 시대라면 모를까 지금은 스토리지를 낭비해 내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기왕 리비전을 모두 보관한다면 이를 더 유용하게 사용할 방법을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컨플루언스에서는 검색하면 최신 리비전 범위에서만 검색하는데 이를 옵션에 따라 모든 문서의 모든 이전 리비전을 검색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낭비되는 스토리지를 의미 있게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 지금은 잘 사용되지 않는 것 같지만 맥에서 타임머신 검색을 통해 이전 히스토리를 검색하는 기능이 이전 리비전을 유용하게 사용하는 한 가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