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과 쓰레기집
나름 짧지는 않은 기간에 걸쳐 위키를 사용해 오면서 위키를 필요로 하는 이유와 위키를 사용하는 방법이 어느 정도 고정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위키 같은 모양의 도구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글의 형태나 주제에 신경 쓰지 않고 일단 아무데나 문서를 만들기 시작하는 것 자체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게시판에 글을 쓴다면 먼저 게시판을 선택하고 카테고리를 선택하고 제목을 쓰는 등 글을 쓰기 시작하기 전에 해야 하는 생각이 많습니다. 반면 위키는 일단 아무 곳에서 글을 쓰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일단 문서를 만든 다음 네임스페이스 개념이 있는 위키라면 적당한 위치로 나중에 옮기면 됩니다. 만약 네임스페이스 개념이 없거나 개념을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면 그대로 두고 이 문서의 링크를 필요로 하는 다른 문서에 링크를 만들어 놓으면 되고요. 심지어 링크를 만들지 않아도 됩니다. 링크를 통해 접근할 수는 없겠지만 여전히 검색을 통해 접근할 수 있습니다.
위키를 사용하는 방법은 이런 위키의 물리적인 특징과 관련이 있는데 모든 문서는 링크와 검색에 의해 아무때나 튀어나올 수 있습니다. 우연히 검색 결과에 내가 찾으려던 정확한 문서 외의 결과가 나타났을 때 여유가 있다면 우연히 마주친 다른 결과들을 함께 살펴보고 연관이 있는 것 같으면 지금 작성하던 문서에 정확히 원하던 결과 뿐 아니라 우연히 마주친 결과 역시 참고 섹션에 링크를 남겨 두곤 합니다. 그러면 검색이 아니더라도 나중에 이 문서를 읽을 때 참고 항목에서 이전에 내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 링크를 함께 살펴볼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또 새로운 문서를 작성할 때 구글에 검색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구글에 검색하기 전에 먼저 내 위키를 검색한 결과를 살펴본 다음 구글 검색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이를 의식해 미래의 내가 위키를 검색할 때에 대비해 지금 작성하는 문서에 설명을 더 잘 하거나 링크를 추가하거나 레이블을 달거나 할 수 있고요. 새 문서를 쓸 때 이전 문서를 검색해 연결하고 참고하기를 긴 기간에 걸쳐 반복하면 위키에 있는 문서 상당수는 여러 문서를 링크하고 있는 모양이 되는데 이들은 물리적으로 잘 정리된 모습과는 거리가 멀지만 또 완전히 서로 링크로 엉켜 있는 모습과도 거리가 멉니다. 이들은 검색을 시작할 키워드를 잘 선택하면 이전의 기록들을 연달아 볼 수 있는 엉켜 있지 않은 실타래 같은 느낌을 줍니다.
마스토돈 타임라인을 스쳐 지나가는 글을 읽다가 ‘디지털 정원'이라는 개념을 봤습니다. 제 머릿 속 정원의 이미지는 일본식 정원처럼 정원 전체가 한 가지 목표에 의해 완전하게 가꿔진 모습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꽤 잘 정돈되어 있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뭔가 기록할 때 정원에 가깝도록 각각의 항목을 잘 정리하고 기록을 읽을 미래의 나를 위해 현재의 기록을 잘 꾸며 놓는 행동에 가깝다고 이해했습니다. 한편 그렇게 기록한 디지털 기록물에 자신의 취향에 맞는 시각적 꾸밈을 더해 개인적인 인정욕구를 충족하는 행동과도 그리 멀지 않아 보입니다.
디지털 정원을 꾸미기에 적당한 도구는 두 가지 조건을 만족해야 하는 것 같은데 하나는 위키처럼 비선형 도구여서 문서 간의 위계를 선택적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하고 다른 하나는 이미지나 이모지 등을 통해 현대적으로 예쁘게 꾸밀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조건을 쉽게 만족하는 적당한 도구가 노션인 것 같습니다.
제 위키 사용 스타일은 정원과는 거리가 아주 멉니다. 문서를 아주 많이 만들고 문서 사이에 링크도 신경 써서 만들기는 하지만 이들이 분명한 위계에 따라 분류되거나 레이블이 잘 달려있거나 하지 않습니다. 문서는 미래의 검색을 믿고 서로 적당히 연결되어 있고 또 적당히 서로 떨어져 있기도 하고요. 또한 문서를 꾸미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컨플루언스도 지난 몇 년 사이에 문서 제목에 이모지를 붙이거나 문서 타이틀에 이미지를 넣을 수 있도록 했지만 이전 컨플루언스 사용자들이 익숙해진 작성 습관을 고려하면 그리 효과적이지 않은 기능 개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정원과 비교해 개인적인 위키 사용 습관을 표현할 적당한 말이 없을지 고민해봤는데 긍정적인 단어는 아니지만 정원과 비교되는 습관을 표현할 단어로 쓰레기집이 적당합니다. 쓰레기집은 여러 원인으로 집 안에 여러 가지 물건을 쌓아 놓기를 반복해 물건이 차츰 쓰레기에 가깝게 변하 가면서 문제가 일어나는 것을 말하는데 위키에 머릿속에서 나온 온갖 생각과 인터넷에서 찾은 자료를 뒤섞어 일단 쌓는데 집중하고 그 다음에 연결하기는 하지만 철저하지 않으며 미래의 검색에 주로 의존할 것을 기대하는 사용 형태를 잘 설명하는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위키를 사용하며 정원을 가꾼다는 표현은 예쁘고 또 동기부여에도 도움이 되겠지만 냉정하게 이야기해 지금의 위키 사용 습관은 쓰레기집에 가깝습니다. 다행히 현대 기술이 쓰레기집에 쌓인 온갖 문서가 영원히 썩지 않게 해 주고 또 잘 검색해준 덕분에 지금의 사용 습관으로도 의미가 아예 없지 않은 위키를 유지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