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니발의 우주

그가 남긴 가장 무서운 흔적은 피가 아니라 질문입니다. 당신의 욕망은 무엇입니까?

한니발의 우주

사람들을 그를 괴물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묻고 싶습니다. 괴물은 어디서 만들어지나요. 피와 이빨과 어둠에서만 나올까요? 아니면 사람들의 침묵과 위선, 그리고 그럴듯한 말에서 나오나요. 그는 늘 이런 질문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는 다른 이들의 내면을 읽었습니다. 그들의 숨긴 욕망을 맡고 눈빛의 미세한 흔들림을 보고 말 속의 빈틈을 들었습니다. 그 빈틈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배신합니다. 이 순간이야말로 그들의 가장 소중한 얼굴이었습니다. 그를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사람들은 식인 의사 같은 말을 붙일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짧은 표시는 편리할 뿐입니다. 편리한 낙인은 진실을 가립니다. 그는 살인을 단순한 파괴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질서가 무너진 곳에서 질서를 만들고 조악한 감정을 정제해 하나의 형태로 남기는 일을 해왔습니다. 누군가는 이를 악이라고 부르고 도 누군가는 어쩌다 그의 말에 잠시 매혹되기도 합니다. 그의 삶은 그에게 두 사람을 남겼습니다. 윌 그레이엄과 클라리스 스탈링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알지 못한 채 같은 방향으로 그에게 다가갔습니다. 윌은 그에게서 자신을 닮은 무언가를 본 사람이고 클라리스는 그로부터 자신을 읽어내는 눈을 본 사람입니다. 둘 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를 필요로 했고 그래서 결국 자신을 잃었습니다. 이 글의 목적은 단순합니다. 레드드래곤, 양들의침묵, 그리고 한니발에 이르는 세 편의 이야기, 세 개의 문, 세 개의 다른 조명이 어떻게 같은 공간으로 이어지는지 보이려 합니다. 그는 거기서 늘 같은 방식으로 움직였습니다. 가까워지고 시험하고 유혹하고 또 필요하다면 정리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가장 크게 변한 것은 그가 처한 상황이 아니라 저들의 마음이었습니다.

레드드래곤에서 시작은 첫 만남이라는 말로는 부족합니다. 그것은 윌 그레이엄이 그의 세계로 들어간 사건이었습니다. 윌은 그에게 조언을 구하러 온 척 했지만 사실 스스로 설명할 수 없는 감각으로 이미 결론에 도달해 있었습니다. 그 감각이 얼마나 예민한지, 또 윌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는 윌의 눈을 보고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날의 대화는 오래 가지 않았고 그는 조용히 다가가 짧고 깊게 찔렀습니다. 양들의 침묵은 그에게 있어 수감 이야기이면서도 동시에 목소리의 이야기입니다. 몸이 갇혀도 말은 빠져나갑니다. 이 작품에서 사람들이 그가 어떻게 탈출했는지를 기억하지만 그에게는 그 이전의 시간이 더 선명합니다. 클라리스 스탈링이 철창 앞에 선 순간 그는 인터뷰하러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클라리스는 스스로의 공포를 확인하러 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공포가 어디서 울리는지 클라리스가 아직 무엇을 구하려 하는지 쉽게 알아차렸습니다. 이후 한니발은 도망자의 삶입니다. 그는 피렌체에서 다른 이름으로 살았습니다. 그곳은 단지 숨기 좋은 도시가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질서가 아직 남아있는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도시에서 큐레이터로 일하며 건물과 그림과 광장의 균형을 읽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균형을 아름답다고 부르는 이유를 그는 알고 있습니다. 균형은 늘 폭력 직전에 더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무대는 다시 클라리스 스탈링을 불러들였습니다. 클라리스의 세계가 먼저 무너졌고 그는 그 틈으로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미식가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미식은 목적이 아니라 방식입니다. 사람들은 맛을 감각의 쾌락으로만 이해하곤 합니다. 그러나 맛은 기억을 흔들고 자존심을 건드리고 죄책감을 깨웁니다. 한 번의 식사는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는 요리하듯 관계를 다듬습니다. 재료의 결을 보고 열을 맞추고 소리를 듣고 타이밍을 잡습니다. 그 모든 과정이 그에게 있어 살아있다는 감각이었습니다. 살인이 예술이 되는 순간은 보통 피가 흐를 때가 아닙니다. 누군가가 자기 안의 진짜 이유를 깨닫는 순간입니다. 윌 그레이엄은 그의 곁에 앉아 그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윌로부터 나오는 공포는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자각으로부터 오는 공포입니다. 그 자각은 윌을 강하게 만들고 동시에 무너뜨렸습니다. 그는 그 흔들림을 좋아했습니다. 흔들리는 사람은 솔직해지니까요. 그가 말하는 마낭스는 단정한 인사나 식사 예절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무너지는 사회 속에서 스스로를 무너지지 않게 하는 마지막 규칙입니다. 어떤 이는 법을 믿고 어떤 이는 권력을 믿고 또 어떤 이는 돈을 믿습니다. 그는 무엇도 믿지 않습니다. 다만 품위 없는 폭력은 싫어합니다. 이유 없는 소음, 무례한 손짓, 타인의 존엄을 습관적으로 짓밟는 태도, 그런 것들이야말로 그를 움직이게 합니다. 그래서 그는 사회와 싸우지 않습니다. 단지 사회를 읽습니다. 감옥의 규정도 경찰의 동선도 사람들의 자만도 모두 글자처럼 읽힙니다. 양들의 침묵에서 그가 빠져나갈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그들이 만든 규칙의 틈을 그가 더 오래 바라봤기 때문입니다. 그는 특별한 기적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들이 설마라고 생각한 지점에 시간을 들였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의 개인적 역사에 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이유를 찾으려 합니다. 왜 그와 같은 사람이 나왔는지, 어디서 망가졌는지 또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지에 대해서입니다. 하지만 그에게 그런 질문들은 늘 조금 늦었습니다. 그가 이미 어떤 사람인지 그 스스로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는 그를 이해하려는 사람에게만 아주 얇게 문을 열어줍니다. 윌 그레이엄에게는 그 문이 거울처럼 열렸고 클라리스 스탈링에게는 그 문이 고백처럼 열렸습니다. 그 두 문을 통과한 사람은 결국 그를 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보게 됩니다. 이제부터 그 문을 통과한 두 사람이 어떻게 흔들렸는지 그 감정의 선을 더 가까이에서 따라가 보겠습니다.

윌 그레이엄은 한니발 렉터에게 '상대'가 아니라 '거울'입니다. 윌이 가진 재능은 사건을 푸는 재능이 아니라, 타인의 폭력과 욕망을 자기 안에서 재현해 버리는 재능이고, 그 재능이 한니발 렉터의 시선을 붙잡았습니다. 윌이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한니발 렉터에게는 ‘내가 외부에 남긴 흔적’이 계속 숨 쉬는 일처럼 느껴집니다. 윌의 사회적 위치는 겉으로 보면 FBI 행동과학부(프로파일러) 출신의 전설 같은 존재입니다. 윌이 한니발 렉터를 체포했고 그 일로 크게 다쳤으며, 그 뒤 은퇴했다는 점이 이 인물의 기본 설정입니다[^Red Dragon (novel)][^Will Graham (character)]. 하지만 윌의 진짜 위치는 조직의 서열이나 직함이 아니라, '정상과 비정상 사이의 경계선'입니다. 윌은 사이코패스의 시점으로 들어가 범죄를 ‘이해’할 수 있고, 그 능력이 그의 정신을 갉아먹습니다. 그는 범죄자를 이해하는 순간마다 ‘내가 그들과 같은 종류라서 이해하는 게 아닐까’라는 공포에 부딪힙니다. 한니발 렉터는 바로 그 공포를 알아봅니다. 윌은 타인의 잔혹함을 해석하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그 잔혹함이 자신의 내부에도 있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감지하는 사람입니다. 한니발 렉터 입장에서 윌은 ‘내가 가려던 곳까지 먼저 가본 사람’이면서, ‘그곳에서 돌아와 평범한 삶을 선택하려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윌은 한니발 렉터에게 매혹적이고, 동시에 참을 수 없을 만큼 거슬립니다. 윌과 한니발 렉터의 첫 만남은 단순히 '수사관이 용의자를 인터뷰한 날'이 아닙니다. 윌은 수사를 위해 정신과 의사였던 한니발 렉터를 찾아갔고, 잠깐의 대화와 단서들 속에서 ‘이 사람이 바로 체서피크 리퍼’라는 결론으로 급격히 뛰어갑니다. 그리고 윌이 신고 전화를 하려는 찰나, 한니발 렉터는 조용히 다가와 리놀륨 칼로 윌의 복부를 그어 거의 내장을 꺼낼 뻔한 상처를 남깁니다. 이 장면이 주는 감정의 핵심은 '배신'보다 '확인'에 가깝습니다. 한니발 렉터는 윌이 자기를 알아본 순간에 ‘나를 알아본 유일한 두뇌’를 없애려 했고, 윌은 그 공격을 통해 ‘내 직감은 맞았다’는 확신을 얻습니다. 즉, 서로의 정체를 단숨에 알아본 방식 자체가 이미 감정적 교류였습니다.

이후 레드드래곤의 현재 시점에서 윌은 다시 사건으로 끌려옵니다. 연쇄 살인마 ‘이빨요정’(프랜시스 달러하이드)을 잡기 위해 잭 크로포드가 은퇴한 윌을 찾아오고, 윌은 다시 '그 시점'으로 복귀합니다. 그리고 결국 윌은 감옥의 한니발 렉터를 다시 만나야만 합니다. 윌이 한니발 렉터를 찾아가는 장면은 언제나 똑같은 감각을 남깁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윌은 감옥 안의 남자를 보러 가는 게 아니라, 자기 안에 남아 있는 ‘그날의 상처’ 속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한니발 렉터는 그런 윌을 보며 즐깁니다. 왜냐하면 윌이 다시 왔다는 것 자체가, 윌이 아직 끝내지 못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레드드래곤에서 윌이 당한 심리전은 단순히 조롱이 아닙니다. 한니발 렉터는 수감 상태에서도 달러하이드와 연결될 통로를 만들고, 그 통로를 통해 윌의 집 주소가 담긴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그 결과, 윌의 가족은 피신하고 결혼 생활은 금이 가며 사건이 끝났다고 믿은 뒤에도 달러하이드는 결국 윌의 집에 나타나 윌의 얼굴을 찌르고 영구적인 흉터를 남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니발 렉터가 정말로 원한 것이 '윌의 죽음'이었는지입니다. 텍스트가 보여주는 것은 오히려 '윌의 삶의 형태를 바꾸는 것'입니다. 윌은 살아남지만, 그가 꿈꾸던 평범한 일상은 되돌리기 어렵게 됩니다. 한니발 렉터는 윌이 자신을 체포했다는 사실을 단순한 패배로 두지 않고, 그 이후의 삶까지 ‘자기 방식으로 다시 쓰는’ 쪽을 택합니다. 한니발 렉터가 윌에게 ‘우리는 비슷하다’고 강조하는 이유는, 모욕이면서 동시에 유혹이기 때문입니다. 한니발 렉터가 보기엔 윌의 공감 능력은 윤리적 덕목이 아니라 위험한 재능이고, 그 재능은 한니발 렉터의 세계와 닮아 있습니다. 그래서 한니발 렉터는 윌이 자신을 혐오할수록, '그 혐오가 사실은 자기혐오'라고 속삭이며 더 깊이 파고듭니다. 윌의 트라우마는 육체적 상처만이 아닙니다. 윌은 한니발 렉터를 잡았지만, 그 뒤 병원에서 기자 프레디 라운즈에게 몰래 촬영당해 굴욕적으로 소비되는 경험까지 겪고, 결국 FBI에서 물러납니다.

이 지점에서 윌의 ‘자살 충동’은 노골적으로 선언되기보다, 서사의 공기처럼 깔립니다. 윌은 사건을 다시 맡는 순간부터 계속 '내가 이 일을 계속해야 하나'와 '내가 이 일을 하면 결국 무엇이 되는가' 사이에서 흔들립니다. 평온한 삶을 욕망하지만, 그 욕망이 사실상 자신에게 가장 위험한 선택이 되었다는 역설이 윌의 절망을 키웁니다. 윌의 파멸이 의미하는 것은 단순한 비극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니발 렉터의 관점에서 ‘가장 정교한 승리’에 가깝습니다. 윌은 한니발 렉터를 감옥에 넣었지만, 한니발 렉터는 윌을 다시 자기 세계의 규칙 속으로 끌어들이고, 그 규칙이 윌의 가족과 얼굴과 미래를 훼손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한니발 렉터의 감정이 드러납니다. 한니발 렉터는 윌을 미워해서만 이러는 것이 아닙니다. 윌을 ‘인정’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인정이 자기 안의 고독을 잠깐이라도 깨뜨리기 때문에, 한니발 렉터는 윌을 놓지 못합니다. 윌은 한니발 렉터가 세상과 맺을 수 있었던 가장 위험하고, 가장 깊은 관계였고, 그 관계는 결국 ‘거울이 거울을 깨뜨리는 방식’으로 끝을 향해 굴러갑니다. 이 글이 한니발 렉터의 관점이라면, 결론은 차갑게 하나로 모입니다. 윌은 한니발 렉터를 체포한 남자였지만, 한니발 렉터가 보기에 윌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닮았기에 내가 끝까지 지켜보는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한니발 렉터는 윌을 죽이지 못했고, 대신 윌이 살아 있는 채로 평범함에서 멀어지도록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한니발 렉터가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하고도 가장 감정적인 방식의 애정이었습니다.

클라리스 스탈링은 한니발 렉터 박사에게 ‘정보를 가져오는 수습요원’으로 들어오지만, 결국에는 ‘자기 마음을 내어주는 사람’으로 남습니다[^The Silence of the Lambs (novel)]. 렉터 박사의 관점에서 클라리스는 단순히 예쁜 장기말이 아닙니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단단해진 사람인데도, 동시에 세상에 대한 믿음이 아직 완전히 꺼지지 않은 사람입니다[^Clarice Starling]. 그는 그 불빛을 보고, 그것을 지키고 싶은 마음과 꺼뜨리고 싶은 마음을 동시에 품습니다. 그 모순이 클라리스와의 관계를 아주 잔인하고도 아름답게 만듭니다. 클라리스의 배경을 떠올리면, 그가 왜 그렇게 ‘구하려는 사람’이 되었는지 이해가 됩니다. 그는 웨스트버지니아의 작은 마을에서 자랐고, 아버지는 야간 치안관(마을 치안 담당) 비슷한 일을 하다가 강도 사건에 대응하던 중 총상을 입고 사망합니다. 아버지가 죽고 난 뒤, 그는 친척이 운영하는 목장으로 보내지고, 그곳에서 ‘도살되는 양들의 울음’을 듣는 기억을 품게 됩니다[^Silence of the Lambs Ending & Real Meaning Explained]. 그 경험은 단순한 어린 시절의 무서운 기억이 아니라, ‘구할 수 있었는데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남아 삶 전체를 밀어붙이는 엔진이 됩니다[^Clarice Starling]. 그래서 그가 FBI가 되려는 마음은 출세욕이라기보다, 어떤 소리 하나를 멈추게 하고 싶다는 마음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렉터 박사는 그 소리를 ‘비밀’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그 소리가 클라리스의 정체성을 이루는 핵심이라고 봅니다[^The Silence of the Lambs, 29 Years Later: Quid Pro Quo]. 클라리스가 FBI 안에서 겪는 성차별과 고립은, 그가 가진 그 엔진을 더 거칠게 돌립니다. 그는 실력으로 증명해야 하는데, 조직은 그의 실력보다 ‘여성’이라는 사실을 먼저 봅니다[^The rise and fall of Clarice Starling]. 그 결과 그는 늘 혼자 들어가고, 혼자 설득하고, 혼자 버텨야 합니다. 렉터 박사가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는 사람의 눈빛과 옷차림과 말끝에서, 그 사람이 어떤 전쟁을 치르고 있는지 읽는 데 익숙합니다. 그래서 첫 만남에서 그는 ‘정보’를 묻기 전에 ‘너는 어디서 왔는지’를 정확히 찌릅니다. 그 장면에서 렉터 박사가 보여주는 건 단순한 관찰력이 아니라, 상대가 숨기고 싶은 계급감과 열등감을 한 번에 꿰뚫는 폭력입니다. 그 폭력은 피를 흘리지 않지만, 클라리스가 가진 방어벽을 ‘정중하게’ 깎아냅니다. 정중하기 때문에 더 위험합니다.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거래처럼 시작됩니다. 렉터 박사는 교환을 제안하고, 단서를 주는 대신 클라리스의 개인적 고백을 요구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렉터 박사가 정보를 ‘그냥’ 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언제나 상대의 내면을 받는 대가로 정보를 줍니다. 그는 이것을 게임으로 즐기지만, 동시에 기도처럼 여깁니다. ‘마음’이 오가는 순간이야말로 사람이 진짜로 드러나는 순간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클라리스가 말하는 ‘양들의 울음’은, 그 게임의 한복판에서 꺼내진 가장 뜨거운 고백입니다. 그가 어린 시절 도살장에서 들었던 울음이 지금도 꿈속에서 들린다고 말하는 순간, 렉터 박사는 단서보다 더 큰 것을 얻습니다. 그가 얻은 것은 ‘클라리스가 무엇 때문에 움직이는지’에 대한 확신입니다. 그는 그 확신을 손에 쥐는 즉시, 그것을 칼처럼 다루기 시작합니다. 이 고백 장면의 심리적 파괴력은, 클라리스가 ‘말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말할 수밖에 없어서’ 말하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질문으로 밀고, 침묵으로 누르고, 칭찬과 모욕을 섞어 도망갈 길을 막습니다. 결국 클라리스는 자신의 가장 약한 부분을 렉터에게 건네고, 그 순간 렉터는 감옥에 있으면서도 관계의 중심이 됩니다. 여기서부터가 ‘오염’의 시작입니다. 클라리스는 렉터를 미워하면서도 그에게 인정받고 싶어지고, 그에게 인정받을수록 더 깊은 이야기를 내놓게 됩니다. 렉터 박사의 감정은 더 복잡합니다. 그는 클라리스를 단순히 부수고 싶지 않습니다. 그는 그를 ‘자기 세계에 견딜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그는 잔인하게 돕습니다. 돕는 방식이 잔인하니, 도움을 받는 사람의 마음이 망가지는 건 필연입니다. ‘양들의 울음’이 단지 과거 회상이 아니라 현재 사건과 연결된다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클라리스가 지하로 내려가 피해자의 비명 속으로 들어가고, 그 비명을 멈추게 하는 구조가 반복되기 때문입니다[^In "Silence of the Lambs", the story from Clarice's youth with the lamb screaming foreshadows Clarice saving Catherine, except with a better result (explanation in comments)]. 렉터 박사는 그 반복을 보고, 클라리스가 결국 ‘또 다른 양’을 구하러 갈 것이라는 걸 압니다. 그래서 그는 그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 결과가 자신에게 돌아오도록 관계를 설계합니다. 클라리스가 사건을 해결해도, 렉터는 마지막에 전화를 걸어 다시 ‘양들의 울음’을 상기시키는 방식으로 그의 마음에 남습니다. 이것은 협박이면서 동시에 애정 표현입니다. 렉터 박사에게는 사랑과 위협이 같은 방향을 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한니발(소설, 영화의 ‘한니발’)의 구간에 들어서면, 클라리스는 더 이상 ‘순결한 수습요원’이 아니라, 조직 안에서 상처받고 깎여나간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이때 렉터 박사의 유혹은 더 현실적이고 더 잔인해집니다. 과거처럼 ‘대화’만이 아니라, 클라리스의 삶에서 안정성을 하나씩 빼앗고 남은 빈자리에 자신을 넣는 방식으로 접근하기 때문입니다[^Hannibal: Did Author Thomas Harris Try to Destroy Dr. Lecter?]. 소설 한니발의 결말에서는 클라리스가 결국 렉터 박사와 함께 떠나는 결말이 제시됩니다[^Lecter’s Fangs: Why the Ending of ‘Hannibal’ is a Secret Masterpiece]. 그 결말에서 클라리스는 ‘잡는 사람’의 자리를 내려놓고, ‘함께 사는 사람’의 자리로 이동합니다. 그 이동은 낭만이 아니라, 부서진 삶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회복처럼 보입니다. 반대로 영화 한니발의 결말은 그 선택을 끝까지 유예시키고, 클라리스를 남겨둔 채 렉터 박사를 도망치게 합니다[^Hannibal (2001 film)]. 이 차이 때문에 클라리스의 상징도 달라집니다. 소설에서 그는 ‘타락한 영웅’이 되지만, 영화에서 그는 ‘끝까지 무너지지 않은 영웅’이 되기보다 ‘악을 막지 못한 생존자’가 됩니다. 클라리스를 렉터 박사의 관점에서 보면, 그의 순결은 처음부터 깨끗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처를 안고도 선을 믿어보려는 마지막 의지입니다. 렉터 박사는 그 의지에 끌리지만, 동시에 그것이 자신을 심판할 힘이라는 것도 압니다. 그래서 그는 클라리스를 소유하려는 동시에, 그를 자기 손으로 더럽히려 합니다. 그렇게 클라리스는 ‘오염’됩니다. 다만 그 오염은 단순히 더 나쁜 사람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오염은, 세상이 만든 상처 위에 렉터 박사가 남긴 흔적이 겹쳐지며, 그가 더 이상 예전의 방식으로는 선을 믿을 수 없게 되는 변화입니다. 이 파괴가 무서운 이유는, 렉터 박사가 그것을 증오로만 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끝까지 ‘대화’로 사람을 바꾸려고 합니다. 그리고 클라리스도 끝까지, 그 대화의 의미를 이해해 버립니다.

프란시스 달러하이드. 그를 처음 떠올리면, 그는 언제나 '이빨 요정'이라는 별명보다 먼저, 한 장의 그림을 떠올립니다. 불타는 붉은 용, 그리고 그 앞에서 인간이 스스로의 얼굴을 버리고 다른 존재가 되기를 바라던 순간입니다. 달러하이드는 사람을 죽여서 돈을 얻거나 쾌락을 얻으려 한 것이 아닙니다. 프란시스는 자기 자신을 없애고 싶어 했고, 그 자리에 '드래곤'을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그 목적이 너무 절박해서, 살인은 그에게 ‘수단’이 아니라 ‘의식’이 됩니다. 달러하이드는 토머스 해리스의 소설 레드드래곤에서 '이빨 요정'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등장하며, 가족 단위의 살인을 반복합니다[^Francis Dolarhyde]. 달러하이드의 개인사는 한 문장으로 요약하기 어렵습니다. 이 인물의 핵심은 '자아 부정'이고, 그 자아 부정은 몸에서 시작됩니다. 그는 선천적으로 구순구개열(입술·입천장 갈라짐)이 있었고, 어린 시절부터 이 문제로 수치심과 혐오를 학습하며 자랍니다. 그에게 거울은 단순한 반사면이 아닙니다. 거울은 ‘그가 원치 않는 자기 자신’을 강제로 보여주는 형벌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몸을 감추고, 목소리와 시선을 숨기며, 타인의 시선 앞에서 무너집니다. 하지만 그 무너짐이 끝내는 외부로 폭발합니다. 자기 혐오가 강해질수록, 그는 '나 아닌 다른 것'을 갈망하고, 그 갈망이 '변신'이라는 단어로 굳어집니다. 그 변신의 가장 위험한 점은, 달러하이드가 그것을 스스로의 힘으로는 완성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신을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승인, 누군가의 ‘이해’, 누군가의 ‘감탄’이 필요합니다. 그때 그가 찾은 사람이 바로 한니발 렉터 박사입니다. 달러하이드는 렉터에게 편지를 보내고, 렉터의 답장을 개인 광고란 같은 방식으로 받도록 제안합니다. 영화 레드드래곤에서도 '이빨 요정이 렉터에게 승인받고 싶어한다'는 식의 설명과 함께, 렉터의 감방에서 편지가 발견되는 장면이 이를 보여 줍니다[^Red Dragon: Reading Hannibal's secret message HD CLIP]. 여기서 저는 달러하이드가 얼마나 외로운 사람인지, 그리고 그 외로움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그는 단지 '범죄자'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의미’를 부여받고 싶은 사람입니다. 그 의미를 줄 수 있는 존재가 렉터라고 믿는 순간, 달러하이드의 살인은 더 이상 자기만의 세계에 갇힌 폭력이 아니게 됩니다. 그 살인은 '관객'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 관객은 누구보다 잔인하고, 누구보다 박식하며, 누구보다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관객입니다. 렉터가 달러하이드를 조종하는 방식은 단순한 지시가 아닙니다. 그는 직접 '윌 그레이엄을 죽여라'라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달러하이드는 이미 스스로를 드래곤으로 만들기 위해 ‘의식’을 수행해야 하는 사람이고, 렉터는 그 의식에 '정당성'을 부여해 주기만 하면 됩니다. 달러하이드가 렉터에게 보낸 편지의 핵심은 결국 하나입니다. '나를 봐 달라, 나를 인정해 달라.' 그리고 렉터는 그 욕망을 알아차린 뒤, 아주 조용히 ‘무대’를 깔아 줍니다. 영화에서도 렉터는 감방 안에서 외부와 교신할 여지를 만들고, FBI가 그 흔적을 뒤늦게 파악하는 흐름이 이어집니다[^Red Dragon (2002) - full transcript].

그 무대의 중심에는 윌 그레이엄이 있습니다. 달러하이드는 윌을 단순히 방해자로 보지 않습니다. 윌은 '자기 탄생을 막는 자'이면서 동시에 '자기 탄생을 증명해 줄 관객'입니다. 윌이 자신을 이해하고, 두려워하고, 끝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싶어 합니다. 소설의 결말에서 달러하이드는 한 차례 ‘죽은 것처럼 보이게’ 만든 뒤 다시 돌아와 윌의 집에서 습격을 감행하고, 윌의 얼굴을 심각하게 훼손하며, 결국 윌의 아내가 그를 쏘아 죽입니다[^Red Dragon]. 이 장면이 잔혹한 이유는 단지 피 때문이 아니라, 달러하이드가 마지막까지도 '나는 변신할 수 있다'는 믿음을 놓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달러하이드의 정체성 전환은 ‘드래곤이 되는 것’으로 설명되지만, 렉터는 그 바닥에 깔린 감정을 다르게 봅니다. 그는 사실 '드래곤'이 되고 싶었다기보다, '프랜시스 달러하이드'로 살기 싫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 이름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래서 드래곤이라는 거대한 이미지, 성서적이고 회화적인 폭력의 상징에 자기 몸을 밀어 넣습니다. 그렇게 하면 자기가 사라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는 윌의 집을 습격하는 것으로 그 변신을 완성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 변신은 끝내 ‘완성’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달러하이드가 바깥에서 빌려온 상징으로는 자기 안의 공허를 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렉터의 승인도, 붉은 용의 이미지도, 살인의 의식도 결국은 한 가지를 바꾸지 못합니다. 달러하이드가 거울을 볼 때 느끼는 그 첫 감정,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입니다. 그래서 그의 최후는 늘 비극으로 보입니다. 윌에게 패배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도망치려다 끝내 자기 자신을 더 깊게 확인하고 만 끝이기 때문입니다. 소설에서도 마지막에 '그가 어떻게 죽음을 위장했는지'가 밝혀지고, 윌은 병원에서 회복하지만 얼굴의 상처와 결혼의 붕괴를 함께 받아들입니다. 이 지점에서 렉터의 역할이 다시 무섭게 빛납니다. 렉터는 달러하이드를 ‘만든’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이미 존재하던 욕망을 발견했고 그 욕망에 이름표를 붙였고, 그 욕망이 스스로를 정당화하도록 도와줬습니다. 렉터는 칼을 쥐지 않아도 됩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칼을 쥐게 만들고, 그 칼이 춤추는 모습을 감상합니다. 달러하이드는 그 춤의 가장 슬픈 무용수였습니다. 그리고 그 슬픔 때문에, 저는 이 이야기가 단순한 범죄물이 아니라, 한 인간의 결핍이 어디까지 폭주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비극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달러하이드를 다루는 장을 여기서 마무리하려면, 결국 한 문장이 남습니다. 그는 ‘괴물’이 되려고 했지만, 사실은 '사랑받고 싶은 아이'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렉터에게 보낸 편지의 답장은, 어떤 위로도 아니고 어떤 구원도 아닙니다. 그저 한 줄의 인정, 그리고 한 줄의 함정입니다. 영화와 소설이 반복해서 보여주는 것은 그 사실입니다.

피렌체에서 파치 형사는 ‘수사관’이라는 옷을 입고 있지만, 그 옷의 주머니에는 늘 계산기가 들어 있습니다[^Hannibal (2001 film)]. 영화 한니발은 파치가 닥터 펠, 즉 렉터의 정체를 깨닫는 순간을 ‘번뜩이는 직감’처럼 보여 주면서도, 그 직감이 곧바로 ‘돈’으로 이어지는 것을 숨기지 않습니다. 이 인물은 정의로운 경찰이 되기에는 너무 지쳤고, 완전히 타락한 악인이 되기에는 아직 체면이 남아 있는, 그래서 더 현실적인 사람입니다[^Stranger in Paradise: Hannibal in Florence]. 파치의 사회적 위치는 지역 권력의 한복판입니다. 그는 피렌체의 치안 조직 안에서 꽤 중요한 자리에 있지만, 그 자리는 ‘세계적 무대’가 아닙니다. 그래서 파치는 렉터를 체포해 공을 세우는 것보다 렉터를 팔아 큰돈을 얻는 쪽을 더 현실적인 성공으로 봅니다. 이 선택이 이미 파멸의 시작입니다. 젊은 아내와의 결혼은 파치의 마음을 가장 강하게 흔드는 부분입니다. 파치는 아내에게 더 좋은 삶을 주고 싶어 하고, 그 욕망이 그를 ‘부패의 문턱’까지 밀어 넣습니다. 이 관계는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중년의 불안과 체면과 열등감이 섞여 있는 관계로 그려집니다. 파치는 자신이 가진 것만으로는 아내의 기대를 채우기 어렵다고 느끼고, 그래서 한 번의 기회에 인생을 걸려고 합니다. 렉터의 정체를 발견하는 과정은 ‘수사력’의 승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렉터가 이미 피렌체에 ‘완벽한 무대’를 마련해 둔 결과이기도 합니다. 렉터는 이 도시에서 도서관 큐레이터라는 직업과 고전 예술의 언어로 자신을 감춥니다. 파치는 그 언어를 알아듣는 사람이라서 렉터를 더 빨리 알아봅니다. 하지만 ‘알아봄’은 곧 ‘거래’로 변하고, 그 순간 파치의 수사는 사실상 렉터의 공연이 됩니다. 메이슨 버저와의 거래는 파치가 스스로를 속이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파치는 경찰로서 렉터를 잡는다고 말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경찰 절차 없이 넘겨서 현상금을 받겠다'는 결정을 내립니다. 여기서 파치가 내리는 도덕적 타협은 ‘작은 일탈’이 아니라 ‘경찰이라는 정체성의 포기’에 가깝습니다. 그 포기는 렉터에게는 아주 매력적인 냄새입니다. 렉터는 사람의 욕망이 만드는 균열을 잘 보기 때문입니다[^Hannibal’s Hosts].

파치가 지문을 얻기 위해 브레이슬릿 같은 물건을 이용하는 장면은 ‘합리적인 수사’로 포장되지만, 사실상 렉터의 영역에 들어가겠다는 선언입니다[^Hannibal]. 렉터는 그 선언을 듣고, 파치가 '진짜로 넘어왔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이때 등장하는 집시 소매치기 여성의 두려움은 중요합니다. 렉터는 법이나 조직보다 먼저, 사람의 본능에 ‘악’으로 감지되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파치가 렉터에게 노출되는 순간은 아주 단순합니다. 파치가 해야 할 일을 ‘끝내지 못했는데도 끝낸 척’하는 순간, 즉 성급해지는 순간입니다. 파치는 렉터를 체포하는 대신 그를 넘기는 도박을 택했고, 그 도박은 결국 렉터에게 시간을 줍니다. 렉터는 파치를 제압한 뒤 그에게 자백을 강요하고, 파치가 무엇을 원했는지, 누구와 거래했는지, 얼마에 팔았는지까지 확인합니다. 렉터에게 이런 확인은 복수라기보다 ‘작품의 서명’처럼 보입니다. 파치의 실수는 한두 개가 아닙니다. 가장 큰 실수는 렉터를 ‘범죄자’로만 보고, 렉터가 ‘미학가’라는 사실을 잊은 것입니다. 렉터에게 살인은 처벌을 피하는 기술이 아니라, 의미를 만드는 기술입니다. 그래서 파치의 죽음은 단순한 살해가 아니라 피렌체라는 도시의 역사와 겹쳐서 완성됩니다. 렉터가 파치를 팔라초 베키오의 발코니에서 내장을 꺼내 매달아 놓는 장면은 영화가 '이건 단지 잔혹한 장면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방식입니다. 그 장소는 피렌체의 권력과 역사 그 자체인 시뇨리아 광장과 연결되어 있고 실외에서 벌어지는 ‘공개 처형’의 이미지가 강합니다. 그리고 ‘파치’라는 성은 실제 역사에서 파치 음모로 악명 높았고, 프란체스코 데 파치 같은 인물들이 팔라초 델라 시뇨리아 창문에서 교수형을 당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여기서 렉터의 미학은 한 문장으로 요약됩니다. '당신이 무엇을 욕망했는지, 당신이 어떤 이름을 가졌는지, 당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까지 포함해서, 나는 당신의 끝을 디자인할 수 있다'는 선언입니다[^‘Short’ analysis of: Hannibal (2001), Rinaldo Pazzi Execution]. 파치는 돈을 원했고, 인정도 원했고, 젊은 아내의 시선을 붙잡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렉터는 파치를 ‘가장 눈에 띄는 곳’에 걸어 둡니다. 파치의 파멸이 비극적인 이유는 그가 끝까지 무능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Stranger in Paradise: Hannibal in 피렌체]. 그는 충분히 똑똑했고, 실제로 렉터를 알아봤고, 손에 쥘 수 있는 선택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선택지의 갈림길에서 파치는 ‘정의’가 아니라 ‘욕망’을 택했고, 렉터는 그 욕망을 아주 조용히 읽어냈습니다. 그 조용함이야말로 렉터가 가장 무서운 이유이고, 동시에 피렌체의 밤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입니다.

한니발 렉터의 세계에서 사람은 ‘선악’으로 분류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기 안의 결핍을 어떻게 다루는지로 분류됩니다. 어떤 이는 결핍을 품위로 감싸고, 어떤 이는 권력으로 덮고, 어떤 이는 돈으로 눌러버리려 합니다. 그리고 그런 방식은 거의 예외 없이, 렉터에게는 손쉬운 손잡이가 됩니다. 메이슨 버저, 프레드릭 칠튼, 폴 크렌들러는 서로 다른 계층에 서 있지만 같은 방향으로 무너집니다. 세 사람의 공통점은 단 하나입니다. 스스로의 욕망을 ‘정당한 것’으로 포장해 놓고, 그 포장이 얼마나 얇은지 끝까지 인정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 순간부터 렉터는 칼을 들지 않아도 됩니다. 이들은 이미 스스로를 한 겹씩 찢어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메이슨 버저는 한니발 렉터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렉터가 가장 쉽게 읽을 수 있는 ‘가해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볼티모어의 초부유층 가문 출신이며, 사회적으로는 돈과 연줄로 법을 굴절시키는 위치에 있습니다[^Mason Verger]. 그가 무너진 이유는 단순히 렉터가 더 잔혹해서가 아니라 메이슨이 원래부터 잔혹했고 그 잔혹함이 렉터를 만나 ‘형벌’로 되돌아왔기 때문입니다. 메이슨의 배경은 ‘렉터에게 당한 파괴’로 요약되지만, 그 파괴는 폭력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욕망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렉터의 상담 과정에서 메이슨은 환각제와 유도에 의해 자기 얼굴을 거울 조각으로 찢어내고, 그 조각을 개에게 먹이며, 자신의 코를 먹는 행동까지 하게 됩니다. 이 장면이 끔찍한 것은, ‘타인이 가한 고문’이라기보다 ‘자기 손으로 자기 몸을 망가뜨리는 선택’의 형태로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렉터는 여기서 폭력을 직접 행사했다기보다, 메이슨이 이미 가지고 있던 자기파괴적 충동과 잔혹한 놀이 욕구를 정확히 눌러 작동시킨 쪽에 가깝습니다. 그 결과 메이슨은 목 아래가 마비되고 호흡기를 쓰는 상태로 생존합니다. 이때부터 그의 인생은 ‘살아 있음’이 아니라 ‘기다림’이 됩니다. 그가 기다리는 것은 치료도 회복도 아닙니다. 복수입니다. 복수만이 그를 움직이게 하는 유일한 감정이 됩니다. 메이슨의 복수는 단순히 렉터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렉터에게 자신이 겪은 ‘무력감’을 그대로 돌려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렉터를 멧돼지 우리에 산 채로 던져 넣어 먹이로 만들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위해 돈과 사람을 동원합니다. 이 지점에서 메이슨의 치명적인 착각이 생깁니다. 그는 자신의 돈이 렉터의 세계에서도 통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렉터에게 돈은 가치가 아니라 재료에 불과합니다. 메이슨은 스스로 ‘거대한 사냥꾼’이 되었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렉터에게 ‘확실한 함정이 있는 사냥터’를 제공하는 안내자에 가깝습니다. 메이슨은 파치 형사를 통해 렉터를 잡으려 합니다. 파치는 ‘정보를 팔아 돈을 얻으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고, 메이슨은 ‘복수’를 위해 그 욕망을 기꺼이 사 줍니다. 여기서 메이슨의 복수는 이미 더럽혀집니다. 복수의 순수성이 아니라 거래의 냄새가 나기 시작합니다. 렉터는 바로 그 냄새를 맡습니다.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파멸하는 방식은, 작품에 따라 다르지만 모두 같은 메시지를 갖습니다. 소설에서는 마고 버저가 메이슨에게 정액을 강제로 채취하고, 장어를 그의 입에 밀어 넣어 익사에 가까운 죽음을 맞게 합니다. 영화에서는 그의 주치의 코델 도믈링이 멧돼지 우리로 메이슨을 밀어 넣어, 메이슨이 준비해 둔 ‘사냥터’에서 되려 먹이가 됩니다. 결국 메이슨은 자신이 만든 복수의 장치로 죽습니다. 이것이 렉터 세계의 가장 잔인한 규칙입니다. 사람이 가장 집착한 것이 그 사람을 죽입니다.

프레드릭 칠튼은 ‘악인’이라기보다 ‘작은 욕망을 가진 평범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볼티모어의 정신병원 원장으로, 한니발 렉터의 감금과 면담을 관리하는 위치에 있습니다[^Frederick Chilton]. 겉으로는 권력을 쥔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렉터 앞에서 끊임없이 작아지는 사람입니다. 칠튼의 권력 욕구는 단순합니다. ‘내가 이 위험한 괴물을 통제하고 있다’는 인정이 필요합니다. 그는 원장이라는 직함으로 렉터를 다루지만, 그 과정에서 진짜로 원하는 것은 안전이 아니라 성과와 명성입니다. 그래서 클라리스 스탈링이 렉터와 대화에서 의미 있는 정보를 얻어낼 때, 칠튼은 그것을 곱게 보지 못합니다. 렉터에게서 '나만 못 얻어낸 것'을 클라리스가 얻어내는 순간, 칠튼의 마음에는 질투가 생깁니다. 그가 렉터를 향해 가진 감정은 동경과 증오가 섞여 있습니다. 렉터는 잔혹하지만 동시에 교양 있고 침착하며, ‘권력자처럼’ 보입니다. 그 앞에서 칠튼은 자신도 그렇게 보이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렉터는 그 욕망을 한 번만 바라봐도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칠튼의 자존심은 늘 렉터의 미소 앞에서 흔들립니다. 칠튼이 결정적으로 무너지는 지점은 ‘관리자’로서의 능력이 아니라 ‘자기기만’입니다. 그는 렉터가 주는 가짜 단서를 자신이 만든 성과처럼 포장하려고 듭니다. 소설에서 렉터는 칠튼에게 ‘빌리 루빈’이라는 가짜 이름을 던지고, 영화에서는 ‘루이스 프렌드’ 같은 장난을 던집니다. 칠튼은 그 장난을 알면서도, 또는 알아차릴 수 있었는데도, 스포트라이트를 놓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더 치명적인 건 그 다음입니다. 렉터가 탈출할 때 사용할 ‘펜’을 칠튼이 부주의하게 렉터에게 남겨두는 대목이 명확히 언급됩니다. 렉터는 그 펜의 튜브와 종이클립 같은 것들을 이용해 수갑 열쇠를 즉석에서 만들 수 있는 환경을 얻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실수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칠튼의 성격이 만든 필연입니다. 그는 늘 '내가 통제한다'는 연출에 신경 썼지, 진짜 통제에 필요한 세부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칠튼의 운명은 작품 밖으로 밀려나며 더 음산해집니다. 소설 한니발에서는 그가 자메이카 휴가 중 실종된 것으로 언급됩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렉터의 세계에서 ‘실종’은 대개 ‘만찬’의 다른 말이기 때문입니다.

폴 크렌들러는 총을 들지 않아도 사람을 망가뜨리는 권력의 얼굴입니다. 그는 법무부의 고위 관리로 묘사되고, 클라리스 스탈링의 커리어를 집요하게 훼손하려 듭니다[^Hannibal (Harris novel)]. 그의 동기는 정의가 아니라 모욕감입니다. 클라리스가 자신의 성적 접근을 거절했고, 그 거절을 그는 ‘자기 권력에 대한 반항’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크렌들러의 보복은 사적 감정으로 시작해 공적 시스템을 이용하는 방식으로 커집니다. 크렌들러가 보여주는 권력 남용은 ‘큰 악행’이라기보다 ‘일상의 악습’입니다. 모욕적인 말, 음흉한 접근, 인사와 평판을 이용한 압박이 반복됩니다. 이런 종류의 폭력은 겉으로는 피가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피해자의 안쪽에서는 피가 납니다. 클라리스의 고립과 분노가 점점 깊어지는 배경에는 이런 권력의 손길이 있습니다. 렉터는 크렌들러를 단순히 ‘방해물’로 보지 않습니다. 렉터의 미학에서 크렌들러는 ‘품위 없는 권력’의 표본입니다. 그래서 렉터는 크렌들러를 죽일 때조차, 그 죽음을 하나의 메시지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영화 한니발에서 렉터는 크렌들러의 두개골을 열고 뇌를 꺼내 요리해 크렌들러에게 먹입니다. 그 과정에서 크렌들러는 약물에 취해 있지만 의식은 남아 있고, 렉터는 그 상태를 유지시키며 식사를 진행합니다[^The Disturbing Ray Liotta Scene We'll Never Get Out Of Our Brains]. 이 장면이 상징하는 것은 ‘식인’ 그 자체보다 ‘이성의 폭로’입니다. 크렌들러의 뇌는 그가 사용해 온 권력의 중심입니다. 그 권력은 공공의 질서를 위해 쓰이지 않았고, 여성을 모욕하고 경쟁자를 깎아내리고 자기 기분을 보상하는 데 쓰였습니다. 그래서 렉터는 그 뇌를 밖으로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습니다. 그리고 가장 교양적인 방식으로, 가장 저급한 폭력을 저지릅니다. 이 모순이 렉터의 미학입니다. 극도로 정돈된 환경에서 가장 큰 금기를 깔끔하게 실행하는 것.

소설에서는 더 멀리 갑니다. 렉터는 크렌들러의 뇌를 클라리스에게도 내밀고, 클라리스가 그것을 맛있다고 느끼는 서술이 이어집니다[^Clarice Starling]. 그 지점에서 ‘크렌들러의 뇌’는 단순한 장기가 아니라, 클라리스의 세계를 무너뜨리는 열쇠가 됩니다. 그를 짓눌렀던 권력이 이제 음식이 되고, 그 음식을 삼키는 순간 그는 예전의 자신으로만 남기 어려워집니다. 이게 바로 렉터가 가장 좋아하는 형태의 승리입니다. 상대를 죽이는 게 아니라, 상대가 지키던 경계를 스스로 넘게 만드는 것. 영화는 이 부분을 더 멈춥니다. 영화에서는 클라리스가 크렌들러의 뇌를 먹지 않고, 그 끔찍함을 ‘보는 사람’으로 남습니다. 그래서 영화의 클라리스는 타락보다 생존의 이미지에 가깝고, 렉터는 ‘함께 도망치는 연인’이 아니라 ‘끝내 잡히지 않는 악’으로 남습니다. 같은 장면이지만, 결말의 선택이 달라지면 상징의 무게도 달라집니다. 크렌들러의 뇌가 상징하는 것은 결국 ‘지능’이 아니라 ‘품위의 부재’입니다. 렉터가 진짜로 혐오하는 건 무식함이 아니라, 권력을 가진 채로 품위를 포기한 태도입니다. 크렌들러는 그 태도를 대표했고, 그래서 그 뇌는 렉터가 가장 아름답게 훼손할 수 있는 재료가 되었습니다. 이 세 인물은 렉터에게 각기 다른 종류의 식재료 같습니다. 메이슨 버저는 복수라는 독을 농축한 고기이고, 프레드릭 칠튼은 허영으로 만든 연한 내장 같고, 폴 크렌들러는 권력으로 부풀린 뇌입니다. 그들이 가진 욕망은 사회적으로는 크고 그럴듯해 보이지만, 렉터 앞에서는 아주 단순한 냄새로 정리됩니다. 그리고 렉터는 그 냄새를 따라가, 늘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결말을 요리합니다.

이제 그들의 끝을 살펴봅시다. 메이슨 버저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한니발 렉터의 눈으로 보면 메이슨은 '복수'라는 말을 사람이 아니라 기계처럼 반복하는 존재입니다. 그는 부자이고, 권력이 있고, 사람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렉터 앞에서는 그 믿음이 한 번에 무너집니다. 메이슨은 렉터의 상담을 받던 과거에 약물을 먹고 자기 얼굴을 잘라내고, 그 살을 개들에게 먹이는 끔찍한 일을 스스로 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메이슨의 인생은 죽지 못해 사는 시간이 됩니다. 그는 목 아래가 마비되고, 얼굴도 망가진 채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남은 감정은 단 하나, 렉터를 다시 잡아 먹이를 주겠다는 증오뿐입니다. 렉터에게 메이슨은 단순한 '피해자'가 아닙니다. 메이슨은 살아남은 피해자인 동시에, 자기 안의 폭력과 욕망을 더 크게 키워서 세상에 풀어놓는 사람입니다. 메이슨은 렉터를 직접 잡을 능력이 없으니 다른 손을 빌립니다. 그래서 피렌체의 파치 형사에게 돈을 걸고, 렉터의 위치를 팔아넘기게 합니다. 이 지점에서 메이슨의 복수는 이미 썩기 시작합니다. 정당한 법의 손이 아니라 돈으로 사람을 사서 복수를 하려는 순간, 메이슨은 렉터와 같은 쪽의 언어를 쓰게 됩니다. 렉터는 이런 사람을 아주 잘 알아봅니다. 겉으로는 '정의'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욕망을 채우려고 모든 규칙을 구부리는 사람 말입니다. 메이슨의 계획은 한마디로 ‘사냥감이 포식자를 가두고 싶어 하는 꿈’입니다. 그는 렉터를 멧돼지들에게 먹이로 주려 합니다. 그런데 렉터의 세계에서 멧돼지는 도구가 아니라 심판에 가깝습니다. 겁에 질린 사람의 냄새를 맡고 달려드는 짐승을, 렉터는 오히려 자신 쪽으로 돌립니다. 소설에서 렉터는 공포를 '냄새'로 다루듯 행동하고, 멧돼지는 겁먹은 부하들을 물어뜯습니다. 메이슨이 만든 지옥이 메이슨 편 사람들을 먼저 삼키는 순간입니다. 메이슨에게는 이게 가장 잔혹합니다. 그는 복수의 무대를 만들었는데, 그 무대의 주연이 될 수 없고, 악몽은 자기 주변부터 뜯어먹기 시작하니까요. 그리고 메이슨의 끝은, 렉터식으로 말하면 '아주 적절한 결말'입니다. 소설에서는 메이슨이 죽는 방식 자체가 그가 가진 저열한 욕망과 폭력의 모양을 그대로 닮아 있습니다. 메이슨이 파멸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는 끝까지 렉터를 ‘괴물’로만 보고, 렉터가 사람의 욕망을 읽고 그 욕망으로 사람을 움직이는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돈으로 사람을 사고, 공포로 사람을 누르면 세상은 통제된다고 믿는 그 습관이, 렉터에게는 아주 쉬운 손잡이가 됩니다.

다음은 프레드릭 칠튼입니다. 칠튼은 한니발 렉터에게 '감옥'을 준 사람이지만, 동시에 렉터에게 '무대'를 준 사람입니다. 그는 범죄정신병원 원장이라는 직함을 가진 사람이고, 제도 속 권력을 손에 쥔 사람입니다. 그런데 렉터의 관점에서 칠튼은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기보다, 권력에 매달리는 사람입니다. 그는 렉터를 통제한다고 믿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렉터를 '전시'하고, 언론과 외부 인맥 앞에서 자신의 성과처럼 보이게 하려 듭니다. 이 지점에서 칠튼의 욕망은 아주 단순합니다. 그는 정의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는 인정과 명성을 원합니다. 칠튼이 가장 위험한 이유는, 그가 스스로를 똑똑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렉터를 가까이에서 다뤘다는 사실이 그의 자존심이 되고, 그 자존심이 렉터에 대한 묘한 동경으로 바뀝니다. 동시에 그는 렉터를 미워합니다. 렉터가 자신을 비웃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기 때문입니다. 동경과 증오가 한 사람 안에서 동시에 자라면, 판단은 늘 흔들립니다. 렉터는 그런 흔들림을 아주 좋아합니다. 상대가 한 번만 방심해도 그 틈이 곧 출구가 되니까요. 특히 '양들의 침묵'에서 렉터가 탈출하는 과정은, 칠튼의 무능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보여줍니다. 렉터는 호송 과정에서 경비를 죽이고, 얼굴을 이용해 위장을 하고, 구급대의 시선을 속이는 방식으로 빠져나갑니다. 이 장면은 단지 렉터가 잔인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더 무서운 부분은, 칠튼이 만든 시스템이 ‘똑똑한 악’을 상정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칠튼에게 렉터는 '특수한 환자'였지, '정교한 탈출을 설계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규칙은 있었지만, 규칙을 운영하는 감각이 없었습니다. 그 결과 칠튼은 렉터를 잡아두기는커녕, 렉터가 밖으로 나갈 마지막 열쇠를 손에 쥐어준 사람이 됩니다.

이제 폴 크렌들러로 가보겠습니다. 크렌들러는 한니발 세계에서 가장 현실적인 악입니다. 그는 피를 흘리며 살인하지 않습니다. 대신 제도와 권력을 이용해 사람을 망가뜨립니다. 소설에서 크렌들러는 법무부 쪽 인물로, 클라리스 스탈링에게 성적인 접근을 하고 그가 거부하자 보복성으로 그를 흔들어 놓습니다. 렉터의 시선에서 크렌들러는 '품위 없는 돼지'에 가깝습니다. 렉터가 싫어하는 건 폭력 그 자체가 아니라, 폭력을 하면서도 자신을 멋진 사람이라 믿는 태도입니다. 크렌들러는 그 태도의 표본입니다. 크렌들러가 받는 벌은 그래서 상징적입니다. 렉터는 크렌들러의 머리를 열고 전두엽을 꺼내 요리해서 먹이는 식으로 살해합니다. 여기서 전두엽은 단지 충격을 위한 소재가 아닙니다. 전두엽은 판단과 억제, 사회적 규범을 담당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진 뇌 영역입니다[^frontal lobe]. 렉터는 크렌들러가 그 ‘이성의 자리’를 권력과 욕망에만 써왔다고 보고, 그 자리를 '음식'으로 바꿉니다. 이건 렉터가 말하는 방식의 처형입니다. '너는 이성으로 사람을 살린 게 아니라 더럽혔으니, 그 이성은 결국 한 접시 음식이 된다.' 이런 선언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이 살인은 클라리스 스탈링에게도 상처를 남깁니다. 크렌들러는 클라리스에게 단순한 적이 아니라, 그가 조직 안에서 느끼는 공포의 얼굴이었기 때문입니다. 렉터는 그 공포의 얼굴을 잘라내 주는 대신, 그 공포의 ‘뇌’를 눈앞에 올려놓습니다. 클라리스가 이 장면에서 겪는 감정은 단순한 혐오가 아닙니다. 안도감, 죄책감, 그리고 '나는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라는 두려움이 한꺼번에 몰려옵니다. 렉터는 그 혼합을 아주 섬세하게 즐깁니다. 왜냐하면 렉터가 진짜로 먹고 싶은 건, 뇌 한 조각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경계’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가 메이슨 버저, 프레드릭 칠튼, 폴 크렌들러가 렉터의 세계에서 어떤 욕망으로 움직이고, 어떤 실수로 무너지고, 어떤 방식으로 파멸하는지의 이야기입니다. 다음 파트로 넘어가면, 이제부터는 사건이 아니라 장면의 온도 자체를 다뤄야 합니다. 렉터가 말을 고르고, 침묵을 길들이고, 상대의 마음을 한 겹씩 벗겨내는 순간들 말입니다.

렉터의 정체가 드러난 순간을 '실수'라고 부르는 건, 렉터를 너무 인간답게 만드는 말이라서 저는 한 번 더 생각하게 됩니다. 그가 남긴 흔적들은 대개 실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가 세상을 대하는 방식, 즉 ‘내가 얼마나 우아하게 이길 수 있는가’를 확인하려는 습관에서 나온 경우가 많습니다[^Red Dragon (novel)]. 이번에는 레드드래곤의 첫 만남에서 렉터가 왜 잡힐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감옥에 갇힌 뒤에도 왜 다시 스스로의 목줄을 잡아당겼는지, 그 과정을 렉터의 시선으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윌 그레이엄이 렉터의 집에 들어갔던 그 밤을 떠올리면 그는 늘 '요리책'이라는 물건이 가진 잔인한 단순함을 생각합니다. 요리책은 원래 생활의 물건입니다. 칼과 불, 향신료와 시간을 다루는, 아주 평범한 책입니다. 그런데 그 평범함이 렉터에게는 가장 위험한 장식이 됩니다. 레드드래곤에서 윌이 렉터를 의심하게 된 실마리는 렉터가 피해자의 ‘스윗브레드’를 요리해 먹었다는 사실과 그 취향의 흔적들로 이어집니다. 렉터가 요리책을 펼쳐두는 행동은, 단순히 ‘부주의’라기보다 ‘자기 연출’에 가깝습니다. 렉터는 살인을 숨길 때도 숨기지만, 동시에 ‘나를 알아볼 사람은 알아봐야 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흔적을 완전히 지우기보다, 알아볼 수 있는 사람에게만 보이게 하는 쪽을 택합니다. 그게 렉터가 말하는 품위이고, 그가 즐기는 게임의 규칙입니다[^Hannibal Lecter]. 렉터의 지적 우월감은 그날 밤 윌의 눈에 아주 짧게 비쳤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여기까지 드러내도 당신은 나를 못 잡을 거야’ 같은 확신입니다. 렉터는 늘 상대를 관찰하고, 상대의 수준을 측정합니다. 윌이 문틈처럼 흔들리는 순간, 렉터는 그 흔들림을 즐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계산했을 겁니다. '이 사람은 나를 잡을 수 있다.' 이 두 감정이 함께 생기면, 렉터는 폭력으로 넘어갑니다. 그 장면이 늘 슬픕니다. 렉터는 말로 이길 수 있는 순간에도, 결국 칼을 들었습니다. 레드드래곤(2002) 영화의 오프닝에서 렉터가 윌을 급습하는 방식은, 렉터가 ‘말의 예술’보다 ‘즉시성’을 선택한 순간처럼 보입니다. 윌은 그 즉시성을 보고 직감합니다. 이 사람은 단순한 의사가 아니라, 자기 안의 어둠을 숨기지 않는 포식자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그 직감이 윌을 살렸고, 렉터를 감옥으로 보냈습니다[^Will Graham vs Hannibal Lecter | Red Dragon (2002)]. 여기서 렉터의 반격은 단순한 살인 시도가 아닙니다. 윌을 찌르는 행위는 ‘입막음’이면서 동시에 ‘인정의 표시’입니다. 렉터는 윌을 하찮게 보지 않았습니다. 하찮게 봤다면, 그는 그렇게 가까이 오지 않았을 겁니다. 렉터는 윌을 자기와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으로 느꼈고, 그래서 더 위험하다고 느꼈습니다. 그게 첫 만남의 비극입니다.

감옥은 렉터에게 벌이라기보다 실험실에 가까웠습니다. 움직일 수 없으니, 말과 상상으로만 바깥을 만져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조건이 렉터의 ‘욕망’을 더 단순한 형태로 드러내기도 합니다. 렉터가 프랜시스 달러하이드와 접촉하려 한 건, 밖으로 손을 뻗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아직도 바깥을 움직일 수 있다’는 감각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고 봅니다. 레드드래곤에서 달러하이드가 렉터에게 팬레터를 보낸다는 설정은 아주 중요합니다. 달러하이드는 신문에 실린 기사(윌이 렉터를 찾아갔다는 기사)를 보고 렉터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렉터는 그 편지 자체를 ‘선물’처럼 받았을 겁니다. 감옥 안에서 자신을 숭배하는 또 다른 살인마가 나타났다는 사실은 그에게 살아 있는 증거이니까요. 그리고 문제의 시작은 여기입니다. 렉터가 달러하이드에게 답장을 할 방법을 찾는 순간, 감옥은 다시 세상과 연결됩니다. 마이클 만의 영화 맨헌터(1986)에서는 렉터(작중 표기 ‘레크토르’)가 개인 광고, 즉 신문 개인란을 이용해 암호처럼 메시지를 주고받는 구조가 핵심 장치로 나옵니다[^Manhunter (film)]. 이 장치는 '말을 금지한 감옥에서 말이 다시 살아나는 방식'입니다. 글자와 숫자, 짧은 문장 몇 개가 실제 살인 사건의 방향을 움직입니다[^Manhunter (1986) by Michael Mann. Based on the novell by Thomas Harris. Second draft, July 20, 1984]. 소설 레드드래곤에서도 핵심은 같습니다. 렉터의 감방에서 달러하이드의 편지가 발견되고, 그 편지의 일부가 제거되어 있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칠튼’의 역할, 즉 프레드릭 칠튼의 역할은 사실상 '발각의 매개'입니다. 그는 렉터를 미워하면서도 렉터를 이용해 자기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하는 사람이고, 그래서 렉터 주변에서 늘 무언가를 캐내려 합니다. 렉터가 놓친 건 바로 그 점입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나를 더 열심히 들여다본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입니다. 칠튼은 렉터의 편지를 발견하고, 그것을 FBI에 넘길 동기도 충분합니다. 그 동기는 정의가 아니라 명성입니다. 그리고 렉터는 사람의 동기를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이상하게도 칠튼의 허영심이 자기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가능성은 과소평가합니다. 그 다음은 FBI의 시간입니다. 렉터가 남긴 암호는 언젠가 풀립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완전한 비밀’이 아니라 ‘규칙이 있는 게임’이기 때문입니다. 맨헌터에서 FBI가 개인 광고를 해독하려 애쓰고, 광고를 바꿔치기하려다가 실패할 수 있다고 두려워하는 과정은, '암호는 결국 패턴이고 패턴은 결국 읽힌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렉터가 감옥 안에서 만든 연결은, 결국 감옥 바깥의 조직이 가진 ‘시간’과 ‘인력’ 약해집니다.

렉터의 실수들을 한 줄로 묶으면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렉터는 완벽을 사랑하지만, 완벽함을 지키기 위해 ‘욕망’을 버리지는 못합니다. 그게 렉터가 인간이라는 증거입니다. 첫째, 렉터에게는 완벽성에 대한 환상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세운 규칙이 곧 세계의 규칙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감옥에서도 ‘말’만으로 사건을 움직일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 확신은 어느 정도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사실이 너무 오래 지속되면, 사람은 그걸 자연법칙으로 착각합니다. 둘째, 윌 그레이엄에 대한 집착과 복수욕은 렉터의 판단을 더 단순하게 만듭니다. 렉터는 윌을 미워하면서도, 동시에 윌이 자기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윌을 죽이기보다 윌을 흔들고 싶어 합니다. ‘너도 나와 같아’라는 말을 반복하는 이유도 결국 그 욕망입니다. 셋째, 렉터는 게임의 즐거움에 중독돼 있습니다. 렉터에게 살인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입니다. 과정이 아름답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니 안전하게 숨어서 사라지는 건 렉터의 미학에 맞지 않습니다. '상대가 알아채는 듯 말 듯한 단서'가 필요합니다. 그 단서는 상대가 아니라 렉터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한 장식이 됩니다. 넷째, 감옥 속 현실 감각의 마비는 렉터의 약점입니다. 감옥은 단순한 방이 아닙니다. 감옥은 시간의 감각을 무디게 만들고, 위험을 일상으로 바꿉니다. 매일 같은 벽, 같은 절차, 같은 얼굴을 보다 보면, '이 시스템은 항상 이렇게 굴러갈 것'이라고 믿게 됩니다. 렉터가 감옥 안에서 통신을 시도한 건, 그 믿음의 결과입니다. 마지막으로, 렉터는 감정 때문에 판단력을 잃을 수 있습니다. 이건 렉터를 약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무섭게 만듭니다. 감정이 들어오면 그는 더 과감해지고, 더 예술적으로 움직입니다. 그리고 그 과감함이 ‘실수’라는 형태로 보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렉터에게 그 실수는 종종 실수가 아닙니다. 그는 들키는 걸 두려워하면서도, 들키는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짜릿함을 압니다. 그게 렉터의 모순이고, 그 모순이 그의 비극이며, 동시에 그의 매력입니다. 이 부분을 끝내면서, 한 가지를 독자님께 남기고 싶습니다. 렉터는 잡힌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잡히는 형태의 관계’를 선택한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의 이름이, 윌 그레이엄이었고, 나중에는 클라리스 스탈링이었습니다.

렉터의 탈출을 이야기할 때는, 먼저 한 가지를 인정해야 합니다. 이 장면은 '살아남는 기술'이 아니라 '인간을 읽는 기술'이 만든 결과입니다. 렉터는 철창을 부수지 않습니다. 렉터는 사람의 습관을 부숩니다. 그리고 그 습관이 만들어 둔 빈틈으로 걸어 나옵니다. 이 점이 바로 '양들의 침묵'이 무서운 이유입니다[^The Silence of the Lambs (novel)]. 탈출의 밤, 렉터는 테네시 법원 구금시설로 옮겨진 상태에서 수갑과 구속 장치를 풀어냅니다. 그 도구가 거창한 장비가 아니라, 칠튼이 숨겨둔 펜 한 조각으로 만든 즉석 도구였다는 설정이 중요합니다. 렉터는 처음부터 '벽을 부술 힘'이 없다는 걸 압니다. 대신 '열쇠를 만들 시간'을 확보합니다. 그 시간은 상대가 자만하는 순간에 생깁니다. 칠튼은 렉터를 대할 때 늘 한 가지를 놓쳤습니다. 렉터는 얌전한 죄수가 아니라, 좁은 방 안에서도 계속 계획을 세우는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뒤의 살인은 단순히 잔혹해서가 아니라, 탈출 전체의 중심 장치이기 때문에 더 무섭습니다. 렉터는 경비 둘을 죽입니다. 영화에서는 그 살인이 리듬처럼 빠르게 진행되고, 현장은 피로 가득 차지만 이상할 만큼 정돈되어 보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죽였다'가 아니라 '어떻게 죽였는지'입니다. 그는 경비를 처리한 뒤, 한 사람의 얼굴을 벗겨 가면처럼 씁니다. 그리고 그 얼굴로 구조대의 시선을 속입니다. 이 장면은 렉터가 ‘사람을 먹는 괴물’이라는 인상을 넘어, ‘사람의 형태 자체를 도구로 쓰는 존재’라는 공포를 남깁니다. '의료용 카트' 안으로 숨어나오는 장면은 더 차갑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경비를 들것에 올리고 천으로 덮은 다음, 그 아래에 렉터가 같이 실려 나옵니다. 여기서 렉터의 지능은 ‘퍼즐을 푸는 능력’이 아니라 ‘시선을 설계하는 능력’으로 보입니다. 사람들은 카트 위를 봅니다. 피, 시체, 소란, 구조대의 긴박함. 그 위에 모든 시선이 모이면, 그 아래는 그냥 빈 공간이 됩니다. 렉터는 그 빈 공간을 압니다. 그리고 그 빈 공간이 얼마나 넓은지도 압니다.

다음 단계는 경찰관 변장입니다. 영화에서 렉터는 경비의 유니폼을 입고, 얼굴 가면으로 '정상적인 구조 상황'의 일부처럼 보이게 합니다. 이 변장의 핵심은 완성도가 아닙니다. 완벽한 분장은 시간이 걸립니다. 렉터는 시간이 없다는 것도 압니다. 그래서 '완벽한 얼굴' 대신 '당연한 장면'을 만듭니다. 구조대가 바쁘게 움직이고, 경찰이 통제선을 만들고 누군가 들것을 호송하는 장면은 너무 흔해서 오히려 의심이 사라집니다. 렉터는 그 흔함을 무기처럼 씁니다. 마지막으로 경찰 봉쇄를 빠져나가는 장면은, 렉터가 사람의 심리를 얼마나 냉정하게 계산하는지 보여줍니다. 영화는 구조대가 구급차를 몰고 나가며 통제선을 지나가고, 그 안에 렉터가 '환자'처럼 실려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괴물이 달아난다’고 생각하면 문을 잠그고 총을 들지만, ‘구급차가 환자를 싣고 간다’고 생각하면 길을 비켜 줍니다. 렉터는 그 차이를 압니다. 그는 총을 이기는 게 아니라, ‘길을 비키게 만드는 설명’을 이깁니다. 이 탈출이 가능했던 근본 이유를 말할 때, 저는 칠튼의 나약함을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칠튼은 렉터를 통제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렉터를 통해 자기 존재를 키우려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안전보다 자존심이 앞섭니다. 그 자존심은 관리의 구멍이 됩니다. 렉터는 늘 그 구멍을 향해 미소를 짓습니다. '당신은 나를 관리하는 게 아니라, 나를 전시하고 있군요.' 그런 눈빛을 렉터가 보내는 순간, 칠튼은 더 강한 척을 해야 하고,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하고, 더 많은 통제를 보여줘야 합니다. 그리고 그때 렉터는 필요한 도구를 모읍니다. FBI 시스템의 한계도 빠질 수 없습니다. 이 작품에서 FBI는 분명 유능한 조직으로 나오지만, 동시에 개인의 능력에 너무 의존합니다. 클라리스 스탈링이 사건을 끝까지 붙잡고 가는 구조 자체가 그렇습니다. 조직이 움직인다고 믿게 만들지만, 결정적인 구간에서는 한 명의 집중력과 용기에 모든 부담이 얹힙니다. 렉터는 이 구조를 즐깁니다. 조직이 '절차'를 따르는 동안, 그는 '사람'을 상대합니다. 절차는 늦고, 사람은 빠릅니다. 특히 욕망이 섞인 사람은 더 빠르게 무너집니다.

렉터의 극도의 지능과 준비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 지능은 숫자가 아닙니다. 렉터의 지능은 ‘상대가 무엇을 보려 하는지’와 ‘무엇을 보지 않으려 하는지’를 동시에 읽는 감각입니다. 소설에서 렉터는 탈출 후에도 호텔에서 편지를 쓰며 다음 계획을 세우고, 바니에게 감사 편지를 남기고, 칠튼에게는 보복을 예고합니다. 그는 도망치는 와중에도 예절과 조롱을 동시에 놓치지 않습니다. 이것이 렉터가 무서운 진짜 이유입니다. 그는 공포 속에서도 자신의 리듬을 잃지 않습니다. 운과 타이밍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작품이 보여주는 운은 '하늘이 도운 우연'이 아니라 '상대가 만든 조건을 렉터가 정확히 이용한 순간'에 가깝습니다. 테네시 이송 자체가 그렇습니다. 칠튼이 자기 공을 세우려다 렉터를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는 순간, 렉터는 새로운 공간의 구조와 사람들의 루틴을 읽고 탈출의 구도를 맞춥니다. 렉터에게 운은 사건이 아니라 재료입니다. 재료가 오면, 그는 요리합니다. 그렇다면 이 탈출이 가진 상징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 장면이 '시스템의 무능함'을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무능함은 멍청해서가 아니라, 시스템이 본질적으로 ‘예외’를 견디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렉터는 예외입니다. 그는 규칙을 깨는 사람이 아니라, 규칙이 만들어낸 인간의 습관을 이용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규칙이 많은 곳일수록, 습관도 더 촘촘해지고, 그 습관의 빈틈도 더 예측 가능해집니다. 이 역설이 탈출의 핵심입니다. 또 하나의 상징은 개인의 영웅주의, 즉 클라리스 스탈링의 한계입니다. 클라리스 스탈링은 버팔로 빌을 쫓는 과정에서 성장하지만, 그 성장의 대가로 렉터는 자유를 얻습니다. 소설에서도 렉터는 탈출 이후 '양들이 울음을 멈췄느냐'는 질문을 남기며, 클라리스 스탈링의 승리를 완전한 승리로 두지 않습니다. 클라리스 스탈링이 한 명을 구해내는 순간, 또 다른 공포가 세상으로 빠져나옵니다. 이 구조는 잔인합니다. 하지만 작품은 이 잔인함을 통해, '정의가 이겼다'는 쉬운 위로를 거부합니다. 그리고 결국 남는 메시지는, 악은 제거될 수 없다는 불쾌한 진실입니다. 렉터는 죽지 않습니다. 잡히지도 않습니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그는 '오래된 친구를 저녁으로 먹으러 간다'고 말하며 칠튼을 따라갑니다. 이 한 문장은 경쾌한 농담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선언입니다. 악은 어디에나 있고, 다시 일상 속으로 섞여 들어간다는 선언입니다. 마지막으로, 렉터의 '자유'와 '추격'의 반복이 남습니다. 렉터에게 자유는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그는 도망치고, 다시 다른 이름을 쓰고, 다시 다른 도시의 규칙 속으로 들어갑니다. 소설에서 그는 남미로 갈 준비를 하며 편지를 남깁니다. 그는 추격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추격이 있어야 삶이 ‘맛’이 난다고 느끼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누군가가 자기를 잡으려 할 때, 렉터는 그 사람의 마음을 읽고, 그 마음 위에 또 하나의 게임판을 깔 수 있으니까요. 이 장면을 다 보고 나면, 한니발 렉터는 단순히 탈옥한 살인마가 아니라, '문명'이 가진 허점의 그림자처럼 느껴집니다. 문명은 사람을 안전하게 만들려고 규칙을 만들지만, 렉터는 그 규칙 때문에 생긴 습관과 시선의 편향을 이용해 빠져나옵니다. 그래서 이 탈출은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이 세계가 끝까지 끌고 갈 공포의 원리입니다.

‘남쪽’은 렉터에게 도망이 아니라 재출발의 방향입니다. 영화 ‘한니발’에서 그는 피렌체로 숨어들어 ‘로만 펠’이라는 이름으로 살며 미술관과 오래된 도시의 리듬 속에 자신을 섞어 넣습니다.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도시이고, 렉터는 그 도시의 고전적 아름다움 속에서 자신의 취향을 가장 자연스럽게 숨길 수 있다고 믿습니다[^Stranger in Paradise: Hannibal in 피렌체]. 남미, 특히 아르헨티나는 소설 결말에서 더 노골적인 ‘탈주 후의 낙원’으로 쓰입니다. 렉터와 클라리스 스탈링이 함께 도망쳐 새로운 삶을 꾸린다는 설정이 그 방향을 고정합니다. 이때 남쪽은 법의 손이 닿기 어려운 곳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야기에서 멀어지는 곳’이라는 점입니다. 추적의 언어가 약해지는 곳, 그래서 관계가 다른 형태로 변할 수 있는 곳입니다. 비행기는 영화 결말에서 영구적 부랑의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렉터는 땅에 정착하지 않고, 이동 자체를 집처럼 씁니다. 그는 어느 나라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고, 어느 규칙에도 완전히 묶이지 않습니다. 비행기는 그 상태를 가장 간단하게 보여주는 공간입니다. 지리적 이동이 의미하는 정신적 상태는 결국 하나로 수렴합니다. 렉터에게 ‘도망’은 패배가 아니라 자기 세계의 확장입니다. 그는 추격을 끊지 않기 위해 이동하고, 동시에 추격을 즐기기 위해 이동합니다. 그래서 남쪽은 끝이 아니라 다음 막의 시작처럼 보입니다.

렉터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남는 감정은 모순입니다. 공포가 먼저 오는데, 그 공포가 이상하게도 정교한 형태를 갖고 있어서 눈을 떼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무서운 장면'을 단순히 잔인한 장면으로 정리하지 않고, 왜 그 장면들이 동시에 아름답게 보일 수밖에 없는지까지 같이 잡아보려고 합니다. 가장 무서운 장면들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첫째는 칠튼을 죽이기까지의 과정이 ‘완벽한 계획’처럼 보인다는 점입니다. 렉터는 직접 공격만 잘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는 제도 안에서 사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누가 무엇을 확인하고 무엇을 확인하지 않는지, 그 허점을 어디에 두는지까지 계산합니다. 그 결과가 테네시 이송 상황에서의 살인과 탈출로 이어지고, 영화에서는 그 흐름이 마치 정해진 순서대로 진행되는 의식처럼 보입니다. 무서운 건, 폭력이 갑자기 터지는 게 아니라 '예정된 사건'처럼 차갑게 진행된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클라리스 스탈링이 ‘양들의 울음’을 말하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이 무서운 이유는 렉터가 클라리스 스탈링의 약점을 찾아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렉터는 그 약점을 '지식'으로 쓰지 않고 '관계'로 씁니다. 질문은 부드럽지만, 질문의 방향은 늘 같은 곳으로 향합니다. 클라리스 스탈링이 스스로 자신의 가장 깊은 수치를 꺼내도록 만들고, 그걸 꺼낸 뒤에는 그 수치를 ‘둘만 아는 비밀’로 봉인해 버립니다[^Movie Analysis: “The Silence of the Lambs” — Part 1: Scene By Scene Breakdown]. 공포는 칼보다 먼저, 말로 들어옵니다. 셋째는 크렌들러의 개두술 장면입니다. 영화는 크렌들러의 뇌를 꺼내 요리하고, 크렌들러가 자기 뇌를 먹는 상황까지 끌고 갑니다. 이 장면이 유난히 끔찍한 이유는 ‘살아 있는 이성’이 무너지는 걸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건, 렉터가 하필 전두엽을 요리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입니다. 전두엽은 판단, 억제, 계획 같은 기능과 연결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렉터는 단순히 살인을 하는 게 아니라 상대가 의지하던 '판단의 자리'를 음식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넷째는 비행기에서 아이에게 음식을 먹이는 장면입니다. 영화는 렉터가 비행기 안에서 '새로운 걸 시도하는 게 중요하다'는 말로 아이에게 크렌들러의 뇌를 건네는 모습을 보여줍니다[^It's Important To Try New Things (Final Scene) | Hannibal (2001)]. 이 장면이 무서운 건, 렉터가 아이를 죽이거나 위협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강요하지 않고, 오히려 ‘자발적 선택’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순간, 공포는 살인이라는 사건이 아니라 '오염'이라는 과정으로 바뀝니다. 다섯째는 파치 형사가 창문에 매달리는 순간입니다. 영화 속에서 렉터는 파치를 해부하듯 가르고, 피렌체의 팔라초 베키오 발코니에 걸어 둡니다. 이 장면이 잔혹한데도 눈에 남는 이유는, 렉터가 살인을 ‘전시’로 만든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죽음이 은폐가 아니라 공개가 되는 순간, 폭력은 더 이상 몰래 일어나는 범죄가 아니라 도시의 풍경이 됩니다.

이제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첫째는 피렌체의 미술관과 렉터의 일상입니다. 영화는 렉터가 ‘닥터 펠’이라는 이름으로 피렌체에서 큐레이터처럼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장면이 아름다운 이유는, 렉터가 마치 자신이 원래 거기에 속해 있었던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폭력으로 얻은 자유인데도, 그 자유가 오래된 문화와 예술의 공간 안에서 '자연스러움'을 띱니다. 둘째는 클라리스 스탈링과의 대화입니다. 이 대화는 사랑도, 심문도, 치료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 셋이 섞여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렉터는 클라리스 스탈링을 해치려 하지만, 동시에 가장 깊이 들여다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말은 칼처럼 날카롭지만, 말의 결은 이상하게도 아주 공손합니다. 그 공손함이 대화를 '장면'이 아니라 '공연'으로 만듭니다[^Silence of the Lambs: Screenplay Breakdown]. 셋째는 오페라 감상입니다. 오페라는 인간 감정을 가장 과장된 방식으로 밀어 올리는 장르입니다. 그래서 렉터가 오페라를 가까이하는 장면은 ‘문명의 최고치’를 즐기는 태도로 보입니다. 렉터가 오페라를 좋아한다는 설정은 단순한 취향 묘사가 아니라, 그가 폭력을 ‘야만’이 아니라 ‘문명’의 언어로 바꾸려 한다는 선언처럼 들립니다. 넷째는 크렌들러의 요리입니다. 이 장면은 잔혹하지만 동시에 매우 '정제'되어 있습니다. 렉터는 요리를 통해 살인을 마무리합니다. 요리는 살인의 흔적을 지우는 기술이 아니라, 살인을 하나의 완성된 형태로 만들기 위한 마지막 손질처럼 보입니다[^The Disturbing Ray Liotta Scene We'll Never Get Out Of Our Brains]. 그래서 이 장면은 무섭고, 동시에 섬뜩할 만큼 아름답습니다. 다섯째는 최종 도주입니다. 영화는 렉터가 자신의 손을 희생하고도 도망친 뒤, 다시 일상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도주는 승리의 축배가 아니라, '영원한 추격'을 전제로 한 생존 방식입니다. 그래서 아름다움은 안정이 아니라, 끝없이 변장하고 이동하는 움직임 속에서 생깁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왜 무서움이 아름답게 느껴지는지 정리해 보겠습니다. 렉터의 가장 큰 무기는 극도의 정제된 표현입니다. 그는 화를 내지 않고, 소리를 지르지 않고, 감정적 흥분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상대의 심장을 만지는 말을 합니다. 그 침착함이 폭력을 ‘실수’가 아니라 ‘선택’으로 보이게 만들고, 선택은 늘 계획과 미학으로 이어집니다. 또 하나는 폭력의 미학화입니다. 렉터는 피를 지우는 대신 피를 '배치'합니다. 숨기는 대신 보여줍니다. 그래서 관객은 혐오하면서도 동시에 '구도'를 보게 됩니다. 파치 형사의 장면이 특히 그렇습니다[^‘Short’ analysis of: Hannibal (2001), Rinaldo Pazzi Execution.]. 그리고 도덕적 금기의 뛰어넘기가 있습니다. 뇌를 먹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인간이 가장 넘기 힘든 금기를 '한 입'으로 넘기는 순간, 관객은 공포를 느끼면서도 그 금기를 넘는 힘에 묘한 전율을 느낍니다. 그것은 동의가 아니라, 금기가 깨지는 장면을 목격할 때 생기는 원초적 반응에 가깝습니다. 마지막으로 인간 욕망의 극단적 표현이 있습니다. 렉터가 실제로 먹는 것은 고기가 아니라, 사람들의 욕망과 결핍이 만들어 낸 빈틈입니다. 클라리스 스탈링의 구원 욕망, 파치 형사의 부와 인정 욕망, 크렌들러의 권력 욕망이 모두 렉터의 손끝에서 형태를 바꿉니다. 그래서 관객은 공포를 느끼면서도, 그 공포가 결국 ‘우리 안에도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혼란을 겪습니다. 렉터의 이중성은 여기서 완성됩니다. 그는 끔찍한 범죄자이지만, 동시에 인간 욕망의 가장 숨은 모양을 '아름답게' 드러내는 거울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이 작품들이 남기는 감정은 끝까지 단순해지지 않습니다. 무서움과 아름다움이 함께 남고, 둘 중 하나만 고르려는 순간 다시 마음이 흔들립니다[^Lecter’s Fangs: Why the Ending of ‘Hannibal’ is a Secret Masterpiece].

렉터의 실수들은 전부 같은 뿌리를 가집니다. 그는 스스로를 완벽하다고 믿고, 그 믿음이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해 오히려 더 위험한 행동을 택합니다. 첫째, 완벽성에 대한 환상입니다. 렉터는 '내가 들키지 않는 이유'를 운이나 우연이 아니라 자신의 설계 능력으로 설명하려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작은 과시도 큰 위험이 아니게 보입니다. 그래서 레드드래곤의 첫 만남처럼 생활 흔적을 조금 남겨도 괜찮다고 느낍니다. 둘째, 윌 그레이엄에 대한 집착과 복수욕입니다. 윌 그레이엄은 렉터의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나를 본 사람’이고, 그 ‘봄’은 체포보다 더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렉터는 그 상처를 지우기 위해 윌 그레이엄을 단순히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흔들고 싶어 합니다. 셋째, 게임의 즐거움에 대한 중독입니다. 렉터는 살인을 탐닉하지만, 더 깊게 보면 그는 '상대가 내 손바닥 위에서 움직이는 느낌'을 탐닉합니다. 그래서 위험한 통신도, 대담한 과시도, 전부 ‘게임을 계속하기 위한 연료’가 됩니다[^Red Dragon]. 넷째, 감옥 속 현실 감각의 마비입니다. 감옥은 안전을 위해 만든 공간이지만, 렉터에게는 현실이 단순해지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통제된 루틴 속에서는 오히려 변수도 예측 가능해지고, 예측 가능성은 과신을 부릅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으로서의 감정이 만드는 판단력 상실입니다. 렉터는 감정을 초월한 괴물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가 가장 인간적으로 흔들리는 순간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흥미롭다’고 느끼는 순간입니다. 윌 그레이엄이 그 대표이고, 그 흥미가 복수로, 복수가 다시 연결 욕망으로 변합니다. 정리하면, 렉터의 정체 노출은 수사에 패배해서가 아니라, 그의 미학이 가진 약점 때문입니다. 미학은 감추기보다 드러내고 싶어 하는 욕망을 품고 있고, 렉터는 그 욕망을 너무 오래 참지 못합니다. 이어서 다룰 렉터의 상징과 이미지들은, 바로 이 지점에서 더 선명해집니다. 렉터는 숨기려다 들킨 사람이 아니라, 끝내 드러내고 싶어서 들킨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렉터는 자신이 괴물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렉터가 겨누는 것은 ‘괴물이 아닌 척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의 세계에서 가장 쉽게 먹히는 사람들은 대개 제도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일수록, 자신의 욕망을 숨기는 기술이 발달해 있고, 그 숨김이 커질수록 약점도 커집니다. 권력 남용의 대표가 폴 크렌들러 같은 인물입니다. 그는 법과 조직의 권위를 뒤에 두고 클라리스 스탈링을 압박하고 성희롱하며, 그 압박이 개인적 쾌락과 지배욕에서 나왔다는 점이 이야기 전반에서 드러납니다. 렉터의 응징은 잔혹하지만, 더 불편한 진실은 ‘사회가 그를 막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부패의 대표가 파치 형사입니다. 그는 법을 지키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돈과 체면을 위해 거래를 선택하고, 그 선택이 결국 자기 파멸로 돌아옵니다. 렉터는 파치를 죽인 것처럼 보이지만, 렉터의 관점에서는 파치가 자기 욕망을 선택한 순간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무능의 대표가 칠튼입니다. 그는 렉터를 이용해 명성을 얻고 싶어 하지만, 그 과정에서 기본 보안을 스스로 망가뜨리고, 결국 렉터의 탈출과 복수의 표적이 됩니다. 렉터는 이런 사람을 보며 ‘문명의 관리자’가 사실은 문명을 유지하는 사람이 아니라, 문명을 팔아 자기 가치를 올리려는 사람일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가 모이는 지점에는 이중성이 있습니다. 모두가 도덕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욕망을 따르고, 그 욕망을 합리화할 때는 ‘정의’ ‘치료’ ‘공익’ 같은 단어를 가져다 씁니다. 렉터가 정말로 무서운 이유는, 그 이중성을 누구보다 정확히 보고, 그 이중성의 언어로 사람을 자기 쪽으로 끌고 온다는 점입니다.

한편 소설과 영화가 같은 줄거리의 뼈대를 공유하면서도 결말을 다르게 끝내는 순간, 한니발 렉터라는 인물은 전혀 다른 괴물이 됩니다. 같은 사람이 같은 짓을 했는데도, 마지막 문장과 마지막 장면이 바뀌면 ‘무서움의 종류’가 바뀌기 때문입니다[^Book vs. Film: 'The Silence of the Lambs']. 소설판의 끝은 조용합니다. 클라리스 스탈링은 사건을 끝낸 뒤, 렉터가 남긴 편지를 읽고 잠이 듭니다. 그리고 그 잠은 ‘양들의 침묵’이라는 제목을 그대로 실현하는 결말로 제시됩니다[^Silence of the Lambs Ending & Real Meaning Explained]. 이 결말이 주는 감정은 단순합니다. 클라리스 스탈링의 세계가 잠깐이라도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느낌, 그리고 렉터의 목소리가 더 이상 귓가를 파고들지 않는다는 느낌입니다. 영화판은 그 반대로 끝을 열어 둡니다. 클라리스 스탈링이 졸업식장에서 전화를 받는 장면이 나오고, 렉터는 ‘양들은 이제 울음을 멈췄느냐’고 묻습니다. 이 질문은 축하가 아니라 확인입니다. 렉터는 클라리스 스탈링의 트라우마가 해결되지 않았음을 알고 있고, 그 트라우마가 앞으로도 자기와 연결될 고리임을 알고 있습니다. 탈출 묘사도 인상적으로 다르게 받아들여집니다. 소설은 렉터가 조직과 시설의 허점을 이용해 빠져나간 뒤 편지를 남기는 방식으로, ‘멀어졌지만 끝나지 않은 관계’를 강조합니다. 영화는 탈출 이후에도 렉터가 클라리스 스탈링의 위치와 상황을 ‘실시간으로’ 알고 있다는 연출을 붙여, 클라리스 스탈링이 더 이상 안전한 거리로 돌아갈 수 없다는 공포를 남깁니다. 소설판 '한니발'의 결말은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클라리스 스탈링이 렉터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두 사람은 함께 도망치고 마지막에는 바니가 오페라 하우스에서 렉터와 ‘동행자’ 클라리스 스탈링을 발견하는 장면이 제시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도주 자체가 아니라, 클라리스 스탈링이 ‘더 이상 FBI의 사람’으로 남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영화판 '한니발'은 그 길을 끊습니다. 렉터와 클라리스 스탈링은 마지막에 수갑으로 묶이고, 렉터는 도망치기 위해 스스로 손을 잘라냅니다[^Hannibal (2001)]. 이후 렉터는 비행기에서 아이에게 음식을 권하며,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게 중요하다’는 말로 자신의 세계를 다음 대상으로 확장합니다[^It's Important To Try New Things (Final Scene) | Hannibal (2001)].

소설 결말에서 가장 불편한 지점은 ‘선택’이 섞여 있다는 점입니다. 클라리스 스탈링은 단순히 납치당해 끌려간 피해자처럼 그려지지 않고, 결국은 렉터와 함께 도주하는 위치에 놓입니다. 이 선택은 '클라리스 스탈링이 약해서 무너졌다'라기보다 '클라리스 스탈링을 지탱하던 사회적 기반이 먼저 부서졌다'는 쪽에 더 가깝게 읽힙니다[^The rise and fall of Clarice Starling]. 그래서 소설판은 도덕을 절대 규칙으로 두지 않습니다. 클라리스 스탈링의 삶은 정의와 규율로 구원받지 못했고, 그 빈틈으로 렉터의 ‘논리’가 들어옵니다[^Lecter’s Fangs: Why the Ending of ‘Hannibal’ is a Secret Masterpiece] 이 결말이 위험한 이유는, 렉터의 세계가 단지 폭력의 세계가 아니라 ‘따뜻한 듯 보이는 연대’의 세계로 묘사되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소설 결말이 렉터와 클라리스 스탈링의 관계를 노골적으로 '로맨스'에 가깝게 돌려 세운다는 것입니다[^What was the book ending to Hannibal?]. 이때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는 무너집니다. 클라리스 스탈링이 갖고 있던 ‘정상으로 돌아가려는 의지’ 자체가, 렉터와 함께 떠나는 순간 더 이상 작품의 중심이 아니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도망'의 방향도 의미가 큽니다. 소설은 오페라 하우스, 즉 문명의 상징 같은 공간에서 두 사람을 다시 보여줍니다. 문명을 떠났다가 문명의 한복판에서 다시 나타나는 이 구조는, 렉터가 문명 밖의 괴물이 아니라 ‘문명의 취향’으로 자신을 숨길 수 있는 존재임을 말합니다. 영화판은 클라리스 스탈링에게 ‘넘어가지 않는 선’을 남겨 둡니다. 마지막까지 클라리스 스탈링은 완전히 렉터 편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 결과 렉터는 혼자가 됩니다. 하지만 이 결말이 더 절망적인 이유는, 렉터가 벌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손을 자르고도 살아서 도망치고, 그 고통조차 탈출의 비용으로 계산하는 장면은 렉터의 세계가 현실의 법과 도덕을 계속 이긴다는 선언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영화는 마지막에 ‘비행기의 아이’를 배치합니다. 렉터는 아이에게 음식을 권하고, 아이는 그 말을 생활 속 조언처럼 받아들이며 입을 엽니다. 여기서 공포는 살인이 아니라 전염입니다. 렉터는 상대를 강제로 끌고 가지 않고, '좋은 말'의 형태로 다음 사람을 자기 세계에 접촉시킵니다. 그래서 영화판의 메시지는 ‘시스템의 완전한 실패’에 가깝습니다. 클라리스 스탈링은 개인으로서 최선을 다했지만, 그 노력은 렉터를 멈추지 못했고, 오히려 렉터가 다음 무대로 이동하는 장면을 보는 것으로 끝납니다.

소설판이 무서운 지점은 선과 악의 경계가 실제로 무너질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클라리스 스탈링은 멀쩡한 사람이고, 정의를 믿었던 사람인데, 그 사람이 어느 순간 렉터의 논리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쪽으로 이동합니다. 이는 악이 강해서가 아니라, 선이 사회 안에서 지탱되지 못할 때 사람이 얼마나 쉽게 방향을 잃는지 보여줍니다. 반대로 영화판은 ‘악의 영구적 우월성’에 가깝습니다. 클라리스 스탈링이 무너지지 않아도, 렉터는 계속 살아남고 계속 이동합니다. 그래서 책임의 무게도 달라집니다. 소설은 개인이 무너지는 순간을 보여주며 독자에게 '당신이라면 끝까지 버틸 수 있나'를 묻고, 영화는 시스템이 무너지는 장면을 보여주며 '어차피 막을 수 있나'를 묻습니다. 희망과 절망의 비율도 다릅니다. 소설은 매우 끔찍하지만, 그 끔찍함이 ‘관계의 완성’처럼 보이는 장면을 줍니다. 영화는 관계를 완성시키지 않지만, 대신 렉터가 새 세대를 향해 손을 뻗는 장면으로 끝내며 절망을 더 길게 끌고 갑니다. 결국 두 결말이 묻는 질문은 다릅니다. 소설은 인간이 변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공포라고 말하고, 영화는 인간이 변하지 않아도 악은 계속된다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렉터의 폭력과 계획을 따라오셨다면 이제는 그가 왜 그렇게까지 '멋'을 지키려 하는지, 왜 공포가 자꾸 아름다움처럼 보이게 되는지,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 어디서 시작되는지까지 내려가 보셔야 합니다. 렉터의 세계에서 상징은 장식이 아니라 행동의 뼈대입니다. 상징은 그의 취향이고, 취향은 곧 그의 도덕입니다. 그래서 렉터를 이해하려면 사건보다 이미지와 감각을 먼저 읽어야 합니다[^Aesthetic Experience]. 렉터에게 음식은 생존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그는 굶주림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가까이' 가져옵니다. 먹는다는 행위는 타인을 내 몸 안으로 들이는 가장 원초적인 방식이고, 그래서 가장 친밀합니다. 이 친밀함을 인간에게 적용하면, 그것은 곧 식인입니다. 렉터가 식인을 고르는 순간, 그는 살인의 목적을 완전히 바꿉니다. 죽여서 끝내는 게 아니라, 먹어서 남기는 쪽으로요[^Aesthetics of the Everyday]. 렉터가 말하는 '좋은 만찬'은 그래서 단순히 맛있는 한 끼가 아닙니다. 좋은 만찬은 준비의 시간이고, 고른 재료이고, 앉은 자리의 분위기이고, 같이 먹는 사람의 수준입니다. 렉터가 소스와 와인에 집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의 장기가 ‘재료’로 내려오는 순간, 그 재료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됩니다. 그 모독을 정당화하려면, 렉터는 반대로 더 높은 격식을 끌어옵니다. 고급 요리의 문법을 써서, 가장 더러운 짓을 가장 우아한 행동처럼 보이게 만드는 겁니다. 이것은 미각이 아니라 권력의 기술입니다[^Hannibal’s Intertextual Gothic Feast]. 장기의 선택도 같은 방식으로 움직입니다. 렉터는 아무나, 아무 부위를 먹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세계에서 '훌륭한 부분'이라는 말은 단지 영양가가 아니라 사람의 품위를 뜻합니다. 그는 속물과 폭력가, 권력으로 약자를 짓누르는 사람을 혐오합니다. 그리고 그 혐오를 가장 정교한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그가 '재료의 신선도'를 말할 때, 사실은 도덕의 신선도를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도덕이 썩은 사람은, 그의 세계에서 이미 고기처럼 취급됩니다[^Ethical Criticism of Art]. 먹는 행위가 주는 심리학적 의미는 여기에서 완성됩니다. 살인은 상대를 사라지게 하지만, 식인은 상대를 ‘내 안으로’ 이동시킵니다. 이 차이가 무섭습니다. 렉터는 피해자를 무덤에 묻지 않습니다. 그는 피해자를 자기 몸속으로 숨깁니다. 그 순간 피해자는 더 이상 '세상 어딘가에 남은 사람'이 아니라 '렉터의 일부'가 됩니다. 이건 지배의 끝입니다. 누군가의 삶을 끝내는 것보다 더 끔찍한 방식으로, 그 사람의 흔적을 자기 안에 삼켜 버리는 것입니다[^Aesthetic Judgment].

다음은 나방입니다. '양들의 침묵'에서 버팔로 빌이 피해자의 목에 넣어 둔 번데기는, 수사 단서이기 전에 선언입니다. 번데기는 아직 나방이 아니고, 동시에 이미 나방이 될 운명입니다. 그래서 번데기는 ‘중간 상태’의 상징입니다. 사람이 지금의 자신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존재가 되고 싶어 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가 완전 변태입니다. 바퀴벌레가 나비가 되는 게 아니라,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처럼, 자신이 완전히 바뀐다고 믿는 환상 말입니다[^Death’s Head Moths]. 영화에서 사용되는 'Death's-head Hawkmoth'는 이 환상을 더 노골적으로 만듭니다. 그 나방은 등 쪽에 해골 같은 무늬가 있어 ‘죽음의 얼굴’을 달고 날아다니는 것처럼 보입니다[^Just What Is Hannibal Lecter's Link With Moths?]. 변신을 꿈꾸는 순간 이미 죽음이 붙어 있다는 뜻입니다. '나는 다른 내가 되겠다'는 말이 '나는 지금의 나를 죽이겠다'와 붙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버팔로 빌의 변신 욕구는 그래서 생의 확장이 아니라 자아의 살해입니다[^The Silence of the Lambs: Buffalo Bill's Moths, Explained]. 렉터가 이 상징을 좋아하는 이유도 비슷합니다. 그는 나방을 통해 인간의 가장 부끄러운 진실을 봅니다. 사람은 대부분 ‘그대로의 나’로 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인정받고 싶고, 다른 껍질을 쓰고 싶고, 새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어 합니다. 렉터는 그 욕망을 비웃지 않습니다. 그는 그 욕망이 얼마나 강한지 알고, 그 강함을 이용합니다. 자연의 완전 변태가 인간 심리의 완전 변태 환상과 만날 때, 사람은 자기 몸까지 도구로 씁니다. 그 지점이 바로 '양들의 침묵'의 비명입니다. 거울은 그 비명을 더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달러하이드의 거울혐오증은 단순히 외모 콤플렉스가 아닙니다. 거울은 '나를 보는 기계'이고, 그 기계는 늘 질문을 던집니다. 너는 누구냐, 너는 무엇이냐, 너는 왜 그 얼굴이냐. 달러하이드는 그 질문에 답할 수 없어서 거울을 싫어합니다. 그는 자기를 보기 싫은 게 아니라, 자기를 본 뒤에 찾아오는 결론을 견딜 수 없는 겁니다[^Francis Dolarhyde]. 렉터가 거울을 다루는 방식은 정반대입니다. 렉터는 거울을 피하지 않습니다. 렉터는 거울을 타인에게 들이댑니다. 윌 그레이엄에게는 '우리는 비슷하다'라는 문장이 거울이고, 클라리스 스탈링에게는 '양들의 울음'이 거울입니다. 거울은 사실을 보여주는 물건이지만, 렉터의 거울은 상대가 숨기고 싶어 하던 진실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상대는 거울을 깨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렉터는 거울을 깨게 두지 않습니다. 그는 거울 앞에 오래 서 있게 합니다. 그 시간이 곧 공포가 됩니다. 여기서 '자기를 본다는 것'의 공포가 완성됩니다. 자기를 본다는 건, 내가 믿던 내 이야기가 흔들리는 순간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렉터의 대화가 무서운 이유는, 그는 상대가 스스로 그 순간을 말하게 만든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강요하지 않는 척하면서, 스스로 말하지 않으면 숨이 막히게 만듭니다. 그 숨막힘이 결국 자백이 됩니다.

음악과 오페라는 렉터가 마지막까지 붙잡는 문명의 형태입니다. 렉터는 살인마이지만, 동시에 문명인의 역할 놀이를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사는 공간에서 음악을 틀고, 말투를 고르고, 예절을 지키고, 식탁을 준비합니다. 그 중에서도 오페라는 렉터에게 가장 잘 맞는 장르입니다. 오페라는 사람의 감정을 극단까지 밀어붙이고, 사랑과 증오를 큰 소리로 외치며, 죽음을 아름다운 아리아처럼 부릅니다. 렉터는 이런 과장을 좋아합니다. 그의 삶 자체가 과장된 미학이기 때문입니다[^Dr Lecter’s Taste for 'Goldberg', or: the Horror of Bach in the Hannibal Franchise]. 파치가 '오페라에 가고 싶은 욕망'을 품었던 것도 그래서 중요합니다. 파치는 돈을 원했지만, 사실은 돈 자체가 아니라 ‘문명에 들어갔다’는 느낌을 원했습니다. 오페라 극장은 그 느낌의 상징입니다. 렉터는 그 욕망을 이해합니다. 이해하면서도 조롱합니다. 왜냐하면 파치는 문명을 꿈꾸면서 동시에 가장 야만적인 선택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파치는 오페라로 가지 못하고, 광장에 걸립니다. 오페라의 관객이 아니라 관광객의 카메라가 그를 봅니다. 이것이 렉터식 비극입니다. 한니발과 클라리스의 오페라 감상은 소설에서 특히 강합니다. 소설의 결말에서 두 사람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오페라 극장에 등장합니다. 이 장면은 '도망'이 끝난 뒤의 장면입니다. 즉, 살인과 추격의 세계가 아니라, 문명의 세계 한가운데서 둘이 앉아 있는 장면입니다. 렉터가 원하는 이상향이 이런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법의 바깥에서, 하지만 문명의 아름다움은 그대로 누리는 삶 말입니다.

뇌는 이 미학이 가장 잔혹하게 드러나는 상징입니다. 크렌들러의 뇌는 단순히 충격 장면이 아닙니다. 뇌는 사람의 판단, 억제, 사회적 규칙을 다루는 기관이고, 특히 전두엽은 계획과 의사결정, 사회적 행동의 조절에 깊게 연결됩니다. 렉터는 그 전두엽을 요리해 '먹이는' 방식으로 크렌들러의 권력을 해체합니다. 권력은 제도 속에서 사람을 움직이지만, 렉터는 그 권력을 고기로 바꿔 접시에 올립니다. 이건 살인이 아니라 전복입니다[^Reasoning, Learning, and Creativity: Frontal Lobe Function and Human Decision-Making]. 뇌가 음식이 되는 순간의 의미는 단순합니다. 인간이 가장 인간답다고 믿는 부분, 이성의 중심이 단숨에 ‘재료’가 됩니다. 그 순간 관객은 자신도 흔들립니다. '저건 절대 넘으면 안 되는 선'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렉터의 손놀림과 말투가 너무 차분해서, 장면이 마치 요리 프로그램처럼 보입니다. 이게 미학의 폭력입니다. 폭력의 감각을 지워버리는 정교함입니다. 그리고 식뇌는 지배의 극단입니다. 살인은 상대의 몸을 멈추게 하지만, 식뇌는 상대의 ‘판단의 자리’를 먹어 치웁니다. 그래서 그 장면은 신체 훼손이 아니라, 인간 자체의 해체처럼 느껴집니다[^Functional Interplay of the Mre11 Nuclease and Ku in the Response to Replication-Associated DNA Damage]

마지막 상징은 남쪽입니다. 렉터가 피렌체로 도망가는 이유는 숨기기 쉬워서만이 아닙니다.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도시이고, 예술이 생활과 맞닿아 있는 공간입니다. 렉터는 그 공간에서 '로만 펠'이라는 이름으로 큐레이터가 됩니다. 그는 도망자의 얼굴을 하고도, 예술가의 도시에서 예술가처럼 살 수 있다고 믿습니다. 즉, 남쪽은 단순한 지리적 이동이 아니라 ‘자기 미학이 통하는 곳으로의 이동’입니다. 소설에서 남미, 특히 아르헨티나는 또 다른 의미가 됩니다. 그것은 단순한 도피처가 아니라, 사회가 주는 낙인과 규칙에서 멀어지는 장소입니다. 두 사람이 오페라를 보러 갈 수 있는 도시이면서, 동시에 미국의 추격이 닿기 어려운 거리이기도 합니다. 렉터는 늘 이런 이중성을 택합니다. 문명을 버리지 않지만, 문명의 법에서는 빠져나가는 방식입니다. 비행기는 그 이중성이 완전히 굳어졌다는 상징입니다. 영화 결말에서 렉터는 비행기에서 아이에게 음식을 권합니다. 비행기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공간입니다. 국경 위, 제도 위, 도덕 위. 렉터는 그 공간에서 다시 누군가의 마음을 만집니다. 그리고 그게 렉터가 가진 '영구적 부랑'의 진짜 얼굴입니다. 그는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정착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디서든 같은 일을 반복할 수 있습니다. 지리적 이동이 의미하는 정신 상태도 결국 하나로 모입니다. 렉터는 늘 ‘더 아름다운 무대’를 찾아 이동합니다. 감옥에서는 대화로 무대를 만들고, 피렌체에서는 예술로 무대를 만들고, 비행기에서는 타인의 순진함으로 무대를 만듭니다. 그래서 렉터의 세계는 길 위에 있습니다. 도망이면서 동시에 선택이고, 추격이면서 동시에 놀이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길 위에서, 렉터는 늘 같은 질문을 남깁니다. '당신은 무엇을 욕망하나요.' 그 질문이야말로 렉터의 미학이 시작되는 자리입니다[^The Concept of the Aesthetic].

파멸을 '사건'으로만 보면 이야기는 단순해집니다. 누가 누구를 죽였고, 누가 누구에게 잡혔고, 누가 누구를 속였는지로 끝나기 쉽습니다. 그런데 렉터의 시선으로 보면, 파멸은 늘 사건보다 먼저 시작됩니다. 어떤 사람이 마음속에 숨겨 둔 욕망이 먼저 움직이고, 그 욕망이 사람을 한 번 비틀고, 그 비틀림이 결국 몸과 삶을 부러뜨립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살인보다 욕망을 먼저 보려고 합니다. 모든 파멸은 욕망에서 시작됩니다. 사람은 늘 자기가 원하는 것을 정당하다고 믿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욕망이 커질수록 도덕적 타협이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이때 사람은 자기 안의 모순을 느끼고 불편해집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상태를 ‘인지부조화’라고 부르고, 사람은 그 불편함을 줄이기 위해 스스로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합니다[^What is cognitive dissonance?]. 이 합리화가 반복되면, 처음에는 '이번만'이던 타협이 어느새 습관이 됩니다. 그리고 습관은 취약성이 됩니다. 렉터는 이 과정을 누구보다 빨리 알아챕니다. 그는 상대가 무엇을 숨기는지보다, 무엇을 정당화하고 있는지를 먼저 봅니다. 정당화는 이미 균열이기 때문입니다. 욕망이 생기고, 도덕적 타협이 일어나고, 취약성이 노출되고, 렉터가 그 취약성을 이용하고, 결국 파멸이 옵니다. 이 흐름은 한 번만 일어나지 않습니다. 렉터가 지나간 자리에서는 똑같은 구조가 계속 반복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욕망을 버리기보다, 욕망을 꾸며서 들고 가는 쪽을 택하기 때문입니다[^Moral Relativism]. 이 구조가 반복되는 이유는, 렉터가 특별히 초능력을 가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렉터는 인간이 원래 가진 약점을 아주 정확히 쓰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 욕망을 들키고 싶지 않아 합니다. 그래서 욕망을 감추려고 ‘도덕’이나 ‘명분’ 같은 옷을 입힙니다. 그런데 명분은 늘 단단하지 않습니다. 명분이 단단해 보일수록, 그 밑에 숨긴 욕망은 더 커집니다. 렉터는 그 명분의 단추를 하나씩 풀어 봅니다. 단추가 풀리면, 욕망은 바로 드러납니다. 그 순간부터 게임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윌 그레이엄의 파멸은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욕망에서 시작됩니다. 윌 그레이엄은 남들의 악을 머릿속에서 재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고, 그 능력 때문에 사건을 해결하면서도 늘 자기 자신이 무너집니다[^Will Graham (character)]. 그는 그 능력을 직업으로 쓰지만, 사실은 그 능력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윌 그레이엄이 원하는 것은 영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살 수 있는 평범함입니다. 그런데 렉터는 윌 그레이엄에게 그 평범함이 불가능하다고 속삭입니다. 그리고 윌 그레이엄이 그 속삭임을 이해해 버리는 순간, 윌 그레이엄의 평범함 욕망은 곧 트라우마로 바뀝니다. 윌 그레이엄의 파멸은 '악을 이해해야 잡을 수 있다'는 논리에서 오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무서운 지점은 '악을 이해하면, 악이 나를 이해한다'는 상호 인식에서 옵니다. 그 인식이 윌 그레이엄을 끝까지 놓아주지 않습니다. 클라리스 스탈링의 파멸은 'FBI에서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에서 시작됩니다. 그는 능력이 있고 성실하지만, 조직 안에서 젊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끊임없이 시험대에 올라갑니다. 그 인정 욕망은 처음에는 동력입니다. 문제는 렉터가 그 동력을 바꿔 잡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렉터는 클라리스 스탈링이 원하는 것이 ‘정의’만이 아니라 ‘존재의 승인’이라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그는 정보를 주는 대신 이야기를 요구합니다. 이 거래는 겉으로는 공정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클라리스 스탈링의 내면을 더 깊은 곳까지 끌고 들어갑니다. 그 결과, 소설 '한니발'에서는 클라리스 스탈링이 더 이상 예전의 자신으로 남아 있지 못하고, 결국 렉터 쪽으로 기울어지는 결말로 갑니다. 영화 '한니발'에서는 클라리스 스탈링이 그 기울어짐을 끝까지 거부하지만, 대신 무력감이 남습니다. 어느 쪽이든 결론은 같습니다. 인정 욕망은 그를 움직였고, 렉터는 그 욕망의 방향을 바꿔 그를 흔들어 놓았습니다.

파치 형사의 파멸은 '부를 축적하고, 신분을 끌어올리고 싶다'는 욕망에서 시작됩니다. 그는 렉터가 누구인지 알아보고도 체포가 아니라 거래를 택합니다. 그 선택은 단번에 그의 도덕을 가볍게 만듭니다. 그리고 렉터는 도덕이 가벼운 사람을 제일 쉽게 다룹니다. 파치는 렉터를 ‘현상금이 붙은 사냥감’으로 보지만, 렉터는 파치를 ‘품위 흉내를 내는 속물’로 봅니다. 그 시선 차이가 파치의 목을 조입니다. 결국 파치는 피렌체에서 내장이 끌려 나온 채로 매달리는 방식으로 죽습니다. 이 죽음은 단지 잔혹함이 아니라, 파치가 꿈꾸던 문명적 욕망이 가장 반문명적인 방식으로 조롱당하는 장면입니다. 달러하이드의 파멸은 '신체를 바꾸고 싶다'는 욕망에서 시작됩니다. 그는 스스로를 혐오하고, 그 혐오를 견디기 위해 ‘레드드래곤’이라는 환상을 키웁니다. 이 욕망은 단순한 변신 욕구가 아니라, 현재의 자아를 없애고 새 자아를 만들고 싶은 강박입니다. 그런데 렉터는 이 강박에 불을 붙입니다. 수감 중에도 렉터는 편지와 암호로 달러하이드와 연결되고, 그 연결은 달러하이드에게 '너는 이미 선택받은 존재'라는 환상을 더 줍니다. 달러하이드는 결국 윌 그레이엄에게 마지막 공격을 하고, 작품에 따라 죽거나 제압됩니다. 중요한 것은 결말의 방식이 아니라, 그가 끝까지 '나를 바꾸겠다'는 욕망을 내려놓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욕망이 멈추지 않으니, 폭력도 멈추지 않습니다. 이 인물들이 서로 다른 삶을 살았는데도, 파멸의 공통 구조는 놀랄 정도로 같습니다. 먼저 사람들은 자기 욕망에 대해 맹목적입니다. 욕망을 인정하면 부끄러우니, 명분 뒤에 숨습니다. 다음으로 사람들은 렉터의 능력을 과소평가합니다. 그를 단순한 살인마로 보고, 자기 계산이 통할 거라고 믿습니다. 이 믿음이 가장 큰 실수입니다. 그리고 도덕적 기준의 이중성이 드러납니다. 사람들은 도덕을 말하면서도, 욕망을 위해 도덕을 접습니다. 렉터는 그 접히는 순간을 기다립니다. 접히는 순간이 오면, 그는 그 접힌 부분을 손잡이처럼 잡고 사람을 끌고 갑니다. 그래서 마지막 문장은 늘 씁쓸합니다. 렉터가 옳아서가 아니라, 렉터가 인간을 너무 잘 알아서 파멸은 피하기 어렵습니다. 누군가 렉터를 이기려면, 렉터보다 똑똑해져야 하는 게 아닙니다. 자기 욕망을 먼저 정직하게 봐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사람에게 제일 어려운 일입니다[^Relativism].

상징체계를 '종합'한다는 말은, 이제부터는 나방이나 음식이나 거울을 따로 떼어 해석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렉터의 세계에서는 이 상징들이 서로 손을 잡고 한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그 방향은 늘 같습니다. 인간을 '대상'으로 만들고, 그 대상을 '재료'로 바꾸고, 그 재료를 '무대' 위에 올리고, 마지막에 관객인 우리까지 그 무대에 끌어들이는 방향입니다. 그래서 상징체계의 종합은 곧 렉터의 세계관을 한 문장으로 읽는 작업이 됩니다[^Aesthetic Experience]. 먼저 음식 상징계부터 잡아 보겠습니다. 렉터에게 음식은 사냥과 포식의 언어입니다. 사냥은 목표를 고르고 뒤를 밟는 행위이고, 포식은 그 목표를 내 몸의 일부로 만드는 행위입니다. 이 구조는 '지배'의 가장 원초적인 표현입니다. 식인이 역사적으로도 단순한 식량 문제가 아니라, 상대의 힘이나 본질을 흡수하거나 지배를 과시하는 상징 행위로 읽혀 왔다는 설명과 맞닿아 있습니다[^Cannibalism: Exploring the Historical, Cultural, and Symbolic Meanings]. 렉터가 식인을 선택할 때, 그는 살인을 '승리'로 끝내지 않고 '소유'로 끝냅니다. 죽음이 아니라 섭취가 결말이 되면, 피해자는 무덤이 아니라 렉터의 식탁 위에서 마지막 의미를 부여받습니다. 장기의 선택은 그래서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인물의 본질을 고르는 행위가 됩니다. 렉터가 누구를 먹고 누구를 살려두는지, 또는 누구를 오래 갖고 노는지에는 그의 ‘심판 기준’이 들어 있습니다. 이 심판 기준은 법의 기준이 아니라 미학의 기준입니다. 품위 없는 사람을 경멸하고, 그 경멸을 가장 우아한 형식으로 실행합니다. 이때 요리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요리는 야만성을 문명으로 포장하는 기술이기 때문입니다. 날것은 야만적이고, 조리된 음식은 문명적이라는 감각이 우리에게 이미 있기 때문에, 렉터는 그 감각을 거꾸로 이용합니다. 사람을 먹는 행위를 '요리'로 감싸면, 관객의 뇌는 잠깐 동안 그 행위를 문화의 영역으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 착각이 바로 렉터가 만든 함정입니다. 공유의 의미도 여기에 붙습니다. 렉터의 만찬은 혼자만의 식사가 아닐 때가 더 무섭습니다. 누군가와 같이 먹는 순간, 타자는 ‘내 안으로’만 들어오는 게 아니라 ‘우리 안으로’ 들어옵니다. 피해자는 식탁 위에서 공동체의 재료가 됩니다. 식사가 공유될수록 죄책감도 공유되고, 그 죄책감의 분산이 참여자들을 더 깊게 묶습니다. 그래서 공유는 단순한 친밀함이 아니라, 타자의 흡수와 일체화가 됩니다. 신체 상징계는 이 음식 상징계를 더 노골적으로 보여 주는 표면입니다. 상처는 기억의 기록입니다. 윌 그레이엄의 상처든, 클라리스 스탈링이 들고 있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든, 렉터 세계에서 상처는 지워지지 않는 문장처럼 남습니다. 상처는 '이미 일어난 일'이 아니라 '계속 일어나는 일'입니다. 트라우마가 현재를 계속 침범한다는 감각이 있기 때문에, 상처는 단지 과거의 흔적이 아니라 현재의 감옥이 됩니다.

마비는 완전한 무력함의 상징입니다. 메이슨 버저의 전신마비는 '살아 있는데 죽은 상태'를 보여줍니다. 그는 숨 쉬고 생각하지만, 움직일 수 없습니다. 이 마비는 단지 신체 손상이 아니라, 욕망이 한 방향으로만 굳어버린 상태를 닮았습니다. 복수가 삶이 되어 버린 사람은 더 이상 다른 선택을 하지 못합니다. 몸이 굳었듯 마음도 굳습니다. 얼굴 파괴는 정체성의 소실로 이어집니다. 얼굴은 사회에서 사람이 사람으로 인정받는 가장 큰 표지입니다. 얼굴이 망가지면, 사람은 사회에서 '이름'보다 먼저 '형태'를 잃습니다. 그래서 메이슨 버저의 얼굴 파괴, 그리고 렉터가 타인의 얼굴을 벗겨 가면으로 쓰는 장면은 둘 다 정체성을 빼앗는 폭력입니다. 한쪽은 자기 얼굴을 잃어버린 피해자이고, 다른 한쪽은 남의 얼굴을 도구로 쓰는 가해자입니다. 이 둘이 한 세계에 함께 존재하는 순간, 정체성은 신성한 것이 아니라 교환 가능한 물건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 뇌 노출은 이성이 벗겨지는 상징입니다. 뇌는 인간이 ‘인간답다’고 믿는 자리입니다. 특히 전두엽은 계획과 의사결정, 사회적 행동의 조절 같은 기능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렉터가 크렌들러의 머리를 열고 뇌를 요리하는 장면은 그래서 살인이라기보다, 인간 중심성에 대한 조롱처럼 보입니다. '너희가 믿는 이성은 결국 한 접시가 될 수 있다'는 선언입니다. 공간 상징계로 넘어가면, 렉터의 세계가 왜 그렇게 '무대'처럼 보이는지도 정리됩니다. 감옥은 완벽한 통제의 공간인데, 동시에 역설적 자유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렉터는 감옥에서 도망치지 못하지만, 감옥은 그에게 관찰과 대화의 집중도를 줍니다. 바깥에서는 숨어야 하지만, 감옥에서는 오히려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고정됩니다. 통제가 강할수록, 렉터는 그 통제를 이용해 더 강한 심리 게임을 설계합니다. 이 구조는 감시와 권력이 공간을 통해 작동한다는 분석과도 맞닿아 있습니다[^Discipline & Punish - Panopticism]. 미술관은 렉터의 진정한 자리입니다. 미술관은 폭력을 숨기고 아름다움만 전시하는 공간입니다. 렉터는 그 공간의 언어를 가장 사랑합니다. 작품을 설명하는 말투, 작품 앞에서의 침묵, 교양이라는 가면. 미술관은 렉터가 '살인마'라는 정체를 지우고 '교양인'이라는 정체로 살아갈 수 있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피렌체에서 큐레이터로 사는 설정은 단지 직업이 아니라, 렉터가 원하는 삶의 형태를 보여줍니다. 정신병원은 광기의 정상화가 일어나는 공간입니다. 거기서는 가장 위험한 사람이 오히려 '관리 대상'이라는 이름으로 체계 속에 들어갑니다. 문제는 체계가 악을 없애지 못하고, 악을 다루는 방법만 발전시킨다는 점입니다. 렉터는 그 체계의 빈틈을 알기 때문에, 정신병원은 그를 가두는 공간이 아니라 그가 약점을 관찰하는 실험실이 됩니다. 비행기는 영구적 도망의 상징입니다. 비행기는 국경 위에 있고, 소속이 희미하고, 모든 것이 잠깐입니다. 렉터는 그 잠깐의 공간에서조차 타인의 욕망을 건드립니다. 영화 마지막의 비행기 장면은 ‘새로운 세대의 오염’이라는 공포를 남기면서도, 동시에 렉터가 끝없이 이동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못 박습니다. 피렌체는 르네상스 미술과의 동일시가 일어나는 장소입니다. 르네상스는 인간의 몸과 감각을 찬양한 시대의 이미지로 자주 기억됩니다. 렉터는 그 찬양을 가장 비틀린 방식으로 실천합니다. 인간의 몸을 예술로 보되, 그 예술을 해부하고 요리합니다. 그래서 피렌체는 단지 예쁜 배경이 아니라, 렉터의 미학이 가장 자연스럽게 숨 쉴 수 있는 무대입니다.

마지막으로 시각적 상징계는, 이 모든 것을 '보게 만드는 방법'을 다룹니다. 거울은 자아 인식의 공포입니다. 거울은 외형을 보여주지만, 렉터의 이야기에서 거울은 외형이 아니라 본질을 드러내는 장치로 작동합니다. 달러하이드는 거울 앞에서 자기 정체성이 깨지는 걸 두려워하고, 렉터는 타인을 거울 앞에 세워 그 깨짐을 즐깁니다. 밤은 도망과 비밀의 시간입니다. 밤은 시야가 줄어들고, 소리가 커지고, 상상이 강해지는 시간입니다. 렉터는 이런 조건을 사랑합니다. 밤은 폭력이 숨기기 쉬운 시간인 동시에, 공포가 커지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렉터의 세계에서 밤은 사건의 배경이 아니라 심리의 증폭기입니다. 조명은 렉터가 조종하는 무대입니다. 조명은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숨길지 결정합니다. 공연에서 조명이 관객의 시선을 유도하듯, 영화의 조명도 관객이 느끼는 감정을 설계합니다[^Mise-en-scène II: Lighting and Color]. 렉터가 하는 일도 같습니다. 그는 대화에서 조명을 켜고 끕니다. 어떤 말로 상대의 과거를 밝히고, 어떤 침묵으로 상대의 현재를 어둡게 만듭니다. 그래서 렉터의 심리 게임은 언어의 게임이면서 동시에 조명의 게임입니다. 카메라와 기록은 도망칠 수 없는 증거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기록은 권력입니다. 기록은 사람을 구하기도 하지만, 사람을 가두기도 합니다. 수사기록, 사진, 보고서, 감시망. 그런데 렉터는 그 기록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는 기록을 '읽는 법'도 알고 '바꾸는 법'도 압니다. 그래서 기록은 렉터를 끝내 잡아내지 못하고, 오히려 그가 사회의 눈을 속일 수 있다는 불쾌한 사실을 더 강조합니다[^Discipline & Punish - Panopticism]. 이렇게 상징체계를 한꺼번에 잡아 보면 결론은 분명해집니다. 렉터의 세계에서 음식은 지배의 언어이고, 신체는 그 지배가 남긴 흔적이며, 공간은 지배가 실행되는 무대이고, 시각은 그 무대를 관객에게 믿게 만드는 장치입니다. 이 네 가지가 한 덩어리로 굴러가면서, 우리는 어느 순간 폭력을 '이야기'가 아니라 '미학'으로 보고 있게 됩니다. 그 착각이야말로, 렉터가 남긴 가장 무서운 유산입니다.

렉터가 남기는 가장 큰 불쾌함은 '사람이 원래 악하다' 같은 단순한 결론이 아닙니다. 더 정확히는, 사람 안에는 늘 서로 다른 기준이 섞여 있고, 그 기준이 상황에 따라 쉽게 뒤집힌다는 사실입니다. 렉터는 그 뒤집힘을 만들지 않습니다. 이미 있는 뒤집힘을 보여 주고, 그 뒤집힘이 일어나는 순간을 이용합니다. 도덕의 상대성부터 보겠습니다. 도덕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말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판단이 항상 하나의 기준으로 고정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도덕 상대주의는 대체로 도덕 판단의 진리나 정당화가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기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나 집단의 기준에 상대적이라는 주장과 연결됩니다. 이를 렉터의 세계로 옮기면 아주 직관적으로 보입니다. 사람들은 '도덕'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속한 조직, 자신의 체면, 자신의 공포, 자신의 욕망에 맞춰 도덕을 바꿉니다. 결국 모두가 '자신의 도덕'을 가지고 있고, 그 도덕은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먼저 움직입니다. 문명의 도덕과 개인의 욕망 사이의 갈등은 여기서 드러납니다. 문명은 규칙과 절차로 굴러가고, 개인은 인정과 생존과 쾌락으로 움직입니다. 둘이 충돌하면, 겉으로는 문명의 도덕이 이겨야 정상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개인 욕망이 조용히 문명의 도덕을 비틀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렉터는 이 갈등을 숨기지 않고 노골적으로 꺼내 보여 줍니다. 그는 '너는 정의를 위해 온 게 아니라 인정받기 위해 왔다' 같은 식으로, 상대가 스스로 감춰둔 욕망의 이름을 불러 줍니다. 그러면 문명이 만든 도덕의 옷이 찢어지고, 그 밑의 맨살이 드러납니다. 욕망의 절대성은 이 이야기의 엔진입니다. 모든 인간이 욕망으로 조종된다는 말은, 사람이 항상 자기 이성으로 선택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원하고 두려워하는 것에 의해 방향이 정해진다는 뜻입니다. 욕망은 종종 개인 통제를 벗어납니다. 사람은 '이건 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이번만'이라는 말로 스스로를 설득합니다. 이 과정에서 판단은 계속 왜곡됩니다[^What is cognitive dissonance?]. 렉터는 바로 이 왜곡의 순간을 읽는 전문가입니다. 그는 상대의 욕망을 ‘정보’처럼 취급하고, 그 욕망을 당기는 말 한마디, 침묵 한 번, 작은 선물 하나로 사람을 이동시킵니다. 그래서 렉터의 조종은 최면이 아니라, 욕망의 지도 위에서 길을 안내하는 기술에 가깝습니다.

지능의 독성은 그 기술을 더 위험하게 만듭니다. 지능은 악을 더 예술적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힘이 센 악은 단순히 때리고 부수지만, 머리가 좋은 악은 이유를 만들고 구조를 만들고 장면을 만듭니다. 렉터는 폭력을 '연출'하고, 그 연출로 상대가 스스로 움직였다고 믿게 합니다. 이게 지능의 독성입니다. 지능이 높은 사람은 도덕 체계를 그대로 따르기보다, 자신의 목적에 맞게 도덕을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능과 도덕성은 반드시 같이 가지 않습니다. 어떤 연구들은 지능과 도덕의 관계가 단순하지 않고, 방법론과 측정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온다고 정리하기도 합니다[^Intelligence and Moral Development: A Critical Historical Review and Future Directions]. 이 불확실함 자체가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똑똑하면 착하다'는 기대는 안전장치가 아닙니다. 오히려 똑똑한 악은 더 조용하고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 마지막은 미의식의 위험성입니다. 아름다움이 도덕을 압도할 수 있다는 말은, 사람들이 어떤 장면을 너무 아름답다고 느끼면 그 안의 폭력을 잠깐 잊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술과 도덕의 관계를 다루는 논의에서도, 작품을 도덕 기준으로 평가해야 하는지, 혹은 미학은 미학대로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긴장이 오래 이어져 왔습니다. 렉터는 그 긴장을 자기 편으로 끌어옵니다. 그는 극도의 세련됨으로 극도의 악을 정당화하려고 듭니다. 식탁의 예절, 정확한 말투, 음악, 미술관, 와인. 이런 것들이 폭력의 냄새를 가립니다. 그래서 문화적 교양이 도덕성으로 이어진다는 믿음은 쉽게 무너집니다. 교양은 선함의 증거가 아니라, 악을 더 잘 포장하는 기술이 될 수도 있습니다. 렉터는 결국 '극도의 미의식을 가진 자의 위험'을 보여줍니다. 그는 더럽게 살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무 깨끗하게 살려고 합니다. 문제는 그 깨끗함이 사람의 생명과 존엄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렉터의 아름다움은 늘 혐오와 함께 옵니다. 관객은 동시에 두 감정을 느끼고, 그 혼란 때문에 자기 안의 기준이 흔들립니다. 그 흔들림이 바로 렉터가 드러내는 인간의 본질입니다. 누구나 도덕을 말하지만, 누구나 욕망을 숨기고, 누구나 아름다움 앞에서 잠깐 눈을 감을 수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렉터를 따라가는 동안 관객의 마음은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계속 방향이 바뀝니다. 처음에는 '저건 괴물이다'라고 단정하려다가도, 어느 순간 '왜 저렇게까지 완벽하지?'라는 이상한 감탄이 스며들고, 마지막에는 '내가 지금 무엇에 끌린 거지?'라는 도덕적 불안감이 남습니다. 이 감정의 흔들림 자체가 렉터 이야기의 핵심 효과입니다. 렉터에 대한 감정의 변화는 대체로 네 단계로 읽힙니다. 초기에는 공포와 혐오가 먼저 옵니다. 그는 사람을 찢고 먹고, 표정이 흔들리지 않으며, 말투는 친절한데 내용은 잔인합니다. 그래서 관객은 '이해하면 안 되는 존재'로 렉터를 밀어냅니다. 그런데 중기로 들어가면 매력과 흥미가 생깁니다. 렉터는 똑똑하고, 상대의 본심을 단번에 읽고, 품위 있게 말하고, 무엇보다 자기가 만든 규칙을 끝까지 지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관객은 그 일관성에 끌립니다. 이 시점의 흥미는 '그가 옳아서'가 아니라, '그가 너무 정확해서' 생깁니다. 후기가 되면 연민과 이해의 충동이 찾아옵니다. 특히 소설과 영화는 렉터에게 교양과 상처의 흔적을 나눠 주면서, 관객이 ‘그를 전부 악으로만 규정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이런 장치는 관객이 렉터의 시선으로 세상을 잠깐 보게 만들고, 그 잠깐이 위험합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남는 것은 도덕적 불안감입니다. '나는 왜 저 사람을 흥미롭게 봤나'라는 질문이 남습니다. 이 불안감이야말로 작품이 관객에게 남기는 가장 오래가는 흔적입니다.

이제 렉터의 세계관에 대한 동의 위험을 보겠습니다. 관객이 어느 순간 '그의 논리가 실제로 타당한가?'라고 묻기 시작하면, 이미 렉터는 이야기 안에서 승리한 셈입니다. 왜냐하면 그 질문 자체가 도덕 체계에 작은 균열을 내기 때문입니다. 도덕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믿는 동안에는 '저건 그냥 악'이라고 밀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도덕이 상황에 따라 흔들릴 수 있다는 의심이 생기면, 렉터의 말은 더 깊게 들어옵니다. 이 의심은 관객을 자기 욕망 쪽으로 끌고 갑니다. '나는 정말 정의를 위해 분노하나, 아니면 안전한 거리에서 스릴을 소비하나' 같은 질문이 생깁니다. 관객은 작품을 보며 렉터를 판단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작품이 관객을 판단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때 관객은 자신도 ‘타락 가능함’이 있다는 걸 어렴풋이 깨닫습니다. 타락은 거창한 범죄가 아니라, 작은 합리화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Cognitive Dissonance]. 여기서 심리적 장치 하나가 더 중요해집니다. 사람은 이야기 속으로 깊이 몰입할수록, 그 이야기의 주장에 대한 반박을 덜 하게 될 수 있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이것이 서사 몰입, 즉 내러티브 트랜스포테이션 이론이 말하는 핵심 중 하나입니다[^Transportation Theory]. 렉터 이야기는 몰입을 강하게 유도합니다. 사건이 흥미롭고, 대화가 날카롭고, 이미지가 강하고, 인물들이 불안정합니다. 그래서 관객이 정신을 차리고 '잠깐만, 이건 위험한 생각인데'라고 끊어내기 전에, 이미 렉터의 언어가 관객의 머릿속에 자리를 잡기 쉽습니다. 그게 동의 위험의 실제 모습입니다.

마지막으로 미적 쾌감과 도덕적 불편함의 공존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렉터의 세계는 아름다운 영상과 끔찍한 내용이 한 화면에 붙어 있습니다. 피렌체의 빛과 고전 음악, 정갈한 식탁, 예술 작품 같은 장면 위에 잔혹한 행위가 얹힙니다. 관객은 이때 이상한 감각을 느낍니다. 마음은 '싫다'라고 말하는데, 눈은 '멋있다'라고 반응합니다. 이 충돌이 쾌감이 되기도 하고, 동시에 죄책감이 되기도 합니다. 아름다움이 도덕적 거부감을 약화시키는 과정은 대개 아주 조용합니다. 관객은 폭력에 동의하지 않지만, 폭력을 ‘연출’로 보기 시작합니다. 연출로 보기 시작하면, 현실의 피해자는 흐려지고 장면의 완성도만 또렷해집니다. 이때 관객은 스스로를 속이기 쉽습니다. '나는 저 폭력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영화의 완성도를 좋아하는 거야' 같은 식으로요. 이런 자기기만은 도덕적 불편함을 줄여 주지만, 동시에 쾌감을 죄책감으로 바꿉니다. 또 하나 중요한 감정은 혐오가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예술에서의 혐오는 연민, 호기심, 경이, 웃음 같은 감정들과 섞여 나타날 수 있다는 설명이 있습니다[^Varieties of Aesthetic Disgust Get access Arrow]. 렉터의 장면이 딱 그렇습니다. 역겨운데 눈을 못 떼고, 무섭지만 대사가 아름답고, 싫은데 웃음이 나오기도 합니다. 감정이 섞이면 판단도 섞입니다. 그래서 관객은 점점 더 불안해집니다. '내 감정이 지금 정상인가?'라는 질문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결국 관객과 독자는 렉터를 보면서 렉터를 배우게 됩니다. 사람을 먹는 법이 아니라, 사람을 ‘미학’으로 처리하는 법을요. 그리고 그 배움이 남기는 후유증이 바로 도덕적 불안감입니다. 작품이 끝나도 사라지지 않는 이 불안감이, 렉터가 관객에게 남기는 가장 무서운 흔적입니다.

저 자신을 포함한 사람들이 렉터를 매력적으로 느끼는 이유는, 렉터가 ‘현실의 악’처럼 지저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품위 있고, 언어가 정확하고, 감정이 흔들리지 않고, 무엇보다 자기 규칙을 가진 사람처럼 보입니다. 이때 매력은 선함에서 오지 않습니다. 통제감에서 옵니다. 혼란한 세상에서 통제감을 가진 인물은 그 자체로 강해 보입니다. 게다가 연구에서는 허구의 악역이 관객과 닮았을 때 오히려 더 호감이나 관심을 얻을 수 있다는 결과도 제시됩니다[^From Voldemort to Vader, Science Says We Prefer Fictional Villains Who Remind Us of Ourselves]. 즉, 렉터가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은 '나는 저 사람과 다르다'가 아니라 '저 사람 안에 내 일부가 있다'는 위험한 느낌과 연결되기도 합니다[^When Do We Identify with the Bad Guy?]. 악의 미학화가 가능한 이유도 여기서 이어집니다. 렉터는 폭력을 ‘미학’으로 바꿔 보여 줍니다. 잔혹함이 멈추는 게 아니라, 잔혹함이 정돈됩니다. 정돈된 잔혹함은 관객에게 이상한 안전감을 줍니다. '이건 통제된 공포다'라는 착각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 착각 위에서 사람들은 장면의 아름다움을 먼저 보게 됩니다. 그래서 도덕과 미의식이 충돌합니다. 도덕은 '보면 안 된다'고 말하지만, 미의식은 '너무 잘 만들었다'고 속삭입니다. 이 충돌은 작품을 끝까지 끌고 가는 힘이 됩니다[^Ethical Criticism of Art]. 렉터를 통해 본 현대인의 욕망은 더 노골적입니다. 규칙에 벗어난 자유를 갈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법을 어기고 싶어서가 아니라, 늘 평가받고 감시받는 느낌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그런 자유를 꿈꿉니다. 렉터는 그 꿈을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실현한 존재처럼 보입니다. 그는 사회의 규칙을 무시하지만, 동시에 사회가 만든 ‘교양’의 상징들은 그대로 즐깁니다. 이 모순이 바로 현대인의 모순과 닮아 있습니다.

문명의 부패에 대한 분노도 렉터 현상을 키웁니다. 작품 속에서 부패한 권력자, 위선적인 조직, 약자를 괴롭히는 사람들은 자주 등장하고, 관객은 그들을 보며 현실을 떠올립니다. 렉터는 그런 현실에 대한 분노를 '대신 실행해 주는 존재'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위험한 착각입니다. 그가 하는 일은 정의가 아니라 폭력이고, 처벌이 아니라 소유입니다. 그럼에도 관객은 순간적으로 속이 시원해질 수 있습니다. 이런 감정이 도덕의 상대성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집니다. '정말 법과 제도가 항상 옳은가'라는 질문이 생기면, 렉터는 더 설득력 있어 보이기 시작합니다. 지능과 세련됨에 대한 동경도 빼기 어렵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세련됨은 일종의 권력입니다. 좋은 말투, 좋은 취향, 좋은 옷, 좋은 지식. 렉터는 그 권력을 가장 완벽하게 쥔 인물로 그려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렉터가 무서워도, 그의 세련됨 자체는 흉내 내고 싶어 합니다. 이 동경은 결국 '겉모습이 곧 신뢰'라는 착시로 이어지기 쉬운데, 현실에서도 매력이나 세련됨이 신뢰를 부르는 편향, 즉 후광효과가 문제를 만들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Psychopaths Are More Attractive, Study Warns]. 마지막으로 영화와 문학의 윤리적 책임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악을 표현할 때의 미적 거리두기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관객이 악을 '관찰'하는 것과 악에 '동조'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렉터 같은 작품은 그 경계를 일부러 흐립니다. 아름다움과 도덕 사이의 긴장을 극대화해서, 관객이 스스로 판단하도록 내버려 둡니다. 예술의 자유는 여기서 힘을 얻지만, 동시에 사회적 책임의 질문도 따라옵니다. 작품이 악을 너무 멋있게 만들면, 악이 가진 현실의 피해가 흐려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관객의 도덕적 주체성 회복이 중요해집니다. 렉터를 좋아해도 됩니다. 다만 '왜 좋아하는지'를 끝까지 따라가야 합니다. 허구 속에서 악을 바라보는 안전지대가 있다는 설명은 설득력 있지만, 그 안전지대가 습관이 되면 감각은 무뎌질 수 있습니다. 렉터 현상은 바로 그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아름다움은 강력하고, 세련됨은 쉽게 사람을 속이며, 도덕은 생각보다 자주 흔들린다는 사실 말입니다.

렉터는 허구입니다. 그런데 그 허구가 오래 살아남는 이유는, 현실의 어떤 부분을 너무 정확히 닮았기 때문입니다. 렉터는 사람을 먹는 살인마라는 극단으로 서 있지만, 그 극단은 결국 '사람이 사람을 다루는 방식'을 과장해 보여 주는 거울이 됩니다. 그래서 렉터를 끝까지 따라가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사건의 결말이 아니라 관객 자신의 얼굴입니다. 렉터가 허구인가 현실인가를 먼저 정리해 보겠습니다. 임상적 관점에서 렉터를 딱 하나의 진단으로 고정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심리검사나 진단은 실제 면담과 기록, 맥락이 필요하고, 작품 속 렉터는 그 조건을 충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렉터가 보이는 차가운 공감 결핍, 조종성, 죄책감의 부재 같은 특징은 대중이 떠올리는 ‘사이코패스’ 이미지와 겹치는 지점이 많습니다[^Psychopathy Checklist Revised (PCLR)]. 동시에 과학적 관점에서는 렉터 같은 인물이 너무 높은 지능과 사회적 기능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설정이 과장일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옵니다[^Hannibal Lecter: fact or fiction?]. 그렇다고 렉터가 '현실과 무관한 판타지'라고만 보기도 어렵습니다. 렉터의 심리적 현실성은 살인 기술이 아니라 인간관계 기술에서 나옵니다. 사람의 욕망을 읽고, 말투와 침묵으로 상대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상대가 스스로 움직였다고 믿게 만드는 방식은 현실에서도 충분히 관찰되는 조작과 설득의 형태를 닮아 있습니다[^Moral disengagement]. 그래서 렉터는 실제 존재라기보다 비유입니다. 그는 '악의 완성형'이 아니라, 문명과 욕망이 부딪힐 때 사람 안에서 생기는 균열을 한 몸에 모아 놓은 상징입니다[^Relativism]. 여기까지 오면 '모든 인간 안의 렉터'라는 말이 왜 불편한지 이해됩니다. 이 말은 '우리도 살인마가 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더 현실적으로는, 우리도 누군가를 도구로 볼 수 있고, 우리도 필요하면 합리화할 수 있고, 우리도 품위라는 포장지로 욕망을 감출 수 있다는 뜻입니다. 도덕적 이탈이 늘 거대한 범죄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예외와 작은 자기기만에서 자란다는 설명은 오래 반복되어 왔습니다[^Moral Disengagement]. 렉터는 그 작은 예외의 끝에 서 있는 캐릭터입니다. 그래서 그를 보면 '나는 아니야'라고 말하면서도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렉터와의 대면이 의미하는 것은 결국 자기 욕망과의 직면입니다. 클라리스 스탈링이 렉터 앞에서 자기 기억을 꺼내 놓는 장면이 무서운 이유는, 그 장면이 관객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지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무엇을 원하나요, 그리고 그걸 위해 무엇을 숨기나요.' 이 질문은 도덕의 기초를 다시 점검하게 만듭니다. 도덕은 강한 사람의 장식이 아니라, 약한 순간에도 지킬 수 있는지로 시험받는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입니다[^Moral Relativism].

지능과 도덕의 관계도 여기서 다시 보입니다. 렉터는 지능이 도덕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불쾌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심지어 지능은 악을 더 효율적이고 더 설득력 있게 만들 수 있습니다. 실제 연구에서도 지능과 도덕 발달, 혹은 도덕적 판단 사이의 관계는 단순한 직선이 아니라 복잡한 주제로 다뤄집니다[^Intelligence and Moral Development: A Critical Historical Review and Future Directions]. 그래서 렉터는 '똑똑한 사람을 믿어도 된다'는 편한 믿음을 깨뜨립니다. 대신 '똑똑한 사람일수록 더 조심해야 할 수 있다'는 불편한 질문을 남깁니다. 개인과 시스템의 관계도 재정의됩니다. 렉터 이야기에서 시스템은 종종 무력해 보이고, 개인은 결정적인 순간에 모든 걸 짊어집니다. 이때 관객은 제도에 대한 불신과 개인 영웅주의 사이를 오가게 됩니다. 그런데 렉터가 보여주는 진짜 문제는 '시스템이 약해서'가 아니라 '시스템이 인간을 전제로 만들어졌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시스템은 절차를 다루지만, 렉터는 사람의 습관과 욕망을 다룹니다. 절차는 느리고, 욕망은 빠릅니다. 그래서 시스템은 계속 뒤처집니다. 미의식과 악의 관계에 대한 성찰로 넘어가면, 질문은 더 뼈아파집니다. 아름다움이 모든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극도의 세련됨이 극도의 악을 은폐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예술과 도덕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오랫동안 도덕주의와 자율주의 사이에서 긴장해 왔고, 어느 쪽도 쉽게 승리하지 못했다는 정리가 있습니다[^Ethical Criticism of Art]. 렉터는 그 긴장을 이야기 속에서 실험합니다. 끔찍한 행위를 너무 아름다운 구도로 찍고, 너무 고급스러운 말투로 설명하고, 너무 차분한 음악으로 감싸 버립니다. 그러면 관객은 순간적으로 판단을 늦춥니다. 그 늦춤이 바로 악의 은폐가 됩니다. 그래서 관객으로서의 도덕적 책임이 생깁니다. 렉터를 보며 쾌감을 느끼는 순간, 그 쾌감이 무엇에서 왔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단순히 '영화가 잘 만들었다'로 끝내면 편하지만, 그 편함이 반복되면 감각은 무뎌질 수 있습니다. 도덕적 불편함을 끝까지 느끼는 것 자체가, 관객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어일 수 있습니다. 무서움과 아름다움을 종합하면 더 분명해집니다. 렉터는 우리를 무섭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그는 폭력보다 먼저 '말'과 '취향'으로 사람을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렉터는 우리를 매료시킵니다. 세련됨, 통제감, 정교한 감각, 그리고 문명적 포장이라는 요소가 공포를 아름다움과 붙여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감정의 공존은 단순한 모순이 아니라, 예술과 도덕이 영원히 긴장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마지막 질문들을 남기고 싶습니다. 렉터가 옳은가라는 질문에 답은 분명히 '아니다'입니다. 하지만 '왜 어떤 순간에는 옳아 보이는가'라는 질문은 끝까지 남습니다. 우리는 모두 잠재적 렉터인가라는 질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인의 의미가 아니라, 욕망을 합리화하고 타인을 도구로 보는 가능성의 의미에서라면, 누구에게나 그 씨앗은 있을 수 있습니다[^Moral disengagement]. 렉터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기술이 아니라 경고입니다. 세련됨은 선함의 증거가 아니고, 지능은 도덕의 보증이 아니며, 아름다움은 언제든 악의 마스크가 될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Hannibal Lecter: fact or fiction?]. 결국 한니발 렉터의 우주는 '악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도덕을 말하면서도 욕망을 숨기고, 욕망을 숨기면서도 아름다움을 원합니다. 렉터는 그 모순을 가장 극단으로 밀어붙여, 우리가 평소에는 못 본 척하던 부분을 눈앞에 놓습니다. 그래서 렉터는 끝내 잡히지 않아도 우리에게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가 남긴 가장 무서운 흔적은 피가 아니라 질문입니다. '당신의 욕망은 무엇입니까?'[^Transportation The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