닌자 퇴근술
현대에도 여전히 닌자 퇴근술은 중요합니다.
실은 요즘은 퇴근할 때 의도적으로 닌자 퇴근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주변 사람들 눈치를 거의 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까지 할 생각이었던 일을 끝냈고 또 계약서에 명시된 출퇴근 시각이 되면 퇴근할 뿐입니다. 만약 오늘 안에 할 생각이었던 일을 오늘 안에 끝내지 못했다면 원인을 알아보기는 해야 합니다. 일의 난이도를 저평가 한 나머지 실제로 해 보니 예상보다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실은 일을 그럭저럭 짧지 않은 기간 동안 했는데도 여전히 일의 난이도를 올바르게 평가하는데 실패할 때가 있고 종종 일을 반드시 끝내야 하는 마감이 겹치면 난이도 평가 실패는 바로 초과 근무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우선순위가 더 높은 일이 끼어들었다면 이는 어쩔 수 없는 상황입니다. 우선순위가 높아 먼저 수행하기는 해야 하지만 이 일의 존재를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 새로운 일이 없는 상황을 가정하고 평가한 업무 난이도와 예상 시간은 새로운 일이 끼어들면서 이전에 예측한 평가를 쓸모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없던 일이 생겼다면 그 새로운 일을 포함해 전체 일을 끝마치는데는 물리적으로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물리적으로 더 많은 시간은 곧 물리적으로 더 긴 근무일 수와 같은 의미입니다.
하지만 살아 오면서 종종 이 간단한 물리 법칙을 무시하거나 믿고 싶어하지 않거나 업무 난이도 평가 실패를 그리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아주 많이 만나 왔습니다. 중간에 일을 얼마나 끼워 넣더라도 그 일을 포함한 전체 목표에 대한 일정은 여전히 유지 되어야 하며 처음 예측한 일정을 맞추지 못하면 이를 개인의 능력 부족이나 성실하지 못한 증거로 평가하려는 시도가 종종 일어났습니다. 불행하게도 그런 분들은 주로 평가자 위치에 있었고 우리들은 피 평가자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매년 물가 상승률에 아슬아슬하게 근접하는 급여 인상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이런 시각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정에 없이 끼어든 일을 포함해 원래 계획한 일까지 예정된 시간 안에 끝마치기 위해서는 초과근무를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시대나 지금이나 초과근무에 제대로 비용을 지불하는 회사는 많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일이 많고 그 많은 일을 제 시간에 해 내기 위해 필요한 초과근무가 있다면 종종 일이 없는 상태에서도 초과근무를 해야 하는 상황도 있습니다. 한 프로젝트에서는 오픈 베타 서비스가 가까워졌을 때 테스트 할 인력을 확보하지 못해 평일에는 개발팀이 개발을 하고 주말에는 같은 개발팀이 테스트를 하도록 했습니다. 요구 받은 테스트 중 하나는 모든 아이템이 인게임에 똑바로 나오는지 확인하는 일이었습니다. 아이템 이름이 제대로 들어가 있는지, 아이콘은 나오는지, 바닥에 떨어뜨릴 때 제대로 된 메시가 나오는지 따위를 살펴보는 일이었는데 오래 전에 개발한 MMO 게임 답게 게임에는 엄청나게 많은 종류의 아이템이 있었고 이들을 하나 하나 직접 인게임에서 확인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작업의 거의 대부분을 자동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자동화를 그리 신뢰하지 않았던 의사결정자들은 주중에 개발하고 주말에 테스터가 된 사람들 각각에게 아이템을 몇 백 개 씩 할당해 버립니다.
이미 자동화 할 수 있는 일을 사람들이 하나하나 확인해야 하고 또 아이템 중에는 개발용으로 사용하는 아이템들이 섞여 있어 아이콘이나 메시가 없거나 이름이 올바르지 않은 상태가 결함인지 아닌지 여부를 직접 판단할 수 없는 사람들마저 수동 아이템 테스트에 동원되었기 때문에 테스트 과정은 아주 고통스러웠고 또 테스트에 집중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누군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면 그 상태가 결함인지 아니면 테스트 아이템이 테스트 항목에 섞여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인지 확인해주기를 반복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아이템을 불러 오는 커맨드를 입력하는 과정을 자동화하고 아이템을 불러온 다음 스크린샷을 자동으로 찍도록 한 다음 밥 먹고 돌아오는 사이에 실행해 놓았습니다.
밥 먹고 돌아와 스크린샷이 모두 잘 찍힌 상태인지 확인한 다음 빠르게 스크린샷을 넘겨 가며 이름, 아이콘, 메시가 올바른 상태인지 확인해 밥 먹고 자리에 돌아온 지 30분을 넘기기 전에 테스트를 마쳤습니다. 하지만 집에 갈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같은 방법을 사용해 다른 사람들의 작업을 도울 수도 없었습니다. 명령 받은 방법과 다른 방법을 통해 수행했다고 보고하면 분명 좋은 소리를 들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같은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면 일요일 오후에 그 많은 사람들이 아무 댓가 없이 자기 돈 들여 출근해 자기 돈 들여 밥을 사 먹고 앉아있지도 않았을 겁니다.
의사결정자 눈에 띄지 않게 같은 팀에 몇 사람에게 할당된 확인 물량을 같은 방법으로 처리해 다음 한 시간 사이에 팀에서 확인할 물량 전체를 처리했습니다. 그 다음 딱히 할 일이 없지만 모두가 바쁘게 아이템을 불러오는 명령어를 타이핑하고 인벤토리를 클릭해 아이템 정보를 확인하느라 바쁘게 키보드와 마우스를 조작하는 분위기 속에 아예 다른 일을 하기 뭣해서 모니터를 멍하니 바라보며 일요일 오후를 보내다가 문득 이렇게 아무 일도 안 하고 앉아있다가는 휴일 오후를 회사에서 무의미하게 날리고 또 바로 다음날 부터 지친 몸을 이끌고 출근해 똑같은 초과근무를 반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애초에 이런 테스트를 수행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도 짜증 나는데 그걸 주말에 쉬지도 못하고 멍청한 방법으로 수행하기를 강요 받을 뿐 아니라 더 빠른 방법을 사용해 완료했다고 보고했다가는 명령을 올바르게 수행하지 않았다고 오히려 처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갑자기 확 짜증이 났습니다.
의사결정자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도망가기로 합니다. 주말에는 건물 정문이 잠겨 있었기 때문에 짐을 챙겨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건물을 빙 돌아 후문을 통해 나가고 있었는데 순간 담배터에 있던 의사결정자와 마주쳤고 속으로는 ‘아 망했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목례를 합니다. ‘다 했어?’라길래 ‘네. 저희 팀 모두 완료했습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고 그가 더 이상 뭔가 말하기 전에 최대한 빨리 걸어 그 앞을 지나쳤습니다. 이 사건이 영향을 줬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결국 그 다음 번 평가와 연봉협상 결과는 전경련에서 발표하는 티배깅에 가까운 물가인상률을 따라잡지도 못하는 수준이었고 이곳에서 더 이상 일했다가는 일을 할수록 점점 더 가난해지는 상황을 피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이 사건과 상황의 근본적인 문제는 누군가 제가 집에 가는 모습을 썩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이런 사람은 생각보다 많으며 업계 구석구석에 도사리고 있어 언제 마주칠 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저평가된 연봉은 적절한 이직을 통해 극복할 수 있지만 어딜 가든 계약서에 명시된 시각에 집에 가는 사람들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는 이상 이들을 피할 방법은 없습니다. 또 이런 사람들이 도사리고 있는 곳일 수록 제대로 된 노동시간 관리 체계를 갖추지 않은 곳이 많아 아침이 훨씬 지난 느즈막한 시간에 출근해 밤 늦게 까지 회사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실제로 수행하는 업무에 비해 높은 평가를 받는 반면 계약서에 명시된 올바른 시간에 출근해 올바른 시간에 퇴근하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나쁜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 정신이 망가지지 않고 버티기 위한 현실적인 방법은 제 시간에 집에 가되 제대로 된 노동시간 관리가 안 된다는 헛점을 노려 집에 가는 모습을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는 방법, 즉 닌자 퇴근 기술을 익히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이런 반복되는 불합리한 회사 생활 속에 갈고 닦은 닌자 퇴근 방법을 소개하겠습니다.
먼저 ‘닌자 퇴근’을 정의하면 회사와 맺은 계약에 근거해 약속한 시각에 출근하고 약속한 시각에 퇴근하며 한 해에 부여된 휴가를 사용하고 주말과 공휴일에는 출근하지 않으며 이 범위 안에서 출근해 있는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 업무를 수행하고 쉬는 동안에는 일할 때를 대비해 높은 생산성을 유지함과 동시에 제가 퇴근하는 모습을 탐탁찮게 생각하는 무리들에 대항해 퇴근하는 모습이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도록 행동하는 것입니다. 혹은 누군가가 제 퇴근하는 순간을 관측할 수는 있지만 그 사람이 저를 평가하는 의사결정자가 아니도록 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묶어 닌자 퇴근이라고 정의하겠습니다. 그러면 닌자 퇴근 하는 방법을 소개합니다.
첫째. 닌자 퇴근, 혹은 퇴근 닌자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출근한 상태와 퇴근한 상태를 자리만 보고 구분할 수 없게 해야 합니다. 쓸 데 없이 가방을 들면 안됩니다. 출퇴근 할 때 무지성으로 들고 다니는 가방 안에 들어있는 물건을 하나하나 철저히 평가해 그 물건이 정말로 출퇴근에 필요한지 판단해 보면 물건의 대부분은 실제로 출퇴근에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겁니다. 하지만 평생의 습관으로 가방 없이는 도저히 불안해서 출퇴근 할 수 없다면 자리에 디코이 가방을 둬 제가 가방을 들고 퇴근한 상태와 그렇지 않은 상태를 쉽게 구분할 수 없도록 하고 가끔 디코이 가방과 진짜 가방을 바꿔 들어 회사에 같은 가방이 항상 걸려 있다는 사실을 쉽게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또한 디코이에는 가방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지지난 세대 아이폰을 자리에 뒤집어 두고 흡연자라면 사용하지 않는 흡연 용품을 자리에 두면 도움이 됩니다. 만약 전자담배 사용자라면 사용하지 않는 담배갑과 라이터를 자리에 두면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와 퇴근한 상태를 구분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리고 자리를 떠날 때 절대 의자를 책상 아래로 밀어 넣어 정리하면 안됩니다. 항상 의자를 약간 뒤로 뺀 다음 그대로 자리를 떠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만약 이런 상태가 마음에 걸린다면 반대로 행동하면 됩니다. 잠깐이라도 자리를 떠날 때 무조건 의자를 잘 정리해 주변 사람들을 헛갈리게 만드는 것이 핵심입니다.
타이머가 달린 물건은 항상 퇴근 전에 타이머를 작동 시켜 사람이 있는 것처럼 연출합니다. 타이머가 달린 선풍기는 자리에 제가 없더라도 계속해서 작동하며 선풍기를 끄지 않고 잠깐 자리를 떠난 것처럼 보이게 만들 수 있으면서도 밤새도록 기계가 작동하는 문제를 완화할 수 있습니다. 또 먹다 만 음료를 자리에 두고 퇴근하면 도움이 되는데 웬만한 사람들이 먹다 만 음료를 자리에 두고 퇴근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웬만하면 뚜껑이 있는 용기에 담긴 음료여야 합니다. 이유는 저도 알고 싶지 않았습니다.
둘째. 회사를 떠나는 모습과 잠깐 화장실에 가는 모습이 최대한 비슷해야 합니다. 회사에서 신는 신발과 출퇴근 할 때 신는 신발을 구분하면 퇴근을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노출하게 됩니다. 가령 평소에는 사무실에서 슬리퍼를 신고 다니다가 출퇴근 때만 신발을 갈아 신는다면 슬리퍼를 신고 있지 않은 내가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을 때 그냥 나 지금 퇴근한다고 건물 전체에 외치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만약 자차로 출퇴근 한다면 회사에서 신는 신발을 신은 채로 자동차까지 이동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또한 겉옷을 포기하면 큰 도움이 됩니다. 요즘 세상에 적당한 후드티 한 벌이면 겨울에도 실내외를 모두 커버할 수 있습니다. 누구와 마주치더라도 내가 외투를 입은 건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밖에서 너무 춥거나 회사에서 너무 덥다면 후드티 안에 다른 옷을 겹쳐 입었다가 이를 조절하는 방법을 적극 추천합니다. 어떤 상황이라도 항상 겉옷이 똑같은 상태를 유지해 퇴근할 때에도 그냥 후드티 하나만 덜렁 걸치고 있어 잠깐 바람 쐬러 나가는 모양과 구분할 수 없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헤드폰을 포기하세요. 요즘 세상에는 이어팟 형태의 음향기기도 그럭저럭 노이즈캔슬링이 잘 되며 외부 소음을 그럭저럭 잘 막아 줍니다. 그럭저럭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아무리 그래도 헤드폰만큼 잘 동작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출퇴근 할 때 눈에 띄는 헤드폰을 써서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퇴근 의사를 당당히 밝혀서는 안됩니다. 이어팟 형태의 음향기기라면 회사를 완전히 빠져나간 다음 주머니에서 꺼내 귀에 착용할 수 있습니다. 물론 위에서 설명한 가방과 마찬가지로 절대 헤드폰을 포기할 수 없다면 반대로 헤드폰을 모든 시간에 항상 신체의 일부처럼 목에 걸어 사람들을 헛갈리게 하면 도움이 됩니다.
셋째. 회사 컴퓨터 바탕화면을 업무 중인 화면의 스크린샷을 찍어 사용합니다. 한때는 의도적으로 보안 규칙을 무시하고 윈도우를 잠그지 않은 상태로 자리를 떠나 내 빈 자리를 보는 사람들에게 내가 잠깐 자리를 비운 건지 아니면 아예 퇴근한 건지 헛갈리게 하고 또 도메인 정책으로 강제 적용된 일정 시간 동안 기계를 사용하지 않으면 잠기는 설정을 무시하기 위해 일정 시간마다 마우스 커서를 1픽셀 씩 움직여 잠금 정책을 무력화 하곤 했지만 이는 실제 보안 사고를 일으킬 수 있어 안전한 방법이 아닙니다. 대신 바탕화면과 잠금화면을 업무 중인 화면 전체 스크린샷을 찍어 설정해 두면 기계가 잠긴 상태에서도 언뜻 봐서는 잠긴 상태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어 내 퇴근 여부를 모호하게 만드는데 도움이 됩니다.
넷째. 가능한 출입구와 가까운 바깥쪽 자리를 선택합니다. 종종 회사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 안쪽 자리가 더 좋은 것처럼 묘사되고 또 조직에서 더 상위 직책인 사람들이 더 안쪽에 자리를 잡곤 하는데 자리가 더 안쪽에 있다는 의미는 제가 퇴근할 때 더 많은 사람들과 마주쳐야만 한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자리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면 반드시 자리를 출입구와 더 가까운 최대한 바깥 자리로 정합니다. 바깥 자리는 같은 공간을 사용하는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모니터가 노출 되어 피곤하게 느낄 수도 있지만 애초에 업무 중인 모니터를 보고 뭐라 할 사람도 없고 제 스스로도 업무 중인 모니터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서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 업무 시간에 더 집중해서 일할 수 있는 장점도 생깁니다. 게다가 바깥쪽 자리는 이런 이유로 썩 선호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선호하지 않는 자리를 제가 선택해 살신성인 하는 이미지를 만들 수 있습니다.
다섯째. 가능하면 책상 위에 물건을 높이 쌓아 맞은편 자리에 앉은 사람이 제가 자리에 있는지 여부를 바로 파악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책상에 올려놓을 만한 책장을 주문하고 어차피 회사에서는 읽지도 않을 책을 쌓아 올려 맞은편 자리의 시야를 완전히 가리면 좋습니다. 맞은편 자리에서 제가 자리에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자리에서 일어서거나 파티션을 돌아 제 자리까지 와 봐야만 하도록 만드는 것이 가장 나은 상태입니다. 이렇게 해 두면 맞은편에 있는 사람 뿐 아니라 맞은편 파티션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고개를 돌릴 때 높이 쌓아 올린 책장과 책을 보게 될 뿐 제 머리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애초에 눈에 잘 띄지 않는 사람의 존재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게 됩니다.
여섯째. 퇴근 직후 일정 시간 동안 회사 슬랙에 기민하게 대응해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업무 시간 중 슬랙에 기민하게 대응하는 것은 상황에 따라서는 당연한 일입니다. 물론 이 기민함이 지나치면 집중할 시간을 빼앗겨 생산성과 작업물의 완성도를 떨어뜨릴 수 있으니 기민한 상태가 좋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퇴근 직후 일정 시간 동안 회사 슬랙에 기민하게 대응하면 사람들이 제가 화장실에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어차피 집에 가는 지하철 안에서 마땅히 할 일이 없어 아까 본 카톡 채팅방을 보고 또 보고 짧은 영상이나 좀 볼 거라면 차라리 그 시간에 회사 슬랙에 기민하게 반응하면 다른 사람들이 내가 지금 자리에는 없지만 회사 안 어딘가에는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데 도움이 됩니다.
일곱째. 건물이 너무 높지 않다면 계단을 이용하면 좋습니다. 계단 사용은 건강에도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애초에 계단으로 오가는 사람이 극히 드물어 이동 중 다른 사람과 마주칠 일이 없다는 큰 장점이 있습니다. 다만 계단을 내려갈 때는 관절을 최대한 보호하기 위해 똑바로 걸어 내려가지 말고 조심스럽게 옆걸음으로 움직이는 쪽을 추천합니다. 어쩔 수 없이 엘리베이터를 타야 한다면 아무 이유 없이 랩탑을 펼쳐 들어 퇴근이 아니라 다른 층에 가는 것처럼 행동해 사람들을 헛갈리게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15층 정도는 계단으로 다니기에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종종 허술하게 설계된 건물은 비상계단이 보안 출입구 안쪽에 있을 수 있는데 보안 관점에서는 정신 나간 설계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 이런 구조는 건물 설계자가 닌자 퇴근을 하라고 만든 구조입니다. 건물 설계자에게 감사하며 보안 출입구 대신 비상계단으로 나가 출입 기록을 만들지 않고 회사에서 사라질 수 있는 기회입니다. 또 엘리베이터를 사용한다면 가능한 화물 엘리베이터를 활용합니다. 회사원은 물건이나 마찬가지이므로 본인의 사회적 위치에 어울리는 화물 엘리베이터 사용을 통해 자신을 ‘사람’인 높은 분들로부터 보호할 수 있습니다.
여덟째. 동료들과 저녁 식사를 했을 수 있습니다. 식사 후 회사로 돌아가지 말고 그대로 퇴근합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저녁 먹고 퇴근할 생각이었을 수 있지만 이들은 아마 회사에 있는 가방이나 자동차 키 따위를 가지러 가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시 회사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회사로 돌아가는 순간 지금까지 이야기한 온갖 문제가 일어날 수 있어 위험합니다. 소지품에 스마트폰, 신용카드만 있다면 그대로 퇴근할 수 있습니다. 혹시 가방이 회사에 있나요? 제가 분명 앞에서 쓸 데 없이 가방을 들고 다니지 말라고 말했을 텐데요. 게다가 회사 신발과 출퇴근 신발을 구분하지 말라고도 했을 텐데요. 그럼 회사 밖에서 언제든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퇴근할 수 있습니다.
아홉째. 퇴근하며 절대 퇴근한다고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 쓰면 안됩니다. 저를 팔로잉 하는 계정들 중 일부가 단순 스팸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비공개 계정이라도 절대 안심할 수 없습니다. 저를 팔로잉 하는 모든 계정 중 신원이 확실한 계정이 얼마나 되고 또 그렇지 않은 계정이 얼마나 되나요? 확신할 수 없는 계정이 있다면 그 계정을 통해 내 타임라인을 들여다 보고 있는 누군가가 바로 내가 아무 할 일도 없지만 자리에 앉아 멍한 눈으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기를 원하는 바로 그 사람일 수 있습니다. 만약 너무나도 퇴근하는 내 기분을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 표현하고 싶다면 방법이 없지는 않습니다. 따라해 보세요. ‘야~옹~' 자. 이제 이대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 기쁨을 표현하세요.
열번째. 오늘 업무를 완료했다면 완료 메일은 내일 아침에 보내세요. 지라 태스크는 내일 아침에 완료하세요. 이 업무는 지금 끝난 것이 아니라 내일 아침에 끝나는 겁니다. 업무가 끝나면 이를 보고하고 퇴근할 수 있지만 사람에 따라 이 업무를 전달 받아 검토한 다음 피드백을 보내고 이 피드백이 반영된 다음에야 업무가 완료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는데 이는 당연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업무 완료를 보고와 같은 날 일어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어 피곤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일과 시간 중 너무 늦은 시점에 업무를 마무리했다면 오늘 보고하지 말고 다음 날 혹은 다음 주 월요일에 보고해 같은 날 업무 후처리가 모두 완료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안전하게 퇴근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현대에 가까워질 수록 닌자 퇴근을 해야만 하는 이유는 점점 줄어들고 있지만 닌자 퇴근을 게을리 해서는 안되는 이유는 앞에서 설명한 바람직하지 않은 사람이 언제 제 평가 권한을 가진 채 나타나 제 퇴근을 방해하게 될 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절대 바람직하지 않으며 노동권을 침해 받는 상황 속에서도 멀쩡히 회사 생활을 계속하고 함부로 평가자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꽤 오랜 시간 동안 닌자 퇴근 방법을 연습하고 또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여기까지 따라오신 분들이 계시다면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퇴근하는 다른 방법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다른 방법이 있으면 공유해 모두의 닌자 퇴근 스킬을 갈고 닦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