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스탭롤의 의미

게임 스탭롤의 의미

한참 전에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누군가 오래된 한국 게임을 대상으로 스탭롤을 정리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게임을 개발하는 모두가 비슷한 신세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한 프로젝트가 런칭하는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며 그러는 사이에 아주 많은 사람들이 프로젝트를 거쳐 가는데 이들 중 대부분은 프로젝트가 런칭하는 그 순간에 프로젝트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또 한 프로젝트가 런칭해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 서비스 되곤 하기 때문에 어떤 기간에 그 프로젝트에서 일하던 사람이 또 다른 기간에는 더 이상 그 프로젝트에서 일하고 있지 않을 수 있고 또 프로젝트에 따라 스탭롤을 게임에 공개하는 곳도 있고 또 그렇지 않은 곳도 있으며 스탭롤에 표시되는 이름은 사실 상당히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의한 산물인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게임 스탭롤을 수집해 정리하려는 의도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게임 스탭롤을 수집하는 행동은 게임 개발에 참여한 여러 사람들 중 우연히 게임이 런칭할 때 프로젝트에 소속되어 있었던 사람들 중에서 회사나 프로젝트 주요 구성원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또 필요 이상으로 미움 받지 않은 사람들의 목록을 수집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기는 어려울 거라고 예상합니다.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며 게임 업계에서 스탭롤이 영화 업계처럼 회사의 지원 부서 구성원이나 프로젝트 진행 중 태어난 아이들 이름을 따로 기입해 주는 등의 낭만적인 측면만이 있지는 않음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한 프로젝트에서 꽤 긴 기간 동안 디렉터의 손발이 되어 일하는 팀에서 한 명 뿐인 기획자이자 주니어 기획자로 일한 적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주니어 기획자는 자신의 의지로 게임 개발에 기여하기 보다는 주로 디렉터의 명령을 팀의 각 부서가 실행할 작은 업무로 나눠 전달하고 이들을 조립해 완성된 플레이를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좋게 말하면 일종의 PM 업무를 함께 수행한다고도 할 수 있고 나쁘게 말하면 뇌를 비우고 거의 디렉터의 손발로써 행동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게임을 런칭하고 시간이 한참 흐른 어느 날 한 주에 한 번 컨텐츠 업데이트를 계속하다가 더 이상 지금 같은 노동강도에 스스로를 노출시키다가는 문제가 생길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들었습니다. 프로젝트 런칭에 기여했고 이것 저것 배운 것도 많았지만 이 곳에서 이런 상태로 더 일하다가는 이미 문제가 생긴 신체 뿐 아니라 나머지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직을 준비했고 어느 날 그만 두겠다고 선언합니다.

이 즈음에 게임에 스탭롤을 넣을 계획이 진행 중이었습니다. 제가 그만 둘 무렵에 그만 두신 다른 분이 계셨는데 당시 팀이 겪던 정신을 무너뜨릴 것 같은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회사와 퇴사 면담에서 털어 놓으셨던 모양입니다. 당시 저는 퇴사 면담에서 뭘 말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그냥 너무 힘들어서 그만 둔다고 하도 면담을 마무리했는데 몇 년이 지난 다음에 알고 보니 회사는 다른 면담에 나온 여러 가지 문제로 팀에 개입했던 모양이고 당시 제 상사는 그런 말을 제가 했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결국 퇴사 후 게임을 다시는 실행해 보지 않았는데 한참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여전히 그 프로젝트에서 일하던 누군가가 제게 말하길 방학 때 파트타임으로 일한 사람들 이름 하나하나까지 다 챙겼지만 제 이름은 빠졌고 이것 때문에 몇몇 사람들이 불편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때 상사의 행동으로 미루어 그런 행동을 해도 별로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고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 정도인 사람이었겠구나 싶었습니다.

한번은 프로덕션 단계에 접어들어 한창 만들고 있는 모바일 게임 프로젝트에 참여했는데 감사하게도 이전에 함께 일했던 분들이 많이 계셔서 첫 출근인데도 어째 익숙한 기묘한 느낌이 드는 곳이었습니다. 첫 날 출근하며 복도에서 저는 그 분을 알지만 그 분은 저를 모르는 나름 업계에서 알려진 분을 스쳐 지나갔는데 알고 보니 그 분은 제가 일하기 시작한 그 프로젝트에 소속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뭔가의 이유로 제가 입사하는 그 날 퇴사하는 길이었고 심지어 출근하다가 마주친 그 때 퇴사 절차를 마무리하고 회사를 나서는 길이었습니다.

그 날 출근해 행정절차를 밟고 개발환경을 설정하고 문서를 읽다가 오후 즈음에 업무를 하나 받았습니다. 출근 첫 날 본격적인 일을 받는 것도 묘하다 싶었는데 그 일은 이미 작성되어 있던 스탭롤을 수정하는 것이었고 수정사항은 아까 출근하며 마주쳤던 바로 그 분의 이름을 스탭롤에서 빼는 것이었습니다. 스탭롤은 언리얼 위젯 블루프린트로 만들어져 있었고 세로로 아주 긴 위젯 블루프린트를 아래에서 위로 스크롤 하는 식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위젯 블루프린트를 열어 스크롤 해 내려가 그 분의 이름을 찾은 다음 구성요소를 삭제하고 그 분 이름 아래에 있던 다른 이름이 그 섹션 맨 위에 올라오게 고쳤습니다. 사실 이 날은 출근 첫 날이라 이 작업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또 어떤 사건에 의한 결과인지는 훨씬 나중에서야 알게 됩니다. 나중에 그 분이 개발했던 시스템을 유지보수 하면서 스탭롤에 그 분의 이름이 빠진 일이 과연 정당한가 하는 의문을 가져 보게 되었습니다.

어떤 프로젝트는 프로젝트를 킥오프 한 다음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에야 런칭하곤 하는데 그러는 사이에 이 프로젝트에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관여했을 수 있습니다. 가령 10년 동안 개발해 런칭한 프로젝트가 있다고 해 봅시다. 이 프로젝트는 10년 전에 시작되었지만 중간에 여러 어려움을 겪으며 사람들이 떠나가고 그 자리를 다시 새로운 사람으로 채우기를 반복하며 세월이 흐르게 됩니다. 그리고 런칭할 때가 되어 스탭롤을 만들려고 보면 이미 프로젝트를 처음 시작할 때 있었던 사람들 거의 전부가 이미 회사를 떠났고 지금 남아 있는 사람들은 비교적 최근에 프로젝트에 참여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확실히스탭롤에 이름이 올라갈 수 있겠지만 스탭롤에 나타난 사람들은 지난 10년의 세월에 걸쳐 이 프로젝트르 스쳐 지나간 사람들의 10% 남짓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나열된 스탭롤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분명 프로젝트에 기여했지만 이름을 올리지 못한 나머지 90%의 사람들은 이 프로젝트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을까요. 또 이 프로젝트는 그런 대부분의 사람들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요. 이미 회사에서 급여를 지급했고 입사와 퇴사 때 비밀유지 관련 서류에 서명했으니 그걸로 끝난 걸까요?

이런 생각 끝에 게임 스탭롤을 수집하는 시도는 의미가 없지 않지만 또 큰 의미가 있지도 않다고 생각합니다. 스탭롤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프로젝트가 런칭할 때 운 좋게 그 자리에 있었거나 회사나 프로젝트 리더십과 아무런 마찰을 겪지 않고 원만한 회사 생활을 한 사람들의 기록일 수 있습니다. 이들을 기록하는 것에 의미가 없지는 않지만 이런 기록일 수 있음을 인식할 필요는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