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 없이 도는 균열
전에 디아블로 이모탈의 재화구조 이야기를 하면서 균열을 돌 때 필요한 일반문장, 전설문장, 영원의 전설문장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균열이라는 던전이 있고 던전을 돌 때 이 문장들을 추가하면 균열에 속성이 생기고 또 보상이 달라집니다. 특히 전설문장과 영원의 전설문장은 보상에 전설 아이템을 추가해 줍니다. 오케이. 문장을 추가하면 던전에서 더 좋은 보상이 나온다. 그리고 문장은 게임 내 여러 경로를 통해 얻을 수 있으며 특히 영원의 전설문장은 상점의 독립 공간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규칙을 이해한 것 같습니다. 어. 그러면 문장 추가 없이 도는 균열에는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요?
어차피 전설을 얻지도 못할 거면 균열을 돌 의미가 없는 것 아닌지, 또 그렇다면 문장을 균열에 추가해서 입장하도록 하는 대신 문장 자체를 균열 입장권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겁니다. 그렇게 설계해도 됩니다. 하지만 이들은 그렇게 설계하지 않았는데 문장 없이 균열을 돌 때는 보상으로 경험치와 꺼져 가는 잉걸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 여전히 확률이 낮기는 하지만 희귀 또는 전설 아이템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반대로 생각할 수 있는데 ‘횟수가 충분하면 문장이 없어도 되는 것 아닌가?’ 하는 겁니다. 맞습니다. 균열 던전에서 문장은 표면적으로 전설 드랍 확률을 보정하는 역할을 하고 동시에 전설 획득에 필요한 시간을 단축합니다. 그럭저럭 널리 양해된다고 알려진 P2W 모델 중 하나인 시간을 구입하는 모델입니다.
또 게임 자체의 규칙과 과금 모델에 익숙하게 만드는 역할도 합니다. 만약 문장을 균열 입장권으로 설계하면 균열은 시험 삼아 들어가볼 수 있는 던전에서 입장재화와 보상을 맞바꾸는 성장 크리티컬한 메커닉으로 위상이 바뀝니다. 더 민감한 던전으로 성격이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균열은 성장에 필요한 핵심 자원인 전설 아이템과 꺼져가는 잉걸불을 드랍하지만 동시에 덜 민감한 메커닉 역할을 합니다. 이건 슬롯머신의 프로그래시브 베팅과 논 프로그래시브 베팅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강원랜드에서 가상의 낡은 슬롯 앞에 앉았습니다. 한 게임을 하는데 필요한 최소비용은 10년 전 기준 500원입니다. 기왕이면 같은 돈으로 더 오래 놀겠다는 생각으로 500원을 넣고 한 줄에 베팅하고 버튼을 누르지만 예상 대로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몇 판을 하는 내 모습을 보고 옆에 앉아 게임을 하던 다른 분이 한심하다는 눈길로 나를 쳐다봅니다. 500원을 추가할 때마다 최대 세 줄 까지 베팅할 수 있고 한 번에 2000원을 내면 프로그래시브 베팅이라는 메커닉으로 다섯 줄을 베팅할 수 있습니다. 당첨 확률은 더 올라가지만 단위시간 당 더 많은 돈을 쓰게 됩니다. 베팅 확률만 생각하면 처음부터 게임비를 2000원씩 받도록 설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저처럼 이곳에 처음 와 본 사람들이 주머니 속에 지폐를 만지작거리며 저걸 해볼까 말까 좀 더 오래 고민하겠죠. 하지만 500원은 그보다 훨씬 덜 고민할 겁니다. 저는 결국 슬롯에 2000원을 내지는 않았지만 일어나 좀 더 화려해 보이는 다른 게임을 찾아 나섰고 새벽에 남은 칩 하나를 기념 삼아 교환하지 않고 들고 나왔습니다.
다시 주제로 돌아가면 균열에 투입한 단위 시간 당 유효한 보상을 얻기 위해서는 문장을 추가해야 하지만 필수는 아닙니다. 문장을 던전 입장 재화로 설계하지 않은 이유는 그렇게 할 때 던전이 좀 더 성장 크리티컬한 형태로 바뀌기 때문이며 균열은 그 역할만 하기에는 플레이어가 게임에 익숙해지도록 하기에도 적당한 메커닉이기 때문입니다. 아. 그리고 위에서 문장 모델이 비교적 널리 양해되는 P2W 모델이라고 이야기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뮤니티 반응은 썩 좋지 않아 보입니다. 사실 여기에도 이유가 있는데 이 이야기는 제목의 범위를 벗어날 것 같으니 다음에 따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