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딜힐의 기원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탱딜힐이라는 메커닉은 어디서 왔고 또 어떻게 변화해 왔을까요. 탱딜힐의 기원과 발전 과정,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살펴봅시다.

탱딜힐의 기원

탱커–딜러–힐러라는 말은 훨씬 뒤의 온라인 게임에서 굳어진 용어지만 이 역할 구조의 뿌리는 1970년대 초반 테이블탑 워게임과 TRPG에서 이미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지난번 RPG 규칙의 역사와 발더스게이트 3의 표면 시스템 탐구를 진행한 김에 중세 미니어처 워게임인 '체인메일(Chainmail)'과 1974년 초판 D&D(OD&D)'를 중심으로 역할 분화가 어떻게 시작됐고 어떤 철학과 플레이 경험 속에서 지금 우리가 아는 탱·딜·힐의 원형이 형성되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체인메일은 개리 가이갹스와 제프 페런이 만든 중세 미니어처 워게임 규칙으로, 처음에는 순수한 병종 단위의 전투 게임이었습니다. 기본 규칙은 중갑보병, 경보병, 기병 같은 병과를 정해진 포인트로 편성하고, 1대 20 비율로 병력을 대표하는 피규어를 놓고 전장을 재현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런 구조에서는 각 유닛이 개별 캐릭터가 아니라 집단을 대표하는 말 그대로의 ‘병종’이었고, 오늘날 말하는 탱커·딜러·힐러 같은 캐릭터 역할 개념은 당연히 등장하지 않습니다. 3판 체인메일에는 이런 중세 규칙 뒤에 14페이지 분량의 판타지 부록이 추가되는데, 여기서 처음으로 '히어로(Hero)', '슈퍼 히어로(Super-Hero)', '위저드(Wizard)' 같은 개별 영웅 유닛이 등장합니다. 이 유닛들은 일반 병과와는 다른 전투 규칙을 사용하고, 마법과 괴물 같은 요소와 함께 다뤄집니다[^Chainmail (game)]. 체인메일의 판타지 부록은 당시 판타지 소설에서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J.R.R. 톨킨, 로버트 E. 하워드, 폴 앤더슨, 마이클 무어콕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직접 참조했습니다. 이들 작품에는 이미 '전선에서 싸우는 전사형 인물'과 '마법으로 전장을 좌우하는 마법사형 인물'이 분명하게 대비되기 때문에, 체인메일에서도 자연스럽게 영웅과 위저드가 '근접 전투 vs 마법 화력'이라는 두 축으로 설정됩니다[^Chainmail (game)]. 체인메일의 기본 전투 시스템을 보면, 유닛은 '라이트 풋', '헤비 풋', '아머드 풋', '라이트 호스', '헤비 호스'처럼 방어력과 기동력을 기준으로 분류됩니다. 병종마다 이동 거리, 공격 주사위, 방어 능력이 달라서, 플레이어는 전열을 구성할 때 항상 '누가 전면에서 버티고, 누가 측면을 치고, 누가 원거리에서 화살을 쏠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엘프나 오크 같은 유닛이 기존 여섯 가지 병종 유형 중 하나로 취급됩니다. 예를 들어 호빗은 라이트 풋, 엘프는 헤비 풋으로 계산되는 식입니다. 영웅은 네 명의 헤비 풋에 해당하는 전투력을 지닌 것으로 처리되며, 죽이려면 동시에 네 번의 명중이 필요하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Chainmail (game)]. 이 구조는 오늘날 MMO 탱커의 '다른 플레이어 여러 명분의 피해를 대신 받아내는 존재'라는 감각의 아주 초기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직 '어그로'라는 개념은 없지만, 히어로/슈퍼 히어로 유닛은 사실상 '여러 유닛을 상대로 전선을 버티는 개인 영웅'이고, 그 뒤에는 보통 병력이 화살을 쏘거나 돌격을 준비합니다. 즉, 병종 설계 단계에서 이미 '앞에서 맞는 단단한 유닛'과 '뒤에서 공격하는 유닛'이라는 역할 분화가 암묵적으로 전제된 것입니다.

판타지 부록은 영웅과 초영웅을 일반 병과와 완전히 다른 특수 유닛으로 정의합니다. 히어로는 네 명의 헤비 풋맨으로 취급되며 네 번의 동시 명중이 있어야 전투에서 쓰러집니다. 슈퍼 히어로는 이보다 더 강력한 존재로 여덟 명 분량의 전투력을 가집니. 위저드는 여기에 더해 판타지적인 요소를 담당합니다. 체인메일 1판에서 위저드는 '파이어볼(Fire Ball)', '라이트닝 볼트(Lightning Bolt)' 같은 주문을 사용해 범위 피해를 주고, 일부 주문은 저장굴림(Saving Throw) 규칙을 통해 저항 여부를 판정합니다. 체인메일의 위저드가 다트머스 대학에서 작성된 'Rules for Middle Earth'라는 팬 규칙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가령 파이어볼의 사거리, 범위, 판정 방식이 체인메일과 거의 동일합니다[^A Precursor to the Chainmail Fantasy Supplement]. 이렇게 체인메일에서 영웅과 위저드는 '한 번에 여러 명분의 피해를 버티는 근접 담당'과 '멀리서 강력한 마법으로 전장을 지배하는 화력 담당'이라는 상반된 역할로 설계됩니다. 특히 위저드는 '일반 투사 무기에 면역' 같은 특수 규칙을 가지고 있어, 사실상 마법이나 영웅급 전사로만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되며, 이는 후에 D&D에서 마법사가 가진 '물리 방어는 빈약하지만, 특정 상황에서만 잡을 수 있는 강력한 후반 캐릭터'라는 위치와 연결됩니다[^A Precursor to the Chainmail Fantasy Supplement].

체인메일의 판타지 전투를 실제로 플레이해 보면, 전투 루프가 자연스럽게 두 층으로 나뉩니다. 하나는 히어로와 보병들이 수행하는 근접 전투 루프이고, 다른 하나는 위저드의 파이어볼과 라이트닝 볼트, 그리고 용이나 트롤 같은 괴수가 만드는 범위, 특수 전투 루프입니다. 대규모 전투에서는 영웅이 특정 전선을 붙잡고 있는 동안, 뒤쪽에 있는 위저드가 범위 마법으로 적의 포메이션을 붕괴시키는 식의 역할 분담이 자주 발생합니다. 이런 패턴은 이미 '앞에서 버티는 탱형 유닛과 뒤에서 큰 숫자를 뽑는 딜러형 유닛'이라는 매우 원시적인 역할 구성을 만들어냈습니다. 또한 판타지 부록은 각 종족과 유닛을 'Law(질서)'와 'Chaos(혼돈)' 진영으로 나누고, 특정 유닛이 특정 상대에 강하거나 약하다는 상성 구조를 도입합니다. 이 상성은 후에 D&D에서 언데드에게 강한 클레릭, 특정 적에게 특효를 발휘하는 마법 같은 형태로 구체화되며, 특정 역할이 특정 상황에서 특히 중요한 ‘역할 매칭’ 메커니즘의 전조가 됩니다[^Chainmail (game)]. 체인메일은 기본적으로 부대 단위 전투 게임이었기 때문에, 개별 캐릭터를 중심으로 한 롤플레잉은 전제를 두지 않습니다. 하지만 OD&D 공동 제작자인 데이브 아네슨은 곧 체인메일 규칙을 기반으로 '블랙무어(Blackmoor)'라는 캠페인을 시작하며 한 명의 영웅이나 마법사를 플레이하는 방식으로 룰을 변형합니다. 이때 전투 규칙은 여전히 체인메일을 참고하지만, 던전이라는 공간을 탐색하고, 전리품과 경험치를 얻고, 캐릭터가 성장하는 구조가 더해지면서 '워게임 위에 올린 RPG'가 탄생합니다. 원래 체인메일에는 캠페인을 장기적으로 운영하는 규칙이 없었습니다. 캠페인 레벨의 규칙은 없고, D&D에서 추가됐습니다[^Chainmail Campaign?]. 이렇게 체인메일의 '영웅 vs 위저드' 구조와 병종별 역할 분화는, 자연스럽게 '전선에서 맞는 캐릭터 vs 뒤에서 화력을 담당하는 캐릭터'라는 전투 역할 개념을 만들어냈고, 이것이 그대로 OD&D의 클래스 설계로 이어집니다. 아직 힐러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탱·딜 개념의 씨앗은 이미 뿌려진 상태였습니다.

체인메일 위에서 출발한 OD&D는, 1974년 '화이트 박스(White Box)'라는 이름으로 처음 출판됩니다. 이 초기판 D&D에서 플레이어가 선택할 수 있는 클래스는 세 가지뿐이었습니다. 파이팅 맨(Fighting-Man), 매직 유저(Magic-User), 클레릭(Cleric)입니다. 세 가지 능력치 그룹이 각각 파이팅 맨, 매직 유저, 클레릭의 주요 능력치이며 이 세 클래스가 게임의 기본 구조를 이룹니다[^DUNGEONS & DRAGONS]. 화이트 박스 시절 D&D는 지금과 달리 직관적 설명보다 룰적 정의에 가까운 문장들로 클래스 개념을 제시합니다. 그럼에도, 각 클래스가 담당하는 역할은 매우 분명했습니다. 당시 D&D는 파이팅 맨, 매직 유저, 클레릭을 각각 '전투의 중심', '주요 마법 사용자', '하이브리드 성직자'로 정의하고, 파티 구성에서 이 셋이 서로 다른 역할수행합니다[^D&D's Original Fighting-Man, Magic-User and Cleric Classes, Explained]. 이 삼분법은 곧 '물리 전면 전투 – 마법 화력, 유틸 – 치유, 성직'이라는 구조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탱커, 딜러, 힐러라는 말은 사용되지 않았지만, 역할의 기능은 지금과 상당히 유사합니다. 파이팅 맨은 체인메일의 히어로를 캐릭터 단위로 옮겨 놓은 존재입니다. OD&D에서 파이팅 맨은 다른 어떤 클래스보다 많은 히트 다이스(HP)를 가지며, 모든 방어구와 무기를 사용할 수 있고, 공격 판정에서도 가장 높은 성공 확률을 가지고 있습니다. 파이팅 맨은 '게임 초반 가장 강력한 클래스'로 평가되며, 모든 캐릭터가 어느 정도 전투를 하긴 하지만, 파이팅 맨이야말로 전투에서 가장 높은 가치를 가집니다[^D&D's Original Fighting-Man, Magic-User and Cleric Classes, Explained]. 이 설계는 오늘날 MMO 탱커의 HP, 방어력 중심의 설계와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체인메일에서 네 명의 헤비 풋에 해당하는 전투력을 가진 히어로가 있었다면 OD&D에서는 높은 HP와 AC(Armor Class)를 통해 '다른 누구보다 오래 버티는 캐릭터'를 정의합니다. 던전 탐험에서 몬스터와의 첫 교전은 대부분 좁은 통로와 문 입구에서 발생하는데, 이때 파이팅 맨이 맨 앞줄에서 공격을 받아내고 뒤쪽에 있는 매직 유저와 클레릭이 그대로 공격 혹은 지원을 하는 구조가 자연스럽게 형성됩니다. 이런 전투 구조는 '누가 앞에서 맞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파이팅 맨이라는 클래스에 집중시킵니다.

매직 유저는 체인메일의 위저드를 개인 캐릭터로 옮긴 클래스입니다. OD&D에서 매직 유저는 가장 적은 HP를 갖고, 방어구 착용이 거의 불가능한 수준으로 제한됩니다. 대신, 파이어볼과 라이트닝 볼트 같은 체인메일에서 온 강력한 주문을 사용해, 한 번의 행동으로 여러 적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체인메일에서 이미 위저드는 이런 주문을 사용하고 있었고, OD&D는 이 메커니즘을 캐릭터 레벨과 주문 슬롯 구조로 재구성해 '초반엔 매우 약하지만, 고레벨에서는 전투를 지배하는 클래스'라는 철학을 심었습니다[^A Precursor to the Chainmail Fantasy Supplement]. 원래 매직 유저는 '게임 후반부에 진짜 힘을 발휘하는 캐릭터'입니다. 초반에는 한두 개밖에 못 쓰는 주문 슬롯 때문에 거의 활약을 못 하지만, 레벨이 오르면 파티의 생존과 전투 결과를 결정하는 핵심 역할을 맡게 됩니다[^D&D's Original Fighting-Man, Magic-User and Cleric Classes, Explained]. 이 설계는 오늘날 온라인 게임의 '후반 캐리형 딜러'와 매우 닮았습니다. 초반에는 탱커나 전사가 더 쓸모 있지만, 어느 시점 이후에는 딜러가 메인 캐리로 전환되는 구조입니다. 매직 유저는 HP와 방어가 약해서 탱커처럼 맞아서는 안 되고, 대신 다른 역할이 만들어준 '시간과 공간'을 활용해 폭발적인 피해를 넣어야 합니다. 한편 클레릭은 흥미롭게도 처음부터 '힐러'로 설계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클레릭의 기원은 블랙무어 캠페인에서 등장한 뱀파이어 플레이어 캐릭터 'Sir Fang'을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뱀파이어 헌터 개념이었습니다. 클레릭이 B급 뱀파이어 영화에서 성직자가 십자가로 흡혈귀를 쫓아내는 장면을 게임화한 것으로 언데드를 격퇴하고 뱀파이어를 상대하기 위한 클래스였습니다[^Cleric (Dungeons & Dragons)]. 초기 블랙무어에서 강력한 뱀파이어 플레이어가 문제를 일으키자, 마이크 카르나 다른 플레이어가 '반헬싱(Van Helsing) 타입'의 성직자 캐릭터를 제안했고, 여기서 '언데드 터닝(Turn Undead)'과 같은 능력이 만들어졌습니다[^About the Cleric]. 이후 OD&D에서는 클레릭이 파이팅 맨과 매직 유저의 중간에 위치한 '하이브리드 전투/마법' 클래스이자 치유와 보호, 언데드 격퇴를 담당하는 책임자로 정리됩니다. 클레릭은 갑옷을 입고 근접전도 가능하지만 치유와 보조 마법을 사용하는 클래스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D&D's Original Fighting-Man, Magic-User and Cleric Classes, Explained]. 즉 클레릭에는 두 가지 기원이 동시에 작용합니다. 하나는 영화와 문학에서 온 뱀파이어 헌터/성직자 이미지, 다른 하나는 체인메일–D&D의 전투 시스템에서 '파티가 오래 버티려면 치유와 회복이 필요하다'는 게임적 요구입니다. 이 둘이 합쳐지며 클레릭은 언데드에 강하고, 파티의 생존 루프를 유지하는 '지원·힐러' 역할로 자리잡습니다. 화이트 박스 시대 D&D를 실제로 플레이해 보면, 파티 구성이 거의 자동으로 '파이팅 맨 + 매직 유저 + 클레릭 + (후일 추가되는 도둑)' 쪽으로 수렴합니다. 3클래스만으로도 게임은 잘돌아갔지만 현실적인 파티는 항상 이 셋의 조합을 갖추려 했습니다[^3 classes only]. 던전 구조 상 파이팅 맨이 앞에서 맞고 매직 유저가 상황을 정리하며 클레릭이 치유와 보호를 맡지 않으면, 파티는 중장기적으로 생존하기 어렵습니다. 통로와 문, 함정, 소모성 자원(체력, 주문 슬롯, 치료 물약)이 결합된 환경에서는, 이 세 역할이 서로를 보완하는 삼각형 구조를 자연스럽게 형성합니다. 탱커·딜러·힐러라는 단어는 없었지만, '앞에서 맞는 전사, 강력하지만 유한한 마법 딜러, 파티를 유지시키는 성직자'라는 루프는 이미 완성되어 있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많은 플레이어들이 오늘날 '4대 역할'로 당연하게 생각하는 도둑(Thief)이 OD&D 첫판에는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도둑은 1975년 보충 규칙인 'Greyhawk'에서야 공식 클래스로 등장합니다[^Greyhawk (supplement)].

많은 구판 플레이어들이 원래는 파이팅 맨, 매직 유저, 클레릭만 있으면 충분했습니다. 당시 설계 철학에서는 함정 찾기, 자물쇠 따기, 몰래 움직이기 같은 행위는 특정 클래스 전유물이 아니라, 누구나 선언하고 던전 마스터가 판정하는 영역이었습니다[^Commoner vs Fighter/Rogue vs Wizard/Cleric]. 그래서 체인메일–OD&D 초기에는 '전투와 치유만으로도 던전 탐험의 핵심 루프는 돌아간다'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역할 구조의 중심에 있는 것은 전면 전투, 마법 활용, 치유, 지원이었고, 함정과 자물쇠는 그 위에 얹힌 디테일에 가깝게 취급되었습니다. 함정 찾기와 자물쇠 따기를 '누구나 할 수 있는 플레이어 선언 + 판정' 영역이었습니다. 즉, 도둑이 생기기 전에는 '문을 자세히 살펴본다', '바닥을 두드려 본다' 같은 구체적 묘사를 하면, 던전 마스터가 적당한 확률을 주고 성공 여부를 정했습니다[^Question about Thiefless D&D]. 이 말은, 설계자 입장에서는 별도의 클래스를 만들지 않아도 충분히 운용 가능한 영역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기 D&D 규칙에는 도둑 클래스가 필요 없다고 판단되었고, 실제로 첫판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도둑 클래스의 기원은 공식 디자이너가 아닌 플레이어 커뮤니티였습니다.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에 있던 'Aero Hobbies'라는 게임 샵의 그룹이 1974년경 '도둑(Thief)' 클래스를 홈브루로 만들어 사용했고, 이 아이디어가 개리 가이갹스에게 전달되면서 공식화되었습니다. 샵 주인인 게리 스위처와 다니엘 와그너가 가이갹스와 장거리 통화를 하며 도둑 개념을 논의했고, 이후 그들의 아이디어가 'Greyhawk' 보충에서 도둑 클래스로 정리되었습니다[^Dyl's Thrills - Thinking too much about movies, weird games, and d20s]. 1975년 'Greyhawk'에서 도둑 클래스가 공식 도입되기 전에 이미 팬지의 뉴스레터 등에 프로토타입 도둑 규칙이 실려 사용되고 있었습니다[^Rules vs. Immersion, Assistance, Aurania and More From the Comment Section].

이렇게 플레이어 커뮤니티에서 먼저 만들어진 도둑 개념은, 1975년 'Supplement I: Greyhawk'에서 공식 클래스로 정식 편입됩니다. 도둑은 백스탭, 자물쇠 따기, 함정 해제, 은신과 같은 능력을 가지고, 각 능력은 퍼센트 기반의 확률로 성공 여부를 판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도둑이 그레이호크 보충에서 처음 등장한 D&D 클래스이며, 이후 로그, 시프 계열로 발전했습니다[^Rogue (Dungeons & Dragons)]. 이 과정은 한편으로 '플레이어가 제안한 클래스를 디자이너가 공식화한 최초의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아네슨의 블랙무어에서 뱀파이어 헌터 성격의 클레릭이 발생했고, 캘리포니아의 에어로 하비즈 테이블에서 도둑이 발생한 것처럼, 초기 D&D의 많은 클래스는 책상 위에서 이론적으로 설계된 것이 아니라, 실제 플레이 중 필요한 역할이 생겨나고 이를 규칙으로 고정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도둑이 처음부터 기본 클래스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역할 분화가 이론이 아니라 플레이 경험에서 나왔다는 점을 잘 보여줍니다. 설계자들은 처음에는 '전사·마법사·성직자'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실제 플레이어들은 함정과 자물쇠, 잠입과 기습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캐릭터 유형을 원했고, 결국 이것이 하나의 클래스로 굳어졌습니다. 이 패턴은 이후 온갖 MMORPG에서 '지원형 버퍼', '탱딜 하이브리드', '컨트롤러' 같은 역할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매우 비슷합니다. 먼저 플레이가 있고, 그 위에 역할 언어가 생기며, 규칙과 UI가 그것을 뒷받침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흥미로운 점은, 초기 TRPG 플레이어들의 클래스 선호도가 지금 온라인 게임에서 관찰되는 탱·딜·힐 선호 패턴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초창기부터 파이터를 고르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파이터는 룰 이해도가 낮아도 직관적으로 플레이할 수 있는 클래스였기 때문입니다. 파이팅 맨은 초보에게 가장 적합한 클래스입니다. 복잡한 주문 시스템을 이해하지 않아도 되고, 고난도 운영 없이도 전투에서 확실한 존재감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D&D's Original Fighting-Man, Magic-User and Cleric Classes, Explained]. 이 점은 오늘날 MMORPG에서 '탱/근딜 입문용 전사'가 인기인 것과 패턴이 같습니다. 규칙이 복잡한 게임일수록 '앞에 나가서 때리는 역할'은 언제나 일정 이상의 수요를 가집니다. 매직 유저, 위저드는 초기에는 매우 허약하고 힘든 클래스지만, 레벨이 올라갈수록 강력한 주문을 사용하며 캠페인의 전황을 뒤집는 캐릭터가 됩니다. 많은 플레이어들이 초반의 고통을 감수하고 마법사를 키우는 이유는 후반의 엄청난 보상 때문입니다. OD&D, AD&D 시절에는 마법사가 레벨이 쌓이면 최강 클래스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습니다[^Now on YouTube: watch all five episodes of 'Angel's Thirst', the 1920s scenario from Cults of Cthulhu]. 이 구조 역시 오늘날 온라인 게임에서 '후반 캐리형 딜러'가 가지는 매력과 맞닿아 있습니다. 초반 난이도는 높고 죽기 쉽지만, 일단 성장하면 누구보다 강하다는 보상 구조가, 숙련 플레이어를 위저드로 끌어들였습니다.

반대로 클레릭은 지금 MMORPG에서 힐러가 그렇듯, 역할의 중요도에 비해 선호도가 낮은 편이었습니다. 커뮤니티에서는 '왜 아무도 클레릭을 하려고 하지 않느냐'는 글이 2000년대 이후 꾸준히 올라옵니다. 5판 기준으로는 클레릭이 매우 강력하고 재미있는 클래스가 되었지만, 3.x나 그 이전판에서는 '힐만 강요받는, 재미 없는 땜빵 역할'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힐러 역할이 RPG에서 덜 인기 있는 것은 일반적이며, D&D에서도 많은 플레이어가 힐만 하는 역할을 피합니다[^Why does it seem like people have to be persuaded to play cleric?]. 클레릭이 '하이브리드 전투, 마법'이라는 본래 설계에도 불구하고 실제 플레이에서는 '힐 할 줄 아는 사람'으로만 소비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About the Cleric]. 이런 패턴은 오늘날 MMORPG에서 힐러가 항상 부족하고, 누군가 '할 사람 없으니 내가 한다' 식으로 맡는 구조와 매우 유사합니다. 고전 CRPG에서 추천 파티 구성 글을 보면, 항상 '전사 + 클레릭 + 마법사 + 도둑'이 이상적인 파티로 제시됩니다. 후반까지 갈 생각이라면 반드시 클레릭, 파이터 조합을 포함하는 것이 좋았습니다[^Preferred endgame party: Fighter/Cleric, Fighter/Rogue, Wizard, Wizard]. 테이블 위에서도 비슷했습니다. 캠페인 시작 전에 '누군가는 클레릭을 해야 한다'라는 말이 거의 필수적으로 나왔습니다. 모두가 전사나 마법사를 하고 싶어 하다 보니, 결국 테이블에서 한 명이 양보하거나, 던전 마스터가 '클레릭이 없으면 캠페인이 너무 힘들다'며 설득하는 식의 상황이 많았습니다[^Chainmail combat in OD&D context]. 이러한 문화는 오늘날 온라인 게임에서 탱커와 힐러가 '역할 매칭을 위해 희생하는 포지션'으로 인식되는 것과 구조적으로 같습니다. 역할 분화가 만들어낸 책임과 스트레스, 보상 구조는 1970년대 TRPG 시절부터 이미 존재했으며, 디지털 게임이 이를 더 크게 확대했을 뿐입니다.

도둑이 Greyhawk에서 공식화된 이후, 많은 D&D 플레이어들은 '파이터/클레릭/마법사/도둑' 4인 구성을 이상적인 기본 파티로 인식하게 됩니다. 'D&D에 어떤 클래스가 있어야 하는가'를 논하는 글에서도, 이 네 클래스가 오랫동안 파티 구성을 정의한 코어 아키타입입니다[^What Classes Should be in D&D?]. 이 네 역할은 현대 MMO의 역할 언어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파이터는 전면에서 맞고 일정 수준의 딜을 하는 탱커/근딜, 매직 유저는 후방에서 폭발적인 화력을 담당하는 캐스터 딜러, 클레릭는 파티의 유지와 지원을 맡는 힐러, 도둑은 함정과 자물쇠, 잠입과 기습을 맡는 유틸리티, 서브 딜러입니다. 즉, 탱–딜–힐–유틸이라는 구조가 이미 1970년대 말 TRPG 파티의 표준 구성이었고, 이후 MUD와 MMORPG, 그리고 현대 온라인 게임들이 이 구조를 그대로 디지털로 옮기고 세분화해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체인메일의 영웅, 위저드 구조에서 출발한 역할 분화는, OD&D의 파이터–매직유저–클레릭 삼분법을 거치며 '전선에서 맞는 전사, 후방에서 화력을 담당하는 마법사, 파티를 유지시키는 성직자'라는 삼각형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도둑은 실제 플레이 현장에서 필요가 생겨난 이후에야 규칙으로 정리된 네 번째 역할이었고, 이 네 역할의 조합이 TRPG 파티의 기본 구조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미 탱커, 딜러, 힐러, 유틸이라는 개념적 역할이 형성되었고, 이후 온라인 게임이 이 틀을 거의 그대로 계승해 '탱딜힐'이라는 현대적 언어로 재포장하게 됩니다[^Chainmail][^Chainmail (game)][^Chainmail: Rules for Medieval Miniatures][^A Precursor to the Chainmail Fantasy Supplement][^Evidence Chainmail Had Material from Dave Arneson][^D&D's Original Fighting-Man, Magic-User and Cleric Classes, Explained][^Post 2 – Give your Thieves a Break][^D&D Clerics: Misunderstood and Improperly Played][^Chainmail combat in OD&D context][^DUNGEONS & DRAGONS][^Rules vs. Immersion, Assistance, Aurania and More From the Comment Section][^About the Cleric][^Help me adjust a player's perception of the strength of wizards/casters vs. fighters/martials][^Play using the Chainmail rules][^3 classes only][^THIEF class NOT A THING in Original D&D #shorts #didyouknow #dnd #osrs][^Cleric (Dungeons & Dragons)][^What Classes Should be in D&D?][^Chainmail Campaign?].

TRPG에서 탱–딜–힐 구조의 씨앗이 생겼다면, 이 구조를 진짜 '역할 시스템'으로 굳힌 무대는 온라인 멀티플레이 세계였습니다. 특히 텍스트 기반 MUD와 초기 MMORPG는, 역할 분화가 단순한 캐릭터 설정을 넘어 시스템적으로 강제되는 지점이었습니다. 이제부터 MUD1에서 시작해 에버퀘스트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그리고 최근 MMORPG까지, 탱–딜–힐 개념이 온라인 게임 안에서 어떻게 정착되고 변형되었는지 단계별로 살펴보겠습니다. MUD는 '멀티 유저 던전(Multi-User Dungeon)'의 약자로, 여러 명의 플레이어가 동시에 접속해 텍스트로 이루어진 가상 세계를 탐험하는 온라인 게임 장르입니다. 1978년 에식스 대학의 로이 트럽쇼와 리처드 바틀이 PDP-10 메인프레임에서 만든 MUD1은 종종 '최초의 온라인 RPG'이자 '가장 오래된 가상 세계'로 불립니다. 트럽쇼는 MIT의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 '조크(Zork)'에 큰 영향을 받았고, 조크의 변형판인 'Dungeon'에서 이름을 가져와 자신의 게임을 '멀티 유저 던전'이라고 지었습니다[^Multi-User Dungeon (MUD) (1978)]. 1978년부터 1980년 사이 MUD1은 대학 내부 네트워크에서 운영되다가, 1980년 ARPANET, 1983년 JANET에 연결되면서 본격적인 온라인 다중 접속 게임으로 자리잡습니다[^ROBLOX is a MUD: The history of virtual worlds, MUDs & MMORPGs]. MUD1은 TRPG적 요소를 온라인으로 옮긴 실험이었지만, 오늘날 우리가 아는 식의 클래스 기반 역할 시스템은 아직 느슨했습니다. 플레이어는 텍스트로 된 방과 몬스터, 아이템과 상호작용했고, 다른 플레이어와 채팅하거나 PvP를 하는 것이 핵심 경험이었습니다. MUD1의 특징은 '여러 사람이 동시에 같은 가상 공간을 탐험하고, 서로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이었고, 전투 메커니즘은 기본적으로 단순한 교환형 공격과 체력 감소에 가까웠습니다[^The Game Archaeologist: A brief history of Multi-User Dungeons]. 이 시기에는 탱커·힐러·딜러 같은 분리된 역할 개념보다, '강한 캐릭터 vs 약한 캐릭터', 'PK를 좋아하는 플레이어 vs 탐험을 좋아하는 플레이어' 같은 플레이 스타일 차이가 더 주된 구분이었습니다. '바틀 플레이어 유형(킬러, 탐험자, 사교가, 성취자)' 같은 모델 역시, 역할이 아니라 플레이 성향을 설명하는 틀에 가까웠습니다[^Multi-user dungeon]. 그럼에도 불구하고 MUD1과 그 후속작들은 중요한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여러 플레이어가 동시에 같은 몬스터와 싸우는 상황 자체가, 결국 '누가 앞에서 맞고, 누가 지원하고, 누가 마무리를 짓는가'라는 역할 문제를 자연스럽게 제기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규칙으로 풀어낸 작품이 바로 DikuMUD입니다.

1991년 덴마크 대학생 팀이 개발한 DikuMUD는 이후 수많은 상업 MMORPG에 영향을 준 MUD 엔진입니다. 이 게임 네 가지 클래스를 제공했습니다. 메이지(Mage), 워리어(Warrior), 시프(Thief), 클레릭(Cleric)입니다. 이 네 클래스는 이미 각각 탱커, 딜러, 유틸리티, 힐러에 대응하는 역할을 갖고 있었고, 각자의 전투 역할이 상당히 분명했습니다[^ROBLOX is a MUD: The history of virtual worlds, MUDs & MMORPGs]. DikuMUD가 중요한 이유는, 이 네 클래스를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전투 역할'로 묶고, 그 역할을 시스템이 뒷받침하는 메커니즘을 도입했다는 점입니다. 클래스별로 서로 다른 전투 역할을 수행하도록 능력치를 구성하고, 어그로 관리, 군중 제어, 소환 같은 능력을 분리했습니다. 특히 워리어는 높은 체력과 방어 능력으로 적의 공격을 받아내고, 클레릭은 치유와 보호 주문으로 파티의 생존을 유지하며, 메이지는 강력한 공격 마법과 군중 제어를 담당했습니다[^ROBLOX is a MUD: The history of virtual worlds, MUDs & MMORPGs]. DikuMUD 계열 MUD에서 가장 중요한 시스템적 혁신 중 하나가 '어그로(aggro)'라 부르는 위협 시스템입니다. 이전 텍스트 게임에서는 몬스터가 단순히 가장 가까운 플레이어나 마지막으로 공격한 대상을 때리는 방식이 많았지만, DikuMUD는 몬스터가 각 플레이어에 대해 '위협 점수'를 계산하고, 가장 높은 위협을 가진 대상을 자동으로 공격하도록 설계했습니다. 이 구조는 실제 플레이어들의 경험을 모아서 정리한 개발자 회고나 MUD 관련 디자인 글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됩니다. DikuMUD 계열 게임에서 전사에게 '어그로를 끌어오는 기술'이 주어졌고, 특정 주문이나 공격이 위협을 크게 증가시켜 몬스터의 타겟을 바꾸도록 설계되었습니다[^ROBLOX is a MUD: The history of virtual worlds, MUDs & MMORPGs]. 이 시스템은 탱킹이라는 역할을 수학적으로 정의해 줍니다. 어떤 캐릭터가 탱커인지, 그 캐릭터가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는지, 이제는 '가장 높은 체력, 방어력을 가진 캐릭터'가 아니라 '가장 높은 위협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캐릭터'로 판단할 수 있게 됩니다. 딜러는 높은 피해를 내면서도 탱커보다 위협이 높아지지 않도록 조절해야 하고, 힐러는 치유 행동이 생성하는 위협 때문에 몬스터에게 맞지 않도록 '힐 타이밍'을 고민해야 합니다. 이 조합이 오늘날 MMORPG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탱커–딜러–힐러의 상호작용입니다.

DikuMUD와 그 파생작들은 이 네 클래스를 기반으로 수많은 전문화를 만들어 냈습니다. 많은 게임이 메이지, 클레릭, 시프, 워리어 외에도 레인저, 팔라딘, 바바리안, 사이오니스트 같은 서브 클래스를 도입했고, 각 클래스는 명확한 역할을 갖는 경우가 많았습니다[^Mud Connector FTPLIST 3/31/96 [325K]]. 이 과정에서 역할 개념은 단순히 '특정 클래스만 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서, '특정 플레이 스타일을 위한 전문화'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팔라딘은 워리어와 클레릭의 중간에 서 있는 하이브리드로, 일정 수준의 탱킹과 치유를 동시에 담당할 수 있고, 레인저는 시프와 메이지의 중간에 서서 정찰과 원거리 공격을 맡는 식입니다. 이런 클래스 전문화 구조는 이후 에버퀘스트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탤런트, 특성 시스템, 그리고 파이널판타지 14의 '잡' 구조의 뿌리가 됩니다. 1999년에 출시된 '에버퀘스트(EverQuest)'는 많은 개발자와 유저에게 '현대 MMORPG의 템플릿'으로 인식됩니다. 이 게임은 그래픽과 3D 월드의 측면뿐 아니라, 역할 구조 측면에서도 중요한 변곡점이었습니다. 에버퀘스트의 진짜 삼위일체는 탱커·힐러·딜러가 아니라 '탱커, 힐러, 슬로워였습니다[^Non-serious Gripe: The "Holy Trinity" in MMOs was never healer/dps/tank.]. 에버퀘스트는 DikuMUD의 전투와 역할 구조를 3D 그래픽과 실시간 전투로 옮긴 게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파티는 보통 6인으로 구성되며, 각 캐릭터는 전사(Warrior), 그림자 기사(Shadow Knight), 팔라딘(Paladin), 성직자(Cleric), 주술사(Shaman), 마법사(Enchanter) 등 다양한 클래스 중 하나를 선택합니다. 이 클래스들은 MUD에서 이미 확립된 역할을 그대로 계승하며 그래픽 UI와 애니메이션까지 더해져 훨씬 직접적인 '역할 체감'을 제공합니다. 이 게임이 이후 대부분의 MMORPG에 영향을 준 '파티 역할 구조'를 확립했습니다[^MMO Timeline]. 에버퀘스트 커뮤니티에서 자주 언급되는 '원조 삼위일체'는 전사, 성직자, 마법사(특히 인챈터)를 중심으로 하는 조합입니다.

가장 기본이 되는 세 축이 탱킹을 담당하는 워리어, 힐과 부활을 담당하는 클레릭, 슬로우와 마나 회복, 군중 제어를 담당하는 인챈터였습니다[^Non-serious Gripe: The "Holy Trinity" in MMOs was never healer/dps/tank.]. 이 구조는 '탱-힐-컨트롤'이라는 형태의 삼위일체입니다. 워리어는 어그로와 물리 방어로 적의 공격을 받아내고, 클레릭은 강력한 단일 힐과 부활로 파티를 유지하며, 인챈터는 슬로우와 메즈(mez, 잠재우기), 매직 리제너레이션으로 전투의 흐름을 통제합니다. 탱·딜·힐 구조와 비교하면, 딜러의 위치가 상대적으로 뒤로 밀려 있고, 컨트롤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습니다. 에버퀘스트에서 주술사와 인챈터는 '슬로우(slow)'라는 매우 강력한 디버프를 가지고 있습니다. 슬로우는 적의 공격 속도를 크게 낮추는 주문으로, 몬스터가 주는 피해 총량을 극적으로 줄여 줍니다. 진짜 삼위일체는 탱커, 힐러, 슬로우어였고, 그 중 인챈터가 슬로우와 군중 제어, 마나 리젠을 동시에 제공하기 때문에 '마법사 축'으로 포함되었습니다[^Non-serious Gripe: The "Holy Trinity" in MMOs was never healer/dps/tank.]. 역할 구조를 수학적으로 보면, 탱킹과 힐링은 '들어오는 피해를 버티는 능력'이고, 슬로우와 컨트롤은 '들어오는 피해 자체를 줄이는 능력'입니다. 이 세 가지가 합쳐져야 파티가 고난이도 던전에서 생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에버퀘스트의 역할 구조는 사실상 탱–힐–컨트롤 삼위일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딜러는 이 구조 위에 얹는 네 번째 축이었습니다.

에버퀘스트의 던전은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매우 가혹했습니다. 몹의 리스폰 시간이 길고, 한 번 풀링에 실패하면 파티 전멸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군중 제어가 없으면 여러 몬스터를 동시에 상대해야 했고, 슬로우가 없으면 탱커와 힐러가 피해량을 버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유저들이 '워리어–클레릭–인챈터' 조합을 사실상의 필수로 여겼고, 다른 조합으로는 레벨업이나 레이드 참여가 어려운 경우가 많았습니다. '논 트리니티 시스템이 실패한 이유'를 논의하는 중에도, 한 유저는 에버퀘스트 시절 삼위일체를 '탱–힐–컨트롤'로 정의하며 이 세 역할이 없으면 당시 던전이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Do you think the non-trinity system failed because of damage stat system?]. 에버퀘스트는 HP와 MP(마나) 관리가 매우 빡빡한 게임이었습니다. 클레릭의 힐은 강력했지만 마나 소모도 컸고, 부활 주문은 레벨과 스펠에 따라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마나가 떨어지면 파티는 쉬어야 했고, 전투 중 갑자기 MP가 바닥나면 탱커가 사망하면서 파티가 무너졌습니다. 이런 자원 압박은, '누군가는 힐에만 집중하고, 누군가는 탱킹에만 집중하고, 누군가는 컨트롤과 디버프에 집중해야 한다'는 역할 전문화를 더욱 필연적으로 만들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에버퀘스트는 MUD에서 이어진 역할 구조를, '이 역할이 없으면 게임 진행이 어렵다'는 수준으로까지 강화했습니다.

2004년 블리자드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WoW)'는 에버퀘스트가 만들어 놓은 복잡한 역할 구조를 세련되게 정리하며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탱–딜–힐' 삼위일체를 사실상 장르 표준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게임이 MMORPG의 모든 것을 발명한 것은 아니지만 훨씬 부드럽고 접근 가능한 방식으로 재구성해서 대중에게 열어줬습니다[^World of Warcraft might not have invented the wheel, but it certainly made it popular—and 20 years on, the MMO titan has fundamentally changed gaming's DNA]. 에버퀘스트의 삼위일체는 탱–힐–컨트롤이었고, 딜러는 그 위에 얹는 네 번째 축이었습니다. 그러나 블리자드는 WoW를 설계하며 너무 많은 역할이 동시에 요구되면 진입 장벽이 높아진다고 판단했습니다. 어떤 던전이 '탱커, 힐러, 컨트롤러, 일부 디버퍼, 특정 버퍼'를 모두 요구하면, 파티 매칭이 극도로 어려워지고, 새 유저는 무엇을 해야 할지 혼란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WoW는 던전과 레이드 설계를 '탱–힐–딜' 세 가지 역할에 맞춰 단순화했습니다. WoW가 과거 D&D나 에버퀘스트에서 존재하던 다양한 지원 역할과 컨트롤 역할을 줄이고, 탱커, 힐러, DPS 세 역할을 중심으로 파티 구성을 설계하면서 플레이 경험을 단순하게 만들었습니다[^Rethinking the Trinity of MMO Design]. WoW의 던전은 에버퀘스트에 비해 훨씬 빠르고, 실패 패널티가 낮으며, 반복 플레이를 전제로 설계되었습니다. 똑같은 인던을 여러 번 돌며 장비를 파밍하는 구조에서, 매번 까다로운 컨트롤과 슬로우, 복잡한 풀링 과정을 요구하면 피로도가 너무 높아집니다. WoW 이전의 삼위일체는 탱–힐–컨트롤이었고, WoW는 이를 탱–힐–딜로 퇴행시켰지만 이 변화 덕분에 AoE 딜과 단순한 전투 구조가 주류가 되었습니다[^Did the Holy Trinity predate WoW?]. 이 단순화는 두 가지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첫째, 초보자도 이해하기 쉬운 구조입니다. '한 명은 때리고, 한 명은 맞고, 한 명은 회복한다'는 설명은 누구에게나 직관적입니다. 둘째, 개발팀 입장에서도 던전 설계와 밸런싱이 쉬워집니다. 탱커에게 요구하는 방어력, 힐러에게 요구하는 회복량, 딜러에게 요구하는 DPS를 수치로 맞추는 작업이 훨씬 단순해지기 때문입니다.

WoW는 이 단순한 삼위일체 구조 안에 다양한 탱커 클래스를 집어넣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방어 전사(Protection Warrior), 보호 성기사(Protection Paladin), 혈기 죽음의 기사(Blood Death Knight) 같은 탱커 특성은 서로 다른 탱킹 스타일을 보여줍니다. 보호 전사는 전통적인 방패와 방어기 중심 탱킹이고, 보호 성기사는 광역 위협 생성과 자동 방어 능력이 강하며, 혈기 죽기(Blood DK)는 자신의 공격이 곧 회복이 되는 '자가 힐 탱커'입니다. 이런 탱커 다양화는 이후 수많은 MMORPG가 '탱커 안에서도 여러 아키타입을 제공'하는 방향으로 설계하게 만든 전례가 되었습니다.각 탱커가 다른 종류의 피해감소와 어그로 관리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습니다[^Protection Paladin Tank Guide — The War Within (11.2.5)]. 탱커가 여러 종류로 나뉘며 게임 메타도 더 복잡해졌습니다. 어느 탱커는 광역 위협과 잔몹 처리에 강하고, 어느 탱커는 단일 보스 상대에 더 강하며, 어느 탱커는 특정 마법 피해에 강한 식입니다. 이는 한편으로 플레이어에게 선택지를 제공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메타 탱커'와 '비주류 탱커'를 만든다는 부작용도 있습니다. 커뮤니티에서는 늘 '어떤 탱커가 현재 패치에서 최고인가?' 같은 논의가 반복되고, 개발팀은 메타가 한쪽으로 쏠리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수치를 조정해야 합니다. 이런 메타 논의는 탱–딜–힐 구조가 단순하다고 해서 실제 밸런싱이 단순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폭발적인 성공 이후, 탱–딜–힐 삼위일체는 MMORPG 장르의 표준처럼 자리잡습니다. '탱커–힐러–DPS'가 더 이상 하나의 게임 디자인 패턴이 아니라, 플레이어가 MMORPG에 입문할 때 기대하는 기본 구조가 되어버렸습니다[^Rethinking the Trinity of MMO Design]. 다른 게임이 이 구조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오히려 유저가 '역할이 애매하다'며 혼란을 느끼거나, 기존 삼위일체 게임에서 가져온 경험을 그대로 투사하다가 시스템과 충돌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WoW 이후의 MMORPG들은 대부분 삼위일체 구조를 그대로 가져오거나, 혹은 이를 변형하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대표적인 네 작품의 방향성을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파이널판타지 14(FFXIV)는 전형적인 '정통 삼위일체 계승' 게임입니다. 공식 가이드와 입문서들을 보면, 이 게임의 잡은 탱커, 힐러, 딜러 세 역할로 명확히 나뉘고, 던전과 레이드는 항상 '한 파티당 정해진 수의 탱커와 힐러'를 요구합니다. FFXIV에서 탱커는 어그로를 유지하고 파티를 지키는 역할, 힐러는 생존을 책임지는 역할, 딜러는 피해와 기믹을 담당하는 역할입니다[^Beginner's Guide To DPS, Healer, And Tank Roles In Final Fantasy XIV]. 그러나 이 게임이 WoW와 다른 점은, 각 역할 안에서 플레이 경험을 크게 차별화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힐러만 해도 화이트 메이지(순수 회복형), 학자(방어막+요정 컨트롤형), 점성술사(버프형), 현자(장벽+공격형)처럼 매우 다른 스타일의 잡으로 나뉩니다. 또, 힐러에게도 적극적인 딜 사이클을 요구하고, 탱커에게도 공격 스킬을 충분히 제공해 '역할은 정해져 있지만, 그 안에서의 플레이는 딜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인상을 줍니다. 이런 설계는 삼위일체 구조의 장점을 유지하면서도, 각 역할이 덜 지루하고 덜 일방적인 느낌을 주기 위한 타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길드워 2'는 삼위일체 구조에서 벗어나려는 대표적인 시도입니다. 개발 초기부터 공식 블로그와 인터뷰에서 '전통적인 탱커–힐러–딜러 구조가 없는 MMORPG'를 목표로 한다고 밝혔고, 실제로 출시 당시에는 전담 힐러와 전담 탱커를 두지 않고, 모든 클래스가 자기 치유와 회피, 지원 능력을 적당히 가지도록 설계했습니다. 개발팀은 이를 '대미지, 지원, 컨트롤' 세 축으로 설명했습니다[^Do you think the non-trinity system failed because of damage stat system?]. 하지만 실제 메타는 달랐습니다. 길드워 2에서는 '빠르게 적을 죽이는 것이 곧 최고의 방어'가 되었고, 게임 내 스탯과 장비 구조도 결국 공격력과 치명타, 피해 증가를 우선시하게 만들었습니다. 논 트리니티 시스템이 실패한 이유는 대미지 스탯 설계 탓'이라며, 방어나 지원 스탯의 효율이 공격 스탯에 비해 너무 낮아 대부분의 플레이어가 결국 딜 위주의 세팅을 하게 되었습니다[^Do you think the non-trinity system failed because of damage stat system?]. 그 결과 길드워 2도 고난이도 콘텐츠에서는 사실상의 역할 분화를 다시 도입하게 됩니다. 레이드와 스트라이크 미션에서는 특정 직업이 힐과 버프를 전담하고, 특정 직업이 탱킹(보스 타겟을 잡는 역할)을 맡으며, 나머지는 딜러로 구성하는 구조가 자연스럽게 형성됐습니다. 즉, 삼위일체를 제거하려는 시도는 'UI와 명칭에서는 사라졌지만, 메커니즘과 메타에서는 여전히 존재하는' 모순 상태로 귀결되었습니다.

'로스트아크'는 삼위일체 구조를 다른 방향으로 변형한 사례입니다. 이 게임에는 전통적인 의미의 '전담 탱커'가 없습니다. 대신, 건슬링어나 버서커 같은 딜러 클래스와 함께, 바드와 홀리나이트(팔라딘) 같은 지원 클래스가 파티를 뒷받침합니다. 바드는 회복과 버프, 디버프를 담당하는 정통 서포터로, 팔라딘은 방어 버프와 보호막, 피해 감소를 제공하면서도 일정 수준의 딜을 낼 수 있는 하이브리드입니다[^The Ultimate Lost Ark Tier List for Beginners]. 또 다른 특징은 건랜서 같은 클래스가 '사실상의 탱커'로 인식되지만, 서양 MMORPG의 탱커처럼 어그로를 독점하고 전투를 완전히 통제하는 구조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건랜서는 팀 보호와 방어적인 유틸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각 유저가 자신의 생존을 직접 책임지는 쪽 설계가 강합니다[^2025 Lost Ark Class Selection Guide | EVERY Single Class Showcased!]. 이런 구조는 '탱커'라는 명시적 역할을 없애고, 대신 모든 플레이어에게 높은 회피와 패턴 숙지를 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예입니다. 하지만 지원 역할(바드, 팔라딘)은 여전히 부족 직군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고 이는 삼위일체에서 '힐러/서포터 부족'이라는 문제가 변형된 형태로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The Ultimate Lost Ark Tier List for Beginners]. 아마존의 '뉴 월드(New World)'는 처음에는 전통적인 클래스 시스템 없이 무기 기반 빌드로 설계된 게임이었습니다. 이론상으로는 어떤 무기 조합이든 자유롭게 선택해 플레이할 수 있었고, 역할 제한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통적인 삼위일체 역할이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습니다. 힐러는 라이프 스태프를 사용하고, 탱커는 소드, 쉴드와 헤비 아머를 사용하며, 딜러는 양손 무기나 원거리 무기 조합을 사용하는 식입니다. PvE 그룹 콘텐츠용 힐러 빌드가 '필수'처럼 다뤄지고, 탱커와 딜러 빌드가 그 뒤를 따르는 구조를 볼 수 있습니다[^New World Healer Build 2023 - The Ultimate Guide for PvE]. 유튜브의 롤 가이드 영상에서도, 뉴 월드에서 탱커, 힐러, 딜러가 어떤 역할을 맡는지 자세히 설명하며 특히 힐러의 역할을 '모두를 최대한 오래 살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역할'로 정의합니다[^New World Role ESSENTIALS - Things EVERY Tank, Healer & DPS Need To Know!]. 이는 시스템이 클래스 선택을 강제하지 않아도, 플레이어와 메타가 결국 삼위일체 구조를 재구성한다는 점을 잘 보여줍니다.

정리하자면, MUD에서 첫 역할 구조와 어그로 시스템이 생기고, 에버퀘스트에서 '탱–힐–컨트롤' 삼위일체가 완성되었으며,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가 이를 '탱–딜–힐'로 단순화해서 장르 표준으로 만들었습니다. 이후 파이널판타지 14는 이 구조를 충실히 계승하면서 각 역할의 플레이 경험을 깊게 만들었고, 길드워 2와 로스트아크, 뉴 월드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삼위일체를 변형하거나 제거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메타와 플레이어 행동을 보면, 역할 구조는 이름과 UI를 바꾸더라도 여전히 '앞에서 버티는 역할, 뒤에서 화력을 담당하는 역할, 파티를 유지시키는 역할'이라는 세 축으로 돌아오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런 역사적 흐름을 이해하면, 탱–딜–힐 구조가 단순히 관성 때문에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온라인 협동 전투라는 조건에서 매우 강력한 설계 도구라는 점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MUD1][^Multi-user dungeon][^The Game Archaeologist: A brief history of Multi-User Dungeons][^Multi-User Dungeon (MUD) (1978)][^MUD1 (1978)][^Mud Connector FTPLIST 3/31/96][^Non-serious Gripe: The "Holy Trinity" in MMOs was never healer/dps/tank.][^Did the Holy Trinity predate WoW?][^Beginner's Guide To DPS, Healer, And Tank Roles In Final Fantasy XIV][^Guild Wars 2: Fix the (Un)holy Trinity][^2025 Lost Ark Class Selection Guide | EVERY Single Class Showcased!][^New World Role ESSENTIALS - Things EVERY Tank, Healer & DPS Need To Know!][^ROBLOX is a MUD: The history of virtual worlds, MUDs & MMORPGs][^Do you think the non-trinity system failed because of damage stat system?][^Rethinking the Trinity of MMO Design][^Is anyone else hoping they go back to the old "Holy Trinity" style? Instead of this DPS meta we have now?][^Originality Going Wrong | GW2's History With the Holy Trinity][^The Ultimate Lost Ark Tier List for Beginners][^Roles in an MMO Raid Team: Tank, Healer, DPS]. 이제부터 탱-딜-힐 구조를 공식과 지표 관점에서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