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웨이
한참 전에 그 회사에서 만들던 프로젝트 하나를 접고 그 다음 프로젝트는 도저히 답이 없어 보여서 - 심지어 책에 언급조차 되지 않음 - 재빨리 탈출한 적이 있었습니다. 첫번째 프로젝트는 책에서 언급한 처음으로 ‘비상 체제’를 도입한 그 프로젝트였고 비상체제 선언 후 ‘3명/일’의 속도로 팀이 사라졌습니다. 팀 전체 크기가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에 이후 4주 정도가 지나자 더이상 팀에 남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좀 갑갑한 기분이 들어 카지노 라이크라는 글을 남겼었습니다. 저는 수많은 몇 백명에 달하는 ‘퇴사자’들 중 한명이었고 이제 종이 한장한장에 기록된 시간을 기준으로 훨씬 먼 미래에서 온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는 잠깐 저곳을 스쳤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당시 판교로 이사와서 일하던 같은 건물의 같은 층의 같은 쪽 근처 자리에서 지금은 다른 회사의 다른 프로젝트에서 일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런 기록이 항상 그렇듯 이런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입장과 승자의 시각이 진하게 베어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장단점을 이야기할 것은 아니고 그냥 특징입니다. 높은 위치에 계신 분들은 항상 자신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고 다른 모든 사람들의 말을 귀기울여 들으며 이를 바탕으로 충분한 고뇌를 거쳐 여러 가지를 결정한다고 말하지만 또 이를 다른 관점에서 보면 정말 오랫동안 생각하고 나서 거의 내 이력서를 업데이트하고 몇몇 회사에 제출할 준비를 완료하고 나서야 직접 메일을 쓸 수 있는 대상입니다. 그 정도 용기가 있어야 승자의 기록에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 올릴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항상 느낀 것은 노동자들에 대한 이중적인 시각이었습니다. 이런 이중적 시각은 한국에서 워낙 흔한 나머지 누구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지만 또 달성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인재가 노동자와 다른 점은 대체불가능함이고 또 이 차이에 힘입어 생산성을 유지할 수 있다면 시간을 돈으로 바꾸는 노동의 근본적인 형태와는 조금 다른 노동형태를 보여도 큰 무리는 없다는 신호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의 생산성이 비슷하다면 장시간 노동하는 사람의 생산성이 더 높다고 평가되며 개개인의 생산성을 정량적으로 평가하지 않는 한 자연스럽게 정량적으로 평가 가능한 지표 하나에 매달린 평가를 하게 됩니다. 이 두 가지 신호는 서로 공존할 수가 없습니다. 일정 수준 이상의 생산성을 유지하려면 노동시간을 조정해 노동시장에서 자기 자신의 상품가치를 유지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또 한가지 동시에 만족할 수 없는 조건 중 하나는 대체불가능성입니다. 대체불가능함이란 제가 이해하는 관점에서는 이 스탭이 빠질 경우 사업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래서 이를 노동자와 구분해 인재라고 표현하고 있다고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갖은 고통을 의미하는 수식어의 동원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인재일 경우 나타날 근본적인 사업의 지속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사업에 실패해 ‘대체불가능’하다고 주장한 인재들을 구조조정하는 모습을 보며 과연 그들이 생각하는 인재란 노동자와 다른가 하는 고민을 했었습니다.
그 후로 몇 년 동안 이 주제로 고민해왔고 안타깝지만 여전히 높은 사람이 되는데 실패한 저는 대체불가능함음 개발에 참여하는 개개인의 노동자성을 제거하는 방법으로써 사용되는 흔한 표현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 말하는 인재상이란 장시간 노동 가능하고 대체불가능함으로 쉽게 기만되며 필요한 시점에 노동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으면서도 낮은 기본급 수준에 만족하는 그런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이 점은 저 조직에 몸담아 잠깐 동안 드랍된 프로젝트에 기여하는 내내 저를 고민과 혼란에 빠지게 만든 주제였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좀 솔직해질 필요도 있습니다. 현대 게임산업에 대체불가능한 인력이 있습니까?
MMO의 특성을 일종의 복잡계 문제로 정의한 접근은 꽤 합리적이었습니다. 굳이 MMO로 한정하지 않더라도 게임에 시간축에 대응하는 성장 메커닉이 포함되는 순간 그 어떤 게임도 이와 비슷한 운명을 피하기 어렵게 됩니다. 우리들의 직관은 근본적으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에 적합하지 않고 지금도 수많은 데이트레이더들이 주식판에 쉴 새 없이 돈을 붓고 있습니다. 다만 게임의 성공가능성을 흥행산업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MMO 시스템을 복잡계 문제로 정의하면서도 여전히 이를 개발하는 프로젝트들에 한결같은 정성적인 잣대를 들이대 ‘모든’ 프로젝트를 절벽으로 밀어 떨어뜨리는 과정은 그 과정에 아주 잠깐이나마 끼어있었던 나날들을 생각하며 썩 훌륭하지는 않은 방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서평을 인용하자면 책 제목의 ‘회사이름웨이’는 회사에서 개발한 (거의) ‘모든’ 게임의 성공을 가로막았고 이 방법의 오류에 빠지지 않은 장르, 인력, 조직을 갖춘 프로젝트만이 이들의 ‘방법’에 의해 좌초되지 않고 무사히 출시되어 상업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요즘 세상에는 복잡계 문제에 속하는 기상예보를 위해 새로운 예측모델을 개발하고 수퍼컴퓨터를 사용해 시뮬레이션하며 현대에는 기계학습을 통한 패턴매칭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전 시대에 비해 비가 올지 말지를 좁은 지역 안에서는 3시간 단위로 알 수 있습니다. 내일 비가 올지 안 올지는 그저그런 문제지만 이제는 오후 두시에서 다섯시 사이에 라이딩을 나가면 확실히 비를 맞게 됨을 미리 알 수 있는 시대입니다. 반면 지속적으로 개발중인 프로젝트의 성공 가능성을 예측하는 방법을 도입하려 시도했으면서도 미래에서 온 저는 이미 알고 있는 속된 말로 폭망한 프로젝트가 회사의 미래로 일컬어지는 상황이 상당 기간동안 지속되었다는 점은 이들의 예측모델 도입 시도가 의미있었는지를 의심하게 만듭니다. 이런 노력이 잘못되었다는 것도 아니고 이런 노력이 불필요하거나 불가능하다는 것도 아닙니다. 사업을 지속하는 입장에서 그 대상이 아무리 흥행산업이라 할지라도 제품의 성공가능성을 예측하지 않고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이러한 시도가 사내 개발조직이 사기를 유지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회사가 커지면 복지수준을 올리기도 좋고 또 프로젝트를 드랍시키기도 더 편해집니다. 하지만 그랬던 순간은 이들의 방법을 무시한 프로젝트 하나가 무사히 출시되기 전까지는 항상 조직을 공포 분위기로 내몰았습니다. 경영진의 마일스톤을 통한 견제는 프로젝트의 가능성을 평가하고 잘못된 점을 미리 발견해 수정할 기회가 되는 대신 - 한때나마 이렇게 생각한 자신이 너무나도 나이브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 다음달에 타사에 이력서를 제출해야 할지, 그리고 이번주에 진행한 작업을 포트폴리오 모양으로 각색한 문서를 준비해야할지 말지를 검토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예측 시도와 견제들로 인해 몇몇 팀은 인력구성에 신기한 특징을 가지게 됐습니다. 이상적인 개발팀은 서로 다른 경험의 길이와 깊이를 가진 사람들이 뒤섞여있어야 합니다. 연차가 높은 사람들은 경험을 통한 문제해결에 기여할 수 있고 그보다 더 연차가 긴 사람들은 나름의 인사이트를 통한 프로파간다를 팀에 심어 팀을 이끌어나갑니다. 하지만 이들은 속도에서는 연차가 낮은 분들을 따라갈 수 없고 이들이 각자 조화를 이룰 때 올바른 방향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리거나 잘못된 방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빠르게 올바른 방향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에서 이야기한 여러 견제정책들로 인해 이 조치들이 뭔가 잘못됐다고 느낄만한 팀의 허리를 담당할 연차들이 일지감치 도망치고 아카데미를 갓 졸업한 1년차들과 이제 이력서가 완전히 꼬여 공개시장에서는 쉽사리 자리를 찾지 못하는 높은 연차들만이 회사에 남아 이들 사이에 언어를 통역해줄 사람들마저 없는 상태이기 일쑤였습니다.
이전에 카지노 라이크에서 언급한 적 있지만 이 프로젝트의 목표는 이상했습니다. 회사에서 보유한 원작 지적재산권에 기반한 모바일게임을 개발해야 했습니다. 까놓고 이야기하면 현대에는 수집형 게임이라고 불리는 소위 도탑전기의 성장시스템을 배껴 핵심을 만들고 그 껍데기를 바꾼 게임을 개발하는게 목표였습니다. 이게 시스템디자인 관점에서 핵심 요구사항이었고 프로젝트 자체에 대외적으로 부여된 목표는 압도적인 그래픽과 촘촘한 성장경험이었습니다. 이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시스템디자이너인 저와 몇몇 사람들은 이제 이 촘촘한 성장경험이 대강은 어떻게 생겨먹은 것인지 어렴풋이나마 이해합니다. 이걸 아주 잘 만들 자신은 없지만 이걸 아주 잘 못 만들어 런칭 직후 게임이 밸런스로 인해 붕괴하게는 만들지 않을 수 있게 됐습니다. 하지만 이 책의 시점을 기준으로 훨씬 미래에서 온 저는 여전히 압도적인 그래픽이 무엇인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또 당시에 위에 이야기한 시스템디자인 관점에서 핵심 요구사항 이외의 목표에 대해서는 경영과 일선 실무자들 사이에 교감이 이루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일선에서는 저 압도적 그래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습니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우리는 압도적인 그래픽이 무엇인지 몰랐을 뿐 아니라 그걸 만들어내기 위해 어떤 연구개발을 해야하는지도 몰랐습니다. 결과를 상상하기 이전에 결과를 상상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도 몰랐고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아예 뭔지 알 수 없는 목표에 집중하기보다는 시스템디자인 관점에서 명백한 요구사항에 집중했습니다. 덕분에 도탑전기 시스템을 낱낱히 해체했고 동작 원리를 파악했으며 그 일부는 훗날 다른 수집형 게임을 개발해 출시하는데 - 출시했다는걸 보면 예상하실 수 있겠지만 다른 회사의 다른 프로젝트였습니다. 그들의 ‘길'에 따라서는 출시할 수가 없었어요 - 큰 도움이 되기는 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면서도 여전히 걱정스러웠습니다. 업계 베테랑들이 모여 개발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어지간해서는 경험하기 어려운 괴물같은 속도로 게임을 만들어냈습니다. 하지만 소위 개발팀을 견제하기 위한 마일스톤의 벽을 넘을 수가 없었습니다. 몇 번의 마일스톤을 반복하면서 우리는 영원히 그 ‘압도적인 비주얼’을 만들어내지 않았고 - 그게 뭔지 몰랐으니까 - 이건 우리들을 소위 ‘견제’에 극도로 취약하게 만들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이 책에 이름이 나올법한 등장인물들은 사업을 할 줄 알았지만 그 사업이 사람에 의해 움직인다는 사실을 등한시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어쩌면 너무 일찍 ‘내 목을 걸지 않으면 이야기할 수 없는’ 사람들의 반열에 올라갔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도 해봅니다만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비상체제를 선언한 이유는 누가 봐도 납득할만했습니다. 퍼블리셔를 포함한 내부 테스트에서 나쁜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런 정성평가는 한 가지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나타나면 이와무관한 나머지 평가항목들도 손쉽게 피해를 입습니다. 이를 알기에 우리들은 이 정성평가를 조작할 수 있는 방법도 알고 있었고 다른 상황에서는 이 방법을 소극적으로, 하지만 고의로 사용할 때가 있었습니다. 한 가지 5점까리 엣지포인트 한 가지 항목을 집요하게 보여주면 나머지 3점짜리 항목들을 4점으로 조작해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직접 숫자에 손대지 않아도 사람들이 3점 대신 4점을 적게 만드는 방법을 알고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이 모든게 반대로 작동했습니다. 우리는 너무 순진했고 우리가 정성평가에 우리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양념’을 치지 않아도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압도적 그래픽’이란 말을 듣고 테스트를 진행한 회의실에 들어온 게임을 플레이하는 모양으로 보아 이런 모바일게임을 딱히 플레이해봤을 것 같지도 않은 사람들이 당시로써는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그저그런 3D 그래픽의 도탑전기를 플레이하면서 그래픽 항목을 제외한 4점짜리 항목에 3점을 주기는 너무나도 쉬웠습니다. 정성평가는 처참했고 이는 드랍에 앞서 비상체제를 선언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처음으로 시도한 비상체제가 ‘3명/일’의 확실한 결과를 내며 개발팀을 붕괴시킨데는 이 과정에서 사업의 백엔드는 경영과 개발리더십이 담당하지만 그 프론트엔드에도 사람이 있다는 점을 간과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이야기했지만 우리들은 이미 우리의 운명을 가를 저 정성평가의 결과를 알고있었습니다. 회의실에 들어오는 굳은 표정의 사람들에게 재롱이라도 좀 떨어보려고 다과류를 준비했지만 그 과자를 살 돈도 없어 낱개포장된 싸구려 과자류를 사다가 잘 분리해서 휴게실에 쌓여있던 일회용 접시에 사람 수에 맞춰 소분해 게임을 플레이할 전화기 옆에 갖다놓으면서 맛있게 드시라고도 해봤습니다. 이상한 기분이었어요. 마치 우리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릴 판사들 옆을 돌며 기요틴 날을 날카롭게 갈아 목에 두번째 칼날을 맞지 않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모양새였습니다.
이 순간에 다다르기 위해 책에 수없이 언급된 망한 다른 팀처럼 우리도 미친듯이 일했습니다. 다들 미래를 어렴풋이는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 끝이 팻맨에 맞아 한번에 주변이 하얗게 변하며 맞는 결말일지 아니면 임팔 전선에서 밤중에 악어에게 물려 고통스럽게 맞는 결말일지는 몰랐습니다. 하지만 알 바 아니었습니다. 우리들은 제대로 갖춰지지도 않은 배포환경속에서 - 배포환경 구축은 이번 마일스톤이 아니었으므로 - 비타500 상자에 가득 담긴 폰에 하나하나 케이블을 연결해 게임을 설치하며 동이 터오는 광경을 지켜봤습니다.
그런 우리들이 어두컴컴한 회의실에 끌려들어가 본 게 바로 비상체제 선언입니다. 운명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 방에서 일어난 선언과정은 이미 약해질대로 약해진 우리들에게는 폭력적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우리의 노동자성을 부정해가며 각자 인생의 일부를 희생해 최대한의 시간과 사고의 대부분을 이 3점짜리 정상평가서를 위해 달려왔는데 그 결과로 우리가 들은 것은 앞으로는 정시출근할것, 밥시간 잘 지킬것, 열심히 일할것, 몇 주 뒤까지 상황이 좋아지지 않으면 - 좋아진 상황의 정의는 뭔지 모르지만 - 드랍될 거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때 우리들 중 정시출근을 못 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이유는 같은 날 퇴근해서 같은 날 출근해야 했기 때문이었고 또 식사시간을 지키기 어려웠던 이유는 당시 구내식당은 우리가 따로 떨어져있던 건물이 아니라 본사가 위치한 다른 건물에 있었기 때문이며 가장 먼 구내식당까지는 200미터도 넘게 걸어가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픽이 압도적이지 않았던 이유는 우리들 중 누구도 그걸 어떻게 하는지 몰랐고 그 목표를 정하는데 동의하지 않았으며 그 목표를 달성할 아무런 가이드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목표를 제외한 나머지 전체중에서 우리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에 매달렸지만 위에 이야기했다시피 이 엣지포인트 하나로 4점짜리 평가항목에 3점을 받으며 정시출근, 식사시간준수, 상황이 좋아지지 않으면 드랍 같은 폭력적이고 또 기만적인 제안을 일방적으로 받았습니다. 마치 약관을 업데이트했으니 동의하지 않으면 탈퇴하라는 여러 회사들의 친절한 메일 같았습니다. 여러 사람들은 이 폭력성에 부당함과 모욕감을 느꼈고 결과는 바로 숫자로 나타났습니다. ‘3명/일’.
마일스톤에 의한 견제는 지금와서 생각해도 이상합니다. 마일스톤 목표는 달성과 미달성 같은 방식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어디선가 읽은 글에서 소프트웨어 개발일정은 기능과 일정으로 평가될 수 없고 마치 최외곽전자의 위치를 추측하는 것처럼 기능 목록과 목표 일정, 그리고 이 일정에 각 목표가 달성될 확률로 표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첫번째 마일스톤을 끝낸 순간부터 우리들은 매 마일스톤마다, 매주마다, 또 매일마다 수시로 변경되는 요구사항과 이 요구사항을 고려하지 못해 점점 더 우리들의 발목을 붙잡는 잘못된 코드베이스와 씨름하게 됩니다. 어떤 피처는 이미 개발된 나머지 요소와 잘 어울려 그 복잡도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개발할 수 있는 반면 어떤 피처는 분명 단순해보였는데 장막을 한 장 걷고 들어가보니 내부가 난장판이라 그저그런 편의기능일 줄 알았는데 비용은 마일스톤 전체의 두자릿수 퍼센트를 차지할 때도 있습니다. 이건 마일스톤을 시작해 실제로 관측해보기 전에는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이 파악과정마저도 마일스톤에 포함된 이상 마일스톤 계획이란 애초에 달성할 수 있는 형태가 아닙니다. 마일스톤 계획이 달성가능해지고 또 이를 개발팀에 대한 견제수단으로 활용하려면 위에서 이야기한 ‘장막을 걷는’ 또는 ‘한번 까보는’ 단계가 마일스톤 안에 들어있으면 안됩니다. 하지만 이들 또한 실제 개발과정과 명백하게 구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즉 이 상황을 완화할 명백한 방법을 개발하지 않는 이상 마일스톤은 항상 기능, 일정, 확률로 평가되어야 하며 확률이 빠진 마일스톤 목표는 항상 거짓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마일스톤 점검을 짧은 주기로 반복하겠다는 말의 의미는 위에 이야기한 확률의 존재를 의도적, 또한 체계적으로 무시해 사실상 비상체제가 선언된 시점으로부터 프로젝트 드랍이 확정되는 시점까지 사람들의 희망을 완전히 무력화시키고 이 기간을 타사에 이직을 시도할 수 있는 기간으로 추가 제공하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실제로도 그렇게 동작했습니다. 저 비상체제 선언 회의에서는 제가 아는 것만 서로 다른 녹음파일 3개가 존재함을 파악했고 자리에 돌아와보니 개발팀 인원들 중 한 절반쯤 되는 사람들의 모니터에 오렌지색 사이트 - 당시엔 게임잡 타이틀이 오렌지색이었음 - 가 떠있었습니다. 관대한 경영진은 비상체제라는 이름을 빌려 우리들에게 타사로 이직을 준비할 충분한 기간을 제시한 셈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괴물같은 속도로 개발했던 초기 몇 마일스톤보다도 더 높은 생산성을 이 마지막 몇 주 동안 보였습니다. 우리들 중 그 누구도 초과근무를 단 1초도 하지 않았지만 개발은 그 어느때보다도 빨랐습니다. 칩거에 들어간 리더십을 대신해 누구도 우리에게 이미 부여된 목표를 뒤흔들지 않았고 우리들은 원래 우리가 집중했던 목표 - 도탑전기 복제 - 에 매달렸습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정성평가 점수를 폭망하게 만든 바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는 것을 우리들 스스로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저 하루에 9시간동안 - 휴게실의 간식을 먹으며 점심시간에도 일했으니까 - 도탑전기를 열심히 베껴 순식간에 도탑전기를 만들어냈습니다. 팀이 속도를 내면 그렇게도 개발할 수 있다는 걸 배운 소중한 경험이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후에도 일시적으로 아주 빠른 개발이 필요할 때 함께하는 멤버들에게 이 때의 경험을 ‘뇌 없는 개발’이라고 부르며 일시적으로 이 방법을 사용해 게임에 구색을 갖출 수 있다고 설득하기도 했습니다.
프로젝트가 드랍되고 그때까지도 팀에 남아있던 기획자였던 저는 개발 문서들을 정리해야 했는데 첫 페이지에 이미지를 하나 걸었습니다. 뭐 결국 이렇게 끝나긴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일선 개발팀이 너무 순진하게 굴면 어른들의 개발과 견제의 균형 속에 정성평가의 장난 한 방에 팀이 단번에 무너질 수 있음을 배웠습니다. 또 하루하루 팀이 말 그대로 ‘무너져’가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가장 높은 생산성을 보이며 폭발하는 별처럼 찬란하게 빛날 수 있음을 배웠고 그런 미래가 보이는 상황 속에서 함께하는 멤버들을 다독이는 요령을 조금이나마 배웠습니다. 또 앞으로 2주만 개발하면 도탑전기 초기 런칭 수준에는 충분히 도달할 수 있음을 마음을 담아 히틀러같은 말투로 사람들에게 설명해 끝까지 최고의 생산성을 보여줄 사람들이 피식거리며 “너 말 존나 잘한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음도 배웠습니다. 하지만 이와는 관계없이 건조하게 그동안 우리가 만든 문서들 마일스톤 별 목표, 이에 해당하는 주요 의사결정 기록과 이에 따른 문서, 데이터, 리비전넘버 등을 빠짐없이 기록했습니다. 프로젝트가 접히고 이제 곧 이 모든 데이터에 접근권한이 사라질 예정이었기 때문에 문서를 서둘러 마무리했습니다. 그리고 제출 직전에 마지막으로 문서 맨 앞에 있던 이미지를 고쳤습니다.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때의 감정을 떠올리면 목 뒤가 뜨뜻해집니다. 그때 먼저 회사를 떠나던 분들과 만나 커피 한 잔 씩을 하며 - 분명 높은분들께서 티타임도 줄이라고 했지만 하루에 퇴사자들과 몇 번씩 티타임을 해도 결국 이때 생산성이 가장 높았음 - 들은 여러 감정들이 함께 떠오르며 이번에는 목 뿐만 아니라 등짝 전체가 뜨뜻해지고 눈이 건조해집니다. 이 부분이 지나며 책에서는 품격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합니다. 프로젝트 마지막 날 기획 정리문서 맨 앞 이미지를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바꾸며 “야 씨발 청계산 밑에 고깃집에 가서 소고기나 먹자” 라고 외치며 프로젝트 리파지토리에 접속을 끊고 일어났습니다만 또 그런 상황 속에서도 나, 우리, 그리고 경영진이 지킬 품격 또는 품격있는 삶이란 무엇이었을까요.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에 승복하고 수퍼셀처럼 망한 프로젝트 팀원들을 축하하며 다독여주기라도 해야할까요?
당장 내부에 자리가 거의 없어서 다들 각자 사는 동네의 고용보험 사무소에 찾아가 한시간짜리 “고용보험에 사기치면 뒤짐요” 교육을 받아야 하는 이 상황에서요? 그나마 회사 안에서 옮길 수 있었던 소수 자리들은 이미 책을 읽어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전부 다’ 망했고 우린 이미 이 시점에 이들이 상태가 아주 안 좋음을 전해들어 알고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실패를 축하할 수가 없었어요. 다만 정시출근해서 성실하게 일하라는 높은분들의 엄포와는 달리 우린 업무시간 도중에 여러 차에 나눠 타고 청계산 밑에 무슨 고깃집에 가서 낮부터 소고기를 구워 먹고 또 누군가는 눈에 안 띌 정도로만 살짝 반주를 걸치고 또 그 근처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며 간만에 오후의 햇살을 좀 받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접속이 끊긴 리파지토리 덕분에 더이상 할일이 없어져 스팀을 깔고 스페이스엔지니어 멀티플레이를 좀 하다가 퇴근했습니다. 이날의 기억을 되살려보며 또다시 고민해봅니다. 과연 품격있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그 품격이란 우리들이 소고기 좀 안먹고 업무용 장비에 스팀 좀 안 깔고 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이었을까요.
개인의 평가가 팀과 프로젝트의 평가에 전적으로 연동되는 정책 역시 지금 돌아보면 그저 ‘허무맹랑하다’고밖에 이야기할 수가 없습니다. 처음부터 반복해서 게임 개발업은 근본적으로 흥행산업이고 고객에게 전달되기 전에는 성공 여부를 판별하기 아주 어려우며 성공 여부에 따라 대박, 중박을 터뜨리거나 아니면 완전히 그 아무것도 남지 않는 그런 산업이라고 해 왔습니다. 또한 고객에게 제품이 전달되기 이전에도 내부 테스트들 역시 겉으로는 그럴싸해보이지만 근본적으로 정상평가이므로 우리가 나쁘게 마음먹으면 목표와 무관한 소수의 엣지포인트를 악용해 점수 전체를 조작할 수 있고 위에 이야기한 대로 완전히 그 반대로 동작할 수도 있습니다. 이 점수 자체가 의도적인, 또는 의도적이지 않은 조작에 너무나 취약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우리들의 평가가 연동돼있으면 내 평가 역시 흥행산업과 다름없잖아요. 인텔의 엔디 그로브 전 회장의 말처럼 결과로써 평가하는건 올바른 접근처럼 보입니다. 그러면 내 행동에 관계 없이 결과로 평가받는다면 내가 ‘인재’로써 생산성을 발휘하고 이 높은 생산성에도 불구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이 과정에 무슨 의미가 있게 될까요. 개인적으로 이런 조직을 ‘아카데미’라고 부르는데 이유는 사람들을 실무를 통해 잘 훈련시킨 다음 좀 쓸만할 때가 되면 평가가 폭망해 타사로 쉽게 이직해 능력을 발휘하기를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이 평가방법은 회사를 훌륭한 아카데미로 만들었고 개인적으로 한동안 그 덕을 좀 봤습니다.
회사를 처음 세우게 된 계기 중 하나를 제 언어로 해석하면 실제로는 우리 게임의 고객도 아닌 높은 분의 의도에 맞추기 위해 사용하지도 않을 부분을 만들고 우리들이 동의하지도 않는 기능을 추가하기를 반복해 게임이 엉망으로 변하고 이를 수습하는 마일스톤을 추가하고 회계라면 명백한 범죄인 보고용 버전과 실제 개발용 버전을 분리하는 등의 행동을 하지 않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이건 너무나도 쉽게 깨집니다. 경영진은 자신의 자리를 이해하고 항상 정립된 회사의 보고체계를 거쳐 자신의 의견을 피력해야 합니다. 너무 작은 회사나 너무 작은 프로젝트에서 오래 구른 높은 분들이 종종 여전히 자신이 그런 조직에 속해있다고 생각하고 체계를 무시하며 의견을 직접 전달하곤 합니다만 결국 이건 큰 회사의 높으신 분들이 하시는 행동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단 한 번이라도 이런 실수를 저지르면 이제 이 팀은 팀이 해제되는 순간까지 고객을 위한 제품을 고민하지 않게 됩니다. 어떤 회의를 하던 모든 의견에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디즈니였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이런 여러 가지 체험 끝에 회사가 가진 비전이 똥 참는 개소리로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 또한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이런 상황에서 인간으로써 품격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또 한번 체감하게 됩니다.
이 책을 읽는 우리들은 미래에서 온 사람들이므로 책의 남은 부분이 점점 얇아짐에 따라 이제 이 모든 옛 일이 아름답게 미화될 그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품격의 의미를 생각하며 이 마지막 부분을 읽을 때는 물을 좀 마시고 화장실도 좀 다녀와 머리와 온몸을 좀 식혔습니다. 근본적으로 이 책의 대부분은 모든 게임 프로젝트를 망하게 만든 여러 가지 접근에 대해 소개했습니다. 잘못된 시장예측, 기능과 비용이 함께 주어지지 않는 흔해빠진 (또한 영원히 반복되는) 실수, 조작에 취약한 정성평가, ‘압도적’인 개발을 위한 연구개발 필요성 무시, 실패한 인력에 대한 비인간적 대우, 인재를 외치기에 부끄러운 대우 등 개발사가 할 수 있는 온갖 실수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미래인인 우리들이 알고있는 단 하나의 게임이 이 모든 실수를 뚫고 출시에 성공했고 그 결과를 모두가 알고있습니다.
여기까지 타이핑할 무렵에 이르자 문득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품격이란 무엇일지 조금은 실마리를 잡은 것 같기도 합니다. 사실은 이 개인적인 원한으로 모두가 즐기는 저 유명한 게임을 결국 구입하지 않았습니다. 영원히 치킨을 먹을 일도 없었죠. 게임을 사진 않았지만 결국 이 파란 책을 사서 끝까지 읽는데 성공했습니다. 끝부분에 다다르기 전에 물도 마시고 화장실도 다녀오고 에어컨 바로 앞에 서서 바람을 쏘였음에도 여전히 목 뒤가 뜨뜻하긴 하지만요. 하지만 이런 개인적인 옹졸한 원한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나오는 품격이란 혹시 이런건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축하합니다. 정말, 정말, 정말로 고생하셨습니다. 하지만 나의 옹졸함이 끝에 한마디를 붙이게 만듭니다. 하지만 치킨은 안 먹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