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멱살
살아오면서 제가 생각을 하는 방식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약점이 있을 거라고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뛰어남과는 너무나 멀었고 적당히 빈둥거리고 적당한 성적을 내는 그냥 적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냥 남들과 비슷했으니 이 상황에 대해 의문을 가질 이유가 없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일을 시작한 다음에도 대강 가장 많은 사람들이 받는 인사고과에 섞여 눈에 잘 띄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업계 초기에 종종 마주칠 수 있었던 극도로 뛰어난 분들을 부러워하며 저런 업무 결과를 흉내 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은 있습니다. 그런 분들의 일 하는 방식을 흉내 내기도 했었는데 어떤 방식은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었고 또 어떤 방식은 그때부터 흉내 내기 시작해 지금까지도 계속하고 있고 또 어떤 면에서는 제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변형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노력을 통해 생산성을 개선하는데 어떤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분명 다른 사람들은 같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덜 스트레스 받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걸 의심하기는 어려웠습니다. 항상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은 더 쉬워 보이기 마련이니까요. 종종 제가 보는 색상이 다른 사람들이 보는 색상과 다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만약 내가 보는 빨간색과 다른 사람이 보는 빨간색이 서로 다른데 서로 자기 뇌가 보여준 색상이 다름을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서로 빨간색이라고 표현하는 그 색상을 구분할 수는 있으니 혹시 서로 다른 색상으로 인지하더라도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겁니다. 후에 비슷한 이야기를 스펙트럼이라는 단편소설에서 만났습니다.
화이트노이즈가 집중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말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카페에서 일하면 집중이 더 잘 된다거나 빗소리나 파도 소리를 들으며 일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실제로 해보니 잘 되지 않았습니다. 일단 카페처럼 소음이 많은 곳에서는 어느 순간 그 소음을 듣느라 일 할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소음에 누군가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내 눈 앞에 있는 집중해야 할 일 대신 들려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서로 다른 테이블에서 여러 명이 제각각 동시에 이야기 하고 있다면 각각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있었고 이걸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눈 앞의 일에 집중하려고 해도 필요한 생각을 하는 대신 쉴 새 없이 주변 소음과 이야기를 듣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빗소리나 파도 소리는 의도와 달리 저를 편안하게 만들어 주지 못했는데 이 소리들은 오히려 이동할 때 들으며 정신이 너무 산만해지지 않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많은 사람들이 한 공간에서 일하는 사무실에서도 똑같이 일어났습니다. 그렇다고 카페에서처럼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으면 생계를 이어갈 수 없어 주위 소음에 덜 휘말리고 생각을 이어갈 수 있는 방법을 고안했습니다.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 머릿속으로만 생각을 할 수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저는 좀처럼 그럴 수 없었기 때문에 머리 만으로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손으로 글씨를 쓰거나 키보드를 두드리며 생각을 이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키보드를 사용할 때는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속도와 그 생각을 타이핑하는 속도가 비슷했기 대문에 머릿속 속도에 맞춰 생각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손으로 글씨를 쓸 때는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속도보다 손으로 글씨를 쓰는 속도가 느려 억지로 천천히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천천히 생각할 때 더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있었고 여기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방법은 꽤 잘 동작했는데 일단 주변 소음이나 말 소리에도 불구하고 생각을 이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중간에 방해를 받아 생각이 중단되더라도 노트나 위키에 그때까지 하던 생각의 덤프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방해 상황이 끝난 다음 몇 줄 위부터 다시 읽어 머릿속 상태를 방해 받기 전과 비슷하게 만든 다음 생각을 이어 나갔습니다. 또 어떤 결정을 내렸지만 결정 과정과 근거에 자신이 없을 때 덤프를 다시 읽으며 생각한 과정을 추적할 수도 있게 됐습니다.
머리와 손을 함께 움직이며 생각하는데 익숙해지자 어느 정도 소음이 있는 공간에서도 일할 수 있게 됐지만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손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며 생각할 때는 생각하는 속도에 따라 타이핑이 점점 더 빨라졌는데 키를 강하게 두드리는 습관과 어우러져 제가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주변에 큰 소리로 광고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재게 용건이 있어 다가왔지만 키보드가 부서져라 뭔가의 텍스트를 두드려 대고 있는 모습을 보곤 다시 돌아가곤 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물어보니 바빠 보였다고 하더군요. 실은 보는 것 만큼 바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생각하고 있을 뿐인데 손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으니 바쁜 것처럼 보였으리라는데 동의하긴 합니다. 이건 상황이 좋을 때 이야기이고 분명 제게 직접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에 방해를 받는 사람이 있었을 겁니다. 이런 상황을 의식하면서도 키보드를 두드리며 생각하는 방법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 방법은 제가 거의 유일하게 머릿속만 가지고 생각을 이어나갈 수 없는 상태를 돌파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하지 않으면 생계를 이어갈 수가 없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머릿속에 생각을 떠올림과 동시에 이를 그대로 텍스트로 바꿔 타이핑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단순히 텍스트를 그대로 타이핑하다가는 손목이 남아 나지 않을 것 같을 뿐 아니라 효율적이지도 않았습니다. 한참 생각을 진행한 다음에는 여러 페이지에 걸친 거대한 한 문단 짜리 빽빽한 텍스트가 남았는데 이건 나중에 도무지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냥 타이핑이 끝나고 결과를 얻으면 그냥 남겨뒀고 아무 용도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문장을 축약하고 블릿포인트 단위로 끊으며 블릿포인트 들여쓰기와 내어쓰기를 이용해 생각하는 동시에 생각에 사용한 텍스트를 어느 정도 구조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에는 거대한 한 문단이 남았지만 여기부터는 주제 별로 들여쓰기 된 블릿포인트 뭉치가 남기 시작했습니다. 빽빽한 한 문단 짜리 텍스트에 비해 블릿포인트는 다시 읽기도 편했고 키워드를 찾기도 편해졌습니다. 또 제 머릿속의 소리에 맞춰 블릿포인트 들여쓰기로 주제를 정리하다 보니 나중에는 같은 방식을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똑같이 정리하는데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회의 할 때 제가 회의를 진행하며 회의 자료를 보여주고 설명하면서도 동시에 의견을 말하고 회의록을 작성할 수 있게 됐습니다. 회의가 끝나는 순간 회의록을 공유할 수 있었는데 제게는 간단한 일이었지만 아무도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기분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실은 머릿속으로 생각을 못해서 이렇게 된 건데 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방법을 생각의 멱살이라고 부릅니다. 남들처럼 머릿속 만으로는 생각할 수가 없기 때문에 손으로 생각의 멱살을 잡고 질질 끌고 다니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의 멱살을 잡고 끌고 다니다 보면 바닥에 끌려 다닌 자국이 남는데 그게 생각하며 손으로 남긴 문서입니다. 왜 개인 위키에 그렇게 집착하는 걸까요. 왜 오랫동안 위키를 사용할까요. 생각의 멱살을 잡는데 텍스트를 타이핑해야 하기 때문이고 이 텍스트를 장기적으로 검색을 통해 재발견하고 서로를 키워드 단위로 연결해 이전에 했던 생각을 따라가며 분명 머리만 가지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할 수 있을 것 같은 한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도약하는 과정을 흉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걸 위키가 아닌 게시판이나 워드 문서 같은 곳에 기록했다면 키워드에 따른 생각의 도약을 머릿속 바깥에서 흉내 내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최근에서야 이런 상태를 부르는 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싼 돈을 내고 검사를 받아 이 상태의 정의에 꽤 잘 일치하며 여기에 속하는 비슷한 사람들과 비교해 청각 자극에 특히 약하다는 사실도 실험(검사)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너무 늦게 깨달았지만 그나마 지금까지 밥벌이 정도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생각의 멱살을 잡는 방법을 알아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상태는 아마도 평생 함께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처럼 한 자리에 가만 앉아 생각에 집중하고 오직 머릿속으로만 깊이 생각하며 추상적인 주제라도 머릿속으로 폭넓게 접근하기 어려움은 여전히 아쉽습니다. 한편으로는 손과 위키를 사용해 생각을 이어 가면서 생각 과정과 결과가 텍스트로 남아 있는 삶도 크게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