빽빽한 글의 용도
몇 주 전에 등대여권에 도장을 찍으러 팔미도에 다녀왔습니다. 인천에서 배를 타고 한 시간 좀 안 되는 시간 동안 배를 타고 가야 했는데 팔미도까지 운행하는 배는 물고기에 의해 삼켜지는 것 같은 모양이라 기억에 남습니다. 연안 부두에서 느낀 현재 시각은 2022년이었지만 배에 타는 순간 순식간에 1990년대로 돌아간 것 같은 분위기가 처음에는 부담스러웠지만 또 한편으로는 재미있었습니다.
배는 총 4층으로 이루어졌는데 지하는 기관실 및 스탭들을 위한 공간, 1층은 앉을 자리가 가장자리를 둘러싸고 가운데를 비워 둔 넓은 공간, 2층은 의자를 잔뜩 배치해 많은 사람들이 않을 수 있도록 한 공간, 마지막으로 3층은 옥상으로 바깥 바람을 맞을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1층의 넓은 공간 맨 앞에는 노래방 기계가 있었는데 이 공간이 왜 가운데를 비워뒀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이 배가 팔미도와 연안 사이를 왕복하는 유람선 역할을 하지만 때에 따라 이 배를 통째로 빌려 바다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한바탕 노는데 사용하기도 할 겁니다. 배에서 안내를 맡은 스탭님은 자신을 방송인이라고 소개하셨는데 나중에 보니 노래방 기계 근처에 이 분이 그려진 한 종편 방송사 프로그램 포스터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건 그렇고 배를 타고 섬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동안 카메라를 앞에 두고 이야기를 계속하시는 분을 봤는데 자세히 보니 잘 차려 입고 실시간으로 방송을 하고 계셨습니다. 시청자들에게 인사도 하고 지금 어딜 가는지, 지금 뭘 하는지, 지금까지는 뭘 했고, 앞으로는 무엇을 할 것인지 계속해서 설명하고 계셨습니다. 시청자들이 실시간으로 질문하면 답하기도 하고 도네이션에 감사 인사도 하고 또 춤을 추기도 하고 표정을 짓기도 하며 배 안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습니다. 이 방송은 인천 연안을 출항할 때부터 시작되어 섬에 도착한 다음 인솔자님을 따라 섬을 한 바퀴 도는 동안에도 계속됐을 뿐 아니라 돌아오는 배 안에서도 계속됐습니다. 일몰 시각이 지나고 주변이 어두워지며 반짝이는 인천 연안 부두가 가까워질 무렵에야 좀 있다가 저녁 먹을 때 다시 보자는 종료멘트가 나오고 종료됐습니다. 어떤 배터리를 쓰는지 여쭤보고 싶었지만 참았습니다.
온라인에서 저런 라이브를 본 적이 있지만 그 라이브 하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본 것은 처음이라 기분이 묘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언젠가 지방의 유명한 도시에 놀러 갔다가 유명한 관광지 주변에 여러 사람들이 카메라를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모습을 보며 이제 시대가 완전히 변했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이건 또 다른 시대의 변화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편 이 생각의 끝은 항상 도대체 요즘 세상에 누가 텍스트를 읽을까 하는 의문으로 끝나곤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요즘 세상에 누가 글자를 읽을까요.
어떤 시대에는 블로그라는 이름으로 웹사이트에 글을 올리고 글을 읽고 또 다른 사람의 글에 반응하는 글을 만들고 이런 글을 모아서 보여주는 사이트가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 이렇게 글자를 주고 받는 사람들은 트위터 같은 마이크로블로그 사이트에 모여 있게 됐습니다. 이전보다 글 길이가 줄어들었고 글을 작성하기 위해 생각하는 시간 역시 이전보다 줄어들었습니다. 글을 쓰기 전에 생각하기보다는 일단 글을 쓰기 시작한 다음 생각을 하며 그때그때 쓰고 있는 부분을 수정하곤 했는데 이렇게 작성한 글은 종종 앞뒤가 안 맞기도 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제 스스로도 어떤 작업의 튜토리얼을 검색하고 싶으면 구글에서 웹페이지를 찾기보다는 먼저 유튜브에서 누군가 만들어 놨을지도 모르는 튜토리얼 영상을 찾아봅니다. 영상이 있으면 영상을 1.5배속이나 2배속으로 돌려 가며 원하는 내용이 있는지 찾아보고 만약 원하는 내용이 없으면 그때서야 구글에서 문서를 검색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러는 저 자신은 결국 매 주 아무도 읽지 않을 것이 확실한 글을 만들어냅니다. 아무도 읽지 않을 것이 확실함에도 글을 만들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글을 만들기가 가장 쉽고 또 이 방법에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상당히 심각하게 글을 만드는 대신 하다못해 팟캐스트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종종 온라인 상의 글을 스크랩 한 다음 TTS를 통해 출퇴근길에 듣곤 하는데 애초에 내가 글을 말하며 팟캐스트 모양으로 만들어 놓으면 글보다는 사람들에게 더 잘 전달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재미 삼아 제 목소리로 TTS를 만들어 글을 변환해봤는데 그리 심하게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걸 배포할 생각을 해보니 그건 또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습니다. 한참 실험해보다가 결국은 이전에 하던 습관 그대로 글을 만드는데 그쳤습니다. 제게 익숙한 방법이 다른 사람에게 편리한 것은 아닙니다. 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글보다는 영상으로 정보를 습득하고 또 이야기를 듣습니다. 제가 계속해서 글로 생각을 공유해봤자 이 생각은 영상 위주로 정보를 습득하는 사람들에게 가 닿지 않습니다.
ChatGPT로 기술 블로그 작성하기라는 글을 봤습니다. 기술블로그를 작성하는데 chatGPT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예상하기에 chatGPT에 자연어로 주제와 글 형태를 제시해 글을 만들고 인간은 그 글을 최소한만 다듬어 블로그에 게시한 것 같습니다. 아마도 중간 중간에 들어갈 삽화를 선정하는데 개입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이렇게 작성한 블로그 글 내용을 신경 써서 읽어 보니 내용의 밀도가 상당히 낮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글은 다른 매체에 비해 정보 밀도가 높은 편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이 블로그 글들은 겉보기에는 빽빽한 텍스트가 계속되며 뭔가 정보 밀도가 높을 거라고 예상하게 만들지만 각 문단은 첫 문장 이외에는 그 문장을 수식하기 위해 꾸며져 있었습니다. 마치 라인프랜즈 아이콘을 사용하는 내용 없는 네이버 블로그 글 같은 느낌입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작성한 글은 내용 밀도가 낮지만 이런 특징에 신경 쓸 사람이 없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빽빽한 글로만 가득한 웹사이트를 운영하며 방문자들의 행동을 살펴보면 빽빽한 글은 거의 읽히지 않습니다. 그나마 좀 선정적인 제목을 쓰면 첫 문단 정도가 읽히지만 무슨 소린지 모를 제목을 지어 놓으면 모든 방문자들은 페이지에 들어와 빽빽한 글을 보고 스크롤을 쭉 내린 다음 닫아버립니다. 이런 행동에 비해 사이트에 대한 평가는 나쁘지 않은데 대략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려운 말을 잔뜩 쌓아 놓은 웹사이트’ 같은 이미지를 가지는 것 같아 보입니다.
이런 관찰로부터 현대에 온라인 상의 빽빽한 글은 마치 커다란 복합 쇼핑몰의 광장 주변을 높다랗게 장식한 결코 읽을 수 없는 가짜 책 장식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책은 전통적으로 읽히기 위해 만드는 것이지만 현대에 책은 읽히는 용도 외에도 높다랗게 쌓아 올려 주변을 장식하는 용도로 적극적으로 사용되는 것 같습니다. 책을 읽을 목적이었다면 족히 6미터는 되어 보이는 책장에 꽂아 두지는 않을 겁니다. 같은 맥락으로 빽빽한 텍스트 역시 현대에는 텍스트의 내용보다는 그런 빽빽한 텍스트를 전시한 웹사이트의 이미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기술 블로그의 빽빽한 텍스트를 chatGPT로 생성해 놓는 행동은 현대에 온라인에서 빽빽한 텍스트가 새롭게 가지게 된 역할을 충실히, 또 효율적으로 이행할 수 있는 훌륭한 방법이라는 생각입니다.
한편 이런 생각에도 불구하고 매 주 시간을 들여 글을 만들고 있는 이유는 이렇게 글을 만드는 행동이 개인적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여러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 있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한 주에 한 번 정도 시간을 들여 아무 주제로나 글을 쓰는 행동이 스트레스를 크게 줄여 주고 또 잠깐씩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생각을 그냥 그대로 놓치지 않고 주워다가 머리를 써서 생각해볼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이런 자기 자신을 위한 목적이 아닌 이상 현대에 빽빽한 글이 필요하다면 이걸 직접 쓰기보다는 빨리 생성해낼 수 있는 방법으로 생성해내 그 역할을 하게 하는 쪽이 효율적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