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토콜 경제는 어디가 잘못 되었을까?
지나가다가 가상화폐로 플랫폼 독과점 막겠다더니…정부 ‘프로토콜 경제’ 전면 폐지라는 기사를 봤습니다. 대략 플랫폼 기업이 이윤을 분배하는 방식을 블록체인으로 옮겨 블록체인에서 자주 사용하는 거래 조율 방식을 통해 독과점을 막고 거래 참여 주체들의 이익을 보전하겠다는 목표로 시작한 일인 모양입니다. 하지만 일은 잘 진행되지 않은 것 같고 별다른 결과 없이 예산을 소모한 다음 끝난 것 같아 보입니다. 기사 끝에 나온 대로 예산이 어디에 어떻게 사용되어 어떤 결과를 도출했는지 알아내는데 그나마 의미가 있겠지만 그건 삼권 분립 중 사법의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확실한 것은 내 일은 아닙니다.
다만 이 이야기의 어디가 이상한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왜 굳이 거래를 블록체인에 기록하려고 하는지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둘 이상의 주체가 거래하려고 하는데 서로를 믿을 수 있다면 굳이 블록체인 같은 이해하기도 어렵고 사용하기도 어렵고 그 결과를 실제 세계에 집행하거나 신뢰하기도 어려운 방식을 사용할 이유가 없습니다. 돈을 빌리려면 그냥 차용증을 쓰고 입금해 주면 끝납니다. 여기서 차용증의 법적 효력은 국가가 정한 법령과 이를 집행하는 입법, 사법, 행정 시스템에 의해 지탱 됩니다. 차용증을 썼고 거래 주체가 이 내용에 합의했다면 법적 효력을 가지며 상황에 따라 실제 세계에 행정력을 통해 집행될 수 있습니다. 입금 사실은 거래한 은행의 입출금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이 기록은 정부기관인 금융감독원을 통해 보장됩니다. 일단 입출금 기록이 남았다면 이를 위조하기는 아주 어렵습니다. 사실상 이를 신뢰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신뢰 관계를 만들 수 없을 때 거래에 블록체인을 사용합니다. 일단 블록체인은 위조가 아주 어렵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국내 금융거래처럼 각 은행과 금융감독원이 기록을 보증하지 않는 환경이라면 블록체인에 거래를 기록하면 이론적으로는 위조할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위조할 수 없다고 가정할 수 있습니다. 또 각 거래 당사자의 프라이빗 키로 서명하므로 각 당사자가 승인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블록체인에 거래가 기록되었다고 해서 이 거래를 실제 세계에 집행할 권한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내가 누군가로부터 이더리움을 입금 받은 기록이 있다 칩시다. 이건 내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빌린 건데 분명 내가 입금 받은 기록이 있지만 내가 이 가상화폐를 갚지 않는다고 해서 사법이나 행정력에 의해 문제가 생기지는 않습니다. 이 시나리오에서 블록체인 상의 기록을 실제 세계에 집행하려면 블록체인 상의 기록 뿐 아니라 실제 세계에 효력을 미치는 차용증이 필요합니다. 때문에 블록체인은 서로 상대를 완전히 신뢰할 수 없고 서로의 기록을 신뢰할 수 없으며 거래 기록에 의한 집행을 스마트컨트랙트에 의존해 블록체인 세계 내부로 제한할 때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나마 이 시나리오에서도 실제 세계의 차용증을 대신할 스마트컨트랙트를 개발하고 수정할 누군가를 신뢰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시나리오를 위 기사에 대입해 블록체인을 사용한 거래에서 정부가 수행하기에 가장 적당한 역할은 스마트컨트랙트를 작성하고 실행하는 것 정도일 것 같습니다. 이론 상 정부는 플랫폼 기업이 거래 참여자들에게 비용을 집행할 때 반드시 특정 블록체인을 사용하도록 강제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국가의 사법과 행정 권한이 필요합니다. 다음은 정부가 직접 스마트컨트랙트를 통해 플랫폼과 거래 참여자 개개인의 거래를 통제할 수 있습니다. 필요에 따라 주고 받는 가상화폐의 비율을 조정해 서로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고요.
하지만 이런 시나리오는 근본적으로 다시 왜 이 거래에 블록체인이 필요한지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정부는 블록체인 사용을 결정하기 위해 거래 참여자들이 서로를 신뢰할 수 없고 또 서로의 기록을 신뢰할 수도 없으며 정부가 정한 법령이 준수되리라 예상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아무도 믿을 수 없지만 그나마 블록체인이라도 믿어야 동작하는 상황도 아닌데 블록체인을 통해 거래하려고 했습니다.
정부는 그 존재 자체가 블록체인을 사용할 필요가 없게 만듭니다. 거래 참여자들이 서로를 신뢰할 수 없다면 정부가 이들을 신뢰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야 합니다. 서로의 거래 기록을 신뢰할 수 없다면 정부가 이 기록을 신뢰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또 스마트컨트랙트에 의한 자원 분배 비율 조정 역시 정부가 입법을 통해 제어할 수 있습니다. 온전히 동작하는 정부의 존재가 이미 블록체인을 쓸모 없게 만드는데 정부가 직접 나서서 블록체인을 사용할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또 행정이 직접 블록체인을 통해 거래를 제어한다면 입법과 사법의 권한을 침범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가령 고객이 지불한 전체 비용에서 배달이 받을 금액을 25%에서 30%로 인상한다 칩시다. 기술적으로는 스마트컨트랙트를 업데이트 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입법과 사법의 영역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를 행정이 직접 수행한다면 절차 상의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정리하면 블록체인은 정부가 처음 생각한 아이디어를 달성하는데 사용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사용하려는 그 주체가 정부라는 것에서부터 이상합니다. 정부는 스스로가 정상적으로 동작하는 이상 블록체인을 사용할 필요가 없게 만들어야 합니다. 블록체인을 사용하는 순간 정부는 입법과 사법의 권한을 간단히 침범해 이상한 상태를 만들게 됩니다. 블록체인을 빼고 생각하면 간단해지는 문제에 블록체인을 끼워 넣음으로써 신문 기사를 만드는데 성공했겠지만 실제로 일을 추진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블록체인을 사용한다는 이야기를 볼 때 거래 주체들 사이에 신뢰할 수 없는 상황인지, 또 거래 결과가 오직 블록체인 세계에만 집행되어도 괜찮은 상황인지, 또 이 행동들이 정부를 포함한 거래 참여자들의 법적인 권한을 침범하지는 않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