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 먹다 달려온 어떤 시연
한동안은 열심히 준비해서 국외에서 일할 기회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헛된 꿈을 꾼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국외로 나가는 관문이라는 가까운 나라의 프로젝트에 지원해 보기도 하고 미친 척 하고 시니어 게임디자이너로 아주 유명한 회사에 지원해 보기도 했는데 모두 잘 되지 않았습니다. 한 쪽은 다 같이 영어에 고통 받으며 일할 것이 분명한 곳 같아서 어차피 님들도 언어에 서툴고 나도 언어에 서투니 뻔뻔한 놈이 이길 거라고 생각하고 인터뷰에 가공할 뻔뻔함을 보이며 임했는데 나름 잘 진행 됐지만 리로케이션 전에 여러 이유로 취소됩니다.
다른 한 쪽은 아주 훌륭한 언어 능력을 요구했는데 인터뷰는 광속으로 종료됐고 재미 삼아 한 시도였지만 나름 상처를 남겼습니다. 이후에도 몇몇 기회가 있었지만 상대가 접히거나 갑자기 국내에 더 나은 자리가 생기는 등 번번이 기회를 잡지 못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지금까지 한국에서 일을 시작해 한국에서 계속해서 일하고 있어 한국 밖에서는 어떤 식으로 일하는지 잘 모릅니다. 간혹 끝없는 초과근무와 상급자의 욕설 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국내든 국외든 게임 만드는 곳 분위기는 다들 비슷한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예 성장해 온 문화가 다른 사람들이 모인 개발팀은 이야기가 다르지 않을까 하는 환상을 가져 보기도 합니다.
한번은 저녁때 밥을 시켜 사무실 구석에 먹고 있었습니다. 마저 처리할 일이 남아 있었는데 저녁을 먹기도 애매하고 안 먹기도 애매해서 치킨을 시키는 김에 서브 메뉴를 조금 더 시키면 거기 끼어 조금 깨작거리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이 날 회사에 손님이 찾아온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습니다. 하지만 손님 응대는 더 높은 분들이 알아서 해 주실 일이니 별로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손님은 원래 약속했던 시간보다 더 늦게 도착한 것 같았고 높은 분들의 설명 역시 예정보다 훨씬 길어져 원래는 훨씬 이전에 방문했다가 이미 회사를 떠났어야 하는 시각이었지만 여전히 어느 회의실에 있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러다가 높은 분들이 달려와 플레이 시연을 좀 해 달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우리들은 아무 준비도 없이 나무젓가락으로 치킨을 집어 우물거리며 입 안에서 뼈를 발라내는 도중이어서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발음으로 ‘지금요?’, ‘우리 전부요?’라고 되물었고 그렇다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먹던 걸 바로 내려놓고 자리로 출발했는데 입 안에 있던 뼈와 살이 아직 덜 분리된 치킨을 그냥 뱉어 놓고 갈 수가 없어 치킨을 담아 놨던 종이컵과 나무젓가락을 그대로 들고 자리로 돌아가 빌드를 실행하기 시작합니다. 빌드가 실행되는 사이에 입 속에 치킨으로부터 뼈를 분리해 내 종이컵에 뱉어 놓고는 키보드와 마우스를 붙잡고 플레이를 진행했습니다.
아마도 이 플레이를 보고 싶어 했던 손님은 대강 누군가 한 명 자리에서, 정확히는 회의에 함께 참여했던 높은 분들 중 한 명의 자리에서 빌드가 동작하는 모습을 간단하게 보고 싶었던 것 같은데 여러 사람이 달려오고 심지어 그들 중 일부는 저 구석에서 뭘 먹다가 달려오고 또 누군가는 나무젓가락을 입에 문 채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 약간 당황한 것 같았습니다. 통역을 통해 대략 ‘얘들 갑자기 왜 달려오는 거니?’ 라고 묻는 것 같았고 ‘어. 멀티플레이 게임이니까 시연에 여러 사람이 필요해서 불렀어’ 라고 답하는 것 같았습니다. 빌드는 뭐 평소에도 잘 동작했고 손님이 보는 앞에서도 별 문제 없이 돌아갔으며 솔직히 비슷한 시장에서 만들고 있는 다른 플레이어들의 썩 좋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진 결과물에 비해서는 말할 것도 없이 훨씬 나은 모습이었을 겁니다.
손님은 이 시연 이후에도 한동안 사무실에 마물렀지만 그 결과를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치킨 먹던 종이컵과 나무젓가락을 내박쳐 놓고 바로 자리로 뛰어와 시연에 참여하는, 어떻게 생각하면 상당히 아시아적인 상황은 손님에게 흥미로운 인상을 준 것 같다는 뒷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앞에서 국외에서 일해보고 싶었지만 일해본 적이 없고 아예 다른 문화권에서 성장한 사람들이 모인 팀이 어떻게 일할 지 잘 모르겠지만 환상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비록 그런 사람들이라도 아시아 사람들의 이런 행동이 나쁜 인상을 준 것 같지는 않은데 이런 현상이 극동아시아 문화권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 입장에서는 양면 적인 느낌이 들어 시연을 마치고 손님이 돌아갈 때까지 머릿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며 피식거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