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의 아레나 슈터와 현대의 슈터
고객들의 TDM 요구는 작게는 지난 빌드의 플레이 경험, 크게는 현대에 이르는 슈터 장르의 변화로부터 기인할 수 있습니다.
지난 감히 우리가 걸작에 손 댈 수 있을까?에서 핵심 메커닉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고객들에게 우리들의 게임 플레이를 전달하기 위해 이 장르 자체를 개척해낸 게임들의 가장 유명한 레벨을 차용해 나쁘지 않은 효과를 봤다는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지난번에는 저 유명한 퀘이크 3 아레나의 굉장히 유명한 레벨을 빌려와 플레이를 만들었습니다. 원작은 1인칭이었지만 우리는 3인칭이어서 게임이 얼마나 달리 전개될지 궁금했는데 막상 본격적으로 플레이 해 보니 사람들은 게임이 일인칭이든 삼인칭이든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아 보입니다. 게임이 삼인칭이라 하더라도 근본적인 크로스헤어에 적을 놓고 클릭해서 무기를 발사해 맞추며 적의 공격을 피한다는 규칙이 그대로여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한편 지난번에 이 레벨로 PvP 모드를 제공한 다음 고객들로부터 TDM 모드를 넣어달라는 의견을 강하게 받았는데 이 의견을 처음 접할 때만 해도 이전에 사용한 Q3DM17 레벨은 거의 모든 장소가 완전히 개방되어 있어 이런 장르에 익숙하지 않은 플레이어들이 몸을 숨기고 분위기를 파악할 틈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바로 개방된 장소에 스폰 되고 그 직후 이미 플레이 하던 다른 플레이어에게 머리가 뚫려 바닥에 누워 있으면 도대체 이게 뭐 하자는 건지 알 수 없을 겁니다. 그래서 FFA 이외에 TDM을 넣어 달라는 요구가 있었고 또 숨을 곳이 있는 레벨이 필요하다는 의견 역시 받았습니다. 그래서 고객들의 의견에 따라 TDM을 넣고 그에 어울리는 레벨을 추가하기로 했고 이번에는 아직 레벨을 확정하지 않은 상태로 TDM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득 고객들이 TDM을 넣어 달라고 말한 의도가 그저 처음 경험한 레벨이 너무나 사방이 트여 있는 레벨이어서 개개인의 실력차가 너무 심하게 드러나고 중간 수준의 고객들이 감을 잡기도 전에 일단 바닥에 눕게 되는 가혹한 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한 관점이 올바른가 하는 의심을 해 봤습니다. 사실 이를 의심한다고 해서 이미 개발을 시작한 TDM모드가 없어지지도 않을 테고 여기에 어울리는 레벨 선정과 개발 계획이 달라지지도 않을 테지만 적어도 개인 관점에서 고객들이 처음으로 FFA 환경에서 모든 공간이 열려 있는 레벨을 경험한 다음 이에 기반해서 TDM 모드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냈다고 볼 것인지 아니면 어떤 다른 이유가 있어서 이 의견을 낸 것인지 나름의 이론을 정립해 보는데는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물론 고객들이 시작하자마자 뭐 해볼 세도 없이 바닥에 눕는 가혹한 경험을 반복한 끝에 좀 더 숨을 곳이 있는 레벨과 TDM 게임모드를 요구한 것이 아주 틀리지는 않지만 여기에는 이렇게 단순한 경험에 의한 반응 뿐 아니라 슈터 장르의 역사와 현대에 이르러 슈터 장르가 살아남기 위해 해 온 진화 과정의 연속이 아닐까 싶습니다.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중반에 나타난 ‘아레나’ 장르는 이전 시대의 1인칭 슈터 게임에 상당히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냅니다. 그 이전에는 스토리라인에 따라 앞으로 진행하며 적들에게 총을 쏘고 나는 총알을 피하는 플레이가 있긴 했지만 이 게임들은 근본적으로 한 방향으로 진행하는 횡스크롤 액션과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초기 둠 시리즈 역시 지금에 비하면 한 스테이지를 구성하는 레벨이 엄청나게 복잡해 보이지만 결국 모든 방을 다 거치며 악마를 죽인 다음 출구를 찾아 다음 스테이지로 이동하는, 과정은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결국 단방향 진행에 가까웠습니다.
이후 발표한 퀘이크 1 역시 기술적으로는 드디어 현대적인 3D 기술에 기반한 게임플레이를 선보였지만 게임 자체는 여전히 복잡한 여러 방을 탐색하며 적을 찾아 모두 죽이는 플레이에서 크게 발전하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퀘이크로 넘어오면서 드디어 레벨의 고저차를 이전에 비해 좀 더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눈앞에 있는 문 열쇠는 고개를 숙여 내려다 본 다리 아래 구덩이나 물 속에 숨겨져 있는 식의 퍼즐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결국 싱글플레이로 만들어진 한 스테이지는 시작과 끝이 있고 한 챕터 묶음의 마지막 스테이지에는 보스 몬스터가 나오는 등 여전히 횡스크롤 액션 장르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퀘이크 1은 싱글플레이를 여러 난이도로 플레이 한 다음 멀티플레이를 한동안 했는데 초창기에 접한 멀티플레이는 매 플레이마다 꽤 짜릿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시대에는 멀티플레이 전용 레벨이 없어 싱글플레이 레벨의 아무데서나 플레이어가 스폰됐고 플레이는 딱히 플레이어에 따라 공정하거나 의도를 가진 플레이를 만들어내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한동안 퀘이크 1 멀티플레이에 집중했는데 실은 이게 개인적으로 경험한 거의 최초의 온라인 멀티플레이 슈터였기 때문입니다.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몬스터 대신 완전히 이상하고 또 예측하기 어렵게 움직이는 인간은 그를 총으로 쏠 때마다 훨씬 큰 재미를 주었고 레벨이 어떻게 생겼든 말든 게임 속에서 사람을 쏘는 감각은 즐거웠습니다.
시간이 흘러 소위 ‘아레나 슈터’ 장르를 창조한 퀘이크 3가 나타났고 이 시점부터 여러 게임이 거의 레벨과 캐릭터, 무기 메커닉을 손 봐 다른 모양의 게임으로 출시되기를 반복하게 됩니다. 둠이나 퀘이크 양쪽 모두 스토리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아 왔는데 퀘이크 2에서는 그나마 눈여겨볼 만한 스토리라인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둠이나 퀘이크 1에 스토리라인이 없었던 것은 아닌데 게임에 스토리가 잘 드러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특히 퀘이크 1은 인게임에는 스토리설명이 전혀 없고 게임 실행파일이 있는 디렉토리에 텍스트로 몇 줄 적힌 파일이 전부였습니다. 이 시대의 슈터 장르는 크게 퀘이크 3나 언리얼 토너먼트를 필두로 한 스토리에 딱히 신경 쓰지 않지만 멀티플레이 경험에 극도로 집중한 ‘아레나 슈터’ 장르와 하프라이프, C&C 레니게이드 같은 스토리 기반의 싱글플레이 슈터 장르로 양분됩니다.
이 시대에 ‘아레나 슈터’ 장르 게임을 미친듯이 플레이 했는데 퀘이크 스타일이 질릴 때 쯤 되면 언리얼 토너먼트에서 제공하는 훨씬 다양한 게임모드를 플레이하며 놀았고 또 좀 더 핵심에 집중한 슈팅을 플레이 하고 싶으면 퀘이크에 돌아와 플레이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는 사이에 울펜슈타인 에니미 테레토리, 콜 오브 듀티가 나타나 각각 역할 기반의 협동 플레이와 풍부한 싱글플레이 경험 측면에서 각각이 새로운 장르의 변화를 만들어냈습니다. 특히 콜 오브 듀티는 이후 여러 게임에 영향을 줘 심지어 둠 리부트 때 내부에서 폐기되기는 했지만 콜 오브 둠이라고 부르던 직선 진행과 풍부한 싱글플레이 경험을 제공하던 둠이 있었을 지경이라고 합니다.
이 두 게임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슈터를 해석했지만 이 두 장르는 겉으로 보기에 모양이 비슷한데 바로 여기에 슈터 장르에 앞으로 일어날 변화를 예상할 수 있는 힌트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울펜슈타인과 콜 오브 듀티 양쪽 모두 밀리터리 테마의 슈터인데 밀리터리 외형은 어느 시대에나 통할 만한 주제이기는 하지만 겉모양 외에도 이전 시대의 아레나 슈터와 밀리터리 테마의 슈터는 서로 레벨 고저차의 중요성을 바라보는 방법에 따라 근본적으로 다른 게임플레이를 만들어냅니다.
퀘이크3와 언리얼 토너먼트의 게임 플레이를 떠올려 보면 레벨에 중요한 구성요소는 바로 점프대입니다. 점프대는 플레이어를 레벨 상의 한 지점에서 미리 정해진 다른 지점으로 날려 보내는데 날아가는 도중 이동이 제한되지만 그 사이에도 시점을 돌려 총을 쏠 수 있어 여전히 게임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점프대를 통해 물리적으로 서로 떨어진 둘 이상의 지점을 사실상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공간을 왜곡할 수 있어 레벨을 겉으로 볼 때 예상할 수 있는 플레이 양상과 실제 점프대를 포함한 플레이 양상이 서로 완전히 다르게 할 수 있습니다. 안전한 지점이라고 생각하고 잠깐 움직임을 멈추면 저 멀리서 갑자기 날아오는 사람과 그가 발사하는 로켓에 반응할 틈도 없이 바닥에 눕는 신세를 면치 못할 겁니다. 점프대가 물리적으로 떨어진 두 지점을 사실상 연결해 버리면서 레벨디자인 역시 좀 더 입체적인 모양을 시도할 수 있게 됩니다. 점프대 없이는 레벨을 여러 층으로 만들면 각 층에서 일어나는 전투가 서로 분리되고 한 전투에서 다른 전투로 전환하는데 시간이 걸리지만 점프대를 사용하면 이런 전투 전환에 걸리는 시간을 거의 없애고 한 층에서 다른 층 전투로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습니다.
이런 요소는 게임을 미친듯이 빠르게 만들고 여기에 적응한 사람들에게 무한한 흥분을 공급하지만 여기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을 순식간에 내쫓기에도 충분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슈터 장르에 익숙하지는 않으며 슈터 장르에 익숙하더라도 점프대와 포탈을 사용해 레벨 곳곳의 시각적인 거리가 실제와 다른 상황에 함께 익숙해지기는 쉽지 않습니다. 또 자신과 같은 높이에 있는 적들을 상대하기도 벅찬 상황에 자신보다 위쪽 레벨이나 아래쪽 레벨에서 일어나는 전투, 그로부터 날아오는 공격에 자연스럽게 대응하고 이로부터 무한한 흥분을 느낄 수 있는 플레이어는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런 짐작 끝에 나타난 밀리터리 외형의 슈터는 일단 외형이 현대 사람들에게 좀 더 익숙한 세계대전으로부터 유래했고 또 실제 세계와 비슷한 이동 방식을 채택합니다. 아레나 장르에서 사람은 스스로 한 점프, 점프대, 포탈, 무기의 반동을 활용한 점프 및 활공 등을 통해 멀쩡히 땅 위를 걸어다니는 플레이어가 살아남기 힘든 환경이었습니다. 하지만 밀리터리 외형의 슈터 장르에서 사람은 땅바닥에 발을 붙이고 걷거나 뛰어 이동해야 했으며 제한적으로 점프할 수 있었지만 실제보다 아주 조금 과장됐을 뿐 점프를 통해 건물 저 편으로 날아가거나 땅바닥에 무기를 발사해 활공할 수는 없습니다. 이전에 비해 움직임이 재미 없어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밀리터리 장르의 이런 이동 규칙은 이전에 멀쩡히 땅을 걷는 플레이어가 거의 없던 아레나 장르에 적응하지 못한 더 넓은 고객층을 확보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역할 기반의 플레이를 통해 단순히 다른 플레이어를 조준하고 사격하면 승리하는 규칙에서 팀 스케일의 목표를 달성하는데 기여하면 팀이 승리하는 식으로 내 플레이와 팀의 승리가 조금은 추상화된 모양으로 이전 시대에 슈터 장르가 요구하던 단 한 가지 핵심 플레이에 조금 덜 익숙한 사람들이 슈터 장르에 남아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이 시대 이후 아레나 장르가 쇠퇴하고 배틀필드 시리즈 같은 밀리터리 외형에 높이에 따른 플레이를 확실히 구분하고 이동 방식을 실제 인간의 이동에 묶어둔 게임이 인기를 얻었습니다. 특히 배틀필드는 아주 많은 플레이어가 참여하는 TDM 기반의 게임플레이를 선보였는데 레벨이 충분히 넓고 같은 편 수가 열 몇 명쯤 되면 나 한명이 좀 버벅거린다고 해서 팀 전체의 승기에 아주 큰 영향을 주지는 않게 됩니다. 물론 배틀필드에서도 중요한 화기를 함부로 소모해버린다든지 하는 트롤을 개인이 할 방법이 없지는 않지만 이전에 비해 개인이 팀 전체의 승리에 기여할 수 있는 수준이 현저히 낮아집니다. 어쩌면 슈터 장르에 좀 더 익숙한 사람 관점에서는 본능적인 플레이 외에 뭔가 자꾸 다른 플레이를 요구해서 마음에 안 들 수 있지만 슈터 장르에 덜 익숙한 사람 관점에서는 사람에게 총을 쏘는 대신 다른 플레이에 집중하면서도 팀에 기여하고 또 내 실력이 전세에 아주 큰 영향을 주지 않아 덜 부담스럽게 플레이 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런 추세가 유지되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콜 오브 듀티는 어드벤스드 워페어에서 딱 한번 퀘이크 스타일의 전투를 시도한 적이 있지만 훌륭한 결말로 이어지지는 않았고 또 싱글플레이 사례이긴 하지만 둠 이터널 확장팩 1의 보스전에서 높이가 계속해서 변하는 바닥과 이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격자 모양 장애물을 통해 고저차에 신경 써야 하고 과거 퀘이크 3만큼 활발하게 움직여야만 하는 스테이지를 선보인 적이 있지만 이 역시 장르 역사에 별다른 흔적을 남기지는 못했습니다. 현대에 밀리터리 외형의 슈터 게임에서 사람은 바닥에 발을 붙인 채 걷거나 뛰고 점프하고 서로 다른 높이에서 전투가 일어날 수 있지만 이들 사이를 빠르게 이동할 방법은 없으며 현실에서와 마찬가지로 계단을 타고 오르내리거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동할 수 있습니다. 플레이는 이전에 비해 더 느리고 본능에 충실한 플레이와는 거리가 있지만 이제 새로운 전략과 팀플레이, 그리고 초보자에게 좀 더 관대한 플레이가 대세입니다.
이런 생각 끝에 이전 사방이 열려있는 공간에서 FFA를 경험한 고객들에게 어쩌면 이런 경험은 이전에 해본 적 없는 경험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 이 경험은 오래 전과 마찬가지로 어떤 플레이어에게는 대단한 감정적 경험을 주겠지만 또 다른 플레이어들에게는 심한 좌절을 주었을 겁니다. 그래서 고객들이 TDM을 요구한데는 이런 기존 FFA 모드가 너무 가혹한 경험을 준 것 외에도 과거에서 현대로 올수록 슈터 장르에 조금 덜 익숙한 플레이어들에게도 충분히 친절하게 굴고 또 이들이 팀에 기여할 방법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게임이 발전해 왔으며 이런 현대적인 취향을 반영한 결과가 TDM 요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