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 드리븐 디벨롭먼트
일선 게임디자이너로써 사양을 작성할 때 종종 이 사양의 목적과 본질, 과거에서 현대에 이르는 맥락을 놓칠 때가 있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놓치지 않으면 많은 질문이 정답이 있는 문제로 바뀌어 일이 쉬워집니다.

본질 드리븐 디벨롭먼트. 이 제목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려다가 문득 이전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애초에 이 블로그 자체가 마치 술 마신 아저씨가 한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과 비슷한 속성을 가진 곳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완전히 똑같은 이야기를 제목만 바꿔 이야기하는 것은 읽는 분들의 시간을 빼앗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심지어 술을 마시지 않고 그런 일을 하고 있는 저 자신의 시간을 빼앗는 일이기도 합니다. 본질 드리븐 디벨롭먼트는 제 멋대로 만든 용어인데 게임디자인 관점에서 게임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여러 기능의 요구사항을 작성할 때는 요구사항 그 자체에 본격적으로 집중하기에 앞서 그 기능이 게임에 왜 필요한지 좀 더 근본적인 이유를 살펴본 다음 그 이유에 근거한 요구사항을 작성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사용하고 이런 주장을 압축한 용어로써 제시할 작정입니다. 그런데 이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기분이 드는 이유는 이전에도 이런 문제의식을 가진 적이 있었지만 여전히 이를 올바르게 해결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일 겁니다. 검색 기능이 극도로 부실한 고스트이지만 잠깐 검색해보니 이전에 오늘 이야기하려는 주제와 비슷한 맥락으로 따라할 때는 왜 그랬는지 알고 따라해야 합니다라는 글을 쓴 적이 있었습니다. 저 때도 대략 요구사항을 작성할 때는 그 요구사항을 도출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상태인 편이 좋으며 실제로는 여러 가지 상황 상 그럴 수 없을 때가 많고 그런 상황 대부분은 어쩔 수 없긴 하지만 가능한 한 자신이 작성하는, 제안하는 요구사항의 게임디자인 관점에서 근거와 목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편이 좋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 하려는 이야기도 방식은 다르겠지만 결국은 비슷한 내용입니다. 이쯤 되면 정말 술 마시고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모든 사장님들이 그렇지 않을 것 같지만 개인적으로 경험한 사장님들 상당수는 롤플레잉 장르를 개발하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사장님들의 연령대를 고려할 때 이분들이 게임에 열정을 불태우셨을는지도 모르는 시기에 게임 세계를 평정하던 장르이기도 합니다. 물론 현대를 기준으로 훨씬 더 먼 과거에는 좀 더 다양한 장르 게임들이 존재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게임들에 온라인 기능이 반 강제적으로 접목된 다음부터는 온라인 기능에 가장 쉽게 어울리는 형식인 롤플레잉, 그 중에서도 성장 메커닉에 초점을 맞춘 롤플레잉이 시장에 나타나는 게임 상당수를 차지했습니다. 이들은 아마도 사장님들이 열정을 불태우셨을는지도 모르는 롤플레잉 장르와 대략 비슷하면서도 온라인 기능이 접목되는 순간 이를 만드는 입장에서는 과거 싱글플레이 롤플레잉 게임과 비슷한 상대적으로 단순한 모양이 아니라 본격적인 복잡계 시뮬레이션으로 변해버립니다. 먼 과거에 게임을 개발하는 이야기를 다룬 책들을 찾아보면 고작 몇 개월 안에 현대 기준으로도 완성도 높은 게임을 개발한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현대 기준으로 이 정도 단기간에 개발되었음에도 게임은 단단하고 온갖 곳에 개발자들의 사랑이 듬뿍 담겨 있으며 곳곳에 시간이 남지 않으면 결코 상상하지 못할 숨겨진 요소들에 이르기까지 현대의 우리들이 도통 따라할 수 없을 것 같은 요소들로 가득합니다. 반면 우리들은 그보다 훨씬 긴 기간에 걸쳐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투입해 개발하면서도 고객들로부터 ‘양산형’이라는 차갑고 현실적인 평가를 받는 것조차 쉽지 않습니다. 이런 차이를 만드는 근본적인 이유는 전통적인 롤플레잉 장르에 온라인 기능을 더하는 순간 게임은 닫힌 계에서 복잡계로 변한다는 사실을 잘 몰랐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인 롤플레잉 장르에 온라인 기능을 더하며 플레이어들이 서로 상호작용 할 수 있게 되면서 가상 세계는 이전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생동감 있고 또 깊이있어졌지만 동시에 이를 만드는 입장에서는 이전에 신경 쓸 필요 없었던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초창기 우리들은 우리들 스스로가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조차 모른 체 플레이어 사이에 자유로운 자원 교환 기능을 넣었습니다. 실제 세계에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재화나 물건을 주는 행동이 너무나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게임에서도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기능은 기술적으로 안전하게 만들기 쉽지 않았는데 이는 실제 세계에서 서로 다른 은행 사이에 돈을 보내는 과정이 금융감독원의 중계를 거쳐 꽤 복잡한 절차를 거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안전하지 않게 작성된 플레이어 간 거래 기능은 여러 가지 상황에 쉽게 오동작해 재화를 복사하곤 했는데 이 때문에 수 년에 걸쳐 개발한 프로젝트가 순식간에 비가역적으로 망가져 서비스를 종료한 사례도 여럿 있습니다. 또 이전에 하던 것과 똑같이 필드에 몬스터를 배치했을 뿐이지만 여러 플레이어가 동시에 이 필드에 등장하자 이번에도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물론 플레이어 단 한 명이 이 필드에서 플레이 할 거라고 예상한 것은 아니어서 그보다 더 많은 몬스터들이 나타나도록 했지만 필드에 나타난 플레이어 수는 그보다 더 많았고 필드는 몬스터를 배치한 것인지 아니면 플레이어를 배치한 것인지 헛갈리는 지경에 이릅니다. 플레이어들은 주변 사람들과 텍스트를 통해 말할 수 있었기에 몬스터가 스폰 될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던 플레이어가 그 자리에 뒤늦게 나타난 다른 플레이어에게 욕설을 하고 그 자리를 떠나기를 종용합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오가는 욕설 속에 필드 분위기는 순식간에 암울해집니다.
이런 여러 가지 경험을 통해 현대에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여전히 비슷한 전통적인 롤플레잉 장르에 온라인 기능을 더한 게임을 개발하면서도 이전 시대에 비해 우리가 만든 계가 복잡계가 되는 의도하지 않은 사고를 최소화 하기 위해 여러 가지 안전장치를 사용하는데 익숙해졌습니다. 마치 화학에서 실수로 폭발물을 만들지 않기 위해 폭발물을 만드는 방법을 배우고 실수로 방서성 물질이 임계질량에 도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방사성 물질의 제조 공정에 전체 작업 속도를 강제로 느리게 만드는 온갖 장치들이 도입된 것과 비슷합니다. 몇 가지 얘를 들면 먼저 여러 사람들이 제한 없이 상호작용 하는 공간을 퍼시스턴트 월드에서 인스턴스 월드로 옮겼습니다. 과거에는 인스턴스 월드 구분 없이 심지어 던전을 포함한 게임 세계의 모든 곳이 퍼시스턴트 월드로 이루어졌습니다. 현대에 플레이어 개개인에게 깊은 경험을 주기 위해 주의 깊게 만들어진 던전과 달리 초기 던전은 필드와 마찬가지로 다른 플레이어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환경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은 종종 예상보다 훨씬 더 넓은 범위에 걸쳐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다른 플레이어를 일정 시간 동안 독에 감염시킬 수 있다고 합시다. 독에 감염되면 단위 시간마다 체력이 감소하고 또 가까이 있는 다른 플레이어에게 독을 옮깁니다. 다른 플레이어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던전에서 보스 몬스터가 플레이어들에게 이런 공격을 한다면 큰 문제가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이들은 곧 죽거나 힐러에 의해 해독되거나 자기 스스로 해독제를 사용해 그 상태를 벗어날 테니까요. 하지만 던전 조차 퍼시스턴트 월드인 세계에서 주의 깊지 않게 설계된 효과는 순식간에 게임에 광범위하게 퍼져 문제를 일으킵니다. 보스를 상대하다가 별 생각 없이 포탈을 열고 마을로 돌아가는 순간 그 보스와 마주치기 전에는 결코 경험할 일이 없었을 효과가 마을을 휩쓸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기도 전에 죽게 됩니다. 현대에는 이런 스킬과 효과를 만들 때 감염 전파 단계를 제한합니다. 가령 현재 플레이어가 총 감염 전파 횟수 중 몇 단계에 감염되었는지 확인해 마지막 단계라면 더 이상 주변을 감염시키지 않습니다. 또 세계 역시 모든 공간이 퍼시스턴트 월드가 아니어서 설사 이런 설정에 작은 실수가 있더라도 인스턴스 월드 안에서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이 문제는 퍼시스턴트 월드로 확장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실수로 우리들이 만드는 게임이 복잡계 시뮬레이션으로 바뀌지 않도록 하기 위한 또 다른 조치에는 플레이어 간 거래 기능을 제거한 것이 있습니다. 초기에는 플레이어 간 거래를 지원할 뿐 아니라 필드에 아이템을 드랍하면 이를 다른 플레이어가 획득할 수도 있었습니다. 지극히 실제 세계의 규칙과 비슷해 이상한 점을 느끼기 어려울 수 있지만 게임 경제를 설계하는 입장에서 이 기능만큼 게임을 의도하지 않게 복잡계 문제로 만들어 버리는 요소가 없습니다. 게임적 허용으로 게임 상에서는 여러 가지 요소가 아이템 모양으로 표현됩니다. 성장 재료에 ‘인내의 모래시계’라는 아이템이 있다고 해 봅시다. 이는 캐릭터가 장착한 전설 등급 방어구를 다음 레벨로 올리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재료인데 이를 획득하기 위해 마을에 있는 상인에게 재료를 가져다 준 다음 72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실제 세계에서 3일이 흐른 다음 다시 상인에게 말을 걸면 인내의 모래시계를 얻게 됩니다. 이 과정은 단지 성장 재료를 얻는 하나의 과정일 뿐 아니라 인내의 모래시계 아이템 자체가 재료 뿐 아니라 72시간의 시간을 아이템 모양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 아이템을 다른 플레이어에게 건넬 수 있다면 이를 획득한 플레이어는 개발할 때 이 성장 과정에 당연히 소요될 거라고 예상한 72시간을 건너뛸 수 있게 됩니다. 게임에는 예상보다 훨씬 빨리 레벨이 높은 전설 등급 방어구가 나타나 상급 보스들이 예상보다 빨리 죽어 나갑니다. 다음 대규모 업데이트까지 시간을 벌어줄 거라고 생각했던 보스는 서비스를 시작하고 고작 한 두어 주 만에 쓰러지고 이 방법은 순식간에 고객들에게 전파되어 보스는 표준 무기를 드랍하는 자판기 신세가 됩니다. 플레이어 사이에 아이템을 직접 교환하는 메커닉은 실제 세계의 규칙과 비슷하지만 여러 가지 자원이 아이템 모양으로 표현되는 게임 세계에서 이는 게임 시스템을 순식간에 복잡계로 만들어버리는 요소입니다.
고객들에게 별로 좋은 인상을 남기지는 못한 것 같은 거래소 메커닉은 이런 맥락의 연장에서 탄생했습니다. 처음에는 다들 자신들이 무슨 일을 저지르는줄도 모르고 9.9킬로그램의 플루토늄 239가 튼 통에 마지막 0.1킬로그램을 더하는 실수를 저질러 버렸습니다. 하지만 그런 시행착오 끝에 현대의 우리들은 과거 복잡계와 비슷해 보이는 온라인 기능이 가미된 롤플레잉 장르를 개발하면서도 더 이상 게임을 복잡계로 만들지 않기 위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플레이어 간 거래 기능이 영원히 제거되었지만 그렇다고 게임 상에서 생산되는 재화가 게임 상의 다른 플레이어에게 전달될 필요가 없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 게임에 진입해 온갖 고초를 겪은 플레이어들은 자신들의 고초에 대한 댓가를 원했습니다. 또 나중에 진입한 플레이어들은 이미 누군가 겪었을 똑같은 고초를 다시 겪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런 요구에 시스템이 직접 각자의 요구사항을 들어주는 메커닉을 도입하는 방식으로 접근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달성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한 목표입니다. 때문에 우리들은 플레이어들 사이에 아이템 교환 기능을 추가했습니다. 대신 과거처럼 플레이어 사이에 직접 아이템을 전달하는 대신 거래소를 통해 주식시장과 비슷한 방법을 사용해 무기명으로 거래하도록 했습니다. 플레이어 각각은 거래소를 통해 이전과 조금 다른 방법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아이템을 거래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필요로 할 것 같지만 자신에게는 필요하지 않은 아이템을 거래소에 적당한 가격으로 올려 두면 이를 필요로 하는 누군가가 그 가격을 인정한다면 그 가격에 구입합니다. 만약 너무 높은 가격을 제시했다면 거래소 시스템에서 정렬 순서에서 뒤로 밀려 아무도 구입하지 않을 것이고 판매자는 가격을 낮출 것입니다. 이 시스템을 통해 이전과 똑같이 ‘인내의 모래시계’가 거래됩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 아이템의 가치에 해당하는 비용이 지불되어야만 합니다. 플레이어 사이에 직접 아이템을 주고 받는다면 대가 없이 아이템이 이동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거래소를 통하면 플레이어 사이에 대가 없이 아이템이 이동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여전히 아이템이 이동하면서도 이전에 비해 훨씬 안전합니다.
이제 개발자들은 좀 더 머리를 써 거래소에서 일어나는 모든 거래에 고정 비율의 수수료를 징수합니다. 처음 거래소에서 일어나는 모든 거래에 댓가로 지불된 골드의 30%를 제한 나머지를 판매자에게 반환하는 규칙을 적용하려 할 때 과연 이 규칙이 고객들에게 받아들여질지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이는 전통적인 고객 입장에서 명백히 근거 없는 자원의 가치 감소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닫힌 계에 자원이 계속해서 생산되지만 이를 충분히 소모할 메커닉이 구축되어 있지 않을 때 자연스레 인플레이션이 발생합니다. 실제 세계에서 통화량이 늘어나면 이에 맞춰 물가가 오르는 형식으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데 비해 게임 세계에서는 상인이 판매하는 주요 아이템의 가격이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플레이어들이 맞닥뜨린 당장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지만 플레이어 각각의 인벤토리에 골드가 거대한 의미 없는 숫자로 남아 있는 상태가 됩니다. 이 상황에서 플레이어 간 아이템 교환 메커닉이 있다면 게임에 쌓인 재화가 서로 다른 캐릭터로 전파되어 심각한 문제가 일어날 수 있기에 인플레이션을 적극적으로 억제해야 했는데 이를 한동안은 하수구 메커닉이라고 불렀습니다. 게임 곳곳에서 플레이어가 숨만 쉴라 쳐도 온갖 목적으로 수수료를 뜯어 댔고 고객들로부터 강력한 반발을 샀습니다. 이를 과도하게 설계하면 플레이어들이 게임에서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게임 내 통화량이 줄어들어 여러 플레이어 간의 협업을 통해 제작되는 아이템의 공급이 줄어들어 플레이가 위축되는 신기한 현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런 배경에서 거래소로부터 고정으로 30%의 수수료를 부과하는 발상은 위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이 시점의 고객들은 이미 다양한 게임으로부터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수수료를 내는데 익숙해져 있었고 제 예상과 전혀 달리 별다른 반발 없이 거래소와 수수료 부과 메커닉이 자리잡았습니다.
하지만 거래소 메커닉은 시간이 흐르며 고객들께 당연한 불만을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거래소 자체에 있다기 보다는 성장을 위해 고객들에게 거래소를 더 적극적으로 사용하도록 압력을 가하면서 일어났습니다. 거래소는 이전과 거의 같은 기능으로 동작하고 있었습니다. 주식시장과 비슷하게 무기명으로 거래가 일어나 시세보다 더 낮은 가격으로 정확한 대상에게 거래를 일으키기는 아주 어려웠습니다. 또 플레이어 간의 거래가 없는 상황에서 다른 플레이어에게 큰 금액을 안전하게 전달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물론 예측 가능한 어뷰징이 일어났고 이는 전체에 비하면 소수여서 이 정도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넘어가는 상황입니다. 게임은 플레이어의 성장에 게임 시스템의 더 광범위한 영역에 대한 접근을 요구합니다. 돌 수 있는 거의 모든 던전을 돌고 획득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아이템을 획득해야 할 뿐 아니라 성장시킬 수 있는 거의 모든 아이템의 성장을 요구했습니다. 이전에는 자신이 획득한 무기와 방어구를 성장 시켜 높은 공격력과 방어력을 획득하면 됐습니다. 이미 무기와 방어구를 성장 시킨다는 개념 자체가 실제 세계의 규칙으로부터 벗어나 있지만 이 정도 까지는 납득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플레이어 사이에 경쟁을 유도하고 조금이라도 더 높은 성장 수준에 따라 게임 상에서 일어나는 전투의 승패가 판가름 나는 상황에서 게임 곳곳에 흩뿌려 놓은 자잘한 능력치를 획득하는 일은 재미가 아니라 경쟁에 관심을 가진 고객들에게는 거의 필수로 여겨집니다. 특히 자신의 아이템을 시스템에 제출해 능력치를 획득하는 이른바 컬렉션이나 게임 내에서 수행한 특정 행동에 따라 보상하는 업적 같은 요소는 이전과 달리 현 시점에 불필요한 아이템에 대한 성장을 요구했습니다. 가령 나는 이미 전설 등급에 최고 레벨까지 성장 시킨 무기를 가지고 있어 더 이상의 무기를 획득하거나 성장 시킬 필요가 없지만 컬렉션에서 최고 등급으로 성장 시킨 다른 무기를 요구하며 이를 제출하면 미약한 추가 능력치를 획득할 수 있다면 이는 선택적으로 도전할 요소가 아니게 됩니다.
이미 각각의 무기를 성장 시키는데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모양으로 설계해 놓은 상태에서 게임의 기존 시스템을 모두 유지한 채 계속해서 이전에 경험한 것과 유사한 플레이를 반복해야 하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플레이어 간의 경쟁, 경쟁에 차이를 만드는 작은 능력치, 이를 획득하기 위한 컬렉션과 업적, 여기에 필요한 이미 수행한 성장 과정을 반복하게 만드는 요소는 비록 이 과정을 통한 결과로 더 높은 성장 수준과 승리를 얻을 수는 있었지만 이 과정 전체를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은 물리적은 시간 상 불가능했고 또 고객들의 인내력을 자극합니다. 이 때 거래소가 그 본격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합니다. 앞서 가상의 아이템인 인내의 모래시계를 거래소에서 구입할 수 있으면 이를 구입한 플레이어는 누군가 이미 소요한 72시간을 획득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플레이어가 사용하지 않는 전혀 다른 무기를 최고 등급까지 성장 시킨 상태를 거래소로부터 획득할 수 있다면 이 상태를 직접 만들기 위해 필요한 기나긴 시간과 노력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승리를 위해 이렇게 거래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음이 고객들에게 알려지고 고객들은 이제 한 명의 승리를 위해 한 플레이어에게 요구하던 여러 지리한 플레이를 서로 다른 플레이어들이 병렬로 나눠 수행한 다음 그 플레이를 아이템 모양으로 바꿔 거래소를 통해 교환합니다. 이들은 자신이 어느 플레이어의 강함을 위해 그가 수행했어야 할 플레이를 다신 수행하는지 알 필요가 없습니다. 거래소에서 적정 가격을 제시하면 거래될 뿐입니다. 비슷한 플레이를 대신하는 고객들이 늘어나면 가격은 낮아지고 줄어들면 그 반대의 현상이 일어납니다. 거래소를 통해 여러 플레이어들이 한 플레이어의 강함에 필요한 지리한 플레이를 병렬로 수행하는 모습이 당연해지자 게임디자이너는 더 이상 한 플레이어의 성장을 설계할 때 이를 한 사람이 플레이 할 때 필요한 물리적으로 가능한 시간에 따를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이전에는 플레이어 한 명이 24시간 내내 플레이를 지속할 것을 가정해 숫자들을 설정하고 플레이 시간에 따른 ㅔㅅ그먼트마다 각기 다른 플레이 시나리오를 상정했습니다. 이 방법으로는 24시간동안 24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요구하는 플레이를 만들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이런 플레이를 당연하게 설계하면 고객들은 분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맥락 끝에 플레이어 간에 높은 경쟁 압력을 당연하게 여기던 게임들로부터 피로감을 느낀 고객들이 이 게임들을 등지며 시장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전까지 정말 지독할 정도로 잘 동작하던 강력한 경쟁 압력은 적어도 이 장르와 지금만큼은 그 수명을 다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뒤를 이을 그만큼 시장을 평정할 수 있을 마땅한 메커닉이 아직 나타나지는 않은 상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착한 게임을 주장하며 상업용 프로젝트를 개발하는 사람으로써 상대할 가치가 별로 없는 말을 하기도 하도 또 다른 사람들은 과거에 고객들에게 강력한 경쟁을 조성하며 나쁜 평가를 들었던 주요 키워드에 해당하는 메커닉들을 명시적으로 회피하면 고객들로부터 적절한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을 기대합니다. 가령 과거 고객들을 강력한 경쟁으로 몰아 넣는 메커닉의 기저에는 폭넓은 PvP 메커닉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으로부터 PvP를 제거하면 경쟁 압력을 극적으로 낮춰 고객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또 다른 누군가는 고객들이 자신의 물리적으로 투입할 수 있는 모든 시간을 투입해도 기간 내 달성할 수 없도록 설계된 성장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거래소에 극단적으로 의존하게 만들었던 컬렉션 메커닉을 제거하면 경쟁 압력을 낮춰 고객들로부터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 말합니다. 또 다른 누군가는 고객들이 각자가 투입한 시간과 노력을 게임 상에서 아이템 모양으로 바꿔 주고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게임 전체에 걸친 거래소 메커닉이야말로 고객들이 게임을 등지게 만든 원인이라고 생각해 거래소 메커닉을 제거하거나 축소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들 각각의 의견들은 틀리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딱히 올바른 것도 아닙니다. 제 관점에서 이런 접근들은 이 상황이 일어난 맥락을 지워 버린 체 가장 눈에 띄는 상황만을 보고 반사적으로 판단한 다음 내놓을 수 있는 낮은 수준의 제안에 지나지 않습니다.
과도한 경쟁은 사람을 정신으로부터 망가지게 만들지만 적당한 수준의 경쟁은 목표에 집중하게 만들고 목표를 달성할 때 얻는 정신적 보상을 더 크게 만듭니다. 이런 관점에서 무작정 PvP 메커닉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어쩌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고객들 사이에 가장 직관적인 경쟁을 일으킬 수 있는 장치를 근본적으로 제거한 채 시작하는 의사결정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고객들이 유사 장르 게임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만든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경쟁을 위해 투입해야 할 시간과 노력이 거래소를 통해 서로 다른 플레이어들 사이에 교환 가능해지면서 게임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경쟁에 참여하기 위한 최소 조건이 개인의 모든 시간과 노력을 쏟아 부어 달성할 수 있는 수준을 상회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도 거래소를 경유해 병렬로 성장한 상대와 경쟁할 수 없다면 이 다음부터 경쟁은 노력의 경쟁이 아니라 병렬로 수행된 노력을 획득하기 위하 지출한 금전의 경쟁으로 변합니다. 어쩌면 이는 실제 세계에서 일어나는 경쟁의 본질과 닮은 점이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고객들이 게임을 플레이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실제 세계의 경험을 반복하기 위해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장르라면 고객은 실제 세계에서 할 수 없는 모험, 실제 세계에서 할 수 없는 정당한 경쟁과 그에 따른 경험과 보상을 얻으려 할 겁니다. 이 장르로부터 등을 돌린 고객들의 마음을 얻으려면 거래소 메커닉을 통해 한 사람의 최대보다 더 많은 노력을 병렬로 투입해야만 획득할 수 있는 강함으로 경쟁하게 만드는 이 설계 자체를 문제 삼아야 합니다. 거래소 시스템이 문제가 아니고 또 강화 메커닉이나 플레이어 간 거래 금지, 컬렉션 시스템, 업적 시스템, PvP 메커닉의 제거 같은 낱개의 조치들을 맥락 없이 제각각 수행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자세를 ‘본질 드리븐 디벨롭먼트’ 또는 ‘본질 드리븐 게임디자인’이라고 부를 작정입니다. 물론 각각의 사양을 작성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주니어 그레이드의 게임디자이너일 때가 대부분이어서 이 사양이 필요한 이유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상태일 때가 많습니다. 또 그런 상태를 극복하도록 요구 받지도 않습니다. 필요한 것은 예측 가능한 사양 명세가 지정한 날짜에 도출되느냐 그렇지 않느냐일 뿐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조금 더 진행하면 개발 과정에서 자잘한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크게는 ‘이 게임에 아이템 획득에 따라 스테이터스 보상을 지급하는 컬렉션 메커닉이 필요할까요?’ 같은 것에서 시작해 작게는 ‘걍험치를 캐릭터가 즉시 획득해야 할까요, 아니면 일단 아이템 모양으로 획득한 다음 나중에 적용하게 해야 할까요?’ 같은 좀 더 본질적인 것도 있습니다. 더 크게는 ‘우리 게임에 PvP 메커닉이 필요한가요?’부터 더 작게는 ‘거래소의 범위를 게임 전체로 해야 할까요, 아니면 기술적 단위 구분 - 이른바 서버 - 으로 제한해야 할까요?’ 같은 것도 있습니다. 만약 지금까지 살펴본 끝에 도달한 자잘한 시스템들의 역사와 현대적인 필요를 이해한다면 이 맥락에 의해 주요 의사결정 요구에 대한 답변은 사실 이미 정답이 결정되어 있습니다. 이미 정답이 있기에 정확한 답변을 할 수 있고 의사결정에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맥락에 기반해 행동하지 않는다면 이 작은 질문 하나하나가 모두 의사결정이 필요하고 이에 따라 사양 전체가 변하거나 사양의 성격 자체가 변할 수 있는 큰 질문으로 바뀝니다. 사양의 본질로부터 멀어지거나 본질에 집중하지 않을 때 우리들은 이전에 반 년이면 개발할 수 있는 수준을 3년 내내 개발해도 달성하지 못하는 상황에 쉽게 처해 직업안정성을 위협 받게 됩니다.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어떤 게임디자이너라도 자신이 담당한 사양의 맥락을 다라 도달할 수 있는 그 본질적인 목적과 현대적인 해석, 그리고 현재 프로젝트에서 마주한 문제와 그 해결방법을 생각하며 사양을 작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결과 도출되는 문서는 어쩌면 이전에 작성하던 것과 똑같은 모습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개발을 진행해 나가는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여러 골치아픈 의사결정 문제들이 모두 이미 정답이 결정되어 있어 시간을 끌 필요 없이 즉시 정확한 답변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전과 개발을 진행해 나가는 양상은 완전히 달라질 겁니다. 본질로부터 이어지는 맥락에 관심을 가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