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에 타협해도 개발기간은 줄어들지 않아요.
현대 게임의 많은 부분을 그래픽이 차지하고 있어 여러 문제가 일어나고 있어 그래픽을 타협하고 대신 게임디자인 품질에 투자하면 어떻겠느냐는 영상을 소개하는 트윗을 봤습니다. 게임 개발에 시간이 많이 걸려 한 스튜디오가 콘솔 한 세대 당 게임을 하나 또는 아예 출시하지 못하는 상황을 문제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번에 출시된 프랜차이즈 시리즈 게임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같은 시리즈의 다음 게임 출시까지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아예 시리즈 자체에 대한 관심이 끊어질 수 있다고 합니다. 스튜디오 입장에서도 콘솔 한 세대에 게임을 하나만 출시 가능하다면 과거의 콘솔의 가능성을 끌어낸 게임이 나올 가능성이 없어질 수 있습니다. 스튜디오들은 항상 같은 세대 콘솔의 첫 게임을 만들고 있게 될 겁니다.
현대 게임은 그래픽에 비용을 많이 들이고 있기 때문에 만약 그래픽을 어느 정도 타협한다면 여기서 얻은 자원을 다른 부분에 투자해 현대 게임들이 종종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오랜 기간에 걸쳐 개발했지만 출시 시점에도 게임이 완성되지 않아 첫 날 거대한 패치를 다운로드 해야 하거나 출시 후에도 게임의 곳곳이 완성되지 않아 QA를 통과했을 핵심 경로 외에는 동작하지 않기도 합니다. 게임디자인 개발이 온전히 마무리되지 않아 앞뒤가 맞지 않는 구성요소가 경험을 망가뜨리기도 하고요. 게임들은 주로 차세대 콘솔이 제공하는 새로운 기능에 집중한 대단한 그래픽 효과와 이로 인해 이전에 경험했던 게임 경험의 발전을 광고하곤 하지만 이들은 게임 경험의 부수적인 부분을 담당할 뿐 실제 게임 경험은 광고만큼 대단하지 않기도 합니다.
현대 게임 개발기간이 길고 비용이 높은 이유는 그래픽에 집중한 것도 이유일 수 있지만 이게 핵심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픽은 위에 소개한 영상이나 영상에서 소개한 트윗의 주요 타겟이 유저라는 점에서 유저 입장에서 가장 이해하기 쉬운 이유일 뿐입니다. 대단한 그래픽 때문에 오랜 개발 기간이 필요하고 그래픽을 타협하면 개발 기간을 줄이거나 비슷한 개발 기간을 사용할 때 완성도에 더 집중할 수 있으리라는 논리는 이해하기 쉽습니다. 이해하기 쉽기 때문에 당장 개발사들이 이렇게 행동하지 않는데 대해 비판하기도 쉽고요.
개인적으로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게임 각각의 복잡도가 이전 시대에 비해 훨씬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게임을 통해 비슷한 경험을 하더라도 현대의 게임은 경험 각각의 디테일이 높아졌을 뿐 아니라 경험 각각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또 경험 각각이 메타게임 시스템을 통해 계속해서 측정되고 평가됩니다. 또한 싱글플레이 게임이라 하더라도 게임 내 경험이 게임 외부에 공유되거나 멀티플레이 요소를 도입해 경험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선 잘 와 닿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비약을 조금 보태 현대 게임이 이전 시대의 게임에 비해 복잡해 그래픽을 타협하더라도 개발 기간이 별로 줄어들지 않으리라는 사례를 들어 보겠습니다.
저 유명한 문 문제가 있습니다. 과거 게임에서는 문처럼 보이지만 아예 문 없이 내부로 뻥 뚫린 구조로 만들거나 이 영상에서 소개한 ‘Tier 1’처럼 플레이어의 아무 인터랙션 없이도 문이 알아서 여닫히도록 만들었습니다. 장르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콘솔 게임에서 문 조작은 ‘Tier 3’ 수준을 요구합니다. 영상에서 이야기하듯 이 수준의 문을 만들기 위해서는 단순히 좋은 그래픽 이전에 게임 내 다양한 상황을 잘 정규화한 설계와 이에 맞춘 그래픽 에셋이 필요하고 이전에 비해 더 긴 개발 기간이 필요합니다.
분명 저런 문 연출은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 과거처럼 문을 없애고 공간을 뚫어 놓으면 개발 기간을 단축할 수 있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일단 이렇게 정교한 움직임을 만들어 놓으면 이는 반드시 게임디자인에 활용되어 단순히 그래픽 효과의 수준을 넘어서게 됩니다. 뻥 뚫린 문은 문으로써 의미를 전달하기는 하지만 문이 게임 상에서 어떤 역할을 하지는 않습니다. 때문에 게임디자인 측면에서 이런 문을 게임 규칙에 활용하지도 않고요.
그런데 문이 본격적으로 실제 세계와 비슷하게 동작하기 시작하면 이를 반드시 게임디자인에 활용하게 됩니다. 문을 여는데 시간이 걸려 문 여는 사이에 위험에 노출되거나 문을 조금만 열어 내부를 확인하거나 문 틈으로 뭔가를 던져 넣거나 할 수 있게 만들어 게임 경험을 다채롭게 만듭니다. 이 단계를 지나면 단순히 문을 더 자연스럽게 여닫는 향상된 그래픽의 범주를 넘어 비용을 낮추기 위해 함부로 제거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콘솔 게임에서 주로 보이는 문 문제와 비슷한 문제로 MMO 게임 던전에서 레버를 조작해 문을 여는 사례가 있습니다. 레버는 바닥에 고정 되어 있고 플레이어 캐릭터가 아무 방향에서나 접근해 레버와 상호작용하면 레버와 잘 정렬된 자연스러운 위치로 플레이어가 이동한 다음 멋진 레버 당기는 애니메이션을 재생하게 되어 있습니다. 위에서 이야기한 문 문제와 비슷한데 MMO 게임에서는 같은 상황을 멀티플레이 환경에서도 자연스럽게 동작하게 만들고 있고 여기에는 고려할 사항이 더 많아집니다. 이전에 이동경로를 파괴하는 던전 연출에 대해 다룬 적이 있으니 이쪽을 참고해도 좋을 겁니다.
이전 시대에 비해 세계가 훨씬 넓어졌습니다. 게임 맵 크기를 비교한 영상을 본 적이 있을 겁니다. 요즘 세상에는 도시 하나 정도 크기는 우스운 수준입니다. 게임 레벨은 점점 더 넓어져 몇 백 제곱킬로미터에 달하기도 하고요. 과거에는 그렇게 넓은 세계에 유효한 공간 외에는 비어 있거나 절차생성된 자연물을 채우곤 했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지만 자연물을 절차생성하는 것 역시 오랜 연구 끝에 일상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른 것입니다. 현대에는 그 넓은 세계가 다채롭게 가득 차 있습니다. 이는 그래픽이 좋고 나쁜 수준이 아니라 넓은 세계의 밀도가 이전보다 훨씬 높다는 말입니다.
GTA 시리즈는 항상 넓고 다채로운 세계가 핵심 플레이 요소입니다. 세계를 둘러보면 어느 구석 하나 대충 만들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넓이는 꽤 넓지만 실제 유효한 레벨디자인이 집중된 장소는 아주 작은 메탈기어솔리드5 정도가 실질적으로 개발기간에 유효한 기여를 한 사례입니다. 최근 사례를 생각해보면 워존 2.0의 DMZ를 생각해보면 되는데 충분히 넓은 레벨을 제공하면서도 레벨에 빈 공간이 거의 없습니다. 이 정도 레벨을 제작하는 일은 이미 게임 그래픽의 좋고 나쁨과는 별 관계가 없습니다.
게임 경험은 이전 시대에 비해 훨씬 복잡하고 다양해졌습니다. 인게임에서 플레이어 캐릭터는 게임 상에 더 많은 곳을 돌아다닐 수 있고 더 여러 가지 요소와 상호작용 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이렇게 행동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 행동 각각이 퀘스트 목표이자 업적 달성 목표이기도 하고요. 또한 플레이어 캐릭터의 행동이 게임 세계에 영향을 끼쳐 환경을 바꾸거나 NPC들의 행동을 바꿔 플레이어에게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이런 요소 역시 현대 게임에는 꽤 흔하면서도 제작 비용이 높고 그래픽의 좋고 나쁨과는 별 관계가 없습니다. 싱글플레이 게임이라도 경험을 크게 해치지 않는 선에서 멀티플레이 요소를 도입해 게임 수명을 늘리려 하는 추세이고 멀티플레이 게임은 좀 더 강하게 유저들 사이를 연결해 게임 경험을 생활의 일부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이 역시 제작 비용이 높지만 그래픽의 좋고 나쁨과는 큰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런 디자인을 타협해서 개발 기간을 단축할 수 있지 않느냐고 이야기하거나 여전히 그래픽을 타협해 개발 기간을 단축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일리 있는 주장입니다. 영화는 애니메이션이나 완전히 CG로 만들어지지 않은 이상 실제 인간을 촬영했기 때문에 현대의 모니터를 통해 좀 더 선명하거나 좀 덜 선명한 차이가 있을 뿐 그래픽에 큰 차이가 없습니다. 저예산 영화와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 사이에도 사람은 사람이고 배경은 배경일 뿐 그래픽에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반면 게임 그래픽은 위 영화 설명에서 제외한 애니메이션이나 완전히 CG로 제작된 것에 속합니다. 같은 모니터로 볼 때 시대에 따라 큰 차이가 있습니다. 단순히 빛의 반사 효과를 끄거나 파티클 시큘레이션 대신 애니메이션을 틀거나 세계에 낮과 밤이 변할 때 로딩을 거치게 하는 정도 수준이 아닙니다. 둠 이터널을 플레이 하던 현대 사람이 그래픽을 타협한 울펜슈타인 3D를 플레이 하며 비슷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까요? 실은 그럴 수 있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수많은 대중들에게 비슷하게 요구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게임디자인은 게임 플레이를 이끌어 가고 유저를 게임에 오랫 동안 붙들어두는 역할을 하지만 게임 그래픽은 게임의 첫인상을 결정하는 역할을 합니다. 잘 만들어진 게임디자인도 유저가 게임을 선택하지 않으면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합니다. 그래픽은 유저가 게임을 선택하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이미 게임을 선택한 입장에서 그래픽이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미 너무나 당연하고 또 게임디자인에 의해 이끌려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래픽을 타협한 게임은 애초에 선택되지조차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위에 설명한 대로 현대의 게임은 이미 이전 시대에 비해 모든 측면에서 복잡도가 높아져 단지 그래픽에 타협한다고 해서 개발 비용이 줄어들지도 않을 겁니다.
너무 긴 개발 기간 때문에 유저들을 실망시키고 있음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개발사들이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개발 기간을 줄일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은 맞습니다. 다만 단지 그래픽을 타협해야 한다는 식의 일차원적인 접근에 쉽게 동조하는 것은 개발사에게나 유저에게도 썩 달가운 움직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솔직히 그래픽 좋은 게임 하고 싶습니다. 그러면서도 더 자주 출시됐으면 좋겠고 또 그러면서도 게임디자인은 정교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럴 방법을 찾는 것은 개발사의 몫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