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의 심장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미술과 건축이 일상을 장식하는 공간이면서도 정치적 폭력과 공개 처형이 역사 속에서 반복된 도시입니다. 이 장소는 렉터 박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요.

단테의 심장

피렌체의 밤은 이상하게도 오래 남습니다. 영화 한니발에서 피렌체 파트는 사건을 빨리 밀어붙이기보다 도시가 가진 공기와 표정을 천천히 보여주면서 시작합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추격전’보다 먼저 ‘장소’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 장소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한니발 렉터의 취향과 파치 형사의 운명을 함께 끌고 가는 무대라는 사실이 점점 드러납니다. 특히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도시로 알려져 있지만, 동시에 권력투쟁의 흔적과 공개 처형의 기억도 강하게 남아 있는 곳입니다. 1478년 파치 음모 이후 관련자들이 베키오 궁전(팔라초 델라 시뇨리아) 창문에서 교수형을 당했고, 그 뒤 파치 가문의 이름과 문장이 공적으로 억압되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 '예술의 도시'와 '처벌의 도시'가 겹쳐 있는 느낌이, 작품 속 피렌체를 더욱 불편하게 아름답게 만듭니다[^Pazzi conspiracy]. 또 하나 강렬하게 남는 이유는, 피렌체 파트가 한니발 렉터를 단순한 도망자가 아니라 '자기 삶을 예술처럼 꾸미는 사람'으로 보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서 작품은 유난히 문학과 음악을 전면에 놓습니다. 영화는 오페라 장면을 핵심 축으로 사용하고, 그 음악을 위해 단테의 텍스트를 실제로 끌어옵니다. 'Vide Cor Meum'이라는 제목 자체가 라틴어로 '내 심장을 보라'라는 뜻이고, 영화에서 이 노래가 단테의 시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설명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How the Passion of Hannibal Lecter Inspired a New Opera About Dante]. 이 장면은 앞으로 펼쳐질 폭력과 처벌을 예고하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아름다운 음악이 흐를수록, 그 아름다움이 결국 피가 흐르는 쪽으로 이어질 것을 우리들이 직감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야기할 범위는 크게 네 덩어리입니다. 첫째는 역사입니다. 파치 형사가 '파치'라는 성을 가진 인물로 설정된 것 자체가 피렌체의 실제 역사, 특히 파치 음모와 그 뒤의 잔혹한 보복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앞서 언급했듯 파치 음모의 여파로 많은 처형이 있었고 ‘창문 교수형’이라는 이미지가 남았습니다[^Pazzi conspiracy]. 둘째는 텍스트입니다. 영화는 단테의 문장을 인용하고, '불타는 심장을 먹는' 이미지 같은 강렬한 표현을 렉터의 언어로 바꿔 씁니다. 단테의 새로운 삶(La Vita Nuova)에는 ‘Vide cor tuum’(네 심장을 보라)이라는 말과 함께 잠든 여인을 깨워 불타는 것을 먹게 하는 환시가 영어 번역으로도 잘 정리돼 있습니다[^Vita Nuova (Frisardi Translation)]. 이 이미지는 ‘사랑의 은유’로도 읽히지만, 한니발 렉터의 세계에서는 곧바로 ‘섭취’와 ‘포식’이라는 문자적 의미로 미끄러질 수 있는 위험한 언어가 됩니다. 셋째는 연출입니다. 영화 속 오페라 장면은 음악과 시를 통해, '숭고함'과 '잔혹함'을 일부러 한 화면에 겹쳐 놓습니다. 그리고 강연 장면에서 렉터가 파치 형사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시 구절을 읊는 연출은, 단순한 인사나 교양 과시가 아니라 '내가 너를 안다'는 표식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이때 렉터가 말하는 문장들은 영화 대본에 여러 형태로 전해지는데, 핵심은 '떨며 순종해 불타는 심장을 먹고, 그는 울며 떠난다'라는 이미지입니다[^Hannibal (2001) - full transcript]. 넷째는 인물입니다. 파치 형사는 왜 ‘체포’가 아니라 ‘거래’를 택하는지, 알레그라는 파치 형사에게 어떤 의미인지, 한니발 렉터는 파치 형사의 선택을 어떻게 판단하고 어떤 방식으로 응징하는지, 그리고 왜 알레그라가 무례하지 않은 사람처럼 보이는데도 '먹을지 고민한다'는 말을 던지는지까지, 모두 피렌체 파트의 테마 안에서 연결됩니다. 그 연결은 '도시의 역사'와 '단테의 언어'와 '렉터의 미학'이 한 덩어리로 맞물릴 때 가장 또렷해집니다. 여기까지는 전체 글의 앞부분으로, 피렌체 파트를 어떤 렌즈로 읽을지 큰 지도를 먼저 깔아두는 구간입니다.

피렌체는 겉으로는 ‘예술의 도시’라는 한 문장으로 정리되지만, 한니발의 피렌체는 그 반대편 기억까지 함께 끌어옵니다. 르네상스의 미술과 건축이 일상을 장식하는 공간이면서도 정치적 폭력과 공개 처벌이 역사 속에서 반복된 도시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1478년 파치 음모 이후 가담자들이 팔라초 델라 시뇨리아(오늘날의 팔라초 베키오) 창문에서 교수형을 당했고, 그 장면이 ‘도시의 공포 기억’처럼 남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이중성 때문에 피렌체는 한니발 렉터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동시에, 그의 폭력과 ‘응징’ 미학을 정당화하는 배경이 됩니다. 렉터 박사가 피렌체로 숨어든 이유를 서사적으로 보면, 이 도시는 그가 위장하기에 매우 좋은 조건을 갖춥니다. 그는 ‘닥터 펠(Dr. Fell)’이라는 가명 아래 학자처럼 살며, 단테 연구자이자 중세문학자처럼 보이는 일상 루틴을 꾸립니다. 영화는 그가 단테 강연을 하고, 새로운 삶(La Vita Nuova) 구절을 암송하며 신곡을 강의하는 인물로까지 위장한다는 설정을 전면에 둡니다[^Ridley Scott, Hannibal (2001)]. 피렌체가 관광객과 외지인이 늘 섞여 다니는 도시라는 점도 ‘익명성’에 유리합니다. 낯선 억양, 어색한 배경, 조용한 생활방식이 오히려 자연스럽게 보일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Hannibal Plot]. 여기에 더해 렉터가 피렌체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미학적입니다. 피렌체는 아름다움이 곧 도덕을 뜻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도시 자체가 보여주는 곳입니다. 렉터는 그 틈을 사랑합니다. 그는 예술과 지식이 인간을 고상하게 만든다고 믿는 척하지만, 동시에 예술과 지식이 폭력을 가리는 ‘가림막’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압니다. 그리고 그 가림막이 가장 그럴듯하게 작동하는 곳이 바로 피렌체입니다. 단테 텍스트가 영화 속에서 반복 인용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단테의 ‘지옥’과 ‘응보’의 상상력은 렉터의 처벌 방식과 맞닿아 있고, 렉터는 마치 자신을 벌의 집행자처럼 연출합니다[^Ridley Scott, Hannibal (2001)]. 여기까지가 이번 파트의 공개 구간입니다.

1478년의 파치 음모는 피렌체가 '예술의 도시'로만 기억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아주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이 음모는 파치 가문이 주도한 권력 교체 시도였고, 목표는 당시 피렌체의 실권자였던 메디치 가문, 그중에서도 로렌초 데 메디치와 줄리아노 데 메디치 형제를 한 번에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사건이 벌어진 시간과 장소가 더 충격적인데, 1478년 4월 26일 부활절 미사 중 피렌체 대성당에서 암살이 시도됐습니다. 거룩한 의식의 한가운데에서 정치적 살인이 실행된 셈이니, 피렌체라는 도시가 가진 ‘아름다움과 폭력의 공존’이라는 기억은 이런 순간들에서 만들어졌다고 봐야 합니다. 결과는 '부분적 성공, 전체 실패'에 가까웠습니다. 줄리아노 데 메디치는 그 자리에서 살해됐지만, 로렌초 데 메디치는 살아남아 도망쳤습니다. 음모 세력은 동시에 정부를 장악하려 했지만, 피렌체 시민이 메디치 편으로 결집하면서 계획이 무너졌고, 그 뒤 보복은 매우 빠르고 잔혹하게 진행됐습니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것은 '법정 절차'보다 '즉각적인 응징'이 앞서는 도시 분위기입니다.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세련된 외피를 가졌지만, 권력투쟁에 대해서는 집단적 폭력으로도 단숨에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Pazzi conspiracy]. 이 음모의 핵심 인물로 가장 자주 거론되는 이름은 야코포 데 파치와 프란체스코 데 파치입니다. 프란체스코 데 파치는 줄리아노 데 메디치 공격에 직접 가담한 인물로 전해지고, 음모 실패 직후 다른 공모자들과 함께 처형됩니다. 야코포 데 파치는 가문의 수장 격으로 묘사되는 인물인데, 사건 뒤 도망쳤다가 붙잡혀 피렌체로 끌려와 고문을 당한 다음 처형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Jacopo de' Pazzi]. 여기서 ‘최후’ 자체도 잔혹하지만, 더 오래 남는 것은 처형 방식이 남긴 이미지입니다. 당시 공모자들 중 여러 명이 시뇨리아 궁전, 즉 지금의 베키오 궁전 창문에서 교수형을 당했다고 정리돼 있습니다. 이 '창문 교수형'은 그냥 처형이 아니라, 도시가 권력의 승자와 패자를 어떻게 전시하는지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 이미지가 왜 그렇게 강력하냐면, 사람을 죽이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보이게 만드는 것'까지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창문에 매달린 시신은 시민이 보는 곳에서, 도시의 한복판에서, 권력이 내리는 결론을 시각적으로 고정합니다. 파치 음모는 실패로 끝났지만, 그 실패는 ‘조용히 사라지는 실패’가 아니라 ‘도시 전체가 기억하도록 만든 실패’가 됩니다. 공모자들이 '베키오 궁전 창문에서 교수형'을 당했다는 서술은 바로 그 지점을 압축합니다. 그래서 파치라는 이름은 단순히 한 가문의 이름이 아니라, 피렌체에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자의 말로'를 떠올리게 하는 기호가 됩니다. 영화 한니발이 이 역사를 '파치 형사'에게 이식하는 방식은 매우 노골적이면서도 효과적입니다. 작품은 파치 형사를 단순한 조연 경찰로 놓지 않고, ‘파치’라는 성을 가진 피렌체 경찰로 설정합니다. 그리고 그가 한니발 렉터를 거래 대상으로 바꾸는 순간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파치라는 이름이 결국 어떤 끝을 부를지'를 예상하게 됩니다. 파치 음모의 공모자들이 베키오 궁전 창문에서 교수형을 당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만큼, 작품 속 파치 형사가 창문과 교수형에 의해 처형되는 장면은 역사적 기억을 그대로 불러오는 장치로 읽힙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역사 고증’이 아니라 ‘운명성’입니다. 작품은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재현하려는 게 아니라, 피렌체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처벌의 이미지를 빌려와 파치 형사의 도덕적 타락을 '이미 예고된 몰락'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파치 형사의 목표는 한 줄로 정리하면 ‘한니발 렉터를 잡는 것’이 아니라 ‘한니발 렉터를 팔아 돈을 받는 것’입니다. 영화는 그 차이를 대사와 행동으로 계속 강조하고, 그 과정에서 파치가 경찰로서 지켜야 할 선을 어떤 순서로 넘는지까지 단계적으로 보여줍니다. 파치가 처음부터 끝까지 붙잡고 있는 목표가 '현상금 거래'라는 점은 스토리의 핵심 갈림길입니다. 피렌체 경찰인 파치는 닥터 펠의 정체가 한니발 렉터라는 사실을 깨닫자, 이를 상부 보고나 국제 공조의 방향으로 밀어 올리기보다 ‘그 정보가 돈이 될 수 있다’는 쪽으로 생각을 돌립니다[^Hannibal (2001)]. 이 선택은 단순히 욕심이 많다는 성격 묘사가 아니라, 이후 전개를 '수사극'에서 '배신극'으로 바꾸는 장치가 됩니다[^Hannibal (2001 film)].​ 타락의 단계는 시간 흐름에 따라 또렷하게 구분됩니다. 오페라 장면은 파치가 아직 범죄를 실행하기 전이지만, ‘돈과 체면’이 그의 가치 판단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분위기를 먼저 깔아 줍니다. 다음으로 향수 가게 단계에서 클라리스 스탈링이 CCTV를 요청하자, 파치는 그 요청이 닥터 펠과 연결된다는 실마리를 잡고 스스로 확신을 굳히기 시작합니다. 그 다음은 버저에게 연락하는 단계입니다. 파치는 메이슨 버저가 마련한 연락망으로 전화를 걸어 현상금 지급 조건을 확인하고, 사실상 '나는 이걸 거래로 처리하겠다'는 방향을 확정합니다. 여기서부터는 단순한 마음속 유혹이 아니라, 돈을 받기 위해 필요한 증거인 지문과 절차를 맞추는 ‘실무’로 넘어갑니다. 지문 확보 단계는 파치가 ‘되돌릴 수 없는 선’을 실제로 넘는 구간입니다. 파치는 소매치기를 동원해 렉터의 지문을 얻으려 하고, 실패하면 감옥에 보내겠다는 식으로 압박까지 가합니다. 이 순간부터 파치는 더 이상 '유혹받는 경찰'이 아니라, 범죄를 설계하고 타인을 도구로 쓰는 공모자가 됩니다. 마지막 납치 시도 단계에서 타락은 ‘목표 달성’이 아니라 ‘자기보존’의 성격까지 띠게 됩니다. 경찰 조직을 끌어들이지 않고 버저의 사조직과 손잡겠다는 선택은 공권력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고, 그 자체가 합법으로 돌아갈 다리를 끊는 행동입니다. 그래서 파치의 몰락은 우연한 불운이 아니라 '체포'가 아닌 '거래'를 선택한 사람이 단계적으로 자기 발밑을 무너뜨린 결과로 보이게 됩니다.

한편 알레그라는 영화 한니발의 피렌체 파트에서 ‘사건을 끌고 가는 사람’이라기보다, 파치 형사의 욕망이 어떤 모양인지 우리들이 한눈에 알아보게 해주는 인물입니다. 알레그라와 파치 형사의 관계는 겉으로는 평범한 부부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이 부부를 '가정'이라는 안정의 틀로 그리기보다는, 파치 형사가 바라는 ‘우아한 생활’의 표지로 배치합니다. 오페라를 보고 싶어 하는 알레그라가 '이번에는 보고 싶다, 뒷줄 말고, 가격은 상관없다'는 식으로 말하고, 파치 형사가 그 욕구를 맞춰주려는 흐름은, 이 관계의 핵심이 애정만이 아니라 체면과 소비, 그리고 ‘더 좋은 자리’에 대한 갈망까지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Hannibal (2001)]. 이 점 때문에 알레그라는 '가정, 우아함, 욕망'을 한 몸에 대표하는 인물로 기능합니다. 가정은 파치 형사가 스스로를 ‘가정이 있는 정상인’으로 믿게 만드는 장치입니다. 우아함은 파치 형사가 실제로 누리고 싶어 하는 세계입니다. 욕망은 그 우아함을 얻기 위해 법의 선을 넘게 만드는 추진력입니다. 영화는 알레그라를 악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알레그라는 정중하고, 호기심이 많고, 오페라와 시 같은 문화적 언어를 편하게 쓰는 사람으로 보이게 합니다. 예를 들어 오페라 극장에서 알레그라는 닥터 펠에게 '한 번의 만남만으로 집착할 수 있나' 같은 질문을 던지고, '허기'와 '양분'이라는 말로 사랑을 설명합니다[^Francesca Neri: Allegra Pazzi] 알레그라가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 부부가 살아가는 생활권이 어떤 문화적 분위기인지도 보여줍니다.

알레그라가 파치 형사에게 갖는 의미는 그래서 매우 현실적입니다. 파치 형사가 한니발 렉터를 체포하지 않고 '현상금 거래'로 돌리는 순간에도 그 선택은 ‘범죄자의 유혹’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더 정확히는 '내가 지금 누릴 수 없는 것'을 한 번에 얻고 싶은 욕망이 작동합니다. 그리고 그 욕망은 추상적인 돈 자체가 아니라, 알레그라가 요구하는 우아한 세계를 ‘내가 제공해 줄 수 있다’는 자기 이미지와 연결됩니다. 다시 말해 알레그라는 파치 형사의 마음속에서 동기이자 변명입니다. '가정을 위해서' '아내를 위해서'라는 말은 언제나 강력한 자기정당화가 됩니다. 영화는 이 자기정당화가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주려고 알레그라를 끝까지 비교적 순수하고 무고한 사람으로 남겨 둡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알레그라가 서사에서 직접적인 개입을 거의 하지 않는데도 파치 형사의 선택을 ‘가속’한다는 사실입니다. 알레그라는 한니발 렉터를 쫓거나 파치 형사에게 거래를 부추기거나, 메이슨 버저와 연결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알레그라가 존재하는 순간, 파치 형사는 항상 ‘집으로 돌아가는 삶’과 ‘한 방에 뒤집을 수 있는 돈’ 사이에서 비교를 하게 됩니다. 영화 속에서 파치 형사가 오페라 티켓을 구하고, 값비싼 장신구를 사고, 그 비용을 감당하려는 듯한 불안과 욕망을 드러내는 장면들은, 알레그라가 '사건의 원인'이 아니라 '사건이 커지는 배경'임을 보여줍니다. 이런 구조는 한니발 렉터의 위협 대사와도 연결됩니다. 한니발 렉터는 파치 형사에게 알레그라가 무례하지 않은 사람인데도 '먹을지 진지하게 고민 중'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무례함에 대한 처벌’이 아니라, 파치 형사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상징을 겨냥한 공격입니다. 파치 형사에게 알레그라는 돈으로 바꾸고 싶은 삶이면서도, 동시에 잃어서는 안 되는 삶입니다. 한니발 렉터는 그 점을 정확히 알고, 협박이자 협상의 카드로 알레그라를 꺼냅니다. 그 결과 파치 형사의 타락은 개인적 선택에서 끝나지 않고, 자기 가족까지 위험에 올려놓는 단계로 넘어갑니다.

한니발 렉터가 파치 형사를 판단하는 기준은 흔히 알려진 '무례한 사람은 먹는다'라는 규칙만으로는 설명이 잘 되지 않습니다. 피렌체 파트에서 렉터가 파치 형사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무례함 자체보다 '배신'과 '탐욕', 그리고 사람을 돈으로 바꾸는 '거래'를 더 큰 죄로 취급하는 쪽에 가깝습니다. 파치 형사는 경찰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렉터를 국가의 법 집행으로 처리하지 않고, 개인의 이익을 위해 ‘현상금 거래’로 돌립니다. 이 선택은 렉터에게 단순한 무례가 아니라, 인간을 물건처럼 파는 행위로 보입니다. 그래서 렉터의 응징은 '버릇없는 사람에게 벌을 주는' 수준이 아니라 '나를 파는 사람에게 내리는 판결'처럼 연출됩니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파치 형사가 경찰이라는 사실은 오히려 죄를 더 무겁게 만듭니다. 파치 형사는 법의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판단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문장이 바로 '당신의 아내를 먹을까 진지하게 고민 중입니다'라는 말입니다. 이 문장은 소설에서도 그대로 유명한 대사로 정리돼 있습니다[^Thomas Harris > Quotes > Quotable Quote]. 이 말이 중요한 이유는, 알레그라가 무례했기 때문이 아니라, 파치 형사의 거래를 ‘협상’으로 되받아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파치 형사는 렉터를 팔아넘기는 조건으로 돈을 받으려 합니다. 렉터는 같은 방식으로 파치 형사의 가장 소중한 것을 거래 테이블 위에 올려놓습니다. '당신이 나를 안전하게 떠나게 해주면 나는 당신의 아내를 건드리지 않을 수도 있다'는 구조입니다. 즉 이 문장은 순수한 식욕 고백이 아니라, 협박이면서 동시에 제안입니다. 렉터는 파치 형사에게 '당신이 거래를 시작했으니, 나도 거래를 하겠다'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그리고 그 거래의 무게 중심을 '돈'에서 '가족의 안전'으로 바꿔버립니다. 파치 형사가 무너지기 시작하는 지점도 바로 여기입니다. 돈을 얻기 위해 시작한 일인데, 결과적으로는 가족까지 위험에 올려놓게 됩니다.

이 다음에 이어지는 파치 형사의 처형은 렉터가 단순히 살인을 저지르는 장면이 아니라, 피렌체라는 도시가 가진 ‘기억’을 이용하는 장면입니다. 영화에서 렉터는 파치 형사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밖으로 흘리게 만든 뒤 발코니에서 매달아 교수형처럼 보이게 합니다. 이 연출이 왜 하필 그렇게 잔혹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답하려면, '파치'라는 이름이 피렌체에서 무엇을 떠올리게 하는지까지 같이 봐야 합니다. 영화 속 파치 형사는 자기 조상이 500년 전에 당했던 처형을 말로 듣고, 결국 거의 같은 모양으로 죽습니다. 이 장면이 ‘역사적 파치 처벌 이미지’와 겹치도록 설계돼 있다는 해석은 장면 분석 글에서도 반복됩니다[^‘Short’ analysis of: Hannibal (2001), Rinaldo Pazzi Execution]. 렉터는 한 사람을 죽이는 데서 끝내지 않고, 그 죽음을 '의미가 있는 형식'으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피렌체는 그런 형식의 창고처럼 쓰이기에 좋은 도시입니다. 예술의 도시라는 겉모습이, 오히려 폭력을 더 차갑게 보이게 합니다. 그리고 과거의 처형 이미지가 현재의 살인에 덧씌워질 때, 우리들은 ‘이건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응징이다’라는 착각에 잠깐 빠지게 됩니다. 렉터가 원하는 효과는 바로 그 지점에 있습니다. 정리하면 피렌체 파트의 렉터는 '무례한 사람을 벌한다'는 규칙보다 '거래로 사람을 파는 자를 벌한다'는 규칙에 더 가까이 서 있습니다. 그리고 '아내를 먹을까 고민'이라는 발언은 그 규칙을 가장 짧고 잔혹하게 전달하는 협상 도구입니다. 마지막으로 내장과 교수형의 처형은 피렌체의 파치 역사와 겹쳐지면서, 파치 형사의 타락을 ‘개인의 실수’가 아니라 ‘이름이 부른 운명’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피렌체 파트에서 오페라 'Vide Cor Meum'은 단순한 배경음악이 아니라, 영화가 우리들에게 한니발 렉터의 세계를 '아름답게 보이도록' 먼저 세팅하는 장치입니다. 이 장면은 숭고한 음악과 교양의 언어를 앞세워 우리들의 감각을 무장해제시키고, 그 직후부터 이어지는 배신·협박·처형을 같은 프레임 안에 끼워 넣습니다[^Opera Meets Film: How Opera Adds Narrative Depth To Ridley Scott’s ‘Hannibal’]. 영화 속 공연은 기존 레퍼토리 오페라를 가져다 쓴 것이 아니라, 영화의 목적을 위해 새로 작곡된 음악을 ‘극중 오페라’처럼 배치한 형태로 설명됩니다. 작품 안에서는 단테의 소넷('La Vita Nuova'의 초기 소네트)를 ‘오페라로 각색한 공연’이 열린 것으로 설정되어 있고, 그 자리에서 파치 형사와 알레그라가 닥터 펠을 마주치게 됩니다. 이 공연의 구성에서 중요한 것은, 'Vide Cor Meum'이 단테·베아트리체·아모르의 정서를 다루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영화 안에서는 파치 형사의 욕망과 렉터의 위험이 교차하는 순간을 강조하도록 쓰인다는 점입니다. 이 오페라 시퀀스가 겉으로는 서사를 크게 진전시키지 않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파치 형사가 오페라에서 렉터를 '확실하게' 목격하는 장면이며 이후 파치가 렉터에게 살해되는 사건으로 연결됩니다[^Opera Meets Film: How Opera Adds Narrative Depth To Ridley Scott’s ‘Hannibal’].

이 장면이 수행하는 역할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숭고함과 잔혹함을 한 화면에 겹쳐 렉터의 세계를 우리들에게 주입한다'입니다. ‘천사 같은 아름다움의 음악’이 곧바로 이어지는 파치의 처형과 뒤의 다른 잔혹한 장면들과 대비를 이루면서, 우리들이 누구에게 감정이입을 해야 할지 혼란스러워지게 만듭니다. 쉽게 말해, 음악이 아름다울수록 화면의 폭력은 더 차갑게 느껴지고, 동시에 그 폭력이 '의식'처럼 보이면서 렉터를 ‘연출자’에 가깝게 느끼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 오페라 장면이 단순히 ‘분위기’만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장면 전후 대사에서 더 분명해집니다. 영화 트랜스크립트에 따르면, 오페라 극장에서 알레그라는 렉터에게 '한 번의 만남만으로 어떤 여자에게 집착할 수 있나'라고 묻고, 이어 ‘허기’와 ‘양분’ 같은 단어로 사랑을 설명합니다. 렉터가 여기에 맞장구치고, 알레그라가 '창살 너머의 처지를 보고 그를 위해 아파할까(ache for him)' 같은 말을 이어가는 흐름은, 사랑의 언어가 ‘먹는 언어’로 미끄러질 수 있는 통로를. 열어 둡니다[^Hannibal (2001)]. 또 한 가지 중요한 효과는, 이 대화가 파치 형사의 타락을 ‘현실적 욕망’으로 고정해 준다는 점입니다. 대본에서 오페라 티켓을 두고 알레그라가 '이번엔 꼭 보고 싶다, 뒷줄은 싫다, 가격은 상관없다'라고 말하고 파치 형사가 맞춰주려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 말은 파치 형사가 왜 ‘체포’가 아니라 ‘현상금 거래’로 기울어지는지 감정적 배경을 깔아줍니다. 오페라가 ‘교양’의 기호라면, 티켓 대화는 ‘소비’의 기호이고, 영화는 이 둘을 붙여서 '교양을 누리기 위한 돈'이 파치 형사의 선택을 얼마나 쉽게 비틀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단테 인용 중에서 가장 강렬한 것은 ‘불타는 심장’ 이미지입니다. 영화 한니발은 이 이미지를 배경 교양으로 쓰지 않고, 피렌체 파트 전체의 감정과 폭력의 리듬을 만들어내는 핵심 언어로 씁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단테를 알면 더 재미있다'가 아니라, '단테를 모르면 장면의 의도가 반쯤 가려진다'에 가깝습니다. 이 텍스트는 단테의 새로운 삶(La Vita Nuova) 3장에 들어 있는 꿈의 기록에서 출발합니다. 단테는 어느 날 잠에 들었다가 ‘사랑(Amore)’이 한 손에 불타는 무언가를 들고 나타나 'Vide cor tuum(네 심장을 보라)'라고 말하는 환시를 봅니다[^The Project Gutenberg eBook, The New Life (La Vita Nuova), by Dante Alighieri, Translated by Dante Gabriel Rossetti]. 그리고 그 환시에서 ‘사랑’은 잠든 여인을 깨워, 자신이 들고 있던 그 불타는 심장을 먹게 만듭니다. 이 한 줄만 놓고 보면, 우리가 익숙한 ‘아름다운 연애시’와는 완전히 다른 기괴한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 기괴함이 바로 중세적 사랑의 양가성입니다. 단테가 말하는 사랑은 달콤한 감정만이 아니라, 삶을 지배하고 몸을 흔들고 사람을 바꿔버리는 힘입니다. 꿈 속에서 ‘사랑’은 단테를 향해 '나는 너의 주인이다'라는 취지의 말을 하고, 그 다음 장면에서 심장을 꺼내 보이며 '네 마음을 보라'고 요구합니다. 여기에는 숭고함이 있습니다. 사랑이 단테의 내면을 드러내고, 그 내면을 어떤 ‘더 높은 질서’로 끌고 가는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폭력도 있습니다. 심장은 빼앗길 수 있는 물건처럼 다뤄지고, ‘먹는다’는 행위로 타인의 몸 안으로 들어갑니다. 다시 말해 이 환시는 사랑을 신성한 것으로 높이면서도, 그 신성이 인간에게 얼마나 잔인한 명령을 내릴 수 있는지까지 함께 보여줍니다. 이 이미지가 영화 밖에서 갖는 미학적 의미는 여기서 더 선명해집니다. ‘불타는 심장을 먹는다’는 장면은 사실적 묘사가 아니라 상징입니다. 사랑이란 감정이 단테에게는 허기처럼 느껴졌고, 그 허기는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타인을 통해 채워지고 완성되는 힘으로 상상됩니다. 그래서 심장은 ‘내 것’이면서 동시에 ‘상대에게 바쳐지는 것’이 됩니다. 또한 '먹는다'는 표현은 사랑이 감상이나 관찰로 끝나는 게 아니라, 상대를 내 안으로 들이는 완전한 소유와 동화의 욕망까지 포함한다는 뜻으로도 읽힙니다. 이런 해석을 뒷받침하듯, 새로운 삶의 다른 영어 번역에서도 같은 장면을 'Look upon your heart'라고 풀고, 여인이 '먹었다'는 묘사를 반복해 보여줍니다. 번역이 달라도 장면의 뼈대는 변하지 않습니다. 불타는 심장, 그리고 섭취. 이것이 단테가 사랑을 상상하는 방식의 핵심 이미지입니다[^La Vita Nuova ‘The New Life’ of Dante Alighieri].

영화 안에서 이 텍스트가 갖는 의미는, 솔직히 말해 더 섬뜩합니다. 영화는 이 단테의 은유를 ‘은유로만’ 남겨두지 않습니다. 한니발 렉터라는 존재 때문에, '먹기'는 언제든 문자적 의미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단테의 시가 가진 숭고함과 폭력의 양가성은 영화에서 교양과 살인의 양가성으로 옮겨붙습니다. 이 전환을 더 매끄럽게 해주는 것이 바로 피렌체 오페라 장면입니다. 영화는 단테의 텍스트를 바탕으로 한 음악 'Vide Cor Meum'을 오페라처럼 배치하고, 그 음악의 정서로 을 먼저 취하게 만듭니다. 그러고 나서 '불타는 심장' 같은 언어를 렉터의 입으로 다시 꺼냅니다. 이런 구조에서는 우리들이 단테를 ‘아름다운 사랑’으로 먼저 오해할수록, 뒤늦게 찾아오는 공포가 더 커집니다. 단테가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쓴 섭취의 은유가, 한니발 렉터에게서는 실제 섭취의 가능성으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것은, 영화가 단테를 ‘지식 자랑’으로 쓰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단테의 문장은 한니발 렉터의 세계관을 우리들의 감각에 직접 입력하는 도구입니다. '사랑을 말하는데 먹는 이야기가 나온다'는 불편함을 우리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만들고 그 불편함이 결국 피렌체 파트의 폭력으로 이어지도록 길을 닦습니다. 단테의 환시는 원래부터 아름답기만 한 장면이 아니었습니다. 그 양가성을 그대로 살려서 영화는 '우아함 속의 잔혹함'이라는 피렌체 파트의 정서를 완성합니다. 강연 장면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사실 강연 자체가 아니라, 강연이 끝난 뒤입니다. 한니발 렉터는 ‘닥터 펠’이라는 이름으로 피렌체의 강단에 서서 단테를 말하고, 그 자리에서 완전히 교양인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강연이 끝난 뒤, 파치 형사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아주 짧은 시 구절을 읊습니다. 그 구절은 영화 트랜스크립트에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He woke her then, and trembling and obedient… she ate that burning heart out of his hand. Weeping, I saw him then depart from me.'[^Hannibal (2001)] 이 문장은 영화에서 ‘단테의 시’로 들리지만, 정확히 말하면 단테 새로운 삶(La Vita Nuova) 안에 있는 ‘꿈 이야기’와 그 꿈을 소네트로 옮긴 부분의 핵심 이미지를 영어로 뽑아낸 형태입니다[^The Project Gutenberg eBook, The New Life (La Vita Nuova), by Dante Alighieri, Translated by Dante Gabriel Rossetti].

이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렉터가 무엇을 말했는가보다, 왜 하필 파치 형사의 어깨에 손을 올렸는가입니다. 그 손은 친근한 제스처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렉터가 타인의 몸에 손을 얹는 순간은 거의 항상 '내가 너의 공간 안으로 들어왔다'는 선언으로 읽힙니다. 여기에 단테의 문장을 얹으면 효과는 더 뚜렷해집니다. 'trembling and obedient(떨며 순종하여)'라는 표현은 누군가가 지배를 받아들이는 상태를 가리키고, 'she ate that burning heart(불타는 심장을 먹었다)'는 표현은 사랑이란 이름으로 상대의 내면을 ‘섭취’하는 폭력적인 상상입니다. 렉터는 그 문장을 파치 형사에게 들려주면서, '지금 이 순간의 관계가 교양의 인사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신호를 남깁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경고이면서 표식입니다. 파치 형사는 그 표식을 알아듣지 못하거나, 알아듣고도 무시합니다. 이때 우리들은 렉터가 이미 파치 형사의 욕망과 선택을 어느 정도 읽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영화는 이런 방식으로 ‘추적’이 아니라 ‘판결’의 분위기를 만들고, 그 판결을 내리는 언어로 단테를 사용합니다. 이 구절의 마지막 'Weeping I saw him then depart from me(나는 울면서 그가 떠나는 것을 보았다)'는 더 미묘합니다. 단테의 원문에서는 ‘사랑(Amore)’이 기쁨에서 갑자기 울음으로 바뀌고, 여인을 안은 채 하늘로 올라가며 사라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즉 단테에게 이 ‘떠남’은 사랑의 환시가 남긴 상실감이자, 사랑이 사람을 지배한 뒤 결국 사라져 버리는 공허함입니다. 그런데 영화에서 이 문장은 ‘상실’이라기보다 ‘예고’로 들립니다. 렉터는 떠나갈 사람이 아니라, 떠나게 만들 사람입니다. 파치 형사에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파치 형사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 끝은 '울며 떠나는 장면'처럼 보이도록 설계돼 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한 낭송이 아니라, 파치 형사의 앞에 놓인 결말을 잠깐 비추는 조명 같은 역할을 합니다.

영화 밖에서 이 단테 텍스트가 가지는 구조는 매우 분명합니다. 사랑은 단테에게 '숭고한 감정'인 동시에, 사람을 굴복시키고 몸을 흔들며 때로는 잔인하게도 지배하는 힘입니다. ‘사랑’은 심장을 손에 들고 '보라'고 말하고, 그 심장을 타인에게 먹게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울며 사라집니다[^The Project Gutenberg eBook, The New Life (La Vita Nuova), by Dante Alighieri, Translated by Dante Gabriel Rossetti]. 이 구조를 요약하면 사랑은 지배이고, 섭취이고, 상실입니다. 영화는 이 구조를 스릴러 문법으로 번역합니다. 지배는 렉터의 통제력으로 바뀌고, 섭취는 렉터의 식인 본성으로 바뀌며, 상실은 파치 형사의 몰락으로 바뀝니다. 피렌체 파트가 유독 강렬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교양 텍스트가 영화 안에서는 곧바로 살인의 설계도가 됩니다. 그리고 그 설계도가 ‘강연장’이라는 가장 문명적인 공간에서, 어깨 위의 손길이라는 가장 일상적인 접촉을 통해 전달됩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영화가 피렌체를 '단테의 도시'처럼 활용한다는 사실입니다. 한니발 렉터가 피렌체에서 중세 문헌학자이자 단테 연구자인 척하며 강연을 하고, 새로운 삶의 시를 낭송하고, 새로운 삶을 바탕으로 한 오페라를 보러 간다는 흐름 자체가 정리돼 있습니다[^Ridley Scott, Hannibal (2001)]. 즉 이 인용은 우연히 끼워 넣은 한 줄이 아니라, 피렌체 파트 전체를 지탱하는 ‘도시-텍스트-살인’의 연결 고리입니다. 그리고 그 연결 고리는 파치 형사의 성(파치)과 결말(교수형 이미지)까지 끌고 가며, 피렌체를 단순한 여행 배경이 아니라 이야기의 기계로 만들어 버립니다.

피렌체 파트는 영화 한니발 전체에서 ‘속도를 바꾸는 장치’처럼 작동합니다. 앞에서는 한니발 렉터가 도망자이면서도 교양인처럼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피렌체에서는 그 모습이 잠깐 낭만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그 낭만은 오래 가지 않습니다. 피렌체 파트가 끝나는 순간, 이야기는 갑자기 '배신의 응징'으로 급전환합니다. 그 급전환을 만든 사람이 파치 형사이고, 그 전환을 완성하는 사람이 한니발 렉터입니다. 영화 줄거리 요약을 봐도, 피렌체에서 파치 형사가 ‘닥터 펠’이 한니발 렉터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뒤, 그를 체포하는 대신 메이슨 버저의 현상금을 노리고 납치를 돕기로 한다는 흐름이 분명히 정리돼 있습니다. 결국 렉터가 파치 형사를 제압하고, 자백을 받아낸 뒤 내장을 꺼내 교수형처럼 매달아 살해한 다음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CCTV 너머의 누군가에게 손을 흔들어 보입니다. 메이슨 버저는 이 장면을 입수해 재생하며 코델에게 이 행동의 의미가 만남의 인사인지 아니면 작별인사인지 묻습니다. 그리고 미국으로 돌아가 클라리스 스탈링을 다시 찾아가는 서사로 넘어갑니다. 즉 피렌체 파트는 '피렌체에서의 은신 생활'이 아니라, 렉터의 평온을 깨고, 영화의 2막을 끝내고, 3막의 복수극(메이슨 버저 파트)을 시작하게 만드는 스위치입니다. 이 스위치가 특별한 이유는, 피렌체 파트가 단순히 사건을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한니발 렉터를 바라보는 감정을 한 번 흔들어 놓기 때문입니다. 피렌체에서 렉터는 거의 살인마라기보다, 전시관과 도서관과 오페라를 오가는 르네상스 남자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파치 형사가 그를 '돈으로 바꿀 수 있는 대상'으로 취급하는 순간, 우리들은 렉터의 편에 서는 듯한 기분을 잠깐 느끼게 됩니다. 작품은 이 불편한 심리를 일부러 사용합니다. '나쁜 사람이 나쁜 사람을 벌한다'는 구조를 만들어서, 응징 장면이 잔혹한데도 어딘가 정당해 보이는 착시를 일으킵니다. 이 착시는 피렌체라는 장소와도 잘 맞습니다. 피렌체는 예술과 교양의 표면 아래에, ‘도시가 직접 벌을 내리던 방식’의 기억을 품고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피렌체 파트의 응징은 단지 개인 살인이 아니라, 도시의 기억을 빌린 처벌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파치 형사의 몰락이 남기는 질문이 생깁니다. '타락은 한니발 렉터가 만들었나, 원래 있던 것을 드러냈나'라는 질문입니다. 작품 속 파치 형사는 어떤 의미에서 ‘한니발 렉터 때문에’ 타락합니다. 그는 한니발 렉터를 만났고, 그 만남이 없었다면 현상금 거래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파치 형사가 선택한 것은 한니발 렉터의 강요가 아니라 자신의 계산입니다. 파치 형사는 로비나 상부에 보고할 수도 있었고, 클라리스 스탈링의 경고를 받아들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더 큰 돈을 주는 쪽'을 선택합니다. 이 점을 소설과 영화 비교 글에서도 꽤 노골적으로 짚는데, 파치 형사는 원래부터 스캔들로 불명예를 겪었고, 동료와 대중의 평가에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 한니발 렉터를 팔아 현상금을 받기로 결심했다고 설명합니다[^Book vs. Film vs. TV Series: 'Hannibal']. 이런 설명을 따라가면, 한니발 렉터는 파치 형사를 ‘부패시키는 마법사’라기보다, 이미 흔들리던 사람의 약점을 정확히 건드려서 그의 선택을 더 빨리 현실로 만든 존재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피렌체 파트는 결국 도덕에 대한 질문으로 남습니다. 한니발 렉터는 잔혹하지만 자신의 규칙을 지키는 사람으로 보이고, 파치 형사는 법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그 법을 개인의 이익으로 바꾸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이 역전이 피렌체 파트의 핵심 효과입니다. 우리들은 '내가 누구 편을 들고 있지?'라는 질문을 하게 되고, 그 질문이 불편할수록 피렌체 파트는 더 오래 남습니다. 또한 그 불편함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이어집니다. 한니발 렉터가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피렌체의 교양과 낭만은 사라지지만, 피렌체에서 만들어진 ‘정당화의 착시’는 이후 장면들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눈에 계속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가 오늘의 이야기입니다. 다음 부분(로그인 후 읽을 수 있습니다.)에서는 이 질문을 조금 더 밀어붙여 '만약 파치 형사가 한니발 렉터를 만나지 않았다면 정말 타락하지 않았을까'라는 가정까지 포함해, 작품이 ‘개인의 도덕’과 ‘환경의 유혹’을 어떻게 엮어 놓는지 더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