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체인 사용환경 개선 시도 사례
블록체인이 사용자에게 적대적인 환경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중앙화된 주체가 서비스를 관리하지 않는 점은 블록체인을 사용할 의사결정과 실행에 부담을 줄여줄 수는 있습니다. 가령 회사 입장에서 다른 회사가 관리하는 로그인 시스템이나 로그 데이터베이스 같은 것을 사용하려면 협조 요청부터 시작해야 할 수 있지만 블록체인은 이런 과정을 생략하게 해 줍니다. 그냥 사용하기 시작하면 됩니다. 하지만 사용자 입장에서 중앙화된 주체가 없다는 말은 어디서 시작해야 할 지 전혀 알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폴리곤 블록체인을 통해 거래를 시작해야 하는 상황을 생각해 봅시다. 도대체 어디서 뭘 해야 할까요.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신뢰할 만한 중앙화된 웹사이트가 있나요? 아닙니다. 앱스토어에서 검색해 앱을 설치한 다음 앱의 지시에 따르면 될까요? 항상 그렇지는 않습니다. 간신히 메타마스크 지갑을 사용해 퍼블릭키와 프라이빗키를 만들었다 칩시다. 이제부터 프라이빗키 보관과 사용에 따르는 ‘모든’ 책임은 사용자에게 있습니다. 프라이빗키를 분실하면 자산을 복구할 방법은 없습니다. 프라이빗키를 탈튀 당했다면 이후 트랜잭션을 멈출 방법도 없습니다. 스스로 잘못된 트랜잭션에 사인하면 이를 번복할 방법도 없습니다. 물론 한국에서 공인인증서 시스템을 사용해 봤다면 프라이빗키 보관과 사용에 대한 모든 책임을 사용자에게 전가 하는 모델과 이에 대응해 프라이빗키를 USB메모리 같은 일종의 콜드월렛에 보관하는 모델이 그리 생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용 환경은 블록체인 거래의 몇몇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이를 선뜻 사람들에게 소개하기 어렵게 만들며 이를 사용한 서비스를 설계하기도 어렵게 만듭니다.
문제를 완화하기 위한 시도 중에는 램퍼가 있습니다. 램퍼는 덜 중앙화된 블록체인과 사용자 사이를 연결하는 중앙화된 서비스 주체입니다. 사용자 입장에서 기존에 친숙한 방법일 가능성이 높은 이메일을 통해 서비스에 등록하면 지갑 주소를 만들어 줍니다. 사용자인 나는 블록체인이나 지갑 주소를 직접 인식하지 않고 이메일 주소를 사용해 램퍼에 로그인하고 자산을 주고 받으면 됩니다. 램퍼를 지원하는 다른 서비스를 사용하면 경매 같은 좀 더 복잡한 거래에도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램퍼는 이메일을 통해 서비스에 등록한 사용자에게 지갑 주소를 발행해 연결해 줍니다. 이 과정에서 생성되는 퍼블릭키와 프라이빗키는 램퍼가 직접 보관합니다. 프라이빗키를 익스포트 해서 메타마스크 같은 다른 지갑에 등록할 수도 있지만 그럴 필요는 적은 편입니다. 사용자 입장에서는 프라이빗키의 존재 자체를 인식할 필요가 적고 프라이빗키가 사용자의 개인 기계에 전송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램퍼가 프라이빗키를 안전하게 보관한다는 신뢰가 필요합니다. 이론적으로 이 서비스는 모든 사용자의 프라이빗키에 접근할 권한이 있으며 위에 설명한 블록체인이 사용자에게 적대적인 환경일 때 발생하는 모든 문제를 직접 일으킬 사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일단 이 서비스를 신뢰하면 사용자는 아예 블록체인의 존재 자체를 의식하지 않는 수준으로 블록체인 상 거래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다만 개인적인 사용 경험은 좀 이상했습니다. 램퍼는 블록체인 인프라를 사용자에게 최대한 노출 시키지 않는 모양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램퍼에 이메일을 등록해도 인터페이스 상에서 내 지갑 주소를 조회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내 프라이빗키를 익스포트 하기는 더더욱 쉽지 않습니다. 블록체인 거래에서 저는 여러 지갑 주소를 사용할 수 있고 사용하게 되지만 이는 기존 금융 거래의 멘탈 모델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제가 프라이빗키 도는 이메일 주소를 통해 접근할 수 있는 지갑은 모두 제 소유이지만 기존의 멘탈 모델은 제가 주로 사용하는 입출금 계좌는 대부분 하나인데 램퍼는 이 모델에 지갑 주소를 추가해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램퍼를 통해 NFT를 거래했지만 이 NFT는 ‘내가 알고 있는 지갑’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램퍼는 블록체인 인프라를 사용자에게 노출하지 않는 디자인 철학에 따라 이메일 주소에 연결된 지갑 주소를 노출하지 않아 내가 구입한 NFT를 블록체인 상에서 확인하기 쉽지 않습니다. 램퍼 사용자인 나는 내 지갑 주소를 모를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 지갑 주소를 알고 있더라도 프라이빗키를 익스포트 하지 않아 다른 지갑 앱이나 익스텐션에서 내 자산을 확인할 수도 없고 거래할 수도 없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기존 금융 거래의 멘탈 모델에 맞게 램퍼 지갑에서 내가 주로 사용하는 지갑으로 NFT를 전송하려고 했습니다. 램퍼 지갑에는 당연히 NFT만 덜렁 들어있었으므로 가스비를 지불할 수 없었습니다. 또 램퍼 같은 블록체인 이용환경을 개선하려는 의도를 가진 스마트컨트랙트에 따라 지갑 사이에 직접 NFT를 전송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만약 제가 램퍼를 통해 처음으로 블록체인 거래를 시작했다면 지갑 주소는 하나 뿐이어서 전통적인 금융 시스템의 멘탈 모델과 별로 다르지 않아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전에 조금이라도 블록체인 상에서 거래를 해 본 적이 있는 사람에게 램퍼는 이메일 주소를 연동하고 프라이빗키 관리를 대신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래도 이상하고 부자연스럽게 느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