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경로를 파괴하는 던전 연출에 대해
전에 잠깐 현대로 오면서 던전 플레이가 변했다는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퍼시스턴트 공간이 인스턴스 공간으로 바뀌고 MMO 장르이지만 던전은 싱글플레이나 소규모 멀티플레이에 가깝게 변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로써 여러 효과와 시도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던전 플레이 경험을 좀 더 몰입적으로 바꾸는 강력한 연출을 채용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는 공간에는 이런 일을 함부로 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싱글플레이에 가까워질수록 던전에 강력한 연출을 하기 상대적으로 쉬워집니다. 이런 연출은 던전 경험을 더 깊이 있게 만듭니다. 또 이 경험은 더 오랫동안 플레이어들의 마음 속에 남아 있을 겁니다.
온라인 게임에서는 이런 연출을 할 때 몇 가지 고민거리가 있습니다. 던전에서는 플레이에 따라 플레이어캐릭터가 죽을 수도 있다는 점, 네트워크 순단이나 클라이언트 종료가 일어날 수 있다는 점, 또 소규모 멀티플레이 환경에서 플레이 경험에 동시성을 확보해야 하는 상황 같은 것들이 인스턴스 던전 메커닉을 설계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오늘은 방금 나열한 몇 가지 문제들을 특히 ‘이동경로를 파괴하는 연출’을 사용하는 사례를 들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가상의 던전이 있습니다. 진행해 감에 따라 던전이 흔들리며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위에서 돌이 떨어지기 직전에 바닥에 장판이 깔리고 피하지 못하면 대미지를 입기도 합니다. 충분히 긴박한 느낌을 주네요. 이제 앞에 있는 다리를 건넙니다. 다리를 건너는 순간 드래곤이 나타나 다리를 파괴합니다. 플레이어캐릭터는 아슬아슬하게 불덩이가 되어 다리와 함께 무너져내리는 신세를 피했습니다. 이제 뒤로 돌아갈 방법은 없습니다. 앞으로 나아가 던전을 탐험하고 던전 끝에 있을 던전의 주인을 처치할 수밖에 없습니다.
먼저 소규모 멀티플레이 상황에서 사건의 동시성을 생각해 봅시다. 상대성이론의 동시성과는 굉장히 다른 이야기이니 긴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리는 무너지기로 약속되어 있습니다. 혼자 플레이 할 때는 플레이어캐릭터가 다리 중간에 쳐 놓은 볼륨에 진입하면 그때부터 드래곤이 나타나 다리를 파괴하고 아슬아슬하게 피해 무너지는 다리에 매달려 건너편으로 기어올라가는 연출을 한 다음 플레이어캐릭터에게 다시 제어권을 돌려주는 방법을 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 던전을 두 명이 플레이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 번째 플레이어캐릭터가 다리를 건너며 볼륨에 진입해 드래곤을 불러들여 다리가 이미 무너지고 있습니다만 두 번째 플레이어캐릭터는 아직 다리에 진입하지도 않았습니다. 연출이 끝나고 다리는 파괴된 상태가 됐지만 두 번째 플레이어캐릭터는 진행할 방법이 없군요. 미안하지만 이제부터 이 던전은 혼자 진행해야겠습니다.
근래에 시도한 방법은 다리 위 볼륨을 다리 중간부터 건너편 너머까지 길게 쳐 놓고 모든 플레이어캐릭터가 이 안에 들어있을 때 연출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플레이어가 다리 중간을 지나갈 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플레이어가 다리 중간을 지나가기 시작하면 이때에 맞춰 드래곤이 나타나 다리를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이 볼륨을 길게 쳐야 하는 이유는 누군가 드래곤이 다리를 공격하기 시작하는 시점에 맞춰 볼륨을 벗어날 수 있는데 이 벗어나는 방향이 진행방향과 반대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플레이어가 볼륨에 진입하는 사이에 첫 번째 플레이어가 볼륨을 빠져나가 던전 입구쪽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 때는 마지막 플레이어가 볼륨에 진입했다 해도 연출을 시작하면 안됩니다. 아니면 명시적인 발판을 만들어 모든 플레이어캐릭터가 발판에 올라서기 전까지는 연출을 시작하지 않는 방법도 있습니다. 물론 이 드래곤 케이스에 적용하기에는 좀 어울리지 않긴 합니다.
플레이어캐릭터가 전투 중 죽는 상황을 생각해봅시다. 던전 중간 중간에 부활 지점이 있어 이곳부터 재시작 할 수 있습니다. 방금 플레이하던 곳으로부터 약간 떨어져 있지만 오히려 강한 몬스터들이 부활하자마자 달려들지도 않고 잠깐 서서 재정비할 시간도 있으니 조금 달려가야 한다고 해도 별로 나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부활 지점이 드래곤이 부숴버린 다리 건너편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미 다리는 파괴되어 걸어서 건너올 방법이 없어졌는데요. 포악한 던전의 주인은 여전히 던전 가장 깊은 곳에서 괴성을 질러대고 있지만 나는 그에게 갈 방법이 없고 이제 그만 던전 공략을 포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간단히 부활 지점을 파괴된 자리의 진행 방향 건너편에도 설치하면 간단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온전한 해결 방법은 아닌데 부활 규칙이 이 부활 지점을 망가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게임에 따라 즉시 부활, 부활 지점에서 부활, 던전 입구에서 부활, 마을에서 부활 같은 여러 옵션을 제공합니다. 옵션에 따라 재화를 요구하기도 하고요. 즉시 부활이나 부활 지점에서 부활하는 경우에는 무너진 다리 건너편에 부활 지점을 만들어 두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만 던전 입구나 마을에서 부활한다면 여전히 문제가 있습니다. 게임에 따라서는 던전 진행상황에 따라 던전 입구나 마을 부활을 금지하기도 하고 좀 깨긴 하지만 다리가 무너진 다음에 던전 입구부터 달려올 플레이어들을 고려해 보스전이 시작되면 던진 입구 쪽에 보스룸 앞까지 바로 이동할 수 있는 게이트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해결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동 경로를 파괴하는 던전 연출’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면 게임의 나머지 규칙들에 의해 플레이가 불가능해지는 상황이 일어나지 않도록 연출을 지탱하는 규칙을 꼼꼼하게 설계해야 합니다. 사실 이 연출은 연출의 멋짐과 비교해 나머지 시스템들이 지러야 할 댓가가 상당하기 때문에 게임 전체의 방향성과 비교해 신중하게 선택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