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나와 게임 밖 나는 서로 어떻게 연결될까

영화와 게임은 각자 고객을 영화, 그리고 게임 각각에 연결 시키는 서로 완전히 다른 방법을 사용합니다.

게임 속 나와 게임 밖 나는 서로 어떻게 연결될까

한번은 온라인에서 영상을 학술적으로 연구하시는 분과 짧은 질문과 답변을 나눌 일이 있었습니다. 대략 영상을 연구하는 입장에서 영화로부터 얻는 관객의 여러 가지 상태나 감정의 변화를 게임에서는 어떻게 만들어내는지 궁금하셨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긴 역사에 기반해 학술적 연구가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는 영상과 달리 게임은 학술적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닐 테지만 업계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여러 수법들이 학술적 관점에서 잘 정리되거나 연구되어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종종 게임 쪽 연구를 살펴보면 일선에서 일하고 있는 입장에서 연구자의 경험이나 수준이 충분하지 못하다고 느끼거나 일선에서 일어나는 최신 상황과는 거리가 너무 멀다고 느낄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개인적으로는 영상에 비해 게임은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하는 입장입니다. 일선에서 일하는 입장에서, 그리고 개인적으로 게임을 플레이 하는 행동을 취미의 일부로 하는 입장에서 게임이 어떻게 유저의 여러 가지 상태와 감정의 변화를 만들어내는지 잘 정리된 모양으로 말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지만 대략 어떻게 하고 있는지 답할 수는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학술적 정의와 거리가 있겠지만 제 입장에서 게임이 유저에게 영향을 주는 몇 가지 수법들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개인적으로 영상으로부터 특별한 감정 상태에 들어갔던 경험들을 떠올려 봤습니다. 영화에서는 종종 등장인물이 자신을 비추고 있을 카메라 렌즈를 뚫고 스크린 너머에서 이를 보고 있는 관객을 꿰뚫어볼 때가 있습니다. 가령 살인의 추억 마지막 장면에서 화면을 가득 채운 주인공은 스크린 너머의 저를 응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주인공의 표정으로부터 지금까지 진행을 통해 이야기를 따라온 저에게 답답함과 안타까움으로 시작하는 복잡미묘한 감정을 만들어냈습니다. 세월이 흘러 주인공은 이제 완전히 다른 일을 하고 있고 관객 입장에서 이제 영화가 다 끝나 더 이상 어떤 상황의 전개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런 감정의 변화는 무척 인상깊었습니다. 주인공에게 모든 것을 꿰뚫었음에도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고 동시에 관객에게도 이제 영화가 끝나 더 이상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비슷한 경험을 영화 한니발 끝부분의 비행기 안에서 식사 장면에서도 했습니다. 여러 소설과 영화에서 한니발 렉터 박사는 구속 되어 있는 모습으로 등장하곤 했지만 이 영화에서 한니발 렉터 박사는 이전 이야기인 ‘양들의 침묵’에서 구속된 상태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전설적으로 매력적인 캐릭터가 그저 피렌체의 거리를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기만 해도 이야기가 만들어질 것 같은 영화는 소설의 결말과 달리 또 다른 주인공인 클라리스 스탈링이 ‘나는 클라리스 스탈링. FBI 소속이다’라고 스스로를 정의하며 한니발 렉터 박사가 이 비행기에 타게 만듭니다. 자신의 식사에 관심을 가지는 아이에게 그 식사의 일부를 나눠 주는 그 순간에 멈춘 렉터 박사의 표정과 눈빛 역시 카메라 너머의 저에게 영화가 끝났지만 과연 렉터 박사의 이야기가 끝났다고 함부로 정의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게임에서는 오랫동안 이런 경험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정확히는 만들지 못했거나 만들 수 없었다고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현대에는 전혀 그렇지 않기는 하지만 대체로 영화가 가정하는 관객의 상태는 고정된 자세로 영상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카메라가 등장인물을 비추거나 등장인물이 보고 있는 광경을 직접 보여주거나 등장인물에서 조금 떨어져 그 상황과 광경을 함께 살펴보는 등 다양한 수법을 사용하는 동안에도 관객의 집중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요구사항에 의해 성립하는 장르가 바로 공포영화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종종 집중해서 플레이 해야 하는 퍼즐 게임 도중 갑자기 튀어나온 괴물 그림에 놀라는 사람들을 찍은 영상을 볼 수 있는데 공포영화 역시 이와 비슷한 상태의 변화를 겪게 만듭니다. 반면 게임에서는 이런 상태를 만들기 쉽지 않은데 근본적으로 게임의 형식이 유저의 집중을 함부로 얻을 수 없는 모양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일인칭 장르에서 유저는 이미 게임 속 캐릭터와 완전히 동기화 되어 있고 이 상태를 시시각각 확인하려고 합니다. 콜오브듀티 시리즈 중 어느 하나에서 상륙정에 실려 오마하 해변으로 향하는 주인공은 주산을 둘러 싼 다른 병사들의 겁먹은 표정을 보고 또 그들의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또 고개를 돌려 상륙정 주변을 둘러싼 거친 바다와 흐린 하늘을 올려다볼 수도 있습니다. 게임은 처음부터 게임 속 플레이어와 모니터 밖의 유저를 동기화 시켜 행동하게 만들지만 결코 원하는 시점에 원하는 상태에서 게임 속 상황을 받아들이도록 만들 수 없습니다. 게임 유저는 게임 속 자신과 동기화된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쉴 새 없이 고개를 돌려 주변 상황을 바라보고 본격적인 플레이가 시작되기를 전전긍긍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상황의 분위기를 아무리 잘 표현한다 하더라도 이 상황에서 다른 병사들처럼 고개를 숙이고 자신들을 향해 날아들 것 같은 독일군의 포탄을 피하려 하지 않습니다.

영화는 종종 관객에게 영화 속 주인공이나 주인공이 속한 조직에 이입하게 만들기 위해 시간을 할애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처한 상황과 그들에게 일어나는 상황을 보여주고 관객이 이를 이해해 영화 속 누구에게든 몰입하게 만듭니다. 아마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이 모든 방법의 기저에는 앞서 가정한 주로 고정된 자세로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으리라는 가정에 기반하고 있을 거라고 예상합니다. 이런 설명 과정을 통해 관객이 등장인물에 이입하고 어느 정도 동기화된 상태가 되고 나면 주인공에게 일어나는 상황들에 더 몰입하는 경험을 줄 수 있을 겁니다. 반면 게임에서는 비슷한 수법을 사용하더라도 잘 먹히지 않는데 이는 유저에게 영화에서처럼 충분히 등장인물에게 이입할 만한 설명을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많은 상황에 유저의 관심사는 게임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 자체가 아닐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게임 유저는 영화를 볼 때와 달리 능동적으로 행동을 하는 상태입니다. 영화 속 등장인물의 이동을 따르지 않습니다. 직접 조작하기 전에는 캐릭터가 이동하지 않으며 스스로 고개를 돌리지 않으면 필요한 정보를 볼 수도 없습니다. 게임이 아무리 영화와 비슷한 수법을 통해 유저의 상태에 영향을 주려고 해도 이미 능동적으로 게임을 대하고 있는 유저에게는 거의 통하지 않습니다. 여러 플레이 영상을 찾아보면 영화 같은 경험을 주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여러 게임들을 플레이 하는 모습은 마치 ADHD가 있는 것처럼 쉴 새 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아무 방향으로나 걷고 만약 손에 총을 들었다면 총을 들어 조준했다가 다시 내려놓기를 반복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런 모습이 바로 영화와 게임을 대하는 유저의 가장 큰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영화에 주로 사용하는 수법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와 거리가 멉니다.

그래서 게임은 종종 영화가 그러는 것처럼 등장인물의 심리를 직접 전달하려 하지 않습니다. 만약 앞서 소개한 어딘가를 향해 한창 날아가고 있는 밤 비행기 안에서 렉터 박사의 표정을 통해 상황과 감정을 전달하려 한다면 완전히 다른 접근이 필요할 겁니다. 사실 근본적으로 이런 방식의 감정 전달은 게임에서 거의 불가능하기에 이런 장면을 만들지조차 않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대신 게임에서는 플레이어의 직접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방식을 통해 상황을 전달하고 감정을 제어합니다. 파크라이 5는 유저의 선택에 따라 서로 다른 결말을 맞이하는데 게임을 진행하는 도중 주인공을 세뇌하기 위해 사용하는 음악이 있습니다. 여러 결말 중 하나에서 이제 모든 사건을 뒤로 하고 호프 시티를 벗어나는 차 안에서 그 동안 전적으로 신뢰했던 인물이 운전하며 이 음악을 켜고 그 직전까지 조작 가능했던 플레이어가 더 이상 조작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 유저의 의도와 달리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 게임이 끝납니다. 이는 기본적으로는 게임이 끝나는 순간 더 이상 이 상황에 개입할 수 없음을 말하는 앞서 소개한 두 가지 영화의 사례와 비슷하지만 이 순간의 차이는 지금까지 유저와 동기화 되어 있던 플레이어가 게임 상에서 자신을 세뇌시켰던 음악과 함께 그 동기화가 끊어지는 경험을 함과 동시에 게임이 끝나는 점이 다릅니다. 이 장면을 플레이 하는 영상을 찾아보더라도 앞서 이야기한 것과 비슷하게 플레이어는 계속해서 주변을 둘러보고 운전자를 보고 창밖을 보고 또 뒷자리를 돌아보는 등 쉴 새 없이 행동합니다. 영화와 같은 정돈된 장면을 기대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음악이 시작되고 의도하지 않은 순간 유저와 플레이어 사이의 동기화가 끊기며 운전자의 표정을 보여준 상태로 화면이 어두워집니다. 비슷한 방법처럼 보이지만 게임 쪽에서 사용한 방법은 의도하지 않은 시점에 게임이 일방적으로 유저와 플레이어 사이에 동기화를 끊는 것입니다.

바이오쇼크 인피니트의 첫 장면은 거친 밤바다에 떠 있는 조각배 위에서 시작합니다. 플레이어가 아닌 다른 등장인물들이 알 수 없는 대화를 하고 플레이어는 그 일부만 유저와 동기화 되어 배에 앉은 채 상자 안에 들어 있는 물건들을 살펴봅니다. 배가 등대에 도착해 처음으로 플레이어의 손과 머리 뿐 아니라 다리를 포함한 전신이 동기화 되어 부두의 사다리를 기어 올라가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게임이 시작되는데 점진적으로 유저와 플레이어가 점점 더 많은 영역을 동기화 해 가는 방식으로 유저를 게임에 몰입 시킵니다. 이 처음 부분에서 플레이어는 등대에 들어가 나선형 계딴을 오르는 과정에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장치들과 마주치지만 영화에서 그러는 것과 달리 이들에 집중할 필요도 없고 집중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이전에 플레이 했던 비슷한 장르에서 그랬던 것처럼 주변을 뒤져 동전을 획득하는 플레이를 하는 과정에서 주변에 놓인 물건들을 스쳐 지나갈 뿐입니다. 만약 영화라면 동전을 모으는 행동은 아예 필요하지 않고 관객이 살펴봐야 할 물체를 강제로 보도록 만들었을 겁니다. 이 등대 사례는 게임이 유저의 어떤 감정 상태를 만들기 위해 유저와 플레이어 사이에 동기화 범위를 서서히 넓히고 동기화가 끝난 다음에는 그 상태로 실질적으로 게임에 도움이 되고 또 다른 게임에서 익숙하게 해 왔던 행동을 똑같이 수행하는 가운데 간접적으로 단서를 제공합니다. 그래서 같은 장면을 영화와 게임으로 만든다면 이 장면이 지난 다음의 관객과 유저의 상태는 서로 상당히 다를 겁니다. 아마 게임 쪽 유저의 상태가 훨씬 맥락을 덜 이해하고 또 목표로 한 감정 상태에 훨씬 덜 도달했을 겁니다.

같은 게임의 끝 부분 역시 앞서 이야기한 파크라이 5와 비슷한 수법을 사용하는데 실은 이 두 게임이 서로 같은 라이터에 의해 작성되었음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하기도 합니다. 주인공은 지금까지 경험한 이 모든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자기 스스로 그 진실을 마주하면서도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동기화된 상태로 마지막 등대 문을 열고 앞으로 나아가면 바로 플레이어 자기 자신이 이 모든 불행한 사건의 원흉임을 깨닫게 되지만 이 상황에서 주인공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그저 자신 앞에 펼쳐진 상황을 향해 여전히 조각배에서 부두로 올라가는 순간부터 동기화 된 그 상태를 유지하며 앞으로 나아갈 뿐입니다. 이 상황에서도 여전히 주변을 둘러보고 의도하지 않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며 시간을 끌 수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영화에서 보여줄 법한 관객의 집중 상태를 최대한 끌어올려 감정을 전달하려는 시도 같은 것은 없습니다. 동기화된 플레이어에게 그런 수법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신 플레이어를 둘러싼 지금까지 함께한 동료의 입과 목소리를 통해 이 모든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고 그 순간 유저와 플레이어 사이의 동기화가 갑자기 끊기며 플레이어는 이 게임의 주 무대인 콜롬비아라는 새로운 장소를 향해 이동할 때와 마찬가지로 물 속에 밀어 넣어집니다. 화면이 어두워지고 게임은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을 알려주지 않지만 아마도 플레이어는 물 속에서 그 끝을 맞이했을 겁니다. 동기화가 끊긴 그 순간 유저는 이 상황을 피할 수 없음을 알았을 겁니다.

영화와 게임에서 같은 수법으로 각각 관객과 유저의 상태에 영향을 끼치려 할 때 영화에서 통하던 방법이 게임에 전혀 통하지 않는 이유는 각각 관객과 유저의 예상되는 상태가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관객은 주로 영상에 집중하며 영상에 순응합니다. 공포영화에서 무서운 장면을 보여줄 때 잠깐 눈을 감을 수 있겠지만 그 감은 눈은 결국 뜰 수밖에 없습니다. 스크린에 계속해서 플레이 되는 영상을 멈출 방법은 없습니다. 반면 게임에서 플레이어와 동기화된 고객은 그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할 때 게임 속 상황이 변화화합니다. 게임의 유저는 게임을 이끌어가는 적극적인 주체입니다. 바이오쇼크 인피니트의 여러 장면에서 등대 문을 열고 들어가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 때 유저가 조작하기 전 까지 등대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유저는 이 상황을 이끌어 나가지만 영화와 같은 방식으로 그 장면 하나하나에 집중하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일어난 상황에 전체적인 이입을 하고 있기는 하겠지만요. 그래서 세뇌에 사용된 음악을 재생하며 동기화가 끊길 때, 그리고 지금까지 함께해 온 동료에 의해 물 속으로 밀어넣어지는 순간 동기화가 끊길 때 영화와는 꽤 다른 방식으로 감정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초기 시네마틱을 도입한 게임들이 유저를 내버려둔 채 마치 영화처럼 장시간 영상을 재생하는 실수를 큰 돈을 들여 가며 반복한 다음에는 유저의 집중이 필요한 순간 그때그때 일시적으로 유저와 플레이어 사이의 동기화를 끊고 영상을 재생한 다음 동기화를 복구한 사례가 있습니다. 어느 콜오브듀티 시리즈에서 미래의 우주 군대에서 동료 뒤를 따르던 플레이어는 이야기의 주제가 되는 거대한 우주 전함이 등장할 때 이를 강제로 바라봐야만 합니다. 이런 방법은 게임이 진행되는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데 플레이어와 동기화된 유저 입장에서 상당히 불쾌한 경험입니다. 근본적으로 플레이어와 동기화된 유저들은 게임에 순응적인 상태가 아닙니다. 자신의 조작에 의해 게임이 진행되는 동작에 대단히 익숙합니다. 때문에 아무 때나 동기화가 끊기고 게임에 의해 고개가 돌려지거나 어딘가로 무의미하게 이동하는 경험은 같은 수법을 영화가 사용할 때 줄 수 있는 감정의 변화와는 상당히 다른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그냥 기분이 나쁩니다. 이런 실수를 반복한 끝에 현대에는 함부로 동기화된 상태를 끊지 않고 선택적으로 게임 상에서 집중하면 좋을 대상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A를 눌러 조의를 표하십시오’는 이 시리즈의 밈처럼 사용되지만 게임에서 시네마틱을 적절히 활용할 방법을 탐색하며 온갖 실수를 저지르던 시대였다면 갑자기 게임 화면의 위, 아래에 검정 레터박스를 친 다음 카메라가 뒤로 물러나며 플레이어의 삼인칭을 보여준 다음 조의를 표하는 장면으로 진행했을 겁니다. 그리고 이 결과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감정을 줄 뿐이었을 겁니다. 물론 이 사례가 적절한 방법이었다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영화와 게임이 각각 관객과 유저의 특정 상태를 유발하는 방식은 서로 상당히 다르다는 점을 이해한 기반 위에서 시도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능동적인 유저의 동기화와 관련된 또 다른 흥미로운 사례 역시 수많은 콜오브듀티 시리즈 중 하나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일인칭으로 진행되는 게임들은 근본적으로 유저의 본능에 가까운 행동을 하게 만듭니다. 가령 한때 유행하던 아레나 슈터 장르 게임들은 쉴 새 없이 레벨 위를 뛰어다니고 앞에 나타난 상대에게 본능적으로 무기를 난사해야 합니다. 이 장르 게임을 플레이 하다 보면 카메라에 따라 움직이는 것과 카메라에 반해 움직이는 것을 구분해 정확히 후자를 화면 중앙에 조준하고 총을 쏘게 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장르 게임을 플레이 할수록 유저와 플레이어는 깊은 동기화 상태가 되는데 인터넷 연결이 끊기며 게임이 예상하지 않은 시점에 종료될 때 적지 않은 충격을 받습니다. 이런 상황에 일부 유저들이 격렬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플레이어와 아주 강하게 동기화된 상태에서 준비 없이 순식간에 비동기화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콜어브듀티 시리즈에서 플레이어가 총에 맞아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되어 조작에 기반한 동기화가 해제된 상태로 화면을 바라보게 됩니다. 하지만 이는 총에 맞아 비틀거리는 순간부터 서서히 동기화를 해제해 왔기 때문에 갑작스럽거나 기분 나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동기화가 해제된 상태에서 여전히 일인칭 시점을 유지해 최소한 시각적 동기화를 유지한 다음 일어나는 일은 플레이어에게 총을 쏜 군인들이 나타나 플레이어를 구덩이에 던져 넣고 석유를 뿌린 다음 불을 붙이는 것입니다. 이 상황을 여전히 동기화된 일인칭 시점을 통해 경험하는 것은 굉장히 독특한 경험입니다.

지금까지 영화에서 관객의 상태를 제어하기 위해 사용하는 여러 가지 수법들이 왜 게임에서 전혀 통하지 않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가장 큰 두 가지 특징은 고객 관점에서 게임 유저는 게임에 대해 순응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점, 그리고 특히 일인칭 게임에서 고객과 플레이어는 서로 동기화된 상태이기 때문에 영화에서 그렇듯 뭔가에 강제로 집중하도록 만들기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때문에 영화와 게임은 서로 상당히 다른 방법을 통해 고객의 상태를 바꿔야 하고 이를 통해 도달한 고객의 상태 역시 영화와 게임 사이에 상당히 다를 겁니다. 결국 비슷한 감정에 도달하게 만들 수는 있겠지만 이 단계까지 오는 중간 과정에 거치게 될 여러 상태는 서로 완전히 다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게임에서 플레이어와 유저가 서로 연결된 상태를 동기화라고 표현해 왔는데 지금까지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든 짧은 이야기에서 든 의문은 게임 속 플레이어와 유저를 동기화 하는 과정에 대한 것입니다. 사실 이런 장르 게임을 익숙하게 플레이 해 온 유저들은 별다른 동기화에 대한 가이드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키보드 마우스나 게임패드를 조작해 어떤 조작에 게임 상의 플레이어가 반응하는지 탐색한 다음 바로 익숙하게 동기화된 상태에 도달합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은 아니며 게임에 따라 이 동기화 과정의 맥락을 보다 세련된 모습으로 전달하기도 합니다.

앞서 소개한 바이오쇼크 인피니트에서 플레이어는 처음 시각과 팔의 움직임만을 동기화 한 채 조각배에 실려 밤바다 위를 나아갑니다. 목적지에 도착하는 시점에 모든 동기화가 이루어지며 사다리를 기어오르며 게임이 시작됩니다. 포탈에서는 모닝콜을 들으며 눈을 떠 천장을 바라보고 눈을 깜빡입니다. 이 때부터 시각과 머리의 움직임이 동기화되고 침대를 벗어나 일어선 상태가 된 시점부터 이동이 동기화됩니다. 이후 진행에 따라 포탈건을 손에 넣는 시점부터 플레이어의 모든 기능에 대한 동기화가 마무리됩니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맥락에 기반한 동기화 과정을 잘 표현한 사례에 2016년작 둠 리부트를 꼽습니다. 게임이 시작되면 두꺼운 석관으로부터 끄집어내져 재단에 누워 있는 주인공으로부터 시작되는데 눈을 뜨고 고개를 돌리는 수준의 동기화로부터 시작합니다. 손발의 구속을 뜯어내며 각각 손과 발에 대한 동기화가 일어나고 달려드는 첫 번째 괴물을 온전히 동기화 되지 않은 상태에서 플레이어가 임의로 괴물의 머리를 붙잡고 재단 모서리에 처박아 괴물을 처치합니다. 이제 플레이어의 거의 모든 기능과 동기화된 상태가 되고 옆에 놓인 총을 집자마자 나타난 두 번째 괴물을 향해서는 이제 유저의 조작에 의해 총을 발사합니다. 이 게임을 의미 있는 동기화 사례로 꼽는 이유는 이 상황에서 유저와 플레이어 사이에 신체적인 동기화가 일어났지만 이어서 그 다음 단계의 동기화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플레이어가 누워 있던 방을 나서면 방 바깥에 플레이어가 장착하고 있었을 것이 분명한 슬레이어의 갑옷과 헬멧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갑옷을 입고 헬멧을 둘러본 다음 머리에 뒤집어 쓰는 순간 이제 유저는 플레이어와 신체적으로 동기화 되었을 뿐 아니라 이 게임의 주인공인 슬레이어로써 정신적으로도 동기화된 상태가 됩니다. 이 두 단계에 걸친 동기화 과정은 단지 맥락에 의해 신체적 동기화에 도달하는 사례에 비해 크게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제목으로 돌아가 게임 속 나와 게임 밖 나는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생각해 봅시다. 사실 이 장르는 역사가 깊고 여러 게임에 걸쳐 플레이 방식이 거의 같기 때문에 명시적인 동기화 과정을 생략하기도 하지만 게임에 따라 동기화 과정의 맥락을 세련된 모습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모르는 장소에서 눈을 뜨며 몸의 일부에서 전체에 이르기까지 서서히 움직일 수 있게 되는 과정을 통해 유저와 플레이어가 서로 동기화됩니다. 둠 리부트 사례와 같이 신체적 동기화 뿐 아니라 정신적 동기화를 시도하는 사례도 있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게임에서는 유저가 게임을 대하는 관점 자체가 전혀 순응적이지 않은 특징 때문에 이 장르를 이전에 플레이 해본 적 있는 고객이라면 이 동기화 과정은 거의 본능에 가깝게 일어납니다. 게임 속 나와 게임 밖 나는 전통적인 이 장르의 조작 방식에 기반해 연결되지만 그 정신적인 과정은 거의 본능에 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