닌자 퇴근술
현대에도 여전히 닌자 퇴근술은 중요합니다.
실은 요즘은 퇴근할 때 의도적으로 닌자 퇴근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주변 사람들 눈치를 거의 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까지 할 생각이었던 일을 끝냈고 또 계약서에 명시된 출퇴근 시각이 되면 퇴근할 뿐입니다. 만약 오늘 안에 할 생각이었던 일을 오늘 안에 끝내지 못했다면 원인을 알아보기는 해야 합니다. 일의 난이도를 저평가 한 나머지 실제로 해 보니 예상보다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실은 일을 그럭저럭 짧지 않은 기간 동안 했는데도 여전히 일의 난이도를 올바르게 평가하는데 실패할 때가 있고 종종 일을 반드시 끝내야 하는 마감이 겹치면 난이도 평가 실패는 바로 초과 근무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우선순위가 더 높은 일이 끼어들었다면 이는 어쩔 수 없는 상황입니다. 우선순위가 높아 먼저 수행하기는 해야 하지만 이 일의 존재를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 새로운 일이 없는 상황을 가정하고 평가한 업무 난이도와 예상 시간은 새로운 일이 끼어들면서 이전에 예측한 평가를 쓸모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없던 일이 생겼다면 그 새로운 일을 포함해 전체 일을 끝마치는데는 물리적으로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물리적으로 더 많은 시간은 곧 물리적으로 더 긴 근무일 수와 같은 의미입니다.
하지만 살아 오면서 종종 이 간단한 물리 법칙을 무시하거나 믿고 싶어하지 않거나 업무 난이도 평가 실패를 그리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아주 많이 만나 왔습니다. 중간에 일을 얼마나 끼워 넣더라도 그 일을 포함한 전체 목표에 대한 일정은 여전히 유지 되어야 하며 처음 예측한 일정을 맞추지 못하면 이를 개인의 능력 부족이나 성실하지 못한 증거로 평가하려는 시도가 종종 일어났습니다. 불행하게도 그런 분들은 주로 평가자 위치에 있었고 우리들은 피 평가자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매년 물가 상승률에 아슬아슬하게 근접하는 급여 인상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이런 시각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정에 없이 끼어든 일을 포함해 원래 계획한 일까지 예정된 시간 안에 끝마치기 위해서는 초과근무를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시대나 지금이나 초과근무에 제대로 비용을 지불하는 회사는 많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일이 많고 그 많은 일을 제 시간에 해 내기 위해 필요한 초과근무가 있다면 종종 일이 없는 상태에서도 초과근무를 해야 하는 상황도 있습니다. 한 프로젝트에서는 오픈 베타 서비스가 가까워졌을 때 테스트 할 인력을 확보하지 못해 평일에는 개발팀이 개발을 하고 주말에는 같은 개발팀이 테스트를 하도록 했습니다. 요구 받은 테스트 중 하나는 모든 아이템이 인게임에 똑바로 나오는지 확인하는 일이었습니다. 아이템 이름이 제대로 들어가 있는지, 아이콘은 나오는지, 바닥에 떨어뜨릴 때 제대로 된 메시가 나오는지 따위를 살펴보는 일이었는데 오래 전에 개발한 MMO 게임 답게 게임에는 엄청나게 많은 종류의 아이템이 있었고 이들을 하나 하나 직접 인게임에서 확인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작업의 거의 대부분을 자동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자동화를 그리 신뢰하지 않았던 의사결정자들은 주중에 개발하고 주말에 테스터가 된 사람들 각각에게 아이템을 몇 백 개 씩 할당해 버립니다.
이미 자동화 할 수 있는 일을 사람들이 하나하나 확인해야 하고 또 아이템 중에는 개발용으로 사용하는 아이템들이 섞여 있어 아이콘이나 메시가 없거나 이름이 올바르지 않은 상태가 결함인지 아닌지 여부를 직접 판단할 수 없는 사람들마저 수동 아이템 테스트에 동원되었기 때문에 테스트 과정은 아주 고통스러웠고 또 테스트에 집중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누군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면 그 상태가 결함인지 아니면 테스트 아이템이 테스트 항목에 섞여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인지 확인해주기를 반복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아이템을 불러 오는 커맨드를 입력하는 과정을 자동화하고 아이템을 불러온 다음 스크린샷을 자동으로 찍도록 한 다음 밥 먹고 돌아오는 사이에 실행해 놓았습니다.
밥 먹고 돌아와 스크린샷이 모두 잘 찍힌 상태인지 확인한 다음 빠르게 스크린샷을 넘겨 가며 이름, 아이콘, 메시가 올바른 상태인지 확인해 밥 먹고 자리에 돌아온 지 30분을 넘기기 전에 테스트를 마쳤습니다. 하지만 집에 갈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같은 방법을 사용해 다른 사람들의 작업을 도울 수도 없었습니다. 명령 받은 방법과 다른 방법을 통해 수행했다고 보고하면 분명 좋은 소리를 들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같은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면 일요일 오후에 그 많은 사람들이 아무 댓가 없이 자기 돈 들여 출근해 자기 돈 들여 밥을 사 먹고 앉아있지도 않았을 겁니다.
의사결정자 눈에 띄지 않게 같은 팀에 몇 사람에게 할당된 확인 물량을 같은 방법으로 처리해 다음 한 시간 사이에 팀에서 확인할 물량 전체를 처리했습니다. 그 다음 딱히 할 일이 없지만 모두가 바쁘게 아이템을 불러오는 명령어를 타이핑하고 인벤토리를 클릭해 아이템 정보를 확인하느라 바쁘게 키보드와 마우스를 조작하는 분위기 속에 아예 다른 일을 하기 뭣해서 모니터를 멍하니 바라보며 일요일 오후를 보내다가 문득 이렇게 아무 일도 안 하고 앉아있다가는 휴일 오후를 회사에서 무의미하게 날리고 또 바로 다음날 부터 지친 몸을 이끌고 출근해 똑같은 초과근무를 반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애초에 이런 테스트를 수행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도 짜증 나는데 그걸 주말에 쉬지도 못하고 멍청한 방법으로 수행하기를 강요 받을 뿐 아니라 더 빠른 방법을 사용해 완료했다고 보고했다가는 명령을 올바르게 수행하지 않았다고 오히려 처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갑자기 확 짜증이 났습니다.
의사결정자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도망가기로 합니다. 주말에는 건물 정문이 잠겨 있었기 때문에 짐을 챙겨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건물을 빙 돌아 후문을 통해 나가고 있었는데 순간 담배터에 있던 의사결정자와 마주쳤고 속으로는 ‘아 망했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목례를 합니다. ‘다 했어?’라길래 ‘네. 저희 팀 모두 완료했습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고 그가 더 이상 뭔가 말하기 전에 최대한 빨리 걸어 그 앞을 지나쳤습니다. 이 사건이 영향을 줬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결국 그 다음 번 평가와 연봉협상 결과는 전경련에서 발표하는 티배깅에 가까운 물가인상률을 따라잡지도 못하는 수준이었고 이곳에서 더 이상 일했다가는 일을 할수록 점점 더 가난해지는 상황을 피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이 사건과 상황의 근본적인 문제는 누군가 제가 집에 가는 모습을 썩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이런 사람은 생각보다 많으며 업계 구석구석에 도사리고 있어 언제 마주칠 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저평가된 연봉은 적절한 이직을 통해 극복할 수 있지만 어딜 가든 계약서에 명시된 시각에 집에 가는 사람들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는 이상 이들을 피할 방법은 없습니다. 또 이런 사람들이 도사리고 있는 곳일 수록 제대로 된 노동시간 관리 체계를 갖추지 않은 곳이 많아 아침이 훨씬 지난 느즈막한 시간에 출근해 밤 늦게 까지 회사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실제로 수행하는 업무에 비해 높은 평가를 받는 반면 계약서에 명시된 올바른 시간에 출근해 올바른 시간에 퇴근하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나쁜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 정신이 망가지지 않고 버티기 위한 현실적인 방법은 제 시간에 집에 가되 제대로 된 노동시간 관리가 안 된다는 헛점을 노려 집에 가는 모습을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는 방법, 즉 닌자 퇴근 기술을 익히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이런 반복되는 불합리한 회사 생활 속에 갈고 닦은 닌자 퇴근 방법을 소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