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클라리스 스탈링. FBI 소속이다.
타임라인에 지나가는 트윗을 보고 가장 좋아하는 영화 장면을 생각해봤습니다. 몇몇 장면들이 지나갔지만 실은 그 장면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린 다음 가장 좋아하는 장면을 쉽게 떠올렸습니다. 한편으로는 가장 좋아하는 음악은 시간이 흐르며 몇 번 변해온 것에 비해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몇 년 동안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 영화의 그 장면이 그렇게 마음에 든 것인지 아니면 오랫동안 좋은 영화를 충분히 봐 오지 않아 단지 업데이트가 안 된 상태일 뿐인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최근에는 영화를 충분히 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업데이트가 안 된 상태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지금 당장은 좋아하는 영화 장면을 말하라고 하면 이 장면을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 한니발(2001)의 끝부분입니다.
영화 한니발 끝부분에서 수많은 경찰들이 별장에 나타났지만 이미 렉터 박사는 떠나고 마지막까지 어두운 호수 가운데로 나아가는 배를 뒤쫓던 스탈링은 그 배가 비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지금까지 온갖 일을 겪었음에도 결국 렉터 박사를 체포할 수 없었지만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이 그를 체포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그가 계속해서 자유롭게 여생을 보낼 수 있음에 의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토머스 해리스의 원작에서 스탈링은 렉터 박사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지금 까지의 관계를 넘어선 새로운 친구가 됩니다. 우연히 이를 본 바니가 서둘러 도시를 떠나려는 장면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장면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한니발 렉터는 몇 십 년에 걸쳐 세계에 알려질 만큼 대단한 인물이지만 클라리스 스탈링 역시 그에 못지 않습니다. 소설과 영화에 걸쳐 이 인물의 성장기와 고뇌, 자신의 이상과 FBI에서 겪는 실제 사이의 괴리를 생각해보면 스타게이트(1994)에서 잭슨 박사가 결국 현대 지구로 돌아가지 않는 선택을 한 것과 비슷한 결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소설에서 렉터 박사가 이야기한 대로 스탈링은 크게 도는 비둘기로 제임 검 사건을 해결한 공로에도 불구하고 FBI에 받아 들여지지 않는 상황에 결코 만족하지 않을 인물임을 강조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소설 한니발에서 렉터 박사와 오페라를 관람하기 위해 나타난 스탈링은 크게 돌다가 결국 바닥에 처박혀 죽을 순간을 기다리다 타의에 의해 구원 받는 것처럼 느껴져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제가 소설과 영화를 보고 인식한 클라리스 스탈링은 그렇게 끝날 인물이 아닙니다. 영화 한니발의 결말은 소설과 다릅니다. 스탈링은 렉터 박사의 회유를 거절하고 렉터 박사가 중대한 선택을 하게 만듭니다. 렉터 박사 역시 한니발 렉터 박사가 된 이후의 일생에 가장 큰 선택을 합니다. 결말에서 렉터 박사는 이제 가장 오랜 친구를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음을 느끼고 마지막으로 그 친구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호의를 베풉니다. 어두운 호수 가운데로 나아가는 배를 쫓지만 결국 그 안에 아무도 없음을 알게 된 스탈링 역시 이제 오랜 친구와의 인연이 여기서 영원히 끝나게 됨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총을 겨누고 누군지 밝히라는 경찰의 질문에 손을 들어 올리며 말합니다. “나는 클라리스 스탈링. FBI 소속이다.”
이 결말을 너무나 좋아하고 잊지 못하고 또 항상 마음 속에 두고 살아가는 이유는 소설과 영화에서 쌓아 올린 클라리스 스탈링의 가장 올바른 선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클라리스 스탈링은 성장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어디에도 제대로 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한계까지 밀어붙일 수밖에 없었고 이를 통해 지금의 위치에 도달합니다. 이런 고뇌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사랑한 FBI에 진정으로 속하지 못하고 또다시 버림받는 상황에서 얼마든지 이들을 배신하고 자신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오랜 친구의 손을 잡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스탈링은 크게 도는 새로 바닥에 처박혀 죽어가는 결말을 맞을지언정 사랑하는 자신의 조직을 배신하지 않을 만큼 강인한 인물입니다. 그런 인물이 렉터 박사와 더 깊은 친구가 되는 결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마음 속 착찹함이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FBI 소속이라고 소개하는 이 장면에서 녹아 내리는 경험을 했습니다. 맞아. 클라리스 스탈링은 바로 이런 사람이었어. 소설 끝에서 마음이 답답한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고 이제 더이상 마음이 답답하지 않게 됐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감정을 느낀 순간으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렀고 이제는 그 후의 다른 경험을 통해 가장 좋아하는 장면을 업데이트 할 때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클라리스 스탈링이 자신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오랜 친구와 영원한 결말을 고한 만큼 저 역시 내가 본 모든 영화 중 가장 사랑하는 이 장면을 그와 마찬가지로 떠나 보내고 새로운 가장 좋아하는 장면을 찾으려고 합니다. 이 글은 그러기 전 마지막으로 질척거리며 감정을 나열한 것입니다. 이제 렉터 박사가 자신의 오랜 친구에게 베푼 마지막 호의와 이로 인한 결과를 생각하며 마지막으로 Vide Cor Meum을 들으며 마무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