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스터 로밍의 중요성
MMO 게임에 나올 몬스터를 바닥부터 설계하다 보면 아직 요구 사항이 확실하지도 않지만 이전에 개발해 본 다른 게임이나 시장에 있는 다른 제품에 당연히 있는 기능이니 별 고민 없이 우리도 필요할 거라고 생각하고 설계에 포함하는 기능들이 있습니다. 가령 몬스터 로밍이 대표적인데 로밍은 몬스터가 자신이 태어난 위치 주변을 규칙에 따라 배회하는 것입니다. 만약 세계에 몬스터들이 가만히 서있기만 한다면 그 몬스터를 사냥해야 하는 고객 입장에서 세계가 별로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기 어려울 겁니다. 어차피 서 있는 몬스터를 사냥해야 한다면 이 게임이 굳이 롤플레잉이나 슈터 같은 장르일 필요 없이 프로그래스 퀘스트와 같은 모양이어도 별로 이상하지 않을 겁니다.
로밍 기능은 단순하게 만들 수도 있고 꽤 복잡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과거에는 로밍 기능을 꽤 복잡하게 만들던 경향이 있는데 몬스터가 세계에 태어난 다음 이 몬스터가 원하는 것이 있어 매번 움직일 때마다 가장 가까운 그 좋아하는 것이 있는 방향으로 서서히 움직이는 식으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지역의 몬스터들이 오랫동안 사냥 되지 않은 채 살아 있게 되면 결국 이 몬스터들이 좋아하는 것으로 설정된 특정 장소에 잔뜩 모여 있는 모습을 만나게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규칙을 설명하는 대신 좀 더 실제 게임에 가까운 언어로 이야기하면 어떤 숲 속의 좀비들은 황금에 끌리곤 했는데 이들은 매 번 이동할 때마다 확률에 따라 가까운 금광 방향으로 좀 더 자주 이동하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래서 금광에 가까이 갈 수록 좀비들을 많이 만나고 이들을 처치하면 다시 숲 속에서 좀비가 태어나 서서히 금광 쪽으로 이동해 오곤 했는데 만약 숲 속 지역과 금광 지역이 고객들에게 인기가 없어 아주 오랫동안 방치되면 숲 속에서 태어난 좀비들이 금광 주변에 잔뜩 모여 있는 상황이 벌어져 전투에 익숙하지 않은 고객들의 채광을 불가능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몬스터는 살아있는 세계를 만드는 도구에서 전투를 통해 자원을 넣으면 보상을 돌려주는 일종의 자판기 같은 역할에 가까워졌고 이에 따라 몬스터 자체의 그래픽 퀄리티나 이들이 사용하는 스킬은 정교해졌지만 이들의 로밍 방식은 점차 단순해지는 경향을 보입니다. 몬스터들은 자신이 태어난 위치에서 일정 반경 안의 아무 좌표로나 걸어서 이동했고 만약 태어난 반경 밖으로 나가면 빠른 속도로 자신이 태어난 위치로 돌아오도록 설정되어 있곤 합니다. 자신이 태어난 위치로 돌아와야 하는 이유는 교활한 고객들이 전투를 시작하면 전투 대상을 따라오도록 만들어진 몬스터의 습성을 이용해 많은 몬스터들을 멀리 까지 끌고 다니며 온갖 문제를 일으키는 상황을 막기 위함입니다.
현대에는 비선공 몬스터들이 모여 있는 초반 사냥터에 가만 서 있어 보면 몬스터들은 그저 아무 목적도 없이 주변을 돌아다니기를 반복하는 외형은 세계관에 걸맞는 몬스터이지만 약간은 여느 좀비들과 별로 다르지 않은 행동을 보이곤 합니다. 하지만 모바일 MMO 장르에 자동전투가 도입되면서 좀비처럼 서 있는 몬스터들이라도 고객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게 된 것 같습니다. 또한 아이소매트릭 뷰를 채용한 게임의 경우 화면에 보이는 시야가 좁아 화면 바깥의 몬스터가 이동하지 않더라도 이를 고객이 눈치 챌 수 없었고 시야 안에 들어온 몬스터는 즉시 자동전투에 의해 전투상태에 돌입하므로 이들이 로밍을 하고 있든 그렇지 않든 별로 중요하지 않았으며 또 사실상 이 차이를 구분할 수 없습니다.
한편 2023년 봄 기준으로 게임을 만들면서 핵심 전투를 만들고 몬스터 기반을 설계하고 이들이 실제 세계에 나타나 플레이어와 싸울 수 있게 만들고 있었는데 단단한 몬스터의 행동 체계와 플레이어의 상태 시스템을 만드는데 시간을 들였습니다. 처음에는 여느 삼인칭 게임을 플레이 하던 습관 대로 이동과 점프와 무기 사용을 마구 섞어서 입력하다 보면 상태가 꼬여 플레이어는 이상한 행동을 하거나 무기를 발사할 수 없게 되거나 점프할 수 없는 높이까지 점프하는 등의 이상한 행동을 하기 일쑤였고 몬스터 역시 플레이어를 향해 달려오기는 했지만 제대로 된 스킬을 사용하지 않고 플레이어 주변에 도달해 멈추거나 하기 일쑤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태는 빠르게 개선되어 플레이어와 몬스터 양쪽 모두 꽤 단단해졌고 여느 다른 게임을 플레이 하던 느낌으로 플레이 해도 적어도 비슷한 수준의 단단한 느낌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한편 이 상태에 도달하자 사람들의 눈은 바로 다음 단계로 높아졌고 이제 몬스터들이 자연스럽게 로밍하지 않고 태어난 그 위치에 가만히 서 있는 모양이 어색하다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게임이 아이소매트릭 뷰라면 위에서 설명한 대로 시야가 좁고 모든 플레이어로부터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진 몬스터들은 서버 연산을 줄이기 위해 로밍을 중단하는데 이는 마치 관측을 통한 상호작용을 일으키기 전에는 파동의 형태로 존재하는 빛의 성질과도 비슷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삼인칭 뷰였고 꽤 먼 곳까지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아이소매트릭 뷰 게임에 비해 훨씬 멀리 있는 몬스터들도 로밍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수준으로 로밍을 하게 해야 할지는 아주 잠깐 고민해볼 만한 주제였는데 간단히 이전에 여러 MMO 게임에서 하던 대로 태어난 위치를 중심으로 정해진 반경 안의 아무 좌표를 목표 삼아 돌아다니다가 태어난 위치를 중심으로 한 반경 밖으로 나가면 태어난 위치로 돌아오고 로밍 중 적을 만나거나 공격 받으면 전투를 시작하는 단순한 규칙을 적용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세계가 넓어질수록 거의 같은 규칙에 따라 로밍하는 몬스터가 반복될수록 세계에 대한 몰입이 쉽게 깨지며 몬스터는 세계의 구성원에서 아이템과 경험치를 내놓는 자판기의 역할로 순식간에 강등될 가능성 역시 있었습니다.
가령 둠 이터널에서는 몬스터들이 주인공인 슬레이어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설정에 따라 자기들 끼리 싸우는데 이 모습을 숨어서 가만 지켜보고 있으면 이 몬스터들이 정말로 지옥에서 소환된 몬스터일 것 같은 느낌을 주고 게임에 더 몰입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이들은 서로 싸우다가도 슬레이어를 발견하면 갑자기 슬레이어를 공격하기 시작하는데 이 전환 역시 꽤 자연스러워 둠 이터널의 세계 속에서 학살자의 입장으로 지옥에서 건너온 몬스터들을 학살하는데 몰입을 도와줍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로밍은 어느 정도 수준이어야 할까요. 여느 게임처럼 우리는 아직 몬스터들의 로밍 수준을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세계 속에서 게임 규칙에 따라 몬스터들의 로밍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지, 또 고객들이 몬스터들의 로밍을 얼마나 의미 있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아직 잘 모릅니다. 그래서 일단 앞에서 설명한 다른 게임에서 흔히 사용하는 가장 단순한 수준의 로밍을 먼저 만들어 놓고 이후 요구사항이 나타나면 그 때 본격적으로 로밍 규칙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로밍이 없을 때는 정말 가만히 서 있는 몬스터들에게 총질을 시작하는 밋밋한 느낌이었던데 비해 몬스터들이 자기들끼리 아무 위치로나 움직이기 시작하자 이 단순한 규칙만으로도 나름 눈밭 위에 몬스터들이 원래부터 그 자리에 서서 자기들끼리 ‘하하!’ 하는 웃음 소리를 내며 서 있었을 것 같고 또 우리가 이들에게 총을 쏘지 않았다면 밤에는 어딘가 있을 집으로 돌아갈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는 점입니다. 로밍은 아주 단순하지만 그 단순한 움직임 만으로도 이를 보는 사람에게 여러 상상을 하게 만들 수 있는 요소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