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신호를 소모해버린다

중요한 신호를 소모해버린다

사회에서 살아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몇몇 신호가 다른 신호에 비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가령 건널목에서 신호등에 빨간 불이 들어와 있으면 지금 건너서는 안된다는 의미이고 중요합니다. 만약 이 신호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면 크게 다치거나 심지어는 죽을 수도 있습니다. 또 반짝거리는 경광등을 단 차량은 다른 차량에 비해 더 중요한 일을 긴급하게 처리하는 차량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구급차, 소방차, 경찰차 같은 차들이 이런 신호를 내보냅니다. 이 신호에 맞춰 차가 빨리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거나 차들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당장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가 제때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사이렌 소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터널

터널은 다른 도로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안전한 장소입니다. 비슷한 배경이 반복되어 집중력을 잃기 더 쉽습니다. 안에서 화재가 일어난다면 연기가 터널 안에 가득 찰 수도 있고 또 좌우가 벽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다른 도로라면 도로 밖으로 튀어나가는 정도로 끝날 사고가 더 크게 번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터널 안에서 번쩍이는 경광등, 호루라기 소리, 사이렌 소리를 켜 놓은 것을 여러 번 봤습니다. 처음에는 우연히 터널에 진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길이 막히기 시작했기 때문에 정말로 뭔가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는 근처에 있는 낡은 경유차량에서 내뿜는 배기가스 덕분에 화재가 일어났다고 착각할 정도였습니다. 심각하게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뒤로 돌아가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이내 배기가스를 제외한 나머지 신호는 가짜 신호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터널 안에 이런 가짜 신호를 설치하도록 결정한 사람들은 사람들이 이런 신호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훈련되었기 때문에 이 신호를 터널 안에 뿌려두면 터널을 지날 때 좀 더 주의를 기울일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이런 가짜 신호를 내뿜는 터널을 몇 번 지나자 이 신호에 짜증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이런 신호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훈련받았지만 주의를 기울일 상황이 아니라는 점이 짜증을 일으키는 원인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 짜증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라졌습니다. 그때부터는 터널 안의 가짜 신호를 무시하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터널 안에서 정말로 뭔가 문제가 일어났지만 그 신호를 무시했다가 문제가 생기면 어쩌나 하고 가끔 걱정하기도 합니다. 운이 좋아서인지 아직까지 그런 경우를 겪지는 않았지만 말입니다.

게임의 빨간점

누가 맨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사용자가 게임 인터페이스를 눌러보도록 만들기 위해 인터페이스 어딘가에 빨간색 점을 달아놨습니다. 게임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트릭 중에는 사용자의 강박을 자극해 원하는 동작을 하도록 유도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가령 업적을 표시할 때 아직 달성하지 않은 업적을 필요 이상으로 볼품없고 텅 빈 것처럼 표시해 고통을 무릅쓰고 업적에 도전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비슷하게 이 빨간점은 인터페이스에 접근하면 사라지도록 사용자를 훈련시켜 빨간점이 떠 있으면 일단 이걸 없애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게 되곤 합니다.

하지만 이런 신호를 남용하면 위에서 이야기한 터널 사례처럼 되기 십상이기 때문에 규칙을 정했습니다. 이 빨간점은 게임 인터페이스 구석구석에 분산 배치된 보상을 사용자에게 알려주기 위한 용도로만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빨간점은 눈에 띄고 없애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귀찮은 물건이지만 이 동작을 수행할 때마다 뭔가 보상을 받게 되는 겁니다. 개발자 입장에서는 사용자에게 원하는 동작을 유도하고 사용자는 그 댓가로 보상을 얻습니다. 여기까지는 평화로웠습니다.

하지만 개발팀에 이 빨간점이라는 요소가 구현되었다는 소식이 퍼지자 온갖 서브시스템을 만드는 부서들로부터 연락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들이 만드는 컨텐츠에도 빨간점을 붙여달라는 겁니다. 문제는 이들의 요구사항은 바로 위에서 정해 둔 '보상을 먹는데만 빨간점을 사용한다'는 규칙을 완전히 무시했다는 겁니다. 새로운 컨텐츠가 추가되었을 때도, 이벤트를 할 때도, 그냥 모르겠고 하루에 한번씩 눌러보도록 하기 위해 빨간점을 붙여달라는 요구사항이 밀려왔습니다. 한동안은 상당한 에너지를 소모해가며 요구사항 각각에 왜 그 요구사항을 들어줄 수 없는지를 설명했지만 또 시간이 지나자 앞에서 소모한 에너지가 무색하게 요구사항이 밀려왔습니다. 언제까지 이 일에 에너지를 소모할 수 없었으므로 담당자를 변경하고 문제를 무시해버렸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아주 조금 지났습니다. 그러니까 딱 한 마일스톤이 지났습니다. 게임에는 온갖 장소에 빨간점이 덕지덕지 붙어있게 되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여전히 의도를 가지고 게임 구석구석에 붙여둔 보상까지 안내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나머지 대부분은 그냥 새로운 이벤트가 열려서, 이번주에 길드전이 추가되었기 때문에, 상점에 새로운 상품 카테고리가 추가돼서, 모험에 새로운 챕터가 열렸기 때문에 빨간점이 붙어있었습니다. 후자의 빨간점들은 빨간점을 따라 인터페이스를 조작해도 그 끝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치 내비게이션을 따라 운전해 갔더니 벌판에 도착해놓고는 내비게이션 기계가 먹통이 되어버린 꼴입니다.

제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얼마 지나지 않아 확실히 보상을 주는 소수의 빨간점을 제외하고는 빨간점을 무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차피 눌러봐야 아직은 내가 살 필요가 없는 상품 광고일 뿐이고 눌러서 따라가봐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단지 내 주의력과 시간을 잡아먹는 쓰레기라는 인식이 자리잡았기 때문입니다.

교훈

사람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학습한 중요한 신호가 있습니다. 이 학습이 어떤 행동을 유도하는 결과로 동작하는 이유는 신호가 주는 신뢰성 때문입니다. 번쩍거리는 불빛과 사이렌, 빨간불 따위는 이 신호들이 정말로 급하고 중요하며 위험한 사건사고에 사용된다는 신뢰에 기반합니다. 그래서 룸미러에 비친 번쩍거리는 불빛을 보고 한쪽으로 붙어 기다리는 행동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터널 안에서, 또는 게임에서 빨간점을 사용하듯 신호의 신뢰를 망가뜨리면 결과는 정말로 의도하지 않는 쪽으로 흘러갈 겁니다. 더이상 빨간점을 신뢰하지 않게 된 것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