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q vs. lp

세상에는 크게 lp와 lq의 두 가지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저는 한때 평생에 걸쳐 lp가 올바르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lq가 올바르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lq vs. lp

독립하기 전까지 집에서는 lp 모양을 사용했습니다. 이게 너무 당연했고 또 자연스러웠으며 딱히 불편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독립한 이후에도 lp 모양을 만들었는데 그 때 같이 살던 친구는 제가 lp 모양으로 돌려 놓으면 이게 불편하다고 생각했는지 lq 모양으로 다시 돌려놓기를 반복했습니다. 하지만 처음 독립해 보는 두 아저씨는 서로에게 이런 이야기를 직접 하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각자는 그저 조용히 자신이 선호하는 모양으로 상황을 바꿔 놓았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각자 여러 가지 이유로 여러 날 집을 비웠다 돌아오면 여지 없이 반대 방향으로 돌려진 상황과 마주하는 상황이 전혀 낯설지 않은 상태가 됩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며 여러 곳에서 제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해 온 lp 모양보다 lq 모양을 더 자주 마주치게 됐고 과연 제가 평생에 걸쳐 옳다고 생각해 온 lp 모양은 사실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선호되는 형태일 뿐 실은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lq 모양으로 살아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조금 무섭기도 하고 또 슬프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lp 모양과 lq 모양의 여러 가지 특징을 생각해보고 과연 어느 쪽이 올바른지 한번 깊이 고민해보려고 합니다.

물론 세계에는 이 두 가지 이외의 사례도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가령 지금까지 소개한 서로 대립하는 두 가지 모양은 이를 측면에서 봤을 때의 차이만을 언급한 것입니다. 다른 사례에는 아예 옆에서 볼 때 lp 모양인지 lq 모양인지 정의할 수 없는 아예 세로로 배치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lplq와 같은 방식으로 표현하려고 시도하면 lz와 같이 좀 모호한 모양으로밖에 표시할 수가 없습니다. 굳이 표현한다면 lz 모양과 ls 모양이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 같기는 하지만 직관적이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또 대형 시설에서 만날 수 있는 위에서 내려다 볼 때 lp 또는 lq 모양을 CW90 또는 CCW90 방향으로 회전 시킨 형태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는 애초에 롤이 가정용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함. 이 때는 주로 lq 모양을 벽 방향에 따라 90도 회전 시키는데 이는 lplq 중 어느 쪽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지 정의하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지만 오늘은 그 중 가장 첨예하다고 생각하는 lplq로 범위를 좁혀 다뤄보겠습니다.

여기까지 읽어 오신 분이라면 제가 지금 도대체 무슨 미친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실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로 위 두 문단을 작성하면서 의도적으로 저게 정확히 무슨 소리인지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게 무슨 소리인지 이야기하려는 목적으로 글을 쓰고 있으니 이제 정확히 무슨 소리를 하고 있었고 또 무슨 소리를 해 나갈 작정인지부터 이야기하겠습니다. 지금까지 해 온 이야기는 화장실에 휴지를 어느 방향으로 걸어 놓느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lpl은 벽을 의미하고 p는 롤 모양의 화장실 휴지가 어느 방향으로 걸려있는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lp는 화장실 휴지의 풀려 있는 부분이 벽 쪽을 향하도록 걸려 있다는 의미이고 lq는 반대로 화장실 휴지의 풀려 있는 방향이 벽과 반대쪽을 향하도록 걸려 있는 상태를 표현했습니다. 독립하기 전 저는 집에서 항상 lp 방향으로 화장실 휴지가 걸려 있던 것에 익숙해져 있었지만 세상을 살다 보니 lp 방향으로 휴지를 걸어 두는 사람들보다 lq 모양으로 휴지를 걸어 두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개인적으로 꽤 큰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습니다. 앞서 잠깐 언급한 lslz는 휴지걸이가 하늘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설치된 상태를 설명하려고 시도한 것인데 그리 성공적이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이 경우 휴지를 설치하지 않은 휴지걸이는 li 모양처럼 벽과 연결되어 하늘을 보고 있는데 이 휴지걸이를 위에서 내려다볼 때 시계방향으로 장착하는 것과 반시계방향으로 장착하는 것을 각각 lslz로 나타내 보았습니다. 하지만 썩 직관적이지는 않은 것 같으니 앞서 이야기한 대로 lplq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작정입니다.

먼저 lp는 휴지의 풀린 방향이 벽에 가깝도록 장착한 형태입니다. 오래 전 기억에 의존해 저렇게 설치한 이유를 추측해보면 저 시대에는 휴지에 앞뒷면 구분이 없었습니다. 현대에도 가격이 아주 싼 휴지를 찾다 보면 면 구분이 없는 휴지를 볼 수 있는데 이런 휴지는 면 구분이 없어 아무 방향으로나 말아도 동일한 수준의 성능을 보입니다. 그래서 lp 방향으로 걸린 휴지를 사용할 때는 먼저 휴지가 늘어진 부분을 아래쪽 방향으로 잡아 내린 다음 벽을 기준으로 바깥쪽 방향으로 접어 올려 휴지 뭉치를 만들곤 했는데 lp 방향으로 걸린 휴지로부터 휴지를 잡아당겨 말아 놓은 모양은 lb 모양이 됩니다. 그 다음 점선을 잡아당겨 뜯으면 휴지뭉치 하나가 완성됩니다. lp 모양으로부터 휴지를 잡아당겨 벽을 기준으로 바깥쪽 방향으로 말아 lb 모양으로 휴지를 말아 사용했으므로 제 입장에서 휴지는 당연히 lp 모양으로 걸려 있어야만 했습니다. 만약 휴지가 lq 모양으로 걸려 있으면 똑같이 벽을 기준으로 바깥쪽 방향을 향해 lb 모양으로 휴지를 말려고 하면 의도하지 않은 지점이 제멋대로 힘을 받아 중간에 끊기기도 해서 불편합니다. 이 두 가지 사례를 연결해 나타내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습니다.

lp lq
l l
b b
---------------------------
lp 타입 lq 타입

위 코드에서 볼 수 있듯 lp 모양으로 감겨 있는 휴지로부터 앞뒤 구분이 없는 휴지를 꺼낼 때는 왼쪽 벽을 기준으로 반시계방향으로 감을 때 자연스럽고 또 휴지가 풀려나올 때 점선을 구성한 모든 부분에 힘을 고루 받아 원하지 않는 지점에서 휴지가 끊기는 문제가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반대로 왼쪽 벽을 기준으로 lq 모양으로 걸려 있는 휴지를 꺼낼 때 벽을 기준으로 반시계방향으로 감아 내면 휴지가 풀리는 방향이 벽으로부터 쉽게 멀어져 lp 타입과 비교할 때 점선에 더 큰 힘이 가해져 원하지 않는 시점에 휴지가 끊겨 곤란해질 수 있습니다. 즉 벽을 기준으로 할 때 반시계방향으로 휴지를 감아낼 때는 휴지가 주로 수직 방향으로 힘을 받아 중간에 끊길 일이 적지만 벽을 기준으로 lq 모양으로 걸린 휴지는 같은 상황에서 벽을 기준으로 할 때 사람에 더 가까운 방향으로 힘을 받다 보면 수직에서 훨씬 더 많이 벗어난 모양으로 힘을 받아 훤하지 않을 때 휴지가 끊길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렇다 보니 휴지는 당연히 lp모양으로 걸려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고 이와 반대 방향으로 걸려 있으면 휴지를 벽을 기준으로 반시계방향으로 말려고 할 때 평소보다 더 자주 원하지 않는 지점에서 휴지가 끊겨 불편한 상황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왜 휴지를 lq 방향으로 걸어 놓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고 세상의 다수가 이 방향으로 휴지를 걸어 놓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도대체 왜 이런 세상에 살게 되었는지 자신의 존재 이유를 깊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이렇게 과거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고 고도성장기를 거치며 국민소득이 빠르게 증가하자 이런 화장실 휴지가 처한 상황 역시 빠르게 변했고 이전에 비해 휴지의 올바른 방향을 결정하는데 고려해야 할 아주 중요한 팩터가 추가됩니다. 바로 휴지에 앞뒷면 구분이 생긴 것입니다. 이전까지 설명한 화장실 휴지를 거는 올바른 방향과 원하지 않는 지점에서 휴지가 끊기는 불편함이 훨씬 덜 일어나는 휴지를 풀어내는 시나리오는 오래 전 화장실 휴지에 앞뒤 구분이 없을 때 이야기였습니다. 이 때 화장실 휴지는 어느 면으로 휴지를 감더라도 똑같이 기능했으므로 휴지를 풀어내는 방향은 휴지가 걸린 방향에 따라 결정되었습니다. 하지만 휴지에 앞뒤 구분이 생기는 순간 휴지가 어느 방향으로 걸려 있든 풀어낸 휴지 뭉치의 바깥쪽이 앞면이 되도록 휴지를 풀어내야만 합니다. 물론 반대 방향으로 휴지를 풀어낼 수도 있겠지만 이 경우 휴지의 성능에 차이가 생깁니다. 휴지 제조사들은 휴지에 앞뒤 구분을 만든 다음 앞쪽에는 의도적으로 요철을 추가하고 또 뒷면에 비해 더 부드러운 소재를 사용해 앞면이 뒷면에 비해 더 잘 작동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단순히 요철만 추가했다면 실제 사용될 때 닿는 면의 면적이 감소해 오히려 성능이 저하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더 부드러운 소재를 사용해 닿는 면의 면적을 극적으로 증가 시켜 올바른 방향으로 사용할 경우 훨씬 더 잘 작동하게 만들었습니다. 휴지에 앞뒷면 구분이 생긴 순간부터 휴지를 풀어내는 방향은 어느 한 쪽으로 결정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lp lq
\ |
d b
---------------------------
lp 타입 lq 타입

이렇게 변화한 세계에서 저 역시 휴지가 lp 방향으로 걸려 있을 때 이를 앞면이 바깥쪽을 향하도록 풀 때 이전에 겪던 휴지가 사선 방향으로 당겨져 원하지 않는 시점에 끊길 수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위 코드에서 제가 옳다고 생각해 온 lp 방향으로 걸린 화장실 휴지로부터 두루마리의 안쪽에 있는 휴지의 앞면이 바깥쪽을 향하는 뭉치를 만들기 위해서는 벽으로부터 제 쪽에 가깝도록 휴지를 사선으로 당겨 말아야 했는데 이전에는 lq 모양에서 발행하던 휴지를 수직 방향이 아니라 사선 방향으로 당겨 원하지 않을 때 휴지가 끊기는 문제가 더 자주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게다가 lp 모양으로 감긴 휴지를 왼쪽에 있는 벽을 기준으로 앞면이 바깥으로 오도록 d 모양으로 감다 보면 손이 벽에 더 자주 닿아 불편합니다. 그래서 휴지에 앞뒤 구분이 생긴 순간부터 그 이전 까지 평생에 걸쳐 옳다고 생각해 온 lp 모양이 더이상 옳지 않을 수 있다고 인정하게 됩니다. 반면 같은 상황에서 lq 모양으로 설치한 휴지는 휴지 안쪽의 앞면을 바깥쪽으로 하는 b 모양을 만들기 위해 벽에 손이 거의 닿을 필요가 없으면서도 휴지를 수직 방향으로 잡아당기면 되기 때문에 휴지가 사선으로 당겨질 필요가 없어 원하는 지점에 더 큰 힘을 줘 휴지를 끊어 내기 전에는 휴지가 원하지 않을 때 끊겨 곤란해지는 상황을 거의 겪지 않게 되었습니다. 휴지에 앞뒤 구분이 생긴 세계에서 휴지 안쪽 면이 앞면일 때 휴지는 lq 모양으로 걸려 있을 때 더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으며 과거의 방식에 따라 lp 모양으로 설치해 놓으면 사람들이 벽에 손이 더 자주 닿고 또 휴지가 더 자주 원하지 않을 때 끊기는 불편함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저 역시 오랜 고집을 꺾고 제 스스로도 lq 모양으로 휴지를 거치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휴지에 앞뒤 구분이 없던 시대에 더 올바른 방법으로 시작해 이 방법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며 평생을 살아 왔지만 앞뒤 구분이 있는 휴지가 나타났고 그들은 항상 말려 있는 두루마리의 안쪽 면을 앞면으로 했기 때문에 다수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휴지를 거치하는 것이 더 올바른 방법임을 인정하는 수준에서 생각을 마쳤고 더 이상 고민할 거리가 없었습니다. 꽤 오랜 시간에 걸쳐 도대체 왜 사람들은 휴지를 더 올바른 lp 모양이 아니라 lq 모양으로 걸어 두는지 여러 화장실에 앉아 골똘히 생각했고 때때로 위에서 소개한 특히 케이스인 lslz 모양, 그리고 아예 왼쪽 벽면을 기준으로 CCW90 방향으로 설치된 대형 두루마리를 보며 세상에는 이분법적 논리, 혹은 흑백 논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한 사례들이 있고 언제든 제가 옳다고 생각한 명제가 부정될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미 생각 끝에 결론을 내고 제 틀림을 인정했으며 제 중요한 생활 방식을 바꾼 이 생각을 지금 다시 끄집어내 이런 글을 타이핑 하며 제 오랜 고민을 공유하게 된 이유는 얼마 전 회사 화장실에 갔다가 처음으로 지금까지 해 온 경험과는 완전히 다른 사례와 마주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휴지는 크게 lp 또는 lq 모양으로 거치할 수 있고 휴지에 앞뒤 구분이 있을 때 앞면은 두루마리 안쪽을 향하므로 lq 방향으로 휴지를 거치해야 앞면이 바깥쪽을 향하는 휴지 뭉치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 거의 진리에 가까운 결론을 가지고 있었지만 냉방이 안되는 후텁지근한 화장실에 조용히 앉아 깊은 생각에 빠지게 만드는 상황은 마치 처음으로 lq 모양으로 걸린 휴지가 이 세계의 대다수를 차지하며 저 자신은 소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느끼던 한없는 외로움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 날 제가 회사 화장실의 후텁지근한 공기 속에 벽에 걸린 두루마리 휴지에 손을 내밀어 그 얇은 종이의 감촉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 예상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감각이 손끝을 타고 뇌로 전달되어 옵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평생의 경험에 의하면 앞뒤 구분이 있는 두루마리 휴지는 그 앞면이 안쪽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휴지를 잡으면 말려 있는 휴지의 안쪽 면이 더 부드럽고 또 제품에 따라 의도적인 요철을 포함한 감각을 전달했고 반대쪽, 그러니까 바깥쪽 면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날 화장실에서 잡은 휴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예상한 것과 반대 방향으로 제조 되어 있었습니다. 그동안 제가 앞면이라고 생각해 온 더 부드러운 면이 두루마리 바깥쪽을 향하고 있었고 두루마리 안쪽 면은 그런 부드러운 면이 아니었습니다. 잠시 동안 저는 휴지를 풀던 동작을 멈추고 이 휴지를 설계하고 생산한 사람들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어쩌면 이들은 여전히 안쪽을 앞면으로 설계하고 부드러운 면 보다는 까끌까끌한 면이 더 나은 성능을 낼 거라고 생각하고 이 휴지를 설계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전히 까끌까끌한 안쪽 면이 앞면이고 저는 기존과 같은 방식으로 휴지를 말아 사용하기만 하면 되는 단순한 상황일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휴지를 풀다 말고 양쪽 면을 여러 차례 만져보며 분명 부드럽다고 느끼는 면이 두루마리 바깥쪽을 향해 말려 있는 휴지는 바깥쪽 면이 앞면이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lq
\
d

저는 그 날 분명히 두루마리의 바깥쪽 면을 앞면으로 의도하고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휴지를 lq 모양으로 거치 된 상태로부터 그 앞면, 그러니까 휴지의 바깥쪽 면이 바깥쪽을 향하도록 말기 위해 수직 방향 대신 약간 사선 방향으로 휴지를 잡아당겨 벽이 왼쪽에 있을 때 휴지의 앞면이 바깥을 향하는 d 모양으로 만들었습니다. 사실 현대의 두루마리 휴지는 조금쯤 사선 방향으로 잡아당긴다 하더라도 원하지 않는 지점에서 휴지가 끊겨 곤란한 상황을 만들지 않을 만큼 발전했습니다. 이 휴지는 예술적일 정도로 끊기를 원하는 잡아당김과 풀림을 원하는 잡아당김을 잘 구분해 내기 때문에 수직 방향 또는 사선 방향으로 잡아당겨지는 상태에 주의할 필요가 거의 없습니다. 때문에 이제는 lp 모양이나 lq 모양에 관계 없이 각자의 취향에 따라 휴지를 걸어 놓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방향성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앞면이 바깥쪽을 향한 제품을 마주한 저는 이미 오랜 시간에 걸친 생각 끝에 올바른 방향과 그 이유를 완전히 정립한 상태로부터 다시 이런 사실상의 진리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시 고민해볼 수밖에 없는 불안한 상태에 내몰렸고 오래 전 제 인생의 고민 목록으로부터 삭제된 다음 생각의 깊고 깊은 곳에 처 박아 둔 이 주제를 다시 끄집어내 대체 어느 쪽이 더 올바른 방식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앞면이 바깥쪽을 향한 휴지는 벽이 왼쪽에 있을 때 지금까지 옳다고 생각해 온 lq 방향으로 걸어 두면 앞면을 바깥쪽으로 말기 위해서는 lp 모양으로 걸려 있을 때와 비교해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때 제 인생의 진리이자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던 lp 모양으로 휴지를 걸던 방식은 더 넓은 세계로 나와 lq 방식이 대세이며 이는 휴지에 앞뒤 구분이 있는 더 잘 사는 세계에 올바른 방식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인정했지만 이는 휴지의 앞면이 두루마리의 안쪽 방향을 향하고 있을 때만 통용되는 진리일 뿐 휴지의 앞면이 두루마리의 바깥쪽 방향을 향하고 있을 때는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방식이라는 결론을 내리며 손을 닦고 화장실을 나와 자리에 돌아옵니다. 그리고 15분 이상 자리를 비우면 그 시간을 노동시간에 포함할지 포함하지 않을지 묻는 팝업에 당당히 똥 싸러 다녀왔다고 적은 다음 확인을 누릅니다. 사실 인생의 한 가지 진리가 그 뿌리부터 흔들려 이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하느라 평소보다 더 긴 시간이 걸렸다는 이유를 더 쓸 수도 있었겠지만 이를 읽는 인사 부서의 누군가를 곤혹스럽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lq는 진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기존과 반대 방향으로 감긴 휴지를 생산하는 누군가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