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선택지

대화 중 선택지는 어떤 게임에 의미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현대에 주로 만드는 장르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현대의 선택지

한동안 자전거를 굉장히 열심히 타던 때가 있었습니다. 미니벨로를 하나 산 다음 원래 그 자전거를 탈 거라고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긴 거리, 험한 환경에서 자전거를 탔는데 다행히 그런 사람이 저 한 명 뿐이 아니어서 그런 분들과 몰려 다니며 자전거를 타곤 합니다. 이 자전거는 접으면 당혹스러울 정도로 작게 접혔기 때문에 자전거 출입을 금지하는 신분당선, 평일 자전거 출입을 금지하는 여러 지하철, 지방을 오가는 고속버스, 온갖 기차에도 편안하게 들고 들어갈 수 있었는데 덕분에 장거리 대중교통을 통해 먼 거리를 이동한 다음부터는 자전거를 타고 자유롭게 이곳 저곳을 느릿느릿 돌아다니는 새로운 여행 방법을 알게 됩니다. 한강에서 이렇게 작은 자전거를 만나면 보통 가볍게 짧은 거리를 탈 것 같은 분들이 타고 계시기도 했지만 일단 자전거를 싣고 수도권에서 한참 떨어진 장소로 이동하고 나면 갑자기 다들 눈빛이 바뀌며 자전거로 달릴 수 있는 큰 도로를 용감하게 달려 보통 큰 자전거들도 잘 찾아오지 않는 높다란 언덕을 올라 다니며 언덕 꼭대기에 있던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기도 했는데 그런 눈빛을 받을 때마다 나름 우쭐한 기분도 들었습니다.

이 자전거는 오래 전에 영국에서 처음 만들었는데 처음에는 지금처럼 세련된 모양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작게 접을 수 있는 메커닉은 지금과 거의 같았고 자잘한 수정이 이루어지며 현대에 다다랐고 오래 전에 특허 기간이 만료되어 지금은 여러 회사에서 접히는 메커닉이 이와 동일한 여러 자전거를 만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처음 이 자전거를 만들었던 영국의 본사 역시 계속해서 자전거를 수정, 보완하고 또 강력한 고급화 전략을 통해 누구나 똑같은 자전거를 만들어낼 수 있지만 여전히 나름의 입지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특히 이 자전거에서 마음에 드는 점은 여러 부품을 정말 고집스러울 정도로 잘 바꾸지 않는다는 점인데 오랜 세월에 걸쳐 수정 보완을 거듭하고 또 고급화 전략에 따라 신제품을 생산하면서도 여간해서는 최신 트렌드를 거의 반영하지 않는 것으로 악명이 높습니다. 오래 전 처음 도입한 내장 허브기어는 척박한 환경에서 장거리 주행을 할 때도 신뢰할 수 있게 동작하지만 그 무게나 동력 손실을 고려하면 현대에는 더 나은 선택지들이 있지만 여전히 똑같은 방식을 고집합니다. 또 프레임 자체를 회전 시켜 접는 방식은 이 프레임이 펼쳐진 상태로 강한 힘을 받더라도 프레임이 다시 접히지 않도록 만드는 굉장히 투박한 클램프 고정 메커닉을 사용하는데 이 역시 현대에는 원터치 방식에 비슷한 신뢰성을 유지할 수 있을 법한 방법들이 있지만 고지식할 정도로 오래된 신뢰할 수 있는 방법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어떤 사람들은 서드 파티 제품으로 몇몇 부품을 변경하기도 했는데 이들은 편리하고 아름답지만 함께 장거리 라이딩을 나가면 여지 없이 문제를 일으켜 우리 모두의 일정을 망치는 주범이기도 합니다.

고지식할 정도로 핵심 메커닉을 거의 바꾸지 않아 고객들로부터 불만을 듣지만 이들은 모든 부품을 직접 생산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이 회사의 웹사이트에는 모든 자전거를 런던에 있는 공장에서 사람이 직접 조립해 완성한다고 광고하고 있는데 물론 최종 조립 공정은 그런 것 같지만 이 자전거를 구성하는 여러 부품은 각기 다른 회사로부터 납품 받는 것 같아 보입니다. 가령 앞서 소개한 내장 허브 기어는 100년 전 이 변속 메커닉을 발명한 회사로부터 납품 받고 있고 타이어, 브레이크, 브레이크 레버 등 서로 다른 여러 가지 부품을 여러 회사들로부터 납품 받고 있습니다. 물론 이 접히는 자전거의 핵심인 프레임과 이를 고정하는 메커닉은 런던 공장에서 직접 사람이 만들어 완성되고 처음 이 자전거가 세계 전역으로 떠날 때 그 출발지는 런던 공장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자전거를 볼 때 굉장히 마음에 안 드는 점은 누구나 이 자전거의 접히는 모양을 보고 이 자전거의 이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상징적인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전거를 구성하는 각각의 부품에 자전거 브랜드 이름이 빠짐 없이 적혀 있다는 점입니다. 프레임에 가장 크게 이름이 적혀 있는 것으로 시작해 기어를 붙들고 있는 작은 부품, 브레이크 레버, 변속 레버의 플라스틱 하우징, 안장, 케이블 하우징 등등 수없이 많은 부품에 아주 작게라도 자전거 브랜드 이름이 적혀 있었고 여기에 한 번 신경이 쓰이고 나면 자전거 전체가 구석구석 브랜드 이름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아 좀 불편하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자전거는 이 글을 쓰는 서기 2024년으로부터 대략 50여년 전에 처음 만들어졌고 전 세계적으로 판매되며 그 상징성 덕분에 런던 올림픽에 다른 영국이 만들어낸 여러 가지 상징적인 물건들과 함께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특허가 만료되어 여러 회사들이 같은 메커닉으로 접히는 비슷한 자전거를 만들지만 여전히 그렇게 만들어진 여러 자전거들의 근본을 부르는 이름으로 사용되고 앞서 소개한 고급화 전략을 통해 여전히 미니벨로 시장에 강력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을 뿐 아니라 여간해서는 검증된 메커닉을 잘 바꾸지 않는 강력한 신뢰성 덕분에 미니벨로를 사고 싶다는 분들께 이 자전거 이외에는 여간해서 잘 추천하지 않는 지경에 이릅니다. 개인적으로 이 자전거로 한번에 수 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리를 연속으로 주행하기도 하고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에 온갖 유명하고 높은 오르막을 올라 다니고 또 그 오르막으로부터 안전하게 내려오며 낮과 밤 가리지 않고 또 비 오는 날 포장 상태가 어설픈 도로라도 문제 없이 달리며 그 신뢰성을 입증한 덕분에 요즘 세상에도 런던 공장 단 한 곳에서 사람이 직접 만드는 어처구니 없는 제조 방식을 고집한 덕분에 비싼 가격을 유지하지만 안전하게 탈 수 있는 좋은 미니벨로를 추천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이 자전거 이외의 선택지를 생각해내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 자전거 구석구석을 뜯어볼 때마다 온갖 곳에 적힌 자전거 브랜드 이름은 마치 제품 전체에 제품 이름을 크게 적어 둔 흉측한 의류나 가방 같은 느낌이 들어 영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한편 게임을 만들다 보면 프로젝트에 온갖 사람들이 모인 덕분에 같은 게임을 만드는 사람들이라도 저마다 게임에 바라는 점이 서로 다른 경우가 흔합니다. 우리들은 회사가 시키는 대로 시장에 널린 흔해 빠진 리니지라이크 모바일 MMO 게임을 개발하고 있으면서도 누군가는 갑자기 자신이 집에서 즐겁게 플레이 한 엘든링의 액션 전투를 생각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 항상 자동 사냥을 돌려 놓는 린엠의 공성전을 생각하고 있으며 또 다른 누군가 역시 집에서 즐겁게 플레이 했을 것 같은 너티독에서 만든 컷씬으로 가득한 내러티브를 상상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한 게임을 개발할 때 누군가 중심을 잡고 강력하게 각자의 생각과 욕망을 통제하지 않으면 개발에 참여한 각자는 같은 요구사항을 수행할 때도 자신의 요구사항을 조금씩 밀어 넣곤 하는데 이는 종종 재미있는 결과를 만들고 또 회사에서 일하면서도 각자의 욕구를 조금씩 충족할 수 있어 개발을 즐겁게 만들어 주기도 하지만 종종 게임의 나머지 부분이 지향하는 바와 어긋나 이상한 결과를 만들면서도 그 원인을 찾기 어렵게 만들기도 합니다. 가령 성장을 통한 경쟁 메커닉은 고개들 간에 아주 작은 스테이터스의 차이에 의한 결과의 차이로 드러나도록 설계했으면서도 성장을 위해 수행해야 하는 전투 또는 코어 메커닉은 자동사냥을 지양하는 게임 본연의 재미에 집중한 뭔가를 만들면 분명 PvE에서는 그럭저럭 액션 전투가 동작했을른지도 모르지만 이를 거친 고객들을 PvP에 노출시키자마자 액션을 통해 상상한 것과 스테이터스 증가를 통해 상상한 결과 사이에 큰 오차가 발생하며 게임이 성립하지 않게 됩니다.

이런 사실을 개발하는 도중 깨닫는다면 수습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있을지도 모른다고 표현한 이유는 이미 그렇게 개발 되었다면 상황을 강력하게 통제해야 할 누군가가 제대로 동작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수습하기 어려울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종종 제작 중인 게임을 소개하는 높은 분들의 인터뷰 기사를 읽을 때가 있는데 여기서 앞서 소개한 앞뒤가 맞지 않는 소개를 읽을 때만 한숨이 나오고 이 집 이제 어떻게 하나 싶은 걱정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제가 걱정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지는 않기 때문에 잠깐 동안 걱정하지만 바로 걱정으로부터 벗어나 제가 해결할 일에 대한 또 다른 걱정으로 전환할 뿐입니다. 만약 리니지라이크 장르를 개발하기로 했다면 처음부터 대놓고 엔씨소프트로부터 소송 당할 각오를 하고 개발해야 합니다. 자동 사냥을 강하게 지향하고 이를 편안하게 만드는 여러 보조 장치를 도입하며 인터페이스를 설계할 때 구성요소의 올바름을 평가하는 단 한 가지 기준을 강력하게 적용해야 합니다. 또 누군가 게임 본연의 재미에 집중하기 위해 조작을 통한 액션 전투를 넣어야 한다고 말하는 순간 바로 크리스탈 재떨이를 집어 던져 다시는 그런 멍청한 소리를 하지 못하게 만들어야만 합니다. 비록 고객들에게 욕을 먹고 또 자칫 엔씨소프트로부터 전화를 받거나 귀사의 건승을 비는 내용증명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올바르게 동작하는 게임을 개발할 수는 있을 겁니다.

이전에 경험한 어떤 사례에서는 우리가 만들고 있는 게임의 특징을 깊이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강력한 통제의 부재를 틈 타 이상한 요구사항을 남발해 프로젝트 전체에 깊은 타격을 입혔습니다. 우리는 온라인 환경에서 동작하는 멀티플레이 롤플레잉 게임을 개발하고 있었습니다. 그냥 짧게 표현하면 MMO 게임을 만드는 중이었습니다. 현대에는 이 장르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과 그 결과들이 존재하지만 근본적으로 이 장르의 핵심은 여러 플레이어들이 퍼시스턴트 월드에서 서로의 행동과 그 결과를 공유하며 만들어내는 창발적인 플레이입니다. 이 세계에서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세계에 있으며 내가 어떤 행동을 하면 주변에 이 행동이 전파되어 행동에 의한 결과가 주변의 모두에게 전달됩니다. 가령 지금은 이 주변에 있는 그 누구도 잡을 수 없는 강력한 괴물은 다들 그 존재를 알지만 함부로 건드리지 않고 주변을 조심스럽게 돌아다니며 필요하지 않은 불가능한 전투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누군가 눈치 없이 괴물의 주의를 끌어 이를 모든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소 까지 끌고 오면 괴물이 힘 없는 여러 사람들을 그 자리에서 시체로 만들고 이 괴물을 다시 원래 자리로 돌려 보내거나 괴물을 처치하려는 사람들이 몰려와 난장판을 만듭니다. 현대에는 플레이어들이 처치하기 어려운 괴물을 퍼시스턴트 월드에 잘 등장 시키지 않고 또 다른 플레이어들의 경험을 방해하는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강력한 괴물은 인스턴스 월드에 제한적으로 등장 시키는 추세이지만 초기 MMO 게임들은 이런 현대에 잘 사용하지 않는 장치를 통해 다양한 상황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내곤 했습니다.

이런 게임을 만들기 위해 신경 써야 하는 것은 일단 빠질 수 없는 전투 또는 코어 메커닉, 그리고 이 코어 메커닉을 뒷받침하는 세계와 세계의 구성원, 혹은 괴물들, 그리고 플레이어들이 같은 공간에서 상호작용함에 따라 일어나는 다양한 경험을 만들어내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가령 방금 설명한 아무도 처치할 수 없는 강력한 괴물이 퍼시스턴트 월드 구석을 어슬렁 거리고 있어 이 괴물의 주의를 끌지 않도록 조심하도록 만드는 식으로 같은 공간에서 같은 경험을 공유하는 환경에서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데 집중해야 합니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 이 게임은 고객에게 스토리를 전달하는데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하면 이상한 일이 시작됩니다. 일단 이 세계는 모든 사람들이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어 누군가에게 개인화된 다른 경험을 제공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스토리 진행에 따라 반드시 만나야 하는 NPC는 평소에 마을에 나타나지 않지만 스토리 진행에 따라 특정 플레이어에게만 나타나야 하는데 이 요구사항을 만족하려고 시도하는 순간부터 퍼시스턴트 월드에서 모두가 경험을 공유하는 MMO의 근본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한동안은 퍼시스턴트 월드에서는 서로 스토리 진행 수준이 다른 고객들이 영향을 주고 받지 않도록 스토리 진행은 마을에 있는 모두에게 동일하게 보이는 NPC가 서로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서로 다른 말을 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곤 했지만 MMO 게임에서 개인화된 경험을 제공하기로 한 이상 이 정도 수준으로는 고객들 뿐 아니라 개발하는 우리들 스스로를 만족시키기도 어렵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개인화된 핵심 경험은 인스턴스 월드에서 진행 시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개인화된 강력한 경험을 제공하기 시작했고 게임에 따라서는 퍼시스턴트 월드에서도 유사한 시도를 하기 시작했으며 망할 놈의 불타는 마을에서 소개한 것과 같은 퍼시스턴트 월드 자체를 대신하는 개인화된 인스턴스 월드를 제공하고 또 월드 레벨 개념을 도입해 진행에 따라 지리적으로는 같은 공간에 있지만 서로 분리된 공간에서 다른 경험을 하도록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여러 가지 시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들이 개발하고 있는 게임은 근본적으로 MMO 게임이고 이 단어를 풀어서 쓰면 매시브 멀티플레이 온라인, 즉 퍼시스턴트 월드에서 플레이어들이 서로의 경험과 행동에 의한 결과를 공유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비해 개인화된 경험을 더 적극적으로 제공하면서도 그 경험이 끝나면 던전 입구로 돌아와 다른 플레이어들과 만나게 하고 마을에 진입하면 서로 성장 수준, 진행 정도가 서로 다른 다양한 플레이어들과 마주치게 만들며 외형으로부터 게임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된 사람과 고인물을 구분할 수 있게 만들기도 하고 레벨업을 위해 바쁘게 이곳 저곳을 뛰어 다니는 사람들을 보여주기도 하는 반면 어지간한 컨텐츠를 이미 질리도록 플레이 해 이 무거운 게임 클라이언트를 그저 채팅 클라이언트로 활용하며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플레이어들도 섞여 있게 만듭니다. 만약 우리들이 멀티플레이 온라인 게임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면 굳이 우리들의 모든 행동을 동기화하고 행동의 정당성을 판정하는 서버를 거치는 복잡한 구성을 만들 이유가 없습니다. 그저 로컬에서 동작하는 클라이언트를 통해 완벽하게 개인화된 세계와 완벽하게 개인화된 최상의 경험을 제공하는데 오롯이 집중할 수 있습니다.

자. 이렇게 MMO 게임을 만드는 팀에서 누군가 우리들의 목표를 정의하고 각자의 욕망을 강력하게 통제하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고 이야기했는데 그 중 종종 일어나는 일은 우리가 만드는 게임이 싱글플레이 게임이고 또 너티독에서 주로 만드는 선형 진행과 강력한 내러티브를 통반한 게임이라고 착각한 나머지 이를 달성하기 위한 요구사항을 개발 계획에 포함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들이 만드는 퍼시스턴트 월드의 경험을 망할놈의 ‘야생의 숨결’과 비교하며 멀티플레이 속성을 완전히 무시한 채 자신의 경험을 게임 전체에 녹이려는 시도를 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문제를 일으킵니다. 일단 우리들은 소니 퍼스트 파티가 아니어서 너티독 게임의 스탭롤에 등장하는 거의 세 자리 수에 가까운 외주사들에게 끝없는 반복 수정 작업을 시킬 만한 예산이 없고 만약 그럴 예산이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한 번 플레이하고 끝내는 게임을 개발하기에는 우리들이 마주한 시장이 적절하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들이 더 큰 배후 시장이 존재하는 언어권에서 태어났다면 우리들도 그런 게임을 만들어낼 수 있었겠지만 우리들이 처한 상황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들은 비용을 줄이기 위해 서기 2024년에도 캐릭터들이 30년도 넘은 네모난 상자에 캐릭터 이름이 표시되는 인터페이스 안에 자기 대사를 말하지만 이 대사가 사람들에게 잘 전달되기를 원하므로 대사를 건너 뛸 수 있게 해야 할 지 여부를 요즘 세상에도 고민하고 앉았습니다. 또 그런 기나긴 텍스트를 읽게 만드는 동안 멀티플레이 환경에서 개인화된 경험과 그 주변의 나머지 플레이어들의 경험을 정리하기 위한 온갖 이상한 규칙이 필요해집니다.

이런 게임에 맞지 않는 개인화된 경험과 멀티플레이 환경의 충돌이 가장 흔하게 일어나는 사례는 플레이를 멈춘 채 재생하는 컷씬인데 분명 싱글플레이 게임에서 잘 동작했던 거대 보스의 멋진 등장 연출은 멀티플레이 온라인 환경에서 이상한 문제를 만듭니다. 별 생각 없이 컷씬을 건너 뛸 수 있게 만들었더니 컷씬을 끝까지 보고 나서 다음으로 진행하자 이미 성질 급한 사람들이 컷씬을 건너 뛴 다음 전투를 시작해 벌써 보스 체력이 절반 이상 깎여 플레이가 얼마 안 남은 상황일 수도 있고 또 이미 움직이기 시작한 보스에게 무방비하게 공격 당해 원하지 않게 컷씬이 끝나고 보니 내 캐릭터는 이미 바닥에 누워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완화하기 위해 컷씬을 보는 동안에는 캐릭터를 죽지 않게 만들고 또 모든 파티 구성원이 컷씬을 건너뛰지 않으면 컷씬이 종료되지 않도록 만들기도 합니다. 분명 문제를 완화할 수 있겠지만 이번에도 성질 급한 사람들이 컷씬을 건너뛰지 않는 누군가를 비난해 컷씬을 끝까지 보기를 원하는 다른 고객에게 나쁜 경험을 줄 수도 있습니다. 또 컷씬을 보는 동안 죽지 않는다는 설정은 조금만 실수하면 컷씬을 보는 상태를 이용한 어뷰징을 가능하게 만들 수도 있는데 가까이 가서 상호작용 하면 주변의 멋진 경관을 보여주는 컷씬을 재생하는 뷰포인트가 있을 때 몬스터에게 신나게 쳐 맞다가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어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그 순간 뷰포인트와 재빨리 상호작용 해 전투 상태로부터 벗어나 체력을 회복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규칙은 우리들이 시행착오를 겪으며 점점 더 정교해지고 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멀티플레이 온라인 환경에서 플레이어 개개인에게 개인화된 내러티브를 전달하는 요구사항은 게임 장르와 잘 어울리지 않으며 이들을 잘 어울리게 만들기 위해서는 보다 적극적이고 또 본격적인 연구가 필요합니다.

게임디자이너가 처음 나타난 지 30년도 넘은 텍스트박스 안에 대사를 표시하는 방식으로 내러티브를 전달하려고 할 때 대사를 건너뛰는 기능, 선택지를 보여주고 이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하는 기능 따위를 넣고 싶어 할 때 이 기능들이 필요한 이유를 물어보면 흔히 들을 수 있는 답변이 있습니다. 대사를 건너뛰는 기능을 만들지 않으면 고객들이 대사를 조금이라도 읽어볼 테니 이를 위해서라는 답변, 그리고 중간에 선택지를 넣는다면 선택지에 답하기 위해 대사를 읽어보거나 무지성 건너뛰기를 시전하더라도 선택지에 멈추면 그나마 이 선택지라도 읽어보며 상황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인데요, 주니어님들로부터 이런 답변을 듣는다면 개인적인 경험에 대해 질문하며 이야기를 이어 나갈 수 있습니다. 가령 실제로 대사 건너뛰기 기능과 스토리에 영향을 주지 않는 선택지가 있는 게임에서 대사를 건너뛰다가 선택지를 만날 때 어떻게 행동하고 또 어떤 느낌을 받는지 물어보면 되는데 현대인들 중 극 소수만이 책이나 글을 읽기 때문에 대부분은 겉으로는 자신들이 작성하는 스토리를 사람들이 읽어주기를 바라지만 정작 그들 스스로도 글을 읽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이들 역시 건너뛰기 기능을 애용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건너뛰기 기능을 사용하며 하는 기대는 이 지루한 텍스트로 가득한 대사를 건너뛰고 다음 이어지는 플레이로 복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 건너뛰기 대신 선택지에서 멈춰 대사를 선택할 것을 요구 받으면 고객은 일단 이전 대사들을 건너뛰었으므로 선택지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 다음 플레이로 복귀할 수 있을 거라는 예상을 벗어났기 때문에 당황하거나 짜증을 낼 겁니다. 이게 현실이고 또 우리가 만드는 장르의 특징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만약 원하는 바를 달성하고 싶으면 싱글플레이 게임을 만들거나 먼 과거로 돌아가 일본식 텍스트 어드벤처를 개발하며 수많은 선택지와 수많은 멀티 엔딩을 포함한 게임을 만들어야만 할 거라고 이야기하고 대화를 끝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가 주니어가 아니라면 상황은 많이 달라지는데 이미 이들은 자신이 수 십 년 전에 플레이 했던 텍스트 어드벤처의 향수를 지울 수가 없습니다. 수많은 대사, 대사들 사이사이에 걸친 선택지와 이들 중 일부 선택지는 진행에 큰 영향을 끼쳐 돌이킬 수 없는 충격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만들기도 했는데 이런 경험은 텍스트에 집중한 여러 플레이어들의 뇌리에 강렬한 흔적을 남겼을 것입니다. 그렇다 보니 시대가 변하고 각각의 경험을 만드는데 훨씬 높은 비용을 요구 받는 현대에도 여전히 아주 적은 그래픽 에셋과 수많은 텍스트만으로 게임을 완성해낼 수 있었던 시대에 생각이 멈춰 고객들이 텍스트를 읽고 선택지에 집중할 거라고 예상하고 이에 맞는 규칙을 멀티플레이 온라인 게임에 집어넣으려고 하며 사실 이런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들은 이미 자신들이 내러티브를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써 아주 적은 그래픽 에셋과 텍스트 뿐 아니라 현대적인 컷씬과 보이스를 제작하는데 매우 높은 비용이 소요되며 의미 있는 선택과 분기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핵심적이지 않은 요소에 높은 비용을 소모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애써 이를 외면하는 경향이 있어 보입니다. 덕분에 회사에는 분기가 없는 스토리를 전달하기 위한 컷씬과 이를 뒷받침하는 보이스를 제작하는데 비용을 소모할 작정이라고 말하고 실제로 이렇게 행동하지만 여전히 대사를 건너뛸 지 말 지를 개발자가 결정하게 만드는 옵션을 넣어야 한다든지 대사 이미 분기 없는 컷씬을 만들었으면서도 스토리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도 못하는 선택과 분기를 넣어 건너뛰기 기능을 무력화하고 고객의 예상을 망가뜨리는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합니다. 설득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기에 최대한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GDC 세션에 그 이름이 발견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그의 말을 듣고 또 멋진 말을 남겼으며 2024년 여름 현재 최근 카메라 앞에서 손가락 일곱 개를 펴 보이며 신작의 존재를 공개한 전설적인 한 개발자는 게임이란 의미 있는 선택의 연속이라는 멋지고 의미 있으며 유명한 말을 남긴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고객이 게임을 통해 경험하며 내린 결정과 선택이 실제로 그 자신에게 의미 있는 결과로 다가올 때 비로소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리부트 된 엑스컴에서 초반에 시설을 효율적이지 않은 구성으로 배치하면 이 결정은 게임 후반으로 갈수록 두고두고 고객을 고통 받게 만들며 깊은 교훈을 주어 다음 번 플레이 때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만듭니다. 2천년대 초반에 출시된 메탈기어솔리드 3은 병사들을 함부로 사살하며 플레이 하면 나중에 마주치는 특정 보스가 그 동안 죽였던 병사들을 모두 등장 시켜 플레이를 아주 고통스럽게 만들어 이전에 함부로 병사들을 죽여 온 플레이를 후회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최근 플레이 한 벌더스게이트 3은 플레이어의 직업, 강함의 정도, 전투, 대화의 선택 따위에 따라 특정 인물을 마주치기도 하고 마주치지 않기도 하며 게임 전체에 걸쳐 다양한 결과와 마주칠 수 있습니다. 이들이 이런 의미 있는 선택과 그 결과를 제시해 고객들에게 강렬한 경험을 줄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시대에 맞는 예산, 각자의 장르에 맞는 방식을 선택해 실제로 의미 있는 선택과 결과를 만들어냈기 때문입니다. 결코 어울리지 않는 멀티플레이 온라인 장르에 오래된 텍스트 어드벤처에 기반한 인터페이스를 붙이고 예산 제한 때문에 만들 수도 없는 선택에 따른 다양한 스토리와 퍼시스턴트 월드에 의한 개인화 가능성 제한 따위를 고려하지 않은 제안은 실현 불가능할 뿐 아니라 이를 실현하려고 함에 다라 개발팀에 큰 부하를 일으켜 프로젝트에 실패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여기까지 설득해도 끈질기게 그래도 진행에 아무 영향을 주지 않는, 기껏해야 조금 다른 대사를 읽을 수 있을 뿐인 선택지를 유지하기 위해 줄기차게 노력하기도 하는데 이런 선택의 존재는 마치 맨 처음에 이야기한 어떤 자전거가 자전거를 구성한 온갖 부품 하나하나에 자전거 브랜드 이름이 적혀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그 자전거는 프레임에 적힌 커다란 이름 하나만으로도 이미 그 자전거라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습니다. 안장이나 변속기나 브레이크 레버에 이름이 적혀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선택에 의미가 없다면 그 선택은 존재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사 도중 선택지를 위해 건너뛰기 기능을 의도적으로 망가뜨리면 고객들은 대사에 집중하는 대신 짜증을 내며 아무 말이나 선택하고 다시 건너뛰기를 반복할 뿐입니다. 의미가 없는 선택이라면 존재할 필요가 없으며 억지로 선택을 포함하고 또 이를 지탱하기 위한 멀티플레이 온라인 게임에 어울리지 않는 장치와 규칙을 집어넣기를 반복하다 보면 결국 텍스트를 읽으려는 고객들과 이를 회피하려는 고객들 양쪽 모두를 만족 시키지 못하면서 비용은 비용 대로 소모하고 이들을 지탱하는 여러 규칙을 개발하는데 비용을 낭비하게 될 뿐이며 근본적으로 이런 선택들은 자전거에 수없이 붙은 브랜드 이름처럼 선택이 있을 뿐 그 결과에 따른 의미가 없습니다.

수 십 년 전 어떤 장르에서는 분명 선택지에 큰 의미가 있었고 이를 구성하는 텍스트 역시 내러티브를 전달하는 거의 유일한 수단으로써 의미를 가졌습니다. 그 시대에 이런 장치는 분명 의미 있는 선택을 만들어냈고 그 결과는 고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을 겁니다. 이 사실을 결코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현대에는, 그리고 우리들이 개발하는 장르에 기반해서는 그런 경험을 재현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런 경험은 유효하고 분명 존재했으며 재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게임의 장르, 내러티브 전달 방식 등에 깊은 고민을 통한 설계가 동반되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은 채 억지로 텍스트 어드벤처의 향수를 멀티플레이 온라인 게임에 밀어넣으려고 하는 시도는 프로젝트를 망가뜨리고 회사에 큰 피해를 입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