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해상도로 읽은 책 죽음의 청기사

높은 해상도로 읽은 책 죽음의 청기사

죽음의 청기사를 읽었습니다. 이 책은 한참 전에 겨울서점에서 소개하는 영상을 보고 읽을 책 목록에 올려놓기는 했지만 다른 책 읽느라, 또 다른 게임 하느라, 또 일하느라 시간을 못 내는 사이에 시간이 많이 흘러 버립니다. 지방에 내려갈 일이 있어 기차를 탈 일이 있었는데 이 때다 싶어 죽음의 청기사를 읽기 시작했고 너무나 재미있어 적은 분량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전자책으로 읽으면 책 두께를 통한 분량 인식을 할 수가 없음.) 순식간에 읽고 목적지 역에 도착할 즈음에는 책을 내려놓고 이게 대체 무슨 이야기였나 하며 생각에 빠졌습니다.

지난 몇 년에 걸쳐 인류는 코비드를 겪으며 다시 한 번 많은 사람들이 감염되고 사망하고 또 일부는 장기적은 후유증을 안고 살아가게 됐습니다. 한편 이 문장을 타이핑 하고 있는 2023년 늦은 봄 기준으로는 출퇴근 지하철에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이 더 많고 그 모습이 정부에서 발표한 가이드라인에 맞는 모습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지난 몇 년 사이에 마스크는 거의 신체의 일부가 되어 집 안이 아니면 여전히 대부분의 장소에서 마스크를 쓰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밥 먹을 때, 차 마실 때는 이전처럼 마스크를 안 쓴 상태가 걱정스럽고 또 불편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껏해야 100년 정도 지난 과거에 공기를 통해 전염되는 전 세계적인 감염병 사례가 있었고 코비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영향을 받았으며 작은 비약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이후 인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이야기를 마스크를 쓴 채 여러 사람이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는 기차 안에 앉아 읽고 있으니 묘하게 오싹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흥미로웠던 지점은 이 책의 서술 방식인데 마치 글쓴이가 지구 밖에서 시계를 돌려 어느 시간대를 설정한 다음 지구 곳곳을 훑으며 같은 시간대에 세계 각지에서 무슨 일들이 일어났고 그 일들이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 받았는지 설명하는 방식이 너무나 매력적입니다. 지난 역사를 통해 인류가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가면서 세계 전체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빠른 교통수단의 발명을 통해 지구의 서로 다른 지점에 살며 이전에는 상호작용 하지 않았을 사람들이 서로 상호작용 하게 되는 상황에서 한 시간대에 지구 전체에 걸친 사건을 설명하는 방식은 마치 머릿속에 우주에서 본 지구의 모습을 떠올린 다음 책에서 비추는 작은 지역까지 확대해 그 안에서 일어난 일을 읽고 또 지구를 돌려 다른 지역에서 동시에 일어난 일을 읽으며 이들이 서로 지역과 시간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상호작용한 결과라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런 설명 방식이 매력적일 뿐 아니라 스페인 독감이 전 세계에, 그리고 전 인류에 미친 영향을 설명하기에 적합한 방법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한편 이 책은 그렇게 범 지구 적인 관점에서 사건과 이들의 상호작용을 설명하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때에 따라서는 범 지구 적인 관점에서 어느 한 국가, 어느 한 도시, 어느 한 가정, 어느 한 개인의 일상까지 한번에 줌인 해 스페인 독감이 어떤 시대의 어떤 지역에 미친 사회적인 영향과 이로 인한 개인들의 경험, 그리고 그런 개인들이 모여 다시 사회를 이루고 그 사회가 변해 가는 과정을 서술하기도 해 지구 바깥에서 내려다 본 지구 표면과 거시적인 상호작용만으로는 놓치기 쉬운 개인의 경험, 사회의 경험을 함께 설명하고 있습니다.

범 지구적인 감염병은 분명 범 지구적인 스케일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하지만 그 지구를 구성하는 인류는 인류라는 한 덩어리가 아니라 인류를 구성하는 개개인으로써 감염병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런 개개인의 경험과 그 경험이 거시적인 사건의 일부였을 수 있음을 서로 연결하는 순간 스페인 독감이라는 거대한 사건이 지구 전체와 인류의 각 구성원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책의 설명으로부터 벗어나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또 나름의 역사와 지리적인 상식을 강화하는데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최근에 유튜브 알고리즘의 점지를 받아 의학의 역사 시리즈 영상을 너무나 재미있게 보고 있었습니다. 인류가 현대적인 질병에 대한 대응 방식, 치료 방법, 질병을 정의하는 방법이 과거로부터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재미있는 설명을 통해 빠른 시간 안에 파악하는 경험은 즐겁다는 말 이외로는 잘 표현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분명 병을 일으키는 뭔가가 물을 통해 전염되는 것 같다는 관찰 결과에도 불구하고 ‘아닌 것 같은데? 냄새 때문인 것 같은데??’ 라고 기존 의학계나 사회의 불신을 재미있게 표현하는 방법에 빠져 한동안 이 시리즈를 몰아서 본 덕분에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있을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우리가 현대에 상처를 소독하고 밴드를 붙이는 간단한 수준의 처치나 여러 흔한 질병에 대응하는 방법을 발견하고 또 발명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으며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영상을 보며 그런 즐거운 경험을 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음의 청기사를 읽게 되면서 책에 등장하는 여러 범 지구 적 사건을 접하며 그 사이사이에 의학의 역사 영상으로부터 본 디테일이 추가되며 책에서 설명한 사건의 해상도를 높이는 경험을 했습니다. 책으로부터 1900년대 초에 전 지구에 걸쳐 감염병이 퍼지는 이야기를 읽을 때영상으로부터 본 그 시대의 지역 별 의료 수준을 겹쳐 보면 책에서 설명하는 여러 사건이 왜 그렇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는지 더 빨리 이해하고 또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으며 이 과정 역시 책을 단독으로 읽었다면 느끼기 어려웠을 지도 모르는 신나고 또 즐거운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런 이야기에 흥미가 있는 분이라면 이 모든 이야기가 실화라는 점을 잠깐 잊으면 이 모든 사건과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에도 영향을 주는 이 모든 이야기를 즐겁고 신나게 읽을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이 모든 이야기가 실화이며 그로 인해 지금 제가 살아가는 이 현대의 모습에 큰 영향을 주었음을 다시 생각해 보면 오싹하기도 하지만요. 또한 우연한 시점에 접한 서로 다른 두 가지 미디어가 합쳐져 서로의 해상도를 올려 어느 한 쪽이 없었더라면 할 수 없었을 훨씬 더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