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차 프리젠터의 프리젠테이션 강좌
자동차 관련 유튜브 채널이라고 생각한 곳에 갑자기 프리젠테이션 강좌 영상이 올라왔습니다!
종종 여러 사람들 앞에서 말해야 할 일이 일어납니다. 학교 다닐 때는 그저 같은 강의실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 정도도 쉽지 않았습니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말하기 위해 무슨 준비를 해야 할지 알지도 못했고 또 정작 무슨 말을 할 작정인지도 확실하지 않을 때가 많았습니다. 교사는 준비한 자기 생각을 설명하듯 이야기하면 된다고 이야기했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 때는 자기 생각이라는 것 자체가 잘 형성되지 않은 상태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제 생각이 아닌 적당히 발표를 위해 만들어낸 생각을 별다른 준비 없이 여러 사람들 앞에 나가서 이야기하려고 하면 제 생각도 아니고 저에게 와 닿지도 않으며 딱히 진실에 가깝지도 않은 이야기를 하려고 보니 이를 거의 외우다시피 하지 않으면 보통 이야기할 수가 없었고 이런 발표는 항상 실패해 왔습니다.
학교 다닐 때 도 단위에서 진행하는 비즈니스 아이디어 공모전 비슷한 행사가 있었는데 여기 대충 문서를 만들어 냈더니 이를 심사위원들 앞에서 발표하라는 연락을 받았는데 지금까지는 문서를 만들어 제출하면 그걸로 선발해 다음 단계로 진행하거나 탈락하거나 할 줄만 알았지 이걸 발표하게 할 작정이라는 말을 듣지 못해 상당히 당황했습니다. 발표가 끼어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어쩌면 이 행사 또는 공모전을 무시했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아이디어를 낸 본인이 나가서 발표해야 했고 어느 날 오전 학교 건물 1층의 심사위원들이 모인 어느 방에 들어가 자기소개를 하고 그 시대의 기술로는 거의 달성하기 불가능하며 현대 기술 관점에서는 크게 어렵지 않지만 의미는 없을 법한 의류 산업에 정보기술을 접목한 비즈니스 아이디어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다른 발표가 포함된 수업 때는 보통 ‘제 생각’이 명확하지 않은 채로 말을 시작해야 할 때가 대부분이어서 도통 말하기 어려웠지만 이 때는 다행히 제출한 문서 전체를 제가 작성한 덕분에 그게 말이 되든 안 되든 제 생각을 말할 수 있어 그럭저럭 발표를 완전히 망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결국 무슨 상장 쪼가리를 받았는데 딱히 의미 있을 것 같지 않아 아무데나 처박아 놨다가 이사를 반복하며 결국 사라졌습니다.
일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해야 하는 자리가 아니더라도 아주 자잘한 일종의 마이크로 스피치를 할 기회가 하루에도 몇 번 씩 생겼습니다. 처음에는 그런 설명을 스피치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나중에 찬찬히 생각해보니 그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일에 관련된 주제를 설명하고 제 생각을 이야기하고 때로는 설득하고 근거를 제시하고 더 잘 설명해줄 사람을 데려오고 필요한 자료를 재빨리 찾아 보여주는 일련의 과정은 이야기 하는 대상 수가 적을 뿐 흔히 말하는 스피치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문득 느끼게 됩니다. 그렇게 그럭저럭 일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큰 회사에서 수강한 프리젠테이션 수업 끄트머리에 나가서 하던 발표 때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며 익숙한 감각으로 발표를 완전히 말아 먹고 나서 강사님이 제 문제를 설명해 주었을 때 그 설명과 관계 없이 이번에도 제 생각을 말하려 하지 않고 그 수업 시간에 급조한 문장을 말하려다 보니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강사님은 앞으로도 회사에 초빙 되어 강의를 해야 했기에 수강한 사람들 전원을 통과 처리 해 주었지만 이 날의 제 모습을 생각하면 통과 처리는 올바른 평가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 수업에서 머릿속이 하얗게 된 것과는 별개로 점차 말하는 저와 그 말하는 저를 보고 어처구니 없어 하는 저로 자아가 분리되어 말에 서투른 저는 말하는 저를 마음 속에서 바라보며 당황하곤 했고 말하기에 딱히 불편하지 않게 됩니다.
이제 적은 사람들 앞에서 말하거나 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할 때, 그리고 저에게 호의적인 사람들 앞에서 말하거나 적대적인 사람들 앞에서 말할 때에 따라 대략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포함해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데 이전만큼 큰 부담을 가지지 않게 됩니다. 짧지는 않은 기간에 걸쳐 말할 일이 많아 연습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이전과 달리 제가 하는 말에 거의 대부분은 그 자리에서 만들어낸 가짜 생각이 아니라 이전에 미리 생각해 둔 진짜 제 생각을 이야기하고 있어 말할 내용 전체를 미리 외워 둘 필요가 없어 말하기 훨씬 쉬웠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또 말의 종류에 따라 설명하는 말하기나 설득하는 말하기, 또 호의적인 사람에게 말하기, 그리고 적대적인 사람이나 사람들에게 말하기가 서로 조금씩 다르다는 점을 이론 대신 직접 부딪쳐서 망해 보며 배웠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말하기 불편한 상대가 남아 있는데 특히 기대치와 지위가 높은 분들을 대상으로 말하는 것은 아직 연습이 부족해 상대의 기대를 완전히 박살 낼 때가 있습니다. 그 분들은 시간이 없고 또 디테일에 관심이 적을 가능성이 높으며 주제를 성과 위주로 접근할 때가 많아 보이는데 제가 지금까지 연습해온 말하기와는 완전 다른 방식이어서 열심히 실수를 반복하는 중입니다.
DRIVETRIBE 채널에 새로 올라온 Izzy Hammond drives her dad's 530bhp Grand Tour Subaru Impreza! 영상을 보다가 문득 이거야말로 26년에 걸쳐 프리젠터를 직업으로 삼고 있는 전문가 리처드 해먼드의 프리젠테이션 강좌에 가깝다는 사실을 생각해 냈습니다. 처음에는 자동차를 운전하기는 하지만 사양이나 역사에는 별 관심 없는 캐릭터와 자동차에 관심이 있고 지난 수 십 년에 걸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자동차 쇼 중 하나에 출연하며 경험을 쌓은 전문가 캐릭터가 함께 자동차 프리젠테이션을 하는 에피소드 정도로 생각합니다. 등장하는 두 캐릭터가 아버지와 딸 관계이기 때문에 나오는 특별한 캐미스트리와 한쪽은 자동차의 역사와 기술적 바탕을 잘 설명할 수 있고 또 관심이 있지만 다른 한쪽은 그렇지 않은 특징을 재미있게 그려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제목처럼 아버지의 임프레자를 운전한다는 영상 제목과 달리 영상의 많은 부분은 프리젠터를 여느 때처럼 아버지로 설정하지 않고 딸로 설정해 임프레자를 운전하기는 하지만 운전은 화면을 장식할 뿐 핵심 내용은 프리젠테이션을 하는 것입니다. 영상이 끝나기 전에 아버지의 수 십 년 동안 자동차 프리젠테이션을 해 온 노하우에 접근할 수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자동차 프리젠테이션을 하는 것이 영상의 목표입니다.
먼저 자신이 이야기할 대상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또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확립해야 합니다. 자동차 이름은 스바루 임프레자, WRX, STI, VL, 555인데 이 각각의 단어들이 의미하는 바를 파악하면 이 자동차가 만들어진 배경과 특징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처음 이 이름을 설명할 때 그냥 너무나 긴 자동차 이름을 들으며 이건 도대체 외울 수도 없겠다고 생각했고 영상에 등장하는 캐릭터 역시 같은 의견을 말합니다. 하지만 WRX는 월드 랠리 실험을 의미하고 VL은 매우 희귀한 모델이라는 의미이며 555는 랠리 자동차를 의미하는 번호라는 점을 각각 듣고 나면 자연스럽게 자동차 이름 전체를 떠올릴 수 있고 또 이 자동차가 무슨 목적으로 만들어진 자동차이며 무엇을 중심으로 설명해야 할 지 감을 잡을 수 있습니다. 또 이전 자신의 경험과 비교해 비슷한 점, 다른 점을 파악해 두면 이 역시 프리젠테이션 대상에 따라 설명 수준을 조절하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가령 이 영상의 프리젠터는 평소에 190마력의 A클래스 자동 변속 모델을 타는데 그 차와 다른 점은 일단 변속 하는 방법을 모르겠는 수동 변속 차량이고 속도가 킬로미터 단위로 표시되기 때문에 계기판에 나타난 숫자를 10으로 나눈 다음 6을 곱해야 한다거나 정면에 시야를 가리는 뭔가가 튀어나와 있기도 합니다.
이런 여러 새로운 경험은 이전에 자신의 경험과 비교해 특징 대신 차이로 인식하면 설명할 지점을 더 쉽게 짚을 수 있습니다. 가령 이치 해먼드는 아버지에게 변속 하는 방법을 물어보는데 랠리용 자동차 관점에서 이는 딱히 설명할 만한 요소가 아니지만 자동 변속 차량을 운전하는 사람 입장에서 이는 이전 경험과 차이이고 설명해야 할 주제일 수 있습니다. 한편 자동 변속 차량에서는 양 손을 스티어링 휠에 올리고 있지만 이번에는 변속을 위해 왼 손 - 영국은 오른쪽 운전이니까 - 을 내려 변속 레버를 잡아야 한다는 설명을 듣자 스티어링 휠에 양 손을 올리지 않고 있다가 자동차에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느냐는 대화를 하는데 이 역시 어쩌면 아무렇지도 않은 딱히 이야기할 주제로 느끼지 않을 수 있지만 이 역시 경험의 차이 관점에서 보면 충분히 이야기할 만한 주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험의 차이, 역사, 기술적 배경을 설명할 수 있는 상황이더라도 발표 대상을 누구로 설정하는지에 따라 내용은 크게 달라져야만 합니다. 가령 리처드 해먼드가 주로 활동하던 2천년대의 텔레비전 자동차 쇼는 자동차에 관심이 있어 역사나 기술적 배경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해 왔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의 영상을 보면 역사를 포인트로 잡아 설명하곤 했는데 이 때는 이런 접근이 의미 있었지만 이치 해먼드 입장에서 자동차의 역사는 그리 중요한 지점이 아닐 수 있습니다. 이치 해먼드의 프리젠테이션을 접할 가상의 시청자들은 리처드 해먼드가 예상한 가상의 시청자와 달리 자동차에 대한 관심이 비교적 적고 자동차의 역사나 기술적 배경에 대해서도 굳이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때문에 자동차의 역사는 확실히 건너뛰고 또 터보를 설명하는 방법 역시 완전히 다른 접근을 선택합니다. 리처드 해먼드는 그나마 쉽게 자동차는 연소실에 연료와 공기를 분사해 폭발 시켜 동력을 얻는데 이 때 공기 압력을 올려 더 큰 폭발을 만들어낸다고 꽤 쉽게 설명했지만 이 설명을 듣는 이치 해먼드 입장에서 이런 디테일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고 이는 이치 해먼드의 설명을 들을 가상의 시청자들 역시 비슷할 겁니다. 그래서 터보를 설명하는 방법으로 터보 게이지가 가득 찼을 때 이를 작동 시키면 ‘피융’ 하는 소리가 나며 자동차가 튀어 나간다고 설명했는데 기술적 배경에 관심 없는 입장이라면 이 정도 설명이면 충분할 겁니다.
가상의 시청자를 어떻게 대하는지 역시 중요한데 딸과 아버지가 이 주제에 대해 동시에 ‘헤이 가이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시청자들을 부르는 방법은 현대에 전통의 방송사 대신 수많은 채널을 통해 시청자를 좀 더 가볍게 대하는 방식이 자리 잡은 결과처럼 보입니다. 결과가 어떻든 가상의 시청자를 대할 방식을 설정해야 하는데 현대에는 더 적은 수의 상대, 혹은 상대 한 명에게 말하는 방식을 주로 사용했다면 리처드 해먼드가 활동하던 좀 더 이전 시대, 그리고 좀 더 전통의 방송에서는 카메라를 향해 한 명에게 말하는 방식을 유지하면서도 카메라 한 대 뒤에 여러 사람들이 있다는 점을 감안했던 것 같습니다. 또 현대에 한 명에게 말하는 방식을 사용한다고 해서 실제로 그 한 사람을 특정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설정하면 안 됩니다.
이 영상의 어느 부분 까지가 대본이고 어느 부분이 대본이 아닌지 알기 어렵지만 이런 이야기 끝에 이치 해먼드가 소개하는 스바루 임프레자는 무척 매력적입니다. 자동차를 타고 교외를 달리는 중이고 비가 내리는 중이며 자신이 탄 자동차는 스바루 임프레자입니다. 이 자동차 이름은 이러한데 이 이름의 각 부분은 각각의 의미를 담고 있고 이 이름처럼 처음부터 랠리에 참가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자동차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포장도로에서도 문제 없이 탈 수 있습니다. 수동 변속을 해야 하고 터보 차저가 장착되어 있는데 압력 게이지를 보고 터보를 사용하면 ‘피융’ 하는 소리와 함께 속도를 낼 수 있어 달리는 재미가 있습니다. 자동차를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사용한다면 이 자동차는 적절하지 않은 선택일 수 있지만 달리는 과정에 집중한다면 적절한 선택일 겁니다.
영상의 여러 부분이 사랑스러웠습니다. 아버지의 탑기어 오프닝을 흉내 낼 때 리처드 해먼드가 어쩔 줄 몰라 하는 몸짓, 아버지의 진지한 설명에 눈빛이 흐려지는 이치 해먼드의 표정, 역사적인 부분을 가볍게 건너 뛰고 기술적인 부분을 자신의 이전 경험과 비교해 어처구니 없이 간단하지만 또 완전 직관적인 방식으로 설명하는 장면, 연출에 가깝다고 생각하지만 아버지의 생각하는 코트를 입고 한동안 교외를 거닐며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 여기에 수 십 년에 걸쳐 자동차를 설명해 온 아버지의 노하우에 접근해 설명 방식을 수정한 결과로 짧지만 특징을 납득할 수 있는 설명에 성공하는 장면은 영상에 달린 ‘Father - Daughter monument’라는 설명이 적절합니다. 그러면서도 탑기어와 그랜드투어에서는 제레미 클락슨에게 항상 뭔가 당하고 복수하기를 반복하고 키가 작다는 놀림을 받는 재미있는 캐릭터이지만 자신의 경험을 나눠 줄 때는 진지하고 사려 깊은 모습을 보여주는 점도 인상 깊었습니다.
영상은 그렇게 사랑스러우면서도 오랜 세월에 걸친 프리젠테이션 경험이 있는 리처드 해먼드와 이 경험에 기반해 자기 자신의 프리젠테이션 방식을 구축하고 있는 이치 해먼드의 방식이 서로 부딪치며 현대의 시청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자동차 프리젠테이션 방식을 만들어 냈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사랑스럽고 또 재미있으면서도 프리젠테이션의 핵심 요소를 빠뜨리지 않고 설명한 영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동차에 별 관심이 없더라도 프리젠테이션 요령을 복기하기에 적당해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