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네덜란드 선적 KONO호입니다
몇 달 전에 가장 좋아하는 영화 장면으로 나는 클라리스 스탈링. FBI 소속이다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2022년 읽기 회고에서 오랫동안 좋아하던 한니발을 이제는 놓아 주고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가장 좋아하는 소설과 가장 좋아하는 영화 장면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언제까지 과거에 붙잡혀 있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소설을 다시 읽으며 결말에 대해 이제는 원작 소설의 결말을 납득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여전히 영화의 결말을 더 깊이 이해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고 덕분에 이제 그만 작별하기로 한 이야기를 한 다음 반 년 쯤 지나 다시 한 번 꺼내 소개했었습니다.
한편 좋아하는 영화들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범죄물이 꽤 많은데 그 중에서도 특히 주인공 캐릭터의 윤리, 도덕적 관념이 약간 틀어져 분명 실제 세계에서 중범죄에 해당하고 또 영화 속 가상 세계에서도 비슷한 취급을 받는 행동을 서슴지 않으면서도 그런 장면을 웃기게 그려내는 영화를 좋아합니다. 당장 생각나는 이런 느낌이 나는 영화에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가 있습니다. 한편 국내에 정식으로 소개된 적 없는 것 같아 보이지만 2005년작 로드 오브 워의 여러 장면들을 좋아합니다. 오랫동안 사랑한 영화 한니발이 2001년작이었는데 그보다 더 미래의 영화를 좋아해야겠다고 마음 먹고 소개하는 영화가 고작 그로부터 4년 뒤에 나온 영화인 점은 좀 문제가 있는 것 같지만 아직 한니발 만큼 감히 사랑한다고 말할 만한 영화를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로드 오브 워는 니콜라스 케이지 주연의 범죄 영화인데 전설의 무기상인 유리 올르프의 일대기를 그렸습니다. 영화는 한 가지 사건을 계속해서 따라가기 보다는 유리의 독백과 그 독백을 설명하는 일화들이 계속해서 연결되어 전체적인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인생 초반에 어려 어려움을 겪던 유리는 우연한 역사적 계기를 천재적으로 붙잡아 거대한 행운으로 만들어 세계적인 불법 무기상으로 활동하며 제3세계 국가들의 명운을 바꾸는 역할을 합니다. 그 천재적인 수완을, 이런 장면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살인이나 사기 같은 범죄를 옹호한다는 평가를 받을 지도 모르는 장면들로 표현하고 있고 영화 제작자들의 의도에 따라 이 장면을 너무 좋아합니다.
이 영화의 KONO 씬은 ‘엔젤 킹’을 목적지까지 실어 나르는 과정을 그립니다. 영상은 주인공인 유리가 만약 자신이 일을 제대로 처리했다면 서류 상으로 모든 것이 완벽하므로 세계 각국의 법 집행 기관이 자신의 업무에 관여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예외가 있을 수 있고 서류 처리에 문제가 생겨 인터폴이 유리의 불법 무기가 실린 배를 수색하러 출동했으며 이들이 배까지 도착하기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확실하지도 않은 상황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불법 무기 거래는 전 세계적으로도 상당한 중범죄일 것 같고 영화에서 유리는 결국 법 집행기관으로부터 처벌을 단 한 번도 받지 않지만 이번에 인터폴에 불법 무기를 적발 당하면 큰 문제가 생길 만한 상황입니다. 주인공인 유리 개인 뿐 아니라 유리에게 ‘엔젤 킹’을 주문한 고객들을 실망 시켜 시장에서 유리의 입지를 약화 시킬 수 있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여러 에피소드들이 유리의 무자비하지만 한 편으로는 천재적인 임기웅변술을 보여주는데 이 장면 역시 그런 모습을 보여줍니다. 먼저 인터폴이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지만 일단 이동 속도를 줄이고 재빨리 합법적인 배 이름을 요청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어차피 현재 배 이름으로는 법 집행 기관의 수색을 면하기는 어려울 테니 합법적인 배 이름을 완전히 입수하기 전에 우선 배 이름을 바꿀 준비부터 합니다. 이런 일을 하는 배 답게 배 이름을 바꿀 수 있도록 배 색상과 똑같은 페인트가 항상 준비되어 있어 법 집행 기관이 입수한 이름인 ‘KRISTOL’을 이미 지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합법적인 배 이름을 입수하지만 그냥 이름을 받는 대신 ‘그보다 더 짧은 이름 없어?’ 하고 배 이름을 바꾸는데 걸리는 물리적인 시간을 단축하려는 시도도 합니다.
그렇게 받은 법 집행 기관이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합법적인 배 이름은 ‘KONO’. 이 새로운 배 이름을 얻을 시점에는 이미 이전 이름은 모두 지워졌고 새로 받은 합법적이고 또 짧아 금방 바꿀 수 있을 배 이름을 칠하기 시작합니다. 이 정도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으면 영화는 훨씬 재미 없었겠지만 수정하기 이전 이름의 배는 파나마에 등록되어 있었지만 수정한 다음의 배는 네덜란드에 등록되어 있었습니다.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아마도 공해상에서는 배가 등록된 국가의 법령의 지배를 받고 그래서 배에 달린 국기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잖아도 이 배를 수색하려는 법 집행기관 입장에서는 배 이름과 국기가 일치하지 않으면 수상하다고 판단하고 수색해볼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배에는 네덜란드 국기가 없었는데 영상에서 ‘벨기에 국기는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색상은 완전히 다르지만 벨기에 국기는 네덜란드 국기처럼 세 가지 색상이 세로로 나열된 모양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벨기에 국기는 색상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국기를 제대로 맞춰 달지 않으면 배 이름을 바꿔도 아무 소용이 없는 상황이었는데 다행히 프랑스 국기를 찾아냅니다. 마치 벨기에 국기를 CW 90도 회전 시키면 독일 국기와 비슷해지는 것처럼 프랑스 국기를 CCW 90도 회전 시키면 네덜란드 국기가 됩니다. 다만 국기를 걸기 위해 국기 한쪽에는 구멍이 뚫려 있는데 멀쩡한 국기를 회전 시켰으니 구멍이 없는 곳에 억지로 구멍을 뚫어야 하고 또 회전 됐으니 국기 길이도 다를 겁니다. 하지만 알게 뭔가요. 좀 이상해 보이긴 하지만 어쨌든 네덜란드 국기가 달려 있고 배 이름도 그에 맞는 KONO여서 법 집행 기관은 이 배에 함부로 뭔가를 할 수 없을 겁니다.
영화에 큰 지분을 차지하는 인물인 인터폴 요원 ‘잭 발렌타인’은 주인공의 불법 행위를 끈질기게 추적하는 돈으로는 결코 살 수 없는 강직한 인물로 등장하는데 잭은 분명 이 배가 수상하다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서류 상으로는 온전하고 또 직접 배 영상이나 사진을 실시간으로 전송할 수 없는 시대에 ‘배는 깨끗해 보이나?’ 라는 질문에 ‘그리 깨끗해 보이지는 않는데?’ 라고 답하지만 이 대화를 주고 받는 서로가 완전히 다른 배를 보고 있음을 확신할 수는 없었습니다. 네덜란드 국기를 달고 있지만 뭔가 삐딱하고 분명 깨끗한 배라고 하는데 전혀 그래 보이지 않으며 이전에 불법 무기 관련으로 수사할 때 마주친 인물이 타고 있을 뿐 아니라 배 이름은 마치 방금 새로 칠한 것처럼 배 나머지 부분과 달리 깨끗해 분명 뭔가 이상하지만 어쨌든 서류 상으로 멀쩡한 배를 어떻게 할 수는 없습니다. 배 위에 올라와 컨테이너 하나를 열어 보지만 결국 수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전부터 좋아하던 범죄 영화일 뿐 아니라 그 범죄를 아름답거나 - 한니발 - 웃기게 -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 그려냈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은 냉정하게 이야기하면 불법 무기를 싣고 그 무기를 사용해서는 안 될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고 법 집행 기관을 속였을 뿐 아니라 분명 여러 국가에 걸친 해상 법률도 위반했을 겁니다. 또한 이 무기가 무사히 구매자에게 전달되면 이 무기들은 다시 죽지 않아야 할 여러 사람들을 죽이는 여러 사건을 일으키게 됩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영화 속 주인공 유리가 이 위기를 모면하는 방법이 우리들이 매일 일하는 모습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아 이 장면을 냉정하게 바라볼 수 만은 없었습니다.
마일스톤 마감이 가까워 오거나 게임 런칭과 서비스가 가까워 오면 C레벨 패닉이 일어나 갑자기 지금까지 한 번도 고려한 적 없는 요구사항을 만족하기 위해 순식간에 개발된 기능 각각을 쥐어 짜 비슷한 모양을 만들거나 이미 정해진 정책에 따라 개발된 기능을 갑자기 정책을 바꾼 모양에 맞춰 전부 뜯어 고치곤 했습니다. 한번은 MMO 게임에서 퀘스트를 한 스텝 씩 자동 진행하게 만들었고 이 정책에 모두가 동의했으며 이런 정책을 사용한 의도가 확실했지만 마지막 순간에 다른 게임을 플레이 해 보고 나타난 고위 의사결정자의 말 한 마디에 퀘스트 하나 단위로 자동 진행되는 사례를 그대로 복제해 짧은 기간 동안에 게임 전체를 뜯어 고쳐야 했습니다. 보고와 캐릭터 커스터마이징에서 설명했 듯 고위 의사결정자가 보기에 경영진에게 설명할 때 면이 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기능은 마일스톤 내내 그 기능에 비용을 쏟아 부었지만 마감 직전에 기능을 제거하기도 하는데 이 사례는 같은 기능에 대해 여러 프로젝트에 걸쳐 같은 결정을 여러 차례 경험했습니다.
이렇게 기능이 갑자기 바뀌면 지금까지 무사히 맞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마감이 갑자기 가능과 불가능 사이를 오가는 복잡한 문제로 바뀝니다. 가령 퀘스트 자동진행 규칙이 바뀌면 여기 맞춰 작성한 퀘스트 스크립트가 오동작 해 퀘스트 진행이 어색해질 수 있고 이번 마일스톤에 함께 통합되어 동작할 것을 고려해 만든 사용자 경험은 갑작스런 기능 변화나 제거에 의해 급하게 전체적으로 다시 설계하고 이에 맞춰 모든 데이터를 다시 입력해야 합니다. 게다가 이런 사실이 프로젝트 전체에 한번에 잘 전달되지 않으면 개발에서는 새로운 요구사항에 맞춰 급히 수정한 결과가 QA에 도착하면 모조리 오동작으로 판단되어 수 많은 버그 이슈를 돌려 받고 그렇잖아도 급해 죽겠는데 이들 사이를 조율하는데 시간을 소모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은 항상 일어나고 이제는 놀랍지도 않으며 C레벨 패닉에서 설명한 대로 이를 피할 방법은 없습니다. 오직 완화할 방법만이 있을 뿐입니다.
영화 ‘로드 오브 워’에서 이 장면이 전 세계적으로 온갖 법령을 위반하면서도 무사히 법 집행기관의 감시를 통과하는 결코 적법 하지 않은 장면을 웃기게 그려내고 있음에도 이 장면을 좋아하는 이유는 우리들이 변경된 요구사항에 맞춰 급하게 빌드 곳곳을 수정하는 모습이 그 자체로는 불법과는 거리가 멀지만 이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별 다른 이유를 듣지 못했지만 누군가 제게 소리치면 일단 그를 믿고 이유를 더 묻지 않은 채 배 밖으로 내려가 KRISTOL이라고 적힌 배 이름을 지우기 시작할 겁니다. 미래에 이 결정과 실행이 잘못되었다는 판단을 받을 수도 있고 지금 이 순간 제 스스로도 이 일을 해야 하는 이유를 더 들으면 이 행동이 잘못되었거나 더 나은 방법이 있음을 제안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모든 것이 급하고 시간 범위를 지금 이 순간으로 좁혀 판단해 보면 생각하기 보다는 일단 움직여 배 이름을 고치고 없는 네덜란드 국기를 만들어 세로로 긴 이상한 모양으로 달아 당장의 문제를 회피하는 결정이 올바릅니다. 그리고 이 순간에는 이 결정이 미래에 더 많은 정보를 가진 우리들의 관점에서 잘못 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음을 예상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비록 범죄 장면을 묘사하고 있지만 이 장면을 좋아하고 종종 이 장면의 유리와 이 장면의 이름 없는 배 바깥에 나가 파란색 페인트로 배 이름을 지우는 작업자에 스스로를 이입하며 피식 거리곤 합니다. 미래에 가서 뭐 어떻게 될 지 모르지만 지금 당장의 문제를 회피하는 일상을 반복하며 때론 이게 뭔가 싶지만 이런 일상이 모여 어쨌든 살아 남은 자신과 프로젝트와 회사를 만들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합니다.
한편 이 장면을 좋아하고 또 아주 깊은 인상을 받은 나머지 ‘KONO.pub’이라는 자유 주제 마스토돈 서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원래는 같은 이름의 좀 더 점잖은 도메인을 확보하려고 했지만 순간의 실수로 다른 사람이 만료된 그 점잖은 도메인을 먼저 구입해버렸고 대안으로 액티비티펍의 펍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생각으로 비어 있던 '펍' 도메인을 구입해 서버를 운영하기 시작했습니다. 귀여운 이름과 캐릭터에 둘러싸인 여느 한국어권 액티비티펍 서버와는 좀 다른 분위기인 것 같지만 이 배 이름에 얽힌 에피소드와 우리들의 삶이 별로 다르지 않다는 느낌을 받으시는 분이라면 나쁘지 않은 이름이라고 생각합니다.
결론. 이전에는 영화 한니발의 한 장면을 가장 좋아했지만 지금은 영화 로드 오브 워의 ‘KONO’ 장면을 가장 좋아합니다. 좋아한 나머지 그 이름을 사용하는 자유 주제 마스토돈 서버 ‘KONO.pub’을 운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