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서치 문서 작성 요령
만족스럽지 않은 리서치 문서를 만났습니다. 왜 만족스럽지 않다고 느꼈는지 생각해보기로 했습니다.

업계가 커지면서 여러 회사들이 인턴십 프로그램을 시행하는 것 같습니다. 오래 전에는 인턴십 프로그램에 참여하신 분들이 정상을 차려 입고 회사 곳곳에 몰려다니시는 모습을 보며 제 몰골이 부끄러워 제가 저 분들이 돌아다니시는 이 곳에 함께 있어도 괜찮은 건지 고민한 적도 있습니다. 이 감정은 마치 강남역 근처에서 일하다가 퇴근하려고 건물 밖에 나왔는데 온통 잘 차려 입은 젊은 분들 뿐이라 몰골을 한 아저씨는 이 거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최대한 빨리 지하철 역으로 들어가 사라지려고 했던 것과 비슷합니다. 또 아이폰 배터리를 교체하려고 가로수길에 있는 애플스토어에 가기 위해 지하철 역에서 내려 가로수길을 한참이나 걸어갔는데 길가의 매장들은 뭔가 저와는 어울리지 않는 고급진 모습이고 또 거리를 지나는 자동차들, 인도를 걷는 사람들 모두가 이 거리에 잘 어울리지만 저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 최대한 빨리 걸었던 감정과도 비슷했습니다. 정장 차림으로 회사 구내식당에 나타난 그 분들은 한 분 한 분이 유능해 보였고 이 분들이 얼마 후면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실 거라는 점에서 이제 도대체 뭘 해서 먹고 살아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한번은 다른 회사에서 회사 차원의 인턴십 프로그램을 시행했는데 서류와 면접을 통과하신 분들을 인턴십 프로그램을 시행하겠다고 선언한 팀에 분배해 각 팀의 통제 하에 일정 기간 동안 일하시게 하는 구조였습니다. 이전에 경험한 것처럼 회사 차원에서 교육을 수행하는 구조가 아니어서 각 참가자님들의 경험은 팀에 따라 각기 달라질 수 있습니다. 프로그램 시행 첫 해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인턴십 프로그램 참가를 필사적으로 거절하는데 성공해 옆 부서에 인턴님이 출근하시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고 우리들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인턴십 기간 동안의 성과에 따라 인턴십이 종료될 때 채용 여부를 결정하게 되어 있었는데 팀에서는 채용을 원했지만 우리들이 알 수 없는 어떤 다른 이유 때문에 채용이 불발 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한 해를 무사히 보냈지만 그 다음 해가 되자 또 다시 인턴십 프로그램이 시행되었고 작년에는 필사적으로 인턴십 프로그램 참가를 거절하는데 성공했던데 비해 올해에는 작년에 참가했던 팀이 정말 격렬하게 참여를 거절한데다가 작년에 거절했던 전적이 있어 이번에도 거절할 명분이 없어 하는 수 없이 인턴십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로 합니다.
인턴십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로 결정하면 회사 인사팀에서 한 번 필터링 한 서류를 받아 직접 서류 전형을 실시하고 또 면접 전형을 실시해야 했는데 서류를 받아 살펴보다가 익숙한 바로 그 느낌이 들었습니다. 인턴십 프로그램을 시행하는 모습을 처음 본 회사에서 느꼈던 저런 분들이 일하시는데 내가 과연 이 자리에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건가 하는 그런 느낌, 강남역이나 가로수길을 걸으며 이 거리를 함께 걷는 다른 멋진 분들에 비해 제가 이 거리에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바로 그런 느낌입니다. 도대체 우리가 뭐라고 이렇게 많은 교육을 받고 또 여러 가지 활동을 통해 자신들의 능력을 설명할 수 있는 분들을 감히 평가할 수 있나 싶은 느낌을 받으며 역시 끝까지 인턴십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저항할 것을 그랬다는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팀 단위로 인턴십 프로그램을 운영하기에 한 팀에 여러 명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팀의 업무 부하를 고려해 인원은 한 분으로 하기로 했는데 이력서를 살펴보며 도대체 이 분들 중 어느 분을 선정해야 할 것인지 고민이 깊었고 차라리 이 때 다른 일을 더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고민 끝에 몇 분을 선정해 면접 전형을 진행했고 무사히 처음 생각한 한 분을 인턴십 프로그램에 참여 시키는데 성공합니다.
전에 뉴스를 통해 여러 회사들의 인턴십 프로그램이 예상과 달리 파행에 가깝게 운영되어 문제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회사 차원에서는 인턴십 프로그램을 시행했지만 이를 실제로 운용할 각 팀은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아 아무 업무도 분배하지 못하거나 때때로 잡일을 시키는데 머물러 서로 시간을 낭비하고 끝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애초에 그 잡일의 범주에 포함될 것 같은 복사, 정리 같은 업무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오래 전에는 회의 때 사람들이 볼 인쇄물을 준비한 다음 스테플러로 찍어 각자의 자리마다 비치해 두거나 기획서를 페이지 별로 인쇄해 남들보다 먼저 회의실에 도착해 각 페이지를 가로, 세로 방향으로 쉽게 구분할 수 있도록 준비해 놓고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한 부 씩 나눠지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어떤 회의에서도 인쇄물을 나눠주지 않게 됐습니다. 그냥 회의 주최자는 몇 분 일찍 가서 모니터나 프로젝터를 켜고 기계를 연결해 화면에 설명할 자료를 띄워 놓기만 하면 됐는데 이 사이에 어떤 잡일도 없습니다. 그래서 애초에 그리 의미가 크지 않은 업무를 지시해 빈축을 살 가능성은 없었지만 반대로 의미가 없지 않은 업무를 만들어내야만 했고 회사가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을 제공했지만 대체 우리들이 처한 이 난장판 속에서 인턴십 프로그램을 운용할 방안을 고민해야 했습니다.
처음 제가 준비한 제안은 인턴십이건 말건 마치 신입 직원을 채용한 것처럼 우리들에 수행할 업무 중 하나를 할당하고 시행착오 끝에 이를 완수해 나가는 과정을 겪게 하는 것입니다. 회사는 교육기관이 아니지만 아무 교육 없이 일할 수는 없었고 동시에 우리들은 별도의 교육을 준비할 자원이 없는 이상 직접 일에 부딪치며 성장하게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다행히 저는 그 과정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여러 가지 문제를 수습하는 일을 잘 했고 또 업무에 필요한 이론적 배경을 설명하거나 이론을 습득할 수 있는 시작 지점을 제안할 수 있었기에 이를 감당하는 인턴님은 처음에 좀 고통스럽겠지만 실제 의미 있는 일을 하며 본인이 감당할 수 있다면 빠르게 발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제 보스에 의해 즉시 반려 되었는데 보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제가 인턴십 지원자 분들의 수준을 너무 높게 평가하고 있고 실제로 이 분들은 아무리 기초적인 업무라도 실제 업무를 당장 감당하기 어려울 가능성이 높으며 제가 시행착오를 감당하기에는 저 자신이 지금 너무 바빠 업무를 너무 많이 늘리게 될 거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그 시점에 팀에서 수행할 인턴십 프로그램을 별도로 설계하기도 쉽지 않을 것 같았기에 그렇다면 이번 마일스톤에 진행할 업무 말고 다음, 혹은 다음다음 마일스톤에 계획된 업무 중 하나를 선택해 이를 미리 준비해 보는 정도로 조절하는 것으로 보스의 승인을 받아냅니다.
여름은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업무 지시를 하고 저는 평소처럼 일했고 한 주에 한 번, 또는 두 번 정도 진행 상황을 보고 받고 또 진행 상황에 따라 제가 설명할 수 있는 이론적인 뭔가, 또 이 일을 하는데 필요한 배경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방법 따위를 설명하며 시간을 보냅니다. 개인적으로 인턴십 프로그램은 업무를 수행하는 그 자체에도 의미가 있지만 실제 업무가 일어나는 그 환경에 앉아 있다는 점 역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일하는지, 서로 어떻게 이야기를 주고 받는지, 어떤 회의가 열리는지, 사람들이 일하다가 한숨을 쉬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지, 흡연자들과 비흡연자들이 어떻게 일하고 어떻게 쉬는지, 각자의 모니터에 무엇이 떠 있는지 따위를 살펴보는 것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최소한 팀 분위기가 사람들에 대해 적대적인지 그렇지 않은지 파악해 장기적으로 이 팀에서 일해도 괜찮을지 여부를 판단할 수도 있을 겁니다. 다행히 이 때 함께 일한 인턴님은 다른 회사에 신입으로 보내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채용 절차를 진행했는데 당시 한창 코비드가 맹위를 떨치고 있을 시점이라 채용 의사 확인, 절차 진행 같은 중요한 일들이 차근차근 진행되지는 못해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인턴십 마지막 날 엄청나게 빨리 일어났고 제가 그 상황에 놓여 있었다면 제대로 생각해 볼 여유도 없었을 것 같습니다.
이제 또 다른 회사에서 시행 중인 인턴십 프로그램을 지켜보고 있는데 이번에는 이전에 경험했던 회사가 프로그램을 시행하기는 하지만 실제 운용은 각 팀에 위임하는 기본적인 형식은 크게 다르지 않지만 팀이 속한 프로젝트 수준에서 인턴십 프로그램의 운용 방안을 고민해 기간이 길지는 않지만 최대한 다양한 경험을 해 보시게 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일을 처음 시작하시는 분들께 게임디자인의 어느 세부 역할을 할 지 결정하라는 것은 그리 현명한 접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현대에 가까워질수록 게임디자인은 점점 더 분업화 되는 추세인데 이를 통해 생산성을 올릴 수 있었지만 문제점 역시 적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직 어떤 직군이 있는지도 잘 모르고 각 직군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잘 모르는 상황에서 당장 직군을 선택하라니 이건 마치 초창기 MMO 게임들이 시작하자마자 대뜸 제한된 스테이터스를 분배하게 만들어 잠깐의 실수로 영원한 망캐를 만들도록 유도하는 상황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정식으로 일을 시작하기 전에 여러 직군이 각자 어떤 일을 하고 또 어떻게 일하는지 차츰 체험해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그런 목표를 달성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접근은 그렇잖아도 그리 길지 않은 인턴십 프로그램 기간을 게임디자인 직군 내 서로 다른 부서 별 체험 기간으로 나뉘게 만들어 표면적으로는 여러 직군을 경험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각 직군을 대표하는 팀 단위에서 짧은 기간 동안에 마무리할 수 있는 업무만을 할당 받을 수 있다는 또 다른 문제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가령 대학의 방학 기간에 맞춘 인턴십 프로그램이 8주간 운용된다면 한 부서에서 8주에 걸쳐 경험을 쌓을 수 있고 업무 역시 이 기간을 감안해 너무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수준으로 할당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같은 기간이라면 여러 부서에서 이 기간을 나눠 사용해야 했기 때문에 이전에 경험했던 인턴십 프로그램에 비해 완결성이 부족한 업무를 할당하게 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다행히 적당한 방법을 찾을 때 까지 계속해서 개선해 나갈 모양이어서 미래가 어둡지는 않아 보입니다. 다만
지금 상황에서 짧은 기간에 맞춰 운용 가능한 프로그램은 주로 리서치 업무가 되기 쉽습니다. 각 부서마다 리서치 업무가 있는데 평소에는 각자가 개인적으로 플레이 하는 경험에 많이 의존하게 되며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게임이 나타나면 업무 시간을 할애해 플레이 하기도 합니다. 마냥 플레이만 해서는 업무로 성립하지 않을 수도 있기에 각자의 경험을 일종의 리서치 보고서 형식으로 만들어 기록을 남기는데 또 이렇게 기록을 남기도록 강제하면 평소와 같은 플레이 대신 리서치를 해야 한다는 사실에 영향을 받은 오염된 플레이 경험이 남아 나중에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이전보다 짧아진 각 팀 별 인턴십 프로그램 운용 기간은 이 프로그램의 주요 업무를 리서치 업무로 자연스럽게 한정되게 만든 것 같은데 덕분에 이 분들이 작성하신 여러 리서치 문서를 살펴볼 기회가 생겼습니다. 사실 저 역시 프로젝트에 기여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따라잡기 바쁜 상황이어서 리서치 문서를 읽어보기는 커녕 제 앞가림을 하느라 한동안 야근을 불사했는데 시간이 지나며 아주 조금씩 여유가 생기기 시작하자 드디어 리서치 문서를 살펴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서들을 살펴보다가 몇몇 문서는 도대체 어쩌다가 이 문서가 작성되게 되었는지 상황을 잘 이해할 수 없는 문서들이 있었습니다. 이 리서치 문서는 분명 특정 게임의 특정 부분의 구성과 특징 따위를 차분하게 설명하고 있었고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잘 만들어진 문서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문서를 살펴보기 시작하자 제가 한국어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계속해서 의심하게 만들었고 혹시 제가 야근에 지쳐 이해력이 떨어진 것인지 역시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저는 지금 당장 업무를 중단하고 퇴근하는 편이 회사를 위해 더 나은 선택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제가 왜 이 문서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지, 또 이 문서에 포함된 정보를 습득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했는지 좀 더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다른 게임 리서치 문서들로부터 느낀 첫 번째 감정은 이 문서들은 문서를 작성하신 분이 이 문서를 작성해야 하는 이유를 모른 체 작성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문서에는 특정 게임의 특정 시스템의 생김새, 여러 가지 동작, 이 문서를 작성하신 분의 경험 등이 잘 정리되어 있었고 나름 컨플루언스 위키에 있는 다른 문서들을 잘 참고하신 덕분인 듯 위키 스타일의 페이지 구분, 문단 구분 등을 잘 지켜서 작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서는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다른 게임의 특정 시스템이 이렇게 생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수준의 정보를 얻기를 원했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제 스스로 게임을 플레이 해 보는 것입니다. 분명 문서를 읽는데 비해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제가 게임을 직접 ‘만져’봄으로써 문서를 읽는 것에 비해 더 풍부한 체험을 할 수 있고 이전까지의 다른 게임 플레이 경험의 연장에서 게임을 평가할 수 있으며 우리 게임의 목표와 비교해 받아들일 점,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점을 바로바로 생각해낼 수 있습니다. 문서를 읽는데 비해 시간이 조금 더 걸리겠지만 문서를 읽는데 비해 훨씬 많은 정보를 직접 체험을 통해 획득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읽은 리서치 문서에는 바로 그런 부분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분명 잘 나열된 정보이기는 하지만 더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없었습니다. 다른 게임에 대한 리서치 업무를 제시할 때 기대하는 것은 그 게임의 모습과 시스템 구성, 고객들의 반응 같은 것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업무를 수행한 분의 경험의 연장으로부터 나오는 개인적인 평가, 개인적인 느낌, 자신의 생각이기도 합니다. 그저 게임의 구성을 파악하기를 원했다면 시간이 좀 있다면 위에서 설명한 대로 직접 게임을 만져보는 편이 가장 좋고 시간이 부족하다면 이미 누군가가 잘 정리해 놓았을 글이나 영상을 찾아 보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특히 이들을 작성하는 분들은 게임에 어느 정도 애정이 있어 자신이 생각하기에 괜찮은 점, 그렇지 않은 점을 솔직하게 털어놓기도 하고 또 너무나 실망스러운 부분에 대해서는 개발자들을 욕하기도 하는데 덕분에 우리들은 이런 문서와 영상을 보며 고객 중 한 명일 이 분들의 감정을 적나라하게 체험할 수 있습니다. 반면 제가 살펴보고 실망감을 느긴 리서치 문서들은 마치 제작사 공식 웹사이트에 나열된 정보처럼 게임 자체에 대해 설명하고 있긴 했지만 이 경험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이 완전히 빠져 있었고 제가 오히려 리서치 문서로부터 원한 정보는 그런 개인적인 측면이었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리서치 문서를 포함해 어떤 업무든 업무 지시를 받을 때 자기 스스로 생각하기에 업무 지시가 모호하거나 업무 범위가 너무 넓은 것 같다면 이 상황이 맞는지 계속해서 확인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업무를 받아도 이 업무의 범위가 얼마나 넓은지, 얼마나 오래 걸릴지 전혀 평가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시작하고 시간이 조금 지나면 대략 느낌이 오는데 이 느낌에 근거해 범위가 너무 넓거나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은 예감이 들면 이 예감에 근거해 업무를 조정해야 합니다. 사실 회사에서 처음 일하는 입장에서 자신에게 부여된 업무를 조정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생각하지 못하거나 부담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나쁜 것은 업무 수행에 실패하는 것인데 범위가 너무 넓게 설정된 업무에 실패하는 것 보다는 업무 범위를 조절해 적당한 크기로 줄어든 업무를 성공 시키는 쪽이 개인적으로, 그리고 조직이나 회사 입장에서 훨씬 바람직합니다. 이런 이터레이션 없이 업무가 모호하게 느껴지더라도 이를 확인하지 않고 시간을 들여 업무를 수행하다 보면 목표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사기도 떨어지고 떨어진 사기만큼 결과의 품질 마저 떨어지게 됩니다.
사실 이런 상황은 리서치를 수행하는 이유와 이 이유에 도달하는 맥락을 충분히 설명하고 시스템의 구성을 파악하되 이 시스템에 대한 체험으로부터 얻은 개인적인 경험, 감정, 예상 따위를 포함해 달라고 정확하게 지시하면 어렵지 않게 돌파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미 게임의 구성을 있는 그대로 문서에 설명하는데까지는 충분히 도달했기 때문에 그 경험을 설명하고 자신의 이전 다른 게임 경험과 비교해 보고 장단점을 설명하려고 시도하기만 해도 그저 유튜브를 검색해서 2배속으로 몇 분 동안 플레이 영상을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정보를 만드느라 한 고생이 헛되지 않게 만들 수 있습니다. 리서치를 사람에게 시키는 이유는 그 사람의 경험에 기반한 의견을 얻고 싶기 때문입니다. 조사한 사실로부터는 이야기를 시작하기 아주 어렵지만 개인의 경험에 기반한 의견은 이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고 이들이 잘 한 것, 잘못 한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포커스를 우리 게임으로 옮겨 와 리서치의 맥락을 확실히 인식 시킬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제가 문서를 보고 뭔가 잘못 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시점이 전체 프로그램 진행 과정의 너무 후반이어서 어떻게 해 볼 여지가 없는 상태였습니다. 보스님과 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조금만 더 빨리 따라잡고 또 조금만 더 빨리 여유를 찾을 수 있었더라면 제가 기회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을 하자 효율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려는 압력에도 불구하고 물리적인 업무시간을 늘렸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저에게 더 이상의 기회는 없었습니다.
리서치의 핵심은 사실이 아니라 그 사실을 체험한 개인의 경험입니다. 만약 사실을 얻기를 원한다면 직접 게임을 만져보거나 개인의 감정이 덧입혀진 플레이 영상을 보면 될 일입니다. 처음에는 개인의 경험을 솔직하게 정리해 보고 차츰 이를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려고 노력하다 보면 사실을 포함한 의미 있는 리서치 문서를 작성할 수 있습니다. 사실만 나열했다면 이 문서는 다른 행동들로 대체될 수 있지만 개인의 경험을 포함하는 순간 그 문서는 다른 수단으로 대체될 수 없는 팀의 자산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