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도구 사용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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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처음 시작할 때는 지금 같은 시스템디자인 역할이 아니라 퀘스트 라이터 역할이었습니다. 퀘스트 라이터는 게임 시스템과 스토리를 잘 살펴본 다음 이들에 기반해 그 세계에서 일어날 법한 더 짧은 이야기를 만들고 이를 게임 안에서 다양한 방법을 통해 고객이 체험하도록 하는 역할을 합니다. 처음에는 그저 거의 소설에 가까운 텍스트와 일러스트 몇 장만 있는 상황에 제대로 구축된 게임 플레이나 보조 시스템, 그리고 결정적으로 퀘스트 시스템이 아예 없었기 때문에 퀘스트 라이터로 채용된 사람들은 미리 ‘소설’ 텍스트를 읽고 등장인물과 이야기를 상상한 다음 나중에 퀘스트 시스템이 구축되고 나면 퀘스트를 만들 생각으로 글을 규격화 해서 준비해 놓았습니다. 결말을 미리 말씀 드리면 이렇게 준비한 텍스트는 결코 퀘스트 모양으로 만들어지지 못했는데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보고 있습니다.

일단 우리가 퀘스트에 사용할 작은 이야기를 쓰기 위해 참고한 이야기는 보다 이 세계 전체의 역사적 사건에 가까운 내용이었습니다. 흔히 태초에 빛과 어둠이 있었다로 시작하는 400페이지 짜리 기획 포트폴리오를 보는 느낌과 비슷했는데 분명 제목에는 게임 제목과 같은 텍스트가 적혀 있었지만 이 이야기는 게임의 배경이 되는 현실로부터 꽤 먼 과거의 이야기, 그리고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 거의 대부분은 게임 기준 현대에 마을 광장을 장식한 동상, 지명, 전설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런 과거의 이야기에 기반해 퀘스트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그 과거의 사건에 기반해 만들어진 게임 기준 현대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겪는 현대의 이야기를 쓰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과거 이야기 말고 현대의 설정이 훨씬 더 많이 필요했는데 설정은 계속해서 과거 이야기에 집중되어 있었고 여러 설정들이 현대에 도달하는 속도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현대의 이야기에 비해 너무 느렸습니다. 결국 우리는 대충 아무렇게나 지어낸 현대의 이야기를 만들었는데 이런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사사로워서 이야기가 어떻게 되든 말든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거대한 이야기를 거스르지 않았지만 결코 서로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작성한 퀘스트 문서가 퀘스트 모양으로 만들어지지 못한 다른 이유는 퀘스트 시스템을 구축하지 않은 상태에서 퀘스트를 쓰기 시작했기 때문이고 퀘스트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기반인 캐릭터, 성장, 아이템 기반 따위가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회사나 비슷한데 회사를 만들고 게임 하나를 크게 성공 시키면 많은 사람들이 더 성공적인 다음 게임을 만들고 싶어 합니다. 다음 게임을 성공 시키기 위해 이전에는 없었던 충분한 인력을 처음부터 모집하고 전작에서 가장 부끄럽게 생각했던 부분에 필요 이상으로 집중하곤 하는데 이전에 경험했던 회사에서는 그 부끄러운 부분이 바로 퀘스트였습니다. 전작은 퀘스트가 없지 않았지만 시스템이 충분히 훌륭하지 않았고 당시는 MMO의 퍼시스턴트 월드에서 플레이어 개개인에게 개인화된 경험을 주는 방법을 잘 몰랐습니다. 우리들 역시 싱글플레이 기준의 퀘스트 경험을 상상하기는 쉬웠지만 이런 상상이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실시간으로 모든 행동이 동기화되는 퍼시스턴트 월드에서 어떤 문제를 일으킬지 깊이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전작에 비해 훨씬 훌륭한 퀘스트 경험을 부여하기 위해 아직 핵심 메커닉(aka 전투)이 정립되기도 전에 퀘스트라이터들을 모집해 퀘스트 스크립트부터 작성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퀘스트 시스템은 게임의 나머지 체계가 어느 정도 갖춰져 있을 때 이들을 퀘스트에 의해 제어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면서 만들어 나가는 것이 개발팀에 무리를 가장 적게 주는 개발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퀘스트는 게임을 광범위하게 제어합니다. 가령 퀘스트에 따라 플레이어의 이동 목표를 지정하고 목표 몬스터를 스폰 시키고 플레이어를 퀘스트가 없는 사람은 들어올 수 없는 던전에 입장 시키고 전용 컷씬을 보여주며 평소에는 싸울 수만 있었던 몬스터와 대화를 하고 퀘스트 아이템을 인벤토리에 넣어 주고 많은 경험치를 줘 갑자기 1레벨을 올려주는 등등 퀘스트에서 하려는 여러 가지 행동은 거의 게임 전체를 제어하기에 이릅니다. 그래서 퀘스트는 퀘스트로 제어하려는 나머지 시스템이 어느 정도 구축된 다음 이들을 제어하는 기능을 추가하면서부터 개발하기 마련입니다.

이 순서를 지키지 않으면 사실상 퀘스트 개발을 할 수가 없습니다. 가령 아직 인벤토리가 없다면 퀘스트 보상을 줄 수 없고 아직 몬스터와 전투하는 기능이 없다면 그 흔하디 흔한 몬스터 몇 마리 사냥해 오는 퀘스트를 만들 수도 없으며 NPC가 없다면 NPC와 대화할 수도 없고 PC에 상점 기능이 없다면 NPC 한 마리를 상점 전용으로 만들지 퀘스트 대화 및 상점 역할을 하도록 만들지 결정하고 이에 맞는 인터페이스를 설계할 수도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핵심 메커닉을 구축해 나가는 상황에서 초보적인 전투 외의 동작이라곤 여러 레벨을 건너다니는 기능 밖에 없을 때 퀘스트 라이팅을 시작한데다 그 퀘스트의 기반이 되는 시나리오는 소설 모양에 먼 과거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으니 제대로 된 결과물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참고로 이런 순서를 지키지 않고서 엄청난 비용을 낭비하며 퀘스트 먼저 개발해 낸 사례를 알고 있는데 이건 나중에 다시 기억 나면 이 이야기만 별도로 해 보겠습니다. 여기서 그냥 하기엔 굉장히 신나고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놀랍게도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이 이야기의 본론이 아닙니다! 사실 본론은 그 퀘스트 라이팅을 하는데 사용한 도구가 다름아닌 엑셀이었다는데서 시작합니다. 사실 지금까지 한 퀘스트 만드는데 실패한 이야기는 지금부터 할 이야기와 아무런 상관도 없고 그 퀘스트 라이팅 할 때 텍스트를 타이핑 해 넣던 도구가 엑셀이었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이야기에 본격적으로 연결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