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키보드 사용기. 기능인가 습관인가.

새 키보드 사용기. 기능인가 습관인가.

해피해킹 키보드는 윈도우 환경에서 오히려 강력해요에서 이 키보드를 오래 써 왔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처음 일을 시작할 때는 사실 돈도 없었고 그 전까지는 키보드를 따로 구입해서 쓴다는 생각 자체를 못 했습니다. 그저 컴퓨터를 살 때 끼워 준 키보드를 사용하거나 회사에서 지급한 키보드를 사용하는 정도에 머무를 뿐이었습니다. 키보드를 한번 산 적이 있었는데 타이핑 하다가 오른쪽 새끼손가락으로 오른쪽 시프트 키를 누르자 키가 깨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지금도 의문인데 키를 세게 두드리는 편이기는 하지만 플라스틱 키를 깰 정도는 아닌데 아마 그 키보드가 불량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회사에 클라이언트 프로그래머 중 한 분이 해피해킹 키보드를 사용했는데 일단 키보드 모양이 마음에 들었고 흰색에 무각인 점도 매력적으로 느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분은 완전 골초였던 덕분에 키 사이사이에 담뱃재가 끼어 있었는데 - 그 시대에는 아직 사무실 바로 옆 공간에서 흡연 할 수 있었음 - 그런 상태에서도 회사에서 지급 받은 키보드에 비해 압도적으로 타이핑 감각이 좋았습니다. 다른 키보드를 고려할 것도 없이 바로 '저' 키보드를 사야겠다고 마음 먹었는데 좀 더 알아보니 이 키보드는 꽤 독특한 철학에 기반해 만들어진 키보드였고 일상적인 작업에 사용하기에는 불편할 수 있다는 사용기를 읽었지만 이미 그런 말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내 월급과 생활비를 생각하면 그런 키보드를 살 결정을 하긴 꽤 어려웠고 몇 달이나 돈을 모은 끝에 키보드를 주문해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펑션키가 없거나 컨트롤 키가 캡스락 자리에 있거나 방향키가 없거나 홈, 엔드, 페이지업, 페이지다운 키가 특수키와 조합으로만 입력할 수 있는 점들이 굉장히 어색했고 특히 키에 아무것도 써 있지 않은 점 때문에 적응하는데 애를 먹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몇 달에 걸쳐 모은 큰 금액을 투자했고 이제 돌아갈 방법은 없습니다. 그렇게 그 키보드로 타이핑도 하고 펑션키도 눌러 대고 숫자키도 빠르게 누르고 FPS 게임도 하고 방향키를 사용하는 게임도 하고 엑셀을 사용하기도 하며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옮긴 회사가 망분리를 통한 보안 관리를 하고 있어 컴퓨터를 두 대 주는 바람에 같은 키보드를 하나 더 구입했고 또 시간이 흘러 기왕이면 집에서도 같은 키보드를 사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같은 키보드를 하나 더 구입해 결국 똑같은 해피해킹 프로2 키보드는 어느새 세 개가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해피해킹 키보드는 게으름뱅이들을 위한 키보드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각인이 없는 특징은 키보드를 쳐다볼 이유를 없애 줬습니다. 키보드에 아무리 익숙해져도 가끔 키보드를 쳐다보곤 했는데 손가락이 올바른 키에 올려져 있는지 확인하려 했거나 아니면 키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불안해서였기 때문일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키에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은 순간 키를 내려다 볼 이유가 없어졌고 정말로 더 이상 귀찮게 고개를 내려 키보드를 쳐다보지 않게 됩니다. 그냥 손가락이 올라가 있는 그 키가 맞고 지금 누르는 그 키 조합이 맞습니다. 스스로의 타이핑을 좀 더 신뢰할 수 있게 된 것은 덤입니다.

또 숫자 키패드가 없어 마우스와 키보드 사이 거리가 굉장히 가깝습니다. 만약 숫자 키패드가 있었다면 양 손과 마우스 사이에는 숫자 키패드 뿐 아니라 인서트, 딜리트, 홈, 엔드, 페이지업, 페이지다운 키가 있어 마우스와 손 사이가 거의 30센티미터는 됐을 겁니다. 매번 마우스를 조작하려고 할 때마다 그 먼 거리를 오가야만 한다니 생각만 해도 귀찮습니다. 그 모든 키가 없기 때문에 손과 마우스 사이 거리는 10센티미터 남짓입니다. 마우스를 쓰고 싶으면 순식간에 잡을 수 있습니다.

펑션 키가 없어 굳이 그 먼 곳까지 손을 올릴 필요가 없습니다. 펑션 키는 보통 키보드 맨 윗줄 숫자 키 위에 공간을 띄운 다음 그 위에 있는데 그 곳은 제 작은 손에 비해 너무나도 먼 곳입니다. 손목을 키보드 아래쪽에 대고 타이핑을 하면 이미 첫 줄에 숫자키도 결코 가깝지 않습니다. 숫자키를누르려면 이미 손목을 떼지 않은 채로는 손가락을 뻗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펑션키가 별도로 분리되어 숫자키보다 더 위에 있다면 펑션키를 누르려 할 때마다 키보드 아래쪽에서 손목을 떼서 펑션키를 누른 다음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와 손목을 책상에 대고 타이핑을 계속해야 합니다. 하지만 펑션키가 숫자키와 겸용이기 때문에 펑션키를 누르기 위해 책상에서 손목을 뗄 필요 없이 바로 누를 수 있고 타이핑 하다가 중간에 펑션키 조합을 입력하고 바로 이어서 타이핑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이 사이에 딜레이가 없거나 거의 없습니다.

엑셀을 사용할 때 홈, 엔드, 페이지업, 페이지다운, 방향키를 사용하는 시나리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이 키보드를 구입하기 전에 읽어본 여러 사용기에서 방향키, 숫자키 등이 없어 엑셀 사용에는 불편하다는 의견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 사용기를 쓴 분은 굉장히 부지런한 분이었을 것 같습니다. 오른손 손목을 떼지 않은 채로 방금 언급한 모든 키를 입력할 수 있습니다. 굳이 손목을 떼 손을 옆으로 움직여 방향키를 누르고 다시 타이핑 위치로 돌아오는데 몇 초를 낭비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방향키와 거의 같은 범위 안에 홈, 엔드, 페이지업, 페이지다운이 있어 손을 완전히 그 자리에 둔 채로도 이 키를 모두 누를 수 있고 숫자키 역시 손을 조금 뻗으면 손목을 떼지 않은 채로도 누를 수 있어 해피해킹 키보드야말로 지옥의 게으름뱅이들을 위한 키보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타이핑을 많이 하고 오랜 시간 다양한 키 조합을 사용하며 마우스도 여전히 자주 사용하는데 손을 많이 움직이기 귀찮다면 해피해킹이야말로 완벽한 선택이라고 사람들을 설득하곤 하는데 솔직히 잘 설득이 안 되긴 합니다.

그건 그렇고 2023년 여름 현재를 기준으로 반 년보다 더 오래 전에 우연히 지나가다가 매력적인 키보드를 봤고 이 키보드를 주문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키보드는 애플 M0110 키보드와 같은 배열로 만들되 과거 그 모양과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고 현대적인 무선 기술과 USB-C 커넥터를 사용하며 주문할 때 스위치를 선택할 수 있어 모양은 옛날과 비슷하지만 나머지는 모두 현대적인 키보드였습니다. 나름 지금까지 사용하던 해피해킹과 크게 다를 것 같지도 않아 덥썩 주문했는데 주문 생산 제품이라 시간이 많이 걸렸는데 반 년도 넘게 걸릴 줄은 몰랐습니다. 거의 이거 사기 아닌가 싶을 무렵 도착했습니다.

일단 키보드 자체는 20년 동안 사용한 해피해킹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기본으로 캡스락 키가 꽂혀 있지만 당연히 이런 키보드를 주문할 사람이면 그 자리가 캡스락이기를 원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패키지에 캡스락 대신 꽂을 컨트롤 키가 이미 들어 있어 일단 포장을 뜯자마자 맨 먼저 캡스락 키를 뽑아내고 그 자리에 컨트롤 키를 끼웠습니다.

그런데 해피해킹은 처음부터 Fn키 조합으로 홈, 엔드, 페이지업, 페이지다운, 방향키가 매핑 되어 출고되는데 비해 이 키보드는 키에 직접 적혀 있는 글자 말고는 아무 것도 매핑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키보드를 받자마자 기계에 연결하면 방금 말한 키를 누를 방법이 없습니다. 다행히 윈도우용 설정 유틸리티를 제공하는데 이 유틸리티를 통해 설정을 바꿀 수 있고 이 설정은 키보드 하드웨어에 직접 저장되어 한 곳에서 설정하면 다른 기계에 연결해도 그대로 적용될 뿐 아니라 윈도우 레지스트르리를 변경하는 방식과 달리 재시작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일단 해피해킹 키보드와 똑같은 조합을 모두 사용할 수 있도록 설정했습니다.

사실 해피해킹과 크게 다르지 않고 또 키 조합을 해피해킹과 똑같이 동작하도록 설정했지만 결정적인 큰 차이가 있는데 해피해킹은 스페이스 키가 다른 키 여섯 개 길이인데 비해 M0110 키보드는 스페이스 키가 다른 키 일곱 개 길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해피해킹을 사용할 때 오른손 엄지손가락으로 오른쪽 Alt키를 눌러 한영전환을 해 왔는데 똑같은 감각으로 똑같은 자리를 누르면 거기는 오른쪽 Alt키가 아니라 여전히 스페이스 키 오른쪽 끝입니다. 빠르게 타이핑 하며 한영전환을 할 때마다 엄청나게 거슬리는데 맨 처음 해피해킹을 구입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돌아갈 길은 없습니다. 적응해야만 합니다.

해피해킹 키보드와 똑같이 동작하도록 한 데는 일단 오른쪽 맨 위 Del키는 그냥 이 키를 누르면 해피해킹처럼 `문자가 나오도록 하고 Fn + `을 눌러야 Del로 동작하게 바꿨습니다. 또 Fn + iHome, Fn + ,End, Fn + lPgUp, Fn + .PgDn, Fn + [, ;, ', /는 방향키, 그리고 Fn + iPrintScreen, Fn + oScrollLock, 오른쪽 CtrlApplication키로 설정했습니다. 맨 마지막은 뭐지 싶을 수 있는데 종종 마우스 오른쪽 버튼을 누르는 대신 그냥 애플리케이션 키 누르고 거기 적힌 키를 이어서 누르면 마우스 오른쪽 버튼을 누르는 귀찮음을 덜 수 있습니다. 엑셀에서 Ctrl + 1로 셀 서식 불러오는 것과 비슷합니다.

해피해킹과 비교해 결정적인 문제가 있고 이건 한영키 문제처럼 단순히 적응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이전에는 Alt + F4를 누를 때 Fn + Alt + 4의 순서로 눌러 왔습니다. Fn키가 눌린 상태에서도 AltAlt로 동작했고 반대로 Alt가 눌린 상태에서도 FnFn으로 동작했기 때문에 가능한 조합이었습니다. 그런데 새 M0110 키보드에서는 Fn이 눌린 상태에서 AltAlt로 동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Alt + F4를 입력하려면 반드시 Alt + Fn + 4의 순서로 눌러야 하며 지난 20년 동안 사용하던 습관과 달라 굉장히 신경 쓰이고 또 굉장히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제조사에서 제공한 키보드 드라이버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 봤는데 방법이 없어 보입니다. 해피해킹 키보드를 구입할 때 특징 중에 적혀 있던 ‘n키 오버랩’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종종 사람들은 제가 특이한 키보드를 사용하고 있으니 키보드에 관심이 많을 거라고 예상하지만 저는 그냥 해피해킹 키보드를 세 개 쓰는 사람이고 무슨 스위치니 무슨 축이니 하는 건 전혀 몰랐습니다. 그런데 새 키보드를 주문할 때 스위치를 선택해야만 하길래 무슨 스위치가 있나 살펴보다가 아무 사전정보 없이 그저 키압이 가장 높은 넌클릭 타입이라길래 ‘백축’을 선택합니다. 사실 클릭 타입도 좋아하는데 지금까지 이야기 하지는 않았지만 1990년 제작 IBM Model M 키보드가 있습니다. 다만 이 모델 사용자들이 알아주는 1990년도 이전의 미국 내 생산 모델은 아니고 1990년부터 생산된 멕시코 생산 모델입니다. 이 키보드의 클릭키한 느낌이 너무 좋아 한동안 정신없이 타이핑 했지만 위에서 한참이나 이야기했다시피 이 키보드를 사용하기에 저는 너무나 게을렀고 또 회사에서 사용하자니 너무나 시끄러웠으며 집에서 사용하자니 책상이 너무나 좁았고 또 요즘 세상에 여전히 PS/2 방식이라 기계에 연결하기도 쉽지 않아 요즘엔 그냥 처박혀 있는 신세입니다.

그런데 백축의 키압이 높다는 특성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채로 구입하는 바람에 예상과 좀 특성이 달라 당황했습니다. 키압이 높다는 말은 키를 누를 때 80g만큼 힘을 가해야 한다는 의미라기 보다는 그 정도 압력을 가해 키를 충분히 깊이 눌러야 키가 눌린 것으로 판정한다는 의미에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웬만한 타이핑을 할 때는 이전과 비슷한 감각으로 키를 두드려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AltCtrl 같은 키로 시작하는 조합을 누를 때 해피해킹에서는 이 조합 시작 키를 손가락으로 정확히 누르지 않고 손바닥의 여러 구석을 이용해 대충 누른 상태에서 아직 자유로운 나머지 손가락으로 키를 눌러 왔습니다. 그런데 백축 스위치 키보드에서 조합 시작 키를 그런 식으로 누르면 키가 눌린 것으로 판정하지 않아 쉽게 오타를 내게 되었습니다. 이 상황을 방지하려면 조합 시작 키 역시 손가락으로 정확하게 눌러야 합니다.

이런 이전에 사용하던 키보드와 다른 특성들은 새 키보드의 특성으로 이해해야 할 지 아니면 이전에 같은 키보드를 너무 오래 사용해 온 제 습관으로 인한 결과라고 이해해야 할 지 고민입니다. 당연히 어느 쪽이든 대안을 찾고 적응해 가는 방법 밖에 없지만 새 키보드의 특성이라고 하기에는 이 정도 가격대 키보드 치고 여러 조합 시작 키를 아무렇게나 누르는 방식을 지원하지 않는 것이 실망스러웠고 또 그냥 습관이라고 말하기에는 지금까지 손바닥으로 대충 눌러도 정확하게 동작하던 해피해킹이 나쁜 키보드 사용 방식을 습관으로 정착 시킨 원인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가족의 기타 의견으로는 새 키보드라며 왜 사자마자 누리끼리한 색이냐는 질문이 있었는데 집에서 쓰는 구입한지 3년 된 해피해킹 프로2 흰색 무각보다 훨씬 누리끼리해서 뭐라 할 말이 없었습니다. 결론. 20년만에 큰 맘 먹고 새 키보드를 샀는데 혼파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