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에 시대 구분이 있는 이유

문명 시리즈의 테크트리에는 시대 구분이 있습니다. 늘 플레이하며 별 생각이 없었는데 이 구분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문명에 시대 구분이 있는 이유

게임에 들어갈 테크트리를 설계할 일이 있었습니다. MMO 게임에 들어갈 생활컨텐츠 일부를 설계해야 했는데 정작 그 일부 기능을 설계하려고 보니 아직 생활컨텐츠에 대한 별다른 고려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개발이 계속되고 있었고 그 일부를 설계한다 하더라도 이 일부가 게임의 나머지 부분과 연결될 방법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생활컨텐츠 일부를 설계하며 이 기능을 나머지 게임에 연결하기 위한 기반을 함께 설계하게 되어 다른 프로젝트에서라면 단순한 모양으로 끝났을 기능을 컨셉 부터 설명해야 하는 상황에 처합니다. 생활컨텐츠 기반을 설계하기 위해 각 고객이 인게임에서 생활 방면으로 성장함에 따라 기술 수준이 올라가고 이에 따라 새롭게 추가되는 컨텐츠를 접하는 모양에 대한 컨셉을 만들었는데 여기에는 여러 게임에서 마주칠 수 있는 테크트리 모양을 사용하기로 합니다. 그런데 다른 게임의 테크트리를 보기만 하다가 막상 직접 테크트리를 만들려고 보니 바닥부터 만들기에는 생각보다 시간 소모적인 일이 될 것 같아 컨셉 단계에서는 다른 게임에 나오는 테크트리를 가져와 설명한 다음 시간을 들여 테크트리를 작성하기로 했습니다.

게임 경험에 따라 모두가 다를텐데 저는 테크트리 하면 맨 처음 떠오르는 게임은 바로 문명 시리즈입니다. 문명 시리즈를 그만 둘 수 없게 만드는 여러 가지 장치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턴 단위로 진행되며 내가 직접 턴을 넘기지 않으면 세계 전체가 멈춰 이번에 내가 수행한 행동들에 대한 결과를 즉시 보여주지 않는 것입니다. 턴을 넘기면 나머지 문명들도 의사결정에 의한 동작을 수행하며 이들이 상호작용을 일으켜 결과를 보여주지만 그 결과가 일어난 그 순간에 즉시 개입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의사결정에 의한 결과를 본 다음 다시 턴이 돌아와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상황을 반복하는데 이 과정을 극도로 단순하게 표현하면 마치 결과에 개입할 수 있는 뽑기와 비슷해 일단 게임을 시작하면 쉽사리 그만 둘 수가 없기도 합니다. 또한 어떤 의사결정은 바로 이번 턴을 종료할 때 결과를 알 수 없습니다. 가령 이번 세계에서 근대에 어떤 정치 체제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다른 문명과 상호작용 하는 방법이 크게 달라지는데 그 결과가 우리 문명에 긍정적이었는지는 시간이 많이 지난 다음에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들이 동시에 작용하며 게임을 그만 두기 어렵게 만듭니다.

문명을 플레이 하며 내리는 여러 가지 의사결정에 흥미로운 부분은 바로 테크트리입니다. 문명에는 고대로부터 미래에 이르는 테크트리가 있는데 문명을 시작하면 고대에서부터 한정된 자원으로 테크트리의 항목을 선택해야 합니다. 고대에는 도예, 점성술, 문자, 궁술 같은 서로 결이 상당히 다른 항목들을 선택할 수 있는데 이들 각각은 연구하는데 드는 비용이 상당히 다릅니다. 고대에 문자를 개발해 학문을 발달 시키는 선택을 할 수 있지만 종종 초반에 다른 문명의 침략을 버텨내지 못하고 멸망 당하기도 합니다. 반대로 초반에 궁술을 개발해 다른 문명을 지배할 수 있지만 시간이 흐르며 다른 문명보다 기술 발전이 늦어져 어려움을 겪게 될 수도 있습니다. 테크트리의 각 항목은 직접 개발할 수도 있고 다른 문명과 상호작용을 통해 획득할 수도 있는데 어떤 항목에 먼저 접근했느냐에 따라 적어도 그 시대, 그리고 그 이후 시대에 이르기까지 게임 진행에 많은 영향을 줍니다. 이 테크트리의 각 항목을 살펴보면 실제 현대 지구 문명이 어떤 경로를 통해 발전해 왔는지 여러 번의 시도에 걸친 일종의 대체 역사를 통해 감각적으로 배울 수 있어 앞서 설명한 이유 만큼이나 문명을 완전히 그만 두기 어렵게 만드는 이유로 작용합니다.

특히 테크트리는 종종 어느 시점에서 큰 의사결정을 하기를 요구하는데 트리 모양을 보면 어느 지점에서 한 가지 기술을 선택하면 한동안 다른 선택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기술에 접근할 방법이 없어집니다. 이 때 다른 문명과 상호작용, 가령 협상이나 전쟁을 통해 의사결정에 선택을 받지 못한 다른 기술에 접근할 수 있기는 하지만 특정 기술에 먼저 접근한 다음 이를 기반으로 문명을 구축한 다음 다른 문명으로부터 기술을 가져오는 경험들은 다른 문명과 상호작용 하는 방법, 관심을 가져야 하는 자원, 생산해야 하는 유닛 따위에 차이를 만들어 플레이를 머리 속에서 실제 역사로 치환해 스토리를 만들기도 하고 또 종종 이 문명에 살고 있는 개인의 입장에서 제 의사결정에 의한 영향을 상상해 보기도 합니다. 문명의 테크트리는 인류 문명에 중요한 변곡을 만든 여러 기술을 그저 늘어놓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를 자세히 보면 볼수록 게임의 여러 시점에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게 만든 다음 그 댓가를 게임 속에서 이어지는 수 백 년의 시간을 통해 결과를 보게 만들며 과거의 의사결정에 의한 결과를 오롯이 현재의 자신이 감당해야만 하게 만드는 아주 독특한 게임 플레이를 만들어 내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처음 이 테크트리를 고안할 때 테크트리에 포함될 여러 기술과 기술 사이의 연결 관계를 설정하는데 아주 많은 시간을 들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저는 게임을 만드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시드마이어는 아니므로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그런 테크트리를 바닥부터 만드는 대신 일단 현대에 참고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기술 분류 자료와 문명의 테크트리를 참고해 우리가 생활컨텐츠에 활용할 테크트리를 구성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그리 어렵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게임의 설정 상 문명처럼 고대로부터 시작하는 테크트리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RTS 게임들이 그렇듯 게임이 배경으로 삼은 특정 시대를 기반으로 한 테크트리를 만드는데 더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현대 기준으로 여러 학문의 분류를 나열한 자료에 기반해 시작해 이들의 선후관계를 이전에 문명을 플레이 하며 익힌 감각에 기반해 설정하기를 반복해 테크트리 한 판을 만들었습니다. 가령 먼저 화학 노드 다음에 약학이 오고 또 채광 다음에 금속가공 노드가 나타나는 식입니다. 그렇게 모든 노드를 낮은 기술 수준에서 높은 기술 수준 방향으로 연결하다 보면 문명과 비슷하지만 우리 게임에 어울리는 테크트리를 만들 수 있을 테고 일단 첫 버전까지는 빠르게 도달할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해보니 그리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문명의 테크트리는 시간이 흐르고 과학기술이 발전해 감에 따라 특정 시점에서 할 수 있는 의사결정 수가 너무 많지 않도록 잘 통제하고 있었는데 제가 만든 테크트리는 전체적으로 문명의 테크트리와 노드 수는 비슷했지만 노드 사이에 연결 복잡도가 너무 높아 알아보기 조차 어려운 상태가 됩니다. 또 문명에서는 어느 시점에 선택할 수 있는 노드 수가 너무 많아지지 않도록 통제해 트리를 게임 처음부터 끝에 이르도록 아주 깊게 만들어 어떤 노드를 선택해 플레이 해 왔는지 그 궤적에 따라 게임에 승리하거나 패배할 때 전체적인 경험을 상당히 다르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문명 테크트리와 비슷한 개수의 노드를 늘어놓고 그저 기술 수준이 낮은 항목에서 기술 수준이 높은 항목으로 이어지도록 연결을 그려 놓고 보니 각 시점에서 가능한 의사결정의 범위가 너무 넓을 뿐 아니라 의사결정에 따른 영향 역시 특별하지 않아 보였습니다. 가령 약초학 노드를 선택하면 이를 근거로 포션을 제작할 수 있도록 할 생각이었는데 약초학과 동시에 선택 대상이 되는 기술 종류가 많았고 또 결국 조금만 뒤로 가면 과학 기술들이 다시 특정 지점으로 쉽게 모여 이전에 어떤 선택을 했더라도 결국 같은 결과에 도달해 실제 역사와 비교하면 말이 되지만 게임 플레이라고 생각하면 선택이 미래에 아무런 차이도 만들지 못하는 상태가 됩니다. 일단 그런 미래까지 생각하기 전에 이미 과학기술 노드 사이에 연결 관계가 너무 복잡해 이를 그대로 사용한다면 게임 상에서 이 관계를 잘 보여줄 인터페이스를 만드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문명의 테크트리나 제가 만든 테크트리 양쪽 모두 기술 수준이 낮은 노드에서 기술 수준이 높은 노드 방향으로 연결되기를 반복한다는 점에서 별 차이가 없는데 왜 문명은 복잡도를 통제할 수 있고 또 각 선택마다 의미 있는 플레이 상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반면 제가 만든 테크트리는 그렇지 못한지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문득 이 시점에 문명의 테크트리에 있지만 제가 고안한 테크트리에는 없는 특징이 있다는 점을 발견합니다. 바로 시대 구분입니다. 문명을 플레이 하다 보면 테크트리 상의 특정 노드에 도달하면 시대가 바뀜니다. 가령 처음 시작할 때 고대 시대에서 시작하면 노드를 열어 감에 따라 중세, 근대, 현대 등의 서로 다른 여러 시대를 거칩니다. 시대가 바뀌면 사용할 수 있는 유닛이 달라지고 또 게임의 전체적인 그래픽 테마, 음악 등 여러 가지가 바뀌며 오랜 시간에 걸친 플레이에 주의를 환기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또한 시리즈에 따라 특정 시대에만 적용되는 게임 규칙이 추가되기도 합니다. 고대 시대를 마무리하고 중세가 시작되면 잠깐 화장실에 다녀와 이어질 장시간의 플레이에 대비하기에도 딱 좋은 시점입니다. 처음에는 이런 시대 구분이 장시간에 걸친 플레이에 주의를 환기하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고 마침 그 시점을 과학 기술이 발전에 연동할 수 있기 때문에 테크트리의 특정 시점에 시대가 변하도록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명의 시대 구분은 그저 주의를 환기하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해 새로운 유닛, 새로운 테마와 배경음악, 새로운 규칙을 제공함과 동시에 테크트리의 복잡도를 통제하는데 활용되고 있다는 점을 문득 깨달았습니다. 문명은 각 시대마다 테크트리 상에 등장하는 노드 수가 자연스럽게 제한됩니다. 연구 비용이 낮은 노드는 바로 다음 노드에 자연스럽게 연결되지만 연구 비용이 높고 게임에 끼치는 영향이 큰 노드는 종종 한 노드를 연구하고 나면 갑자기 그 시대의 꽤 후반까지 한 번에 이동해 그 다음 선택을 하도록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여러 노드가 연구 비용에 따라 그 다음 노드에 연결되는 규칙 뿐 아니라 동시에 한 노드는 한 번에 같은 시대의 다음 노드에만 연결되는 제한을 통해 한 시대에 너무 많은 과학 기술 노드가 나타나지 않도록 통제하고 있습니다. 만약 문명 테크트리가 시대 구분 없이 그저 플레이에 차이를 주는 정도에 따라, 그리고 실제 세계의 경험에 따라 감각적으로 그 다음에 이어질 노드를 연걸하기를 반복해 작성했다면 마치 제가 작성한 테크트리처럼 동시에 너무 많은 노드가 나타나고 또 이들 사이에 너무 많은 연결이 생겨 알아보기 어려운 문제는 둘째 치고 사실상 이를 기반으로 게임 규칙을 만들어낼 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문명은 시대 구분을 통해 같은 시대에 등장할 과학기술 노드 수를 줄이고 같은 시점에 선택할 수 있는 과학기술 수 역시 크게 줄였을 뿐 아니라 이 덕분에 한 시점에 어떤 과학기술 노드를 선택하기를 반복한 궤적을 그리며 플레이 했는지에 따라 먼 미래에 그 동안 밟아 온 노드들의 궤적에 따라 다른 플레이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합니다.

제가 고안해야 하는 생활컨텐츠 테크트리는 문명의 여러 시대를 관통하는 수준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굳이 비슷한 사례를 찾는다면 문명 보다는 특정 시대를 배경으로 한 RTS 게임의 테크트리에 더 가까울 겁니다. 다만 RTS 장르는 한 판 안에서 가장 낮은 수준의 과학기술부터 가장 높은 수준의 과학기술까지 연결될 수 있으므로 각 노드를 선택할 때마다 문명에 비해 훨씬 큰 차이를 줄 수 있지만 제가 고안해야 하는 테크트리를 그렇게 만들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문명의 시대 구분 수준은 아니더라도 테크트리의 여러 노드가 동시에 등장하는 각 시점에 따라 어떤 구분을 두고 그 구분 전후의 노드가 직접 연결되지 않도록 하는 규칙을 만들면 한 번에 너무 많은 노드가 나타나고 또 이들 사이의 연결 관계가 너무 복잡해지며 그 결과 여러 선택에도 불구하고 결국 비슷한 결과에 도달하게 될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문명 테크트리의 시대 구분은 여러 역할을 하지만 문명의 특징을 잘 살릴 수 있도록 각 시점의 선택이 너무 많지 않게, 그리고 선택에 따라 게임플레이에 차이를 만들 수 있는 수준으로유지할 수 있으면서도 노드 사이의 연결 복잡도를 통제하는 더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문명을 그렇게나 오랜 세월에 걸쳐 플레이 하며 여러 시대를 넘나들고 시대가 바뀔 때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에 다녀오고 밥을 먹고 벌써 어두워진 바깥을 보고 열려 있던 창문을 닫으면서도 그런 행동을 유발한 시대 구분이 게임에 어떤 근본적인 역할을 하는지 고민해본 적 없었던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런 차이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테크트리 모양을 만들기 위해 문명의 과학기술들을 참고하려고 했던 자신이 얼마나 순진한지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 프랜차이즈 이름으로만 남아 있고 아마도 더 이상 사람들을 자기 방에 불러 편안한 녹색 의자에 앉혀 놓고 잔소리를 일삼는 역할을 하고 있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이 프랜차이즈를 창조한 바로 그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지 다시 한 번 되새기며 함부로 깝치지 말아야겠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Sogno di Volare 듣고 가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