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디아블로 이모탈은 전투가 자동이 아니죠?
‘요즘 무슨 게임 하시나요?’는 회사에서 차 마시다가, 밥 먹다가 나누는 대화 주제 중 하나입니다. 이제는 게임회사라도 모든 사람들이 항상 게임을 플레이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또 더 이상 그걸 기대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게임회사에 이전 시대에 비해 훨씬 여러 분야의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고 이들 모두가 게임 플레이가 취미이거나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게임디자이너들은 다른 직군에 비해서는 여전히 게임을 취미로든 업무 목적으로든 플레이 하기를 요구 받곤 하는데 이는 어느 정도 교육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직접 좋아하지 않고서는 같은 것을 설계하기가 아주 어렵기 때문이기도 할 겁니다.
얼마 전 밥 먹다가 이 주제로 이야기할 때 저는 디아블로 이모탈을 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약 한 달 전부터 날마다 시간 날 때 꼬박꼬박 플레이 하고 있거든요. 첫 공개 때 간담이 서늘한 반응을 받은 일이나 영어권 유튜브에서 쉴 새 없이 까이는 상황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아무데서나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인데 그게 무려 디아블로인데다가 모바일에서도 플레이 감각이 훌륭하고 거기에 탄탄한 P2W 요소를 잘 쌓아올린 좋은 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원작 기반에 소위 양산형 장르를 설계하더라도 이렇게 잘 설계하고 이렇게 잘 실현하기는 이런 게임을 꽤 오랫동안 만들어 왔음에도 여전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건 지난번에도 말했듯 동서양 게임 역사의 집대성이라고 할 만 합니다.
자. 그건 그렇고 이 대화를 하다가 누군가 ‘아. 디아블로엔 왜 자동전투가 없었을까요. 자동전투가 있었으면 플레이했을텐데.’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다른 게임에도 이런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모바일 환경에서 MMO 게임은 이제 과거와 달리 완전히 다른 장르가 되었습니다. 모바일에서 이제 이 장르는 매니지먼트 게임입니다. 플레이어는 인게임의 플레이어캐릭터가 목적에 따라 활동하고 전투를 수행하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마을에서 포션을 구입해주고 가득 찬 인벤토리를 비워주고 퀘스트를 눌러주고 또 현재 위험한 필드를 알아내 그곳을 피하거나 도전하고 또 플레이어캐릭터의 원활한 게임 내 관계형성을 위해 커뮤니티 활동을 합니다. 과거에 적을 직접 공격하고 스킬을 사용하던 그 게임과 겉모양은 상당히 비슷하지만 장르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모바일에서 이 장르의 핵심 중 하나는 자동전투입니다. 감독이 직접 볼을 차지 않고 직접 운전을 하거나 직접 페달을 굴리지 않듯 자동전투는 매니지먼트 장르 자체를 존재할 수 있게 합니다. 이 메커닉이 좀 더 발전해서 ‘소탕권’이 되기도 하고요. 초반에는 플레이어캐릭터가 가진 스킬 버튼들을 누를 수 있게 될 때마다 차례로 눌러주는 수준이었다면 이제는 상황에 따라 효율적으로 스킬을 사용할 뿐 아니라 나를 둘러싼 적 중 가장 유효한 - 가장 강력한과는 다름 - 대상에게 스킬을 사용하거나 스킬 사용 조건을 입맛에 맞춰 설정할 수 있게 됐습니다. 또한 자동전투와 함께 자동퀘스트 역시 현대의 매니지먼트 장르를 구성하는 중요 요소입니다. 이 기능들을 통해 플레이어는 플레이어캐릭터의 매니지먼트 플레이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시스템디자이너들은 이 기능을 효율적으로 설계할 방법을 찾는데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기울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디아블로 이모탈을 추천한 사람들로부터 들은 비슷비슷한 말은 이 자동전투의 유무에 대한 것입니다. 매니지먼트 게임의 자동전투에 익숙해지고 나면 모바일 기기로 직접 조작을 요구하는 전통적인 RPG 장르를 플레이하기 어렵습니다. 마치 액션성을 적극적으로 채용하기 이전 시대에 스킬 캔슬이 극도로 제한적인 게임을 플레이하는 경험처럼 가슴에 돌 덩어리가 내려앉는 듯한 극도의 답답함마저 느낍니다. 당연히 수동 조작을 요구하는 디아블로 이모탈을 플레이 할 수가 없을 겁니다. 그냥 목적지까지 발자국을 따라 걸어서 이동하는 순간 폰을 놔 버릴 정도로 어이없이 귀찮고 답답한 경험이거든요. 하지만 수동전투는 디아블로의 장르 정체성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결코 제거할 수가 없습니다. 디아블로에서 수동 전투를 제거하면 디아블로의 장르가 바뀝니다.
디아블로 이모탈의 장르를 찾아보면 액션 롤플레잉 MMO라고 되어 있는데 핵심 플레이에 집중해보면 이 게임의 플레이를 핵 앤 슬래시라고도 합니다. 이 플레이 방식은 플레이어가 압도적인 화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만만찮은 적들에게 극단적으로 자원 효율적인 방법으로 대응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적들에 둘러싸여 자칫하면 바로 죽을 수 있습니다. 동시에 플레이어캐릭터 역시 만만찮은 화력을 가지고 있어 이를 플레이어의 조작에 따라 효율적인 위치를 선정하고 알맞은 스킬을 알맞은 순간에 사용해 자원 효율적으로 적들을 쓸어버리고 이에 따른 직관적인 보상을 받는 경험을 주는 장르입니다. 만약 이 게임이 자동전투를 지원하면 이 핵 앤 슬래시의 핵심 플레이가 사라지고 매니지먼트 게임이 됩니다. 여전히 이 게임을 디아블로라고 부를 수는 있겠지만 더이상 핵 앤 슬래시 플레이를 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래서 이 게임은 자동전투를 지원하지 않습니다. 덕분에 동아시아에서 MMO 기반 플레이어캐릭터 매니지먼트 장르에 익숙해진 플레이어들을 잠재고객으로 유지할 수 없게 됐지만 핵 앤 슬래시 장르를 유지하고 모바일에서 플레이할 수 있는 디아블로를 만들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