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나 에이스로 살 수는 없다

언제까지나 에이스로 살 수는 없다

이 주제는 꽤 오래 전부터 생각해 볼 작정으로 메모해 놨지만 마땅히 생각해 볼 만한 기회를 찾지 못하다가 얼마 전 내가 믿던 세계의 붕괴에 언급한 상황을 겪으며 생각해 볼 기회를 맞이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개인적인 기여를 하는 입장으로 꽤 오랫동안 일해 왔습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승진이 느려 이대로 괜찮은가 겁을 먹기도 했지만 먼저 관리자로 승진했던 분들이 여러 가지로 고통을 받은 끝에 다시 개인 기여자로 돌아오기도 하는 모습을 보며 분명 만만치 않은 일일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 기여자 입장에서 생산성이 결코 낮지 않았기 때문에 관리자로 승진 시킬 생각을 했다가도 관리자로 승진 시킬 때 얻을 생산성의 저하, 초보 관리자를 운용함에 따라 생기는 위험성 등을 고려할 때 실질적으로는 관리 역할을 어느 정도 하고 있었지만 표면적으로는 개인 기여자 역할로 남겨 놓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 기여자로써는 의미 있는 역할을 하고 있지만 관리자로써는 제대로 된 역할을 할 수 없으리라는 판단에 의해 남들보다 더 오랜 기간 동안 개인 기여자에 마물렀을 수도 있습니다.

항상 승진은 승진에 의해 자리가 바뀌고 업무가 바뀌기 보다는 이미 승진할 위치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을 때 그 역할에 맞는 자리로 옮기는 일종의 선언이라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팀 사이에 조율을 하다 보면 아무리 실질적인 관리자 역할을 하고 있더라도 그 역할과 위치에 대한 선언이 일어나지 않으면 종종 협상에 불리한 입장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은 나의 옮음을 설득하거나 개인적인 친분에 기대는 등 약간은 소모적인 쪽으로 흘러가기 마련이어서 업무에 온전히 집중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을 마주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관리자 역할을 본격적으로 해야만 하는 순간에도 웬만하면 관리자 역할을 직접 수행하기를 최대한 피해 왔습니다. 짧게 생각해 보면 일단 괸라자가 하는 주요 업무는 딱 봐도 별로 재미 있지 않아 보입니다. 개인 기여자는 내가 기여한 업무가 직접 게임에 나타나고 내가 배치한 액터가 게임에 나오고 내가 고안한 규칙에 따라 경험치가 들어오고 내가 고안한 성장 과정과 허들에 따라 고통 받거나 기뻐하는 피드백을 얻을 수 있지만 관리자는 그런 제품으로부터 오는 피드백을 받기 어려워 보였고 이는 일 자체가 재미 없을 거라는 선입견을 가지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연차가 쌓이며 이미 관리자에 요구되는 역할을 어느 정도 수행하고 있는 마당에 굳이 관리자 직함을 달아 다른 개인 기여자들로부터 접근성을 떨어뜨릴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생각을 했고 관리자 직함을 피하는 근거로 한동안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결국 개인 기여자로써 제품에 관여하는 입장에서는 아무리 생산성이 좋아도 분명한 한계가 있으며 그 생산성이 낭비 없이 올바른 방향으로 활용되도록 미리 길을 닦고 장애물을 치우는 역할 역시 제품에 직접 드러나지는 않지만 제품에 기여하는 사람들의 생산성을 올려 주며 이 향상된 생산성들의 집합이야말로 제품 그 자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비슷한 시기에 다행스럽게도 여전히 경쟁력 있는 생산성을 보이고 있지만 과연 이 상태를 얼마나 더 유지할 수 있을지, 그리고 만약 명시적인 관리자가 아닌 상태로 생산성에 경쟁력이 떨어지는 상태가 되면 그 때는 정말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해보니 덜컥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남들보다는 꽤 길었던 개인 기여자 역할을 적당히 마무리하고 이전과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또 완전히 같지도 않은 명시적인 관리자 역할을 인정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명시적인 관리자 역할을 한다고 해서 개인 기여자로써 역할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는데 이는 앞서 내가 믿던 세계의 붕괴에 언급한 대로 업무 스타일 상 업무 범위가 넓은 편이어서 아무때나, 아무데나 들어가 역할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전에는 개인 기여자 관점에서 재미있는 일에 더 적극적으로 반응했다면 명시적인 관리자 입장이 된 다음부터는 내가 보기에 재미있어 보이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도 재미있어 보이는 법이라 그런 일을 맡는 대신 담당자를 결정할 때 다들 눈치만 보며 머뭇거리는 일을 주로 가져오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이러기 시작하면 하루하루 업무가 꽤 재미 없어질 줄 알았는데 재미 없는 일을 처리하는 사이에 멤버들이 재미 있는 일을 진행 시켜 결과를 만들어내는 모습을 보니 이것도 그리 나쁘지 않음을 알게 됨.

하지만 이전에 비해 고민할 점도 많고 여전히 일정 수준 이상의 생산성을 유지해야 할 뿐 아니라 생산성을 멤버들에게 때로는 알려드리고 또 때로는 요구하기도 하는 역할 사이에서 적당한 자리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한때는 나름 팀의 에이스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럴 수 없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고 또 개인 기여자로써 역할에 한계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미 하고 있는 역할에 명시적인 직함이 붙었다는 인식 이상으로 팀이나 프로젝트 전체의 생산성과 목표에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언제까지나 에이스로 살 수는 없습니다. 지금도 업무에 나름의 재미가 있지만 가끔 개인 기여자로써 에이스 역할을 할 때도 재미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기회가 오면 호시탐탐 비슷한 역할을 팀과 프로젝트에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안에서 할 수 없을지 고민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