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컨의 날
과거 어느 여름날 반복되는 더위를 참지 못한 저는 딱 하루만 더 참으면 되는 상황에 충동적이고 또 잘못된 소비를 저지르고 맙니다.
두어 달 전 마지막 아르바이트의 유산과 게임 업계의 고용 형태는 프로젝트 단위 계약직에 가깝습니다에서 상경한 직후에 한참 지독하게 살던 이야기를 조금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난 지금은 그런 상태를 조금 벗어났는가 하면 썩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아마도 앞 세대로부터 부를 전혀 이전 받지 못한 사람이 평생에 걸쳐 일을 해도 결코 그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자본주의 규칙의 근간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튼 그럭저럭 죽지는 않을 정도로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고민거리는 종종 들려오는 세계 최고의 노인 빈곤률에 관한 이야기인데 머지 않은 어느 시점에 그 대열에 합류하는 결말을 맞이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종종 해 봅니다.
그건 그렇고 이 글을 쓰는 2023년 8월 말 현재 올해의 광복절은 이미 지나가 버렸습니다. 8월 15일은 많은 사람들에게 광복절로 알려져 있고 또 영화 오펜하이머의 한국 개봉일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어른들의 사정 때문에 다른 나라에 비해 개봉이 미뤄졌을 것 같지만 사실 15일로 맞추는 바람에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억측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의미 있는 날짜에 맞춰 개봉하려 했다면 7월 16일의 정확한 시각을 포함하는 시간에 맞춰 개봉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국인들과 전 세계 사람들 대부분에게 기억되는 8월 15일과는 달리 개인적으로 이 날은 세계 제 2차 대전이나 한국의 독립기념일과는 무관하게 에어컨의 날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처음 지방에서 올라와 출퇴근에 제법 시간이 걸리는 변두리에 오래된 주택들이 밀집된 지역에 집을 구했는데 워낙 변두리여서 그런지 지하철 역 까지 그리 멀지도 않았지만 꽤 낮은 비용으로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미 그 시대에도 지은 지 적어도 30년 넘게 지난 주택이었는데 나중에 가서야 이런 형식의 집이 한때 정부에 의해 집중적으로 건설되던 형식의 주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집은 대략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가운데 배수구가 있는 시멘트로 포장된 마당 을 향해 내려가는 계단이 두어 칸 있고 가까이에는 반지하 집이 세 칸 있었습니다. 그 좁은 마당이자 반지하 방들로 연결되는 로비이기도 한 공간 오른 편으로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집 바깥쪽을 따라 꺾여 올라갔고 그렇게 외부에 노출된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면 원래는 한 층 전체가 한 집이었을 것이 분명한 공간을 두 집으로 분리해 한 집에는 나중에 만들었을 것 같은 화장실이 어정쩡한 위치에 있는 첫 집이 나타납니다. 이게 제 집이었습니다.
여기서 외부에 노출된 복도를 따라가면 옥상으로 연결되는 철제 계단이 있었고 옥상에는 옥탑이 있었지만 이 곳은 창고로만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집 주인은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마주 보이는 첫 번째 반지하 방에 살고 있었는데 이 집 전체를 매입한 다음 나머지 방들을 임대 해 얻은 수익으로 생활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전세로 집을 얻은 사람들로부터 받은 돈으로는 은행에 담보대출금 일부를 갚는데 사용하고 월세로 집을 얻은 사람들로부터 받은 돈은 생활비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집주인은 가끔 외부에 노출되어 있는 기역자로 꺾인 계단을 올라 2층 복도를 지나 철제 계단을 올라 옥상에 도착해 아무렇게 널려 있는 화분에 물을 주기도 하고 빨래를 널기도 하고 고추를 널어 말리기도 하고 또 창고에 뭘 넣고 빼기도 했습니다. 집에 있다 보면 문 밖으로 집 주인이 하루에도 몇 번 씩 집 앞 복도와 철제 계단을 오르내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집에 처음 이사 왔을 때는 한창 여름이었는데 여름을 날 수 있는 도구라고는 선풍기 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선풍기보다 더 나은 냉방 기구를 상상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이미 집과 최소한의 가재도구를 사는데 가진 돈을 다 써 버리는 바람에 제대로 된 냉방기구를 상상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어차피 가장 더운 낮 시간에는 대부분 집에 있지 않으니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늦은 퇴근을 하며 집 문을 열 때 집 안에 덩어리진 채로 거의 굳어있다시피 한 뜨끈한 공기와 이 공기로 한껏 데워진 싸구려 물건들로부터 나는 유쾌하지는 않은 냄새가 저를 맞이하곤 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냄새들은 아마 현대에 환경호르몬이라고 부르는 종류의 물질로부터 나는 냄새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여튼 그런 집에 들어가 문을 좀 열고 선풍기를 좀 틀고 좀 씻고 늘어져 있다 보면 그럭저럭 잠 잘 수 있는 상태가 되어 어쨌든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평일은 그렇게 보낼 수 있었지만 휴일에는 문제가 좀 있었는데 방 안의 모든 물건들로부터 그들을 구성한 물질이 고온에 반응하며 내는 온갖 냄새 한복판에 앉아 있다 보니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고온으로부터 나는 온갖 화학반응이 일어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또 더위에 버티려고 플라스틱 대야에 물을 조금 받아다가 책상 밑에 놓고 컴퓨터를 쓸 때 발을 대야에 넣고 있었는데 한번은 발이 대야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깜빡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미끄러져 방 안을 온통 물로 적셔 버립니다. 또 한번은 회사 동료 분의 돌잔치에 가기로 했는데 하루 종일 뜨거운 바닥에 누워 있다가 기력을 완전히 소진하고 오직 눈만 떠서 시계가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약속 시간을 넘겨 그냥 그 상태 그대로 잠들지도 않고 그렇다고 움직이지도 않은 채로 시계 초침이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이쯤 되니 이거 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별다른 해결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 즈음에는 한창 신용카드 대란이 슬슬 끝을 향해 달려 가고 있었지만 월급이 아무리 적어도 회사에 고용되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면 신용카드를 발급 받을 수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월급이 너무나 적은 관계로 신용카드는 현금을 들고 다니는 수고를 대신하는 용도 이상으로 사용되지 않았고 월말 마다 찾아오는 신용카드 사용 명세서에는 지금 생각해도 아주 귀여운 금액이 찍힐 뿐이었습니다. 신용카드 대란의 끝자락이라서 그런지 모든 사람들이 신용카드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고 있었고 한참 신용카드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우매함과 체크카드의 안전성, 현금의 유용함 따위를 설파하는 말을 사방에서 듣고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까지도 그 말에는 별로 동의하지 않는데 이 주제는 다른 기회에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 오후에 여느 주말과 마찬가지로 뜨끈하게 데워진 방 안에서 아무 것도 할 기력도 없이 바닥에 누워 있다가 갑자기 이렇게 살 수는 없다 싶었습니다. 이미 지난 몇 주에 걸쳐 회사에 출근하지 않는 주말에 외출할 때를 제외하면 방 바닥에 누워 아무 것도 할 기력 없이 그저 바닥에 누워 기온이 조금 더 내려가기만을 기다리는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다른 사람들처럼 게임을 하거나 공부를 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만나거나 회사 동료의 돌잔치에 가는 등의 사회인으로써 주말에 해야 할 일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낮 시간에는 너무 더워 밤이 돼서야 세탁, 청소 같은 일을 처리했는데 당연히 이런 행동은 얇은 벽과 바닥을 사이에 둔 다른 집들로부터 항의를 받았고 이 날에도 낮에는 너무 더워 아무 것도 못한 챙 밀린 빨래를 내일 오전에는 처리해야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주말 마다 바닥에 드러누워 아무 것도 안 하는 삶을 계속하다가는 모르긴 몰라도 좋은 결과로 연결되지는 않을 것이 확실합니다. 아무 행동도 할 기력도 없이 바닥에 누워 있던 저는 갑자기 머릿속 저 편으로부터 끓어오르는 짜증과 분노에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켜 ‘아 싯팔! 못참겠다!!’ 하고 소리친 다음 이미 슬슬 어둑어둑해진 창문 밖을 내다보고는 책상 위에 있던 지갑과 열쇠 - 집 문은 열쇠로 여닫아야 했음 - 를 집어 주머니에 쑤셔 넣은 다음 슬리퍼를 끌고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가 좁디 좁은 콘크리트 마당을 지나 대문 밖으로 나옵니다. 집 밖은 바람이 약하게 부는 것 같았지만 집들에 밀집해 있어 오던 바람도 다 가로 막히곤 해 2층에 있던 방에도 바람은 거의 들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성큼성큼 걸어 골목 끝까지 나가 차들이 지나 다니는 길로 나가 좁다란 인도를 화 난 얼굴에 넓은 보폭으로 걸었습니다. 슬슬 저녁 식사를 준비할 시간이어서 그런지 가족 단위로 뭘 먹으러 나온 사람들도 있고 또 주말에도 어딘가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것 같은 사람들도 지나갑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에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길 끝까지 걸어 모퉁이를 돌아 또 걸어 지하철 역 입구를 그냥 지나쳐 또 모퉁이를 돌아 이번에는 차들이 많이 다니는 큰 길 옆에 있는 인도를 걸었습니다. 인도 옆에 있는 가게들은 이미 환하게 불을 밝히기 시작했는데 그런 가게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화 난 얼굴을 풀지 않고 걸어 도착한 곳은 집에서 가장 가까운 삼성전자 대리점입니다. 삼성전자 대리점. 분명 거기엔 내가 살 수 없을 정도로 비싼 최신 TV와 컴퓨터와 냉장고와 세탁기 같은 온갖 물건을 전시하고 있었는데 분명 거기에는 실외기를 연결하지는 않았을 에어컨들이 벽면을 가득 매운 채 그저 바람을 뿜어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당기세요’라고 적힌 무거운 유리문을 발로 거의 박차 밀어 열고 들어가 - 그럴거면 왜 당기라고 써있었지? - 여전히 화난 얼굴의 나를 보고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라고 묻는 직원에게 다짜고짜 외치다시피 말합니다. ‘에어컨! 에어컨 주세요!’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 직원은 좀 당황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슬슬 저녁 시간대에 더 이상 손님이 찾아오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의 주말 전자제품 매장에 갑자기 화난 얼굴을 한 아저씨가 쳐들어와 다짜고짜 에어컨을 내놓으라고 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사실 이 매장에서 제가 어떻게 행동했는지는 이제 시간이 많이 지나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대략 에어컨을 달라고 했고 벽에 걸린 에어컨 중 어느 하나를 가리켰으며 지금 주문하면 배달과 설치에 며칠이 걸린다는 설명을 듣다가 말을 가로막고 지금 당장, 지금 저기 걸린 저걸 그냥 내놓으라고 꼬장을 부린 것은 확실합니다. 직원은 어떻게든 오늘 판매를 하고 정상적인 절차 대로 새 제품을 배송해 설치하게 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이미 더위에 맛이 간 저를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매장에서 주문을 어떻게 마쳤는지 역시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결론은 그로부터 한 시간이 좀 넘게 지났을 무렵 매장에 전시되어 있던 바로 그 에어컨과 그 에어컨을 지원하는 상자에 포장된 조그만 실외기를 실은 트럭이 집에 도착합니다. 이제 완전히 캄캄해진 시간이었고 설치 기사님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방 구석 벽에 에어컨을 붙이고 실외기를 창문 밖에 내놓고 둘 사이를 연결했습니다. 하지만 벽을 뚫는 작업은 거부했는데 그 시간대에 벽을 뚫다가 다른 집 사람들과 싸움이 날 수도 있다는 이유였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가끔 유머 사이트에 올라오는 엉뚱하게 설치된 에어컨 사진을 만들어내는 부류의 설치 기사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저는 결국 이 사람이 벽을 뚫도록 설득할 수 없었고 창문으로 연결된 실외기 호스는 창문을 영원히 닫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지금 같으면 다 원상복구하고 당장 나가라고 할 만한 상황이었지만 이미 그 때의 저는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습니다.
기사가 - 님 자를 별로 붙여 주고 싶지 않음 - 설치를 가장한 에어컨 덤핑을 마치고 집을 떠나자마자 집 근처 문구점에 쳐들어가 폼보드를 몇 개 사 들고 다시 돌아와 창문을 최대한 닫은 다음 실외기 호스가 지나가는 자리를 제외한 나머지 공간을 폼보드를 잘라 막고 빈 틈을 테이프로 발라 빈 틈을 만족스럽게 매운 다음에야 그 날 남은 에너지를 모두 소진하고 바닥에 주저 앉습니다. 바닥에는 여전히 창문을 막고 남은 폼보드와 테이프와 커터나이프가 굴러다니고 있었고 에어컨을 포장했던 비닐과 매뉴얼이 아무렇게나 처박혀 있었습니다. 이게 다 무슨 짓거리인가 싶었는데 그런 난장판 속에 에어컨 리모컨이 눈에 띕니다.
조심스럽게 에어컨 리모컨을 집어 들고 떨리는 손으로 전원 버튼을 누르자 마치 세탁기를 처음 켤 때 나는 소리 같은 맑고 경쾌한 시작음이 들려옵니다. 모드 버튼을 눌러 냉방 모드로 바꾸고 목표 온도를 낮춘 다음 리모컨을 아직 손에 든 채 바람이 나오기 시작한 에어컨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에어컨에는 아직 매장에 전시되어 있을 때 바람이 나오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 붙여 놓았던 반짝이는 종이 끄트머리가 완전히 제거되지 않은 모양이었고 실외기에 연결되는 호스는 열린 창문을 지나고 있었으며 그 나머지 공간은 폼보드 두 겹으로 막혀 있고 테이프로 고정된 꼴사나운 모습이었지만 조금 기다리자 드디어, 드디어 찬바람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찬바람이 후덥지근한 방을 식히기 시작하고 그 바람이 선풍기에서 나오는 뜨거운 바람일 뿐 그 바람이 피부에 닿은 다음에야 열을 빼앗아 가는 그런 시원함이 아니라 애초에 바람 자체가 차가워 이미 차가운 바람이 피부에 와 닿는 그런 시원함을 느끼자 갑자기 몸에 긴장이 풀리고 화가 내려가고 힘이 풀려 손에 들었던 에어컨 리모컨을 바닥에 떨어뜨렸습니다. 원래 너무 더워 밤에는 조명도 켜지 않았는데 문득 환한 형광등 불빛 아래 난장판이 된 방안 꼴이 눈에 들어오고 그런데도 방 안은 여전히 시원한 그 모양을 보고 느끼다가 내일 오전에는 정말로 밀린 빨래를 하고 방 청소를 해야겠다는 한 줄기 의욕을 충전합니다. 그리고 그 날 밤에는 서울에 올라와 살기 시작한 다음 정말 오랜만에 더워서 깨지 않고 아침까지 통잠을 자는데 성공했습니다.
한편 그 날 에어컨은 처음으로 신용카드의 할부 기능을 사용해 구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걸 일시불로 샀다가는 다음 달에 바로 파산할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3개월 할부도 아니고 어처구니 없이 작은 월급을 고려해 6개월 할부로 사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8월 중순에 주문한 에어컨은 9월 신용카드 명세서에 나타나기 시작해 이듬해 2월까지 계속해서 나타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상관 없었습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살 수는 없었기 때문이고 모양은 꼴보기 싫었고 또 이 기계는 매장에 전시되어 있던 제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어쨌든 이제 책상 밑에 물을 떠다 놓을 필요도 없었고 또 조명을 끄고 있을 필요도 없었으며 주말 낮에 너무 더워 바닥에 붙은 채 아무 것도 못 하고 시간을 보내지도 않을 수 있게 되어 나름 만족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인 8월 16일 저녁, 저녁거리를 사러 밖에 나갔다가 문득 피부를 스치는 바람이 어제 저녁과는 달리 더 이상 뜨겁지 않고 살짝 시원한 느낌이 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해의 여름은 8월 15일까지는 뜨거웠지만 바로 다음 날 저녁이 되자 바로 선선한 바람에 불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2주가 지나자 더 이상 에어컨을 켤 필요 없을 정도로 밤이 시원해집니다. 하지만 피도 눈물도 없는 카드회사는 바로 다음 달 청구일 부터 에어컨 비용을 청구하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반 년에 걸쳐 다시 켜지 않은 에어컨 비용을 달달이 지불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2월, 마지막으로 에어컨 할부 금액을 포함한 청구 비용을 납부하고 폼보드로 막은 창문 틈새로 들어오는 찬바람을 막기 위해 에어캡을 또 다른 테이프로 막아 놓은 모양을 바라보며 이게 도대체 뭐 하는 짓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에어컨은 그 후에도 몇 번의 이사를 따라다니며 오랫동안 공간을 시원하게 해 줬고 더 넓은 공간을 시원하게 만들 수 있는 다른 에어컨을 구입하게 되면서 그 역할을 마쳤습니다. 그렇게 2천년대 초중반의 어느 8월 15일 저녁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한국의 독립기념일, 전 세계적으로는 종전기념일, 현대에는 영화 오펜하이머의 한국 개봉일로 기억되지만 제 개인적으로 이 날은 에어컨의 날, 처음으로 신용카드 할부 기능을 사용한 날, 사람이 더위에 미치면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지 알게 된 날, 좁은 방이 고작 1분 만에 시원해지는 현대 기술의 혜택을 발견하고 윌리스 캐리어를 신으로 모시게 된 날 따위로 기억됩니다. 네. 그렇습니다. 8월 15일은 에어컨의 날입니다. 그리고 윌리스 캐리어님은 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