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 공리와 상태 객관화
그렉 이건의 내가 행복한 이유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이런 책과 이런 작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예 모르고 살았습니다. 어느 날 소개 영상에 책을 읽으며 서로 어느 정도 양립하는 감정들이 든다는 말을 듣고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그때 몇 년 만에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를 다시 읽다가 책 끝부분으로 접어들면서 사회 문제와 국제 문제를 책에서 소개한 협상론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밝고 희망 찬 부분이 시작되어 슬슬 이전과 마찬가지로 마음이 불편해져 책을 빨리 마무리하고 싶은 참이었습니다. 이 책을 서둘러 마무리하고 ‘내가 행복한 이유’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첫 이야기를 읽어 내려가며 든 생각은 아니 대체 나는 왜 이런 작가와 이런 책을 모르고 있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회사에서 점심시간을 틈타 읽기 시작하자마자 흥미로운 짧은 이야기로 사정 없이 얻어맞고 하루 종일 제가 읽은 이야기의 의미를 곱씹어보게 됐습니다. 다른 인상 깊은 단편 모음처럼 하루에 한 편 이상 읽을 수가 없었는데 한 편을 읽을 때마다 도대체 내가 뭘 읽었는지 다시 생각해보지 않고서는 다음으로 넘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 각각마다 생각할 거리도 있고 할 말도 있었지만 생각만 하고 넘어가다가 ‘행동 공리’를 읽고 어쩌면 저자는 외부 요인에 의해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오는 경험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확히는 저자와 관계 없이 저 자신이 한 행동 공리와 비슷한 경험을 했을 때 결과는 행동 공리의 결과와 달랐다고 말하는 것이 맞습니다.
행동 공리는 뇌에 임플란트를 사용해 미리 정의한 공리를 입력하는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운 세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임플란트를 통해 입력한 공리는 이전의 자신이 가지고 있던 신념과 관계 없이 이를 믿어 버리게 됩니다. 비슷한 이야기를 삼체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외계인들과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지구 방위군에게 의도적으로 승리할 거라는 공리를 부여하는데 사용됩니다. 아이디어는 흥미롭지만 삼체 특유의 아이디어를 둘러싼 조잡한 장치들 때문에 좀 깨긴 했지만 생각할 거리가 되기에는 충분했습니다. 과연 그런 방법으로 어떤 공리를 주입 받아 의심의 여지 없이 믿어버릴 수 있을까? 사람의 생각이 그런 식으로 조작될 수 있는 걸까? 또 그렇게 생각을 조작할 수 있다면 그런 행동이 올바를까? 같은 생각으로 이어져 한동안 아무 것도 안 하고 가만 앉아 있어도 충분히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외부에서 행동 공리를 입력 받을 때 유효 시간을 입력한다는 설정이 추가됩니다. 공리는 지정한 시간 동안만 유효하고요. 주인공이 평생 자신이 가지고 있던 신념과 상반된 공리를 의도적으로 입력 받아 이전의 자신이 하지 않았을 행동을 하지만 이 공리의 유효시간이 끝난 다음 공리가 유효한 동안 자신이 저지른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이게 될 지가 이 이야기의 핵심 사건이었습니다. 주인공은 입력 받은 행동 공리의 유효시간이 끝난 다음 행동 공리가 유효한 시간 동안에 자신이 저지른 행동과 그 행동을 유발한 사고 과정을 행동 공리가 끝난 다음에도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게 되어 스스로 이전의 자신과는 다른 행동을 하게 만들 새로운 행동 공리를 찾으러 나서며 끝납니다.
이 이야기에서 글쓴이는 외부 요인으로 인해 이전과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때 생각이 달라졌을 때 한 생각과 행동을 원래대로 돌아간 다음에 이를 이해하고 납득하게 된다고 설정했습니다. 주인공은 행동 공리를 입력하기 전에는 절대로 하지 않았을 행동을 하게 되는데 행동 공리가 해제된 다음에도 그 행동과 행동을 유발한 생각의 과정에 동의하게 됩니다. 그런데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외부 요인에 의해 생각이 변한 상태에서 한 생각은 이 상태가 다른 외부 요인에 의해 종료될 때 그 상태를 객관화 할 수 있었습니다. 주인공처럼 행동하거나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처방약을 복용하다가 상태가 호전되는 것 같아 용량을 줄였습니다. 그런데 용량을 줄이고 이틀째 되는 날 출근하다가 이전 같으면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 일이 갑자기 굉장히 신경을 쓰이게 만들었습니다. 출근하는 몇 십 분 동안 지하철 안에서 그 작은 일을 유발한 원인을 찾아내고 그 원인을 유발한 사람, 그 사람이 원인을 해결하지 않는 문제, 그 사람에 대한 미움과 증오, 그 사람에 대한 처벌이나 복수, 처벌의 방법, 그걸 실행하는 나 자신, 그렇게 극단적인 방법을 행동으로 옮긴 다음에 느낀 일시적인 후련한 감정 따위를 복잡하게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건 올바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시 용량을 원래대로 되돌려 이 모든 일은 내 머릿속을 빠져나오지 않은 채 끝났습니다.
‘행동 공리’의 이야기를 겹쳐 보면 이후 저는 출근하는 지하철에서 한 생각들을 이해하고 여기에서 연결된 다른 행동이나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을 겁니다. 하지만 제 경험은 이와는 반대였습니다. 저는 그 출근 지하철 안에서 온갖 생각을 하던 나를 객관화해서 같은 몸과 같은 뇌를 공유하는 그날 아침의 나와 그 나를 제외한 나머지 내가 서로 그렇게 까지 다른 방식으로 생각을 전개해 나가고 그런 식으로 순간적인 분노에 휩싸이고 생각이 극단으로 치닫는 상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습니다.
그날 아침의 나를 이런 저런 각도로 바라보며 같은 뇌를 공유하는 여러 '나'들이 서로 그렇게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점에는 동의했지만 그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 날 아침을 벗어난 제 입장에서 그 날 아침의 나는 같은 뇌를 공유하는 이상 지워버릴 수는 없지만 함부로 내 생각을 점유하지 않도록 여러 단계로 안전장치를 만들어 잘 치워 둬야 하는 대상으로 정의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결말에서 주인공의 행동을 보며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 경험과는 일치하지 않아 재미있었지만 동의하지는 않았습니다. 제 관점에서 외부 요인에 의해 일시적으로 변한 생각은 객관화할 수 있는 대상입니다. 그런 경험에 따라 만약 제한시간이 있는 행동 공리를 입력 받는다면 제한시간이 끝난 다음에는 행동 공리가 유지되는 사이의 내 생각과 행동을 객관화할 수 있을 거라고 예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