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구사항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기
내가 작성한 기획서가 내가 원하지도 않는 이상한 요구사항들이 덕지덕지 늘어선 상태가 되었나요? 그 상태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오래 전에 기획서를 작성할 때 어떤 내용은 오랜 시간을 들여 작성해도 도통 끝나지 않을 때가 있었습니다. 처음 요구사항은 그저 다른 게임에 있는 비슷한 요구사항을 우리 게임에도 넣을 작정인데 우리 게임에 그 요구사항이 들어가야 하는 이유와 우리 게임 상에 그 요구사항이 들어가야 하는 이유, 고객이 체감할 수 있는 차이와 재미를 함께 언급하고 이들을 실제 게임에 실현할 수 있는 메커닉의 대략적인 아이디어를 함께 기술해 달라는 것입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이 문서는 특정 요구사항에 대한 제안서로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런 수준의 제안은 기획팀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 보다는 좀 더 높은 사람으로부터 나와 이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기획팀의 낮은 곳에 있는 저 같은 사람이 작성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항상 요구사항에 대한 제안은 제안 요청이 팀 밖으로부터 팀에 도착하면 완전히 바닥부터 이를 작성해야 했고 이 업무는 매번 저를 상당히 고통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업무는 맨 먼저 이 요구사항이 우리 게임에 왜 들어가야 하는지 설명하는 지점에서부터 문제를 일으켰는데 애초에 기획팀에 이 요구사항이 들어올 때 ‘다른 게임에 있는 그것’을 우리 게임에 포함해 달라는 모양으로 도착했기 때문에 이 사실을 정직하게 서술하면 ‘다른 게임에 있는 그걸 우리 게임에도 넣으려고 함’이라고 적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일머리가 없고 똑똑하지 않은 저라도 그렇게 정직하게 문서를 작성하면 안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이는 아마도 동북아시아에 위치한 국가에서 오랜 세월 살아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체득한 이른바 눈치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어릴 때 그렇게도 눈치 없이 행동한다는 평을 많이 들었지만 기획서에 ‘아무개님이 다른 그 게임에 있는 기능을 그대로 가져오라고 했음’ 이라고 적으면 안될 것 같았는데 이를 실험해본 적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