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구사항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기

내가 작성한 기획서가 내가 원하지도 않는 이상한 요구사항들이 덕지덕지 늘어선 상태가 되었나요? 그 상태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요구사항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기

오래 전에 기획서를 작성할 때 어떤 내용은 오랜 시간을 들여 작성해도 도통 끝나지 않을 때가 있었습니다. 처음 요구사항은 그저 다른 게임에 있는 비슷한 요구사항을 우리 게임에도 넣을 작정인데 우리 게임에 그 요구사항이 들어가야 하는 이유와 우리 게임 상에 그 요구사항이 들어가야 하는 이유, 고객이 체감할 수 있는 차이와 재미를 함께 언급하고 이들을 실제 게임에 실현할 수 있는 메커닉의 대략적인 아이디어를 함께 기술해 달라는 것입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이 문서는 특정 요구사항에 대한 제안서로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런 수준의 제안은 기획팀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 보다는 좀 더 높은 사람으로부터 나와 이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기획팀의 낮은 곳에 있는 저 같은 사람이 작성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항상 요구사항에 대한 제안은 제안 요청이 팀 밖으로부터 팀에 도착하면 완전히 바닥부터 이를 작성해야 했고 이 업무는 매번 저를 상당히 고통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업무는 맨 먼저 이 요구사항이 우리 게임에 왜 들어가야 하는지 설명하는 지점에서부터 문제를 일으켰는데 애초에 기획팀에 이 요구사항이 들어올 때 ‘다른 게임에 있는 그것’을 우리 게임에 포함해 달라는 모양으로 도착했기 때문에 이 사실을 정직하게 서술하면 ‘다른 게임에 있는 그걸 우리 게임에도 넣으려고 함’이라고 적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일머리가 없고 똑똑하지 않은 저라도 그렇게 정직하게 문서를 작성하면 안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이는 아마도 동북아시아에 위치한 국가에서 오랜 세월 살아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체득한 이른바 눈치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어릴 때 그렇게도 눈치 없이 행동한다는 평을 많이 들었지만 기획서에 ‘아무개님이 다른 그 게임에 있는 기능을 그대로 가져오라고 했음’ 이라고 적으면 안될 것 같았는데 이를 실험해본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많이 흐른 다음 농담 삼아 다른 높은 분께 이런 식으로 넌지시 물어봤다가 ‘어.. 그건 맞긴 한데… 그럼 안되지 않을려나…’ 라는 답변을 들었고 어릴 때 정직하게 제안서를 작성하지 않아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일어난 일과 이를 정직하게 설명하는 식으로 요구사항의 목적을 기입할 수 없었고 대신 이 요구사항을 먼저 구현해 서비스 하는 그 게임을 살펴보고 이 기능이 그 게임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살펴본 다음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함이라고 거짓말 아닌 거짓말을 해야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과정이 굉장히 부조리하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어차피 들어가야 할 기능이라면 이렇게 이 기능을 이미 포함해 서비스 하고 있는 게임을 살펴보고 그 이유를 탐구하는 행동 자체가 의미 있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제안의 목적을 기입한 다음 이 제안이 우리 게임에서 동작할 때 다른 게임과 달라야 하는 점, 이를 통해 우리 게임이 가지게 될 효과, 고객들이 얻게 될 경험 따위를 상상해 적어 내려가야 했는데 이 때도 제안의 목적을 작성할 때와 마찬가지로 뭔가 제가 생각한 그대로 적어 나가면 안될 것 같은 느낌적 느낌을 받았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NPC로부터 물건을 구입하는 상점 기능을 제안한다고 가정하면 상점이 게임에 있어야 하는 이유부터 적어야 했는데 애초에 우리가 개발하는 MMO 게임이 완전히 실제 세계의 수요와 공급을 구현하려는 목표를 달성하려는 것이 아닌 이상 고객들이 플레이를 통해 획득한 자원을 화폐로 바꿔 주는 장치가 필요합니다. 도대체 어디서 돈을 버는지 잘 모르겠지만 돈을 무한히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NPC가 마을에 상점을 열고 있고 우리들이 몬스터를 쓰러뜨리며 획득한 무한한 쓰레기를 갖다 주면 이를 가치가 있는 골드로 바꿔 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상인의 역할은 근본적으로 고객들의 생산 활동을 화폐로 바꿔주는데 있었고 만약 몬스터들이 쓰레기 아이템 대신 직접 골드를 드랍한다면 상점의 두 가지 기능인 매입과 판매 중 매입 기능은 필요 없어 보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NPC 상점 기능을 제안하면서 매입 기능이 필요한 이유를 ‘고객이 가져온 쓰레기를 화폐로 교환해 주기 위함’이라고 적어서도 안될 것 같았는데 이게 사실이지만 우리들이 보기에도 썩 기분 좋지 않았고 고객들이 본다면 더더욱 기분 좋지 않아 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눈치껏 이런 부분을 그럴듯한 문장력을 발휘해 창의적으로 작성하고 나서 다음 부분으로 옮겨 가면 이번에도 만만찮은 항목이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일단 가상의 상점 제안을 예로 들기 시작했으니 계속해 보면 이번에는 이 상점 기능이 우리 게임에서 동작할 때 다른 게임과 차별점이 무엇인지 말해야 합니다. 이번에도 솔직한 심정은 아니 그냥 우리가 대놓고 복제하려고 하는 MMO 게임에도 상점이 있으니 우리도 그 상점을 그대로 가져올 거고 그 참에 그 상점이 인게임에서 수행하던 기능 역시 그대로 가져올 작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이렇게 쓰면 안될 것 같은 느낌을 받았고 장래 희망에 소설가를 생각해본 적은 단 한번도 없지만 그나마 잘 돌지 않는 뇌를 풀가동해 이 부분을 작성하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일단 연출 상 다른 MMO 게임에 서 있는 상인이 너무 게임의 설정과 아무 상관 없이 서 있는 모양이 아쉬워 우리는 상인이 정말 그 게임 속 세계의 설정에 어울리는 상인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 어떨까 싶었고 기능 상 상인이 고객의 쓰레기를 반복해서 매입해야만 했고 또 고객이 원하는 아이템을 반복해서 구입해야만 했는데 이 과정을 좀 더 편리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아 보였습니다. 가령 모바일 리니지 시리즈에서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포션을 자동으로 사용하는 설정이 있고 또 상인으로부터 소지 중량 제한에 맞춰 포션을 자동으로 구입하는 옵션이 있는 것과 비슷한 발상으로 자주 구입하는 물건을 즐겨찾기에 등록해 놓고 이들을 빠르게 구입하는 기능이 있으면 좋겠다 싶어 제안에 이를 포함합니다.

물론 이런 접근은 결코 올바르지 않습니다. 바로 앞 문단에서 저는 다른 게임의 같은 기능과 우리 게임의 같은 기능이 사로 달라 보이게 만들기 위한 이유만으로 억지로 다른 점을 만들려 했습니다. 사실 성장 경험 자체가 핵심이고 위로 올라갈수록 다른 플레이어와 경쟁하도록 구성된 게임이라면 상인이 어떻게 생겼든지 고객들이 별 관심을 가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심지어 상점이 판타지 세계와 아무런 상관 없는 미래에서 온 로봇 모양이더라도 고객들은 잠깐 이상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다음에는 모양에는 아무런 신경 쓰지 않고 오직 기능에만 집중할 겁니다. 또한 기능 역시 아무 근거 없이 함부로 제안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는데 만약 모바일 리니지에서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포션 아이템을 소지 중량에 맞춰 자동 구입하는 기능은 처음부터 게임이 이런 포션 구입과 사용을 염두해 두고 설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체로 우리들이 게임에 특정 기능을 제안할 시점은 이런 반복 플레이 메커닉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일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고객이 같은 아이템을 반복해서 구입할지, 인벤토리에 무게 개념이 있을지 같은 질문에 답할 수 없는 상태일 때가 대부분이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자주 구입하는 아이템을 즐겨찾기에 등록한 다음 이들을 빠르게 구입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이 글을 읽을 때는 괜찮아 보이지만 잠깐 이를 게임의 결정되지 않은 나머지 부분과 연결해 생각해 보면 이 기능이 필요한지 전혀 설명할 수 없음을 눈치챌 수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 게임의 게임디자인 상의 근거에 기반하지 않고 함부로 기능을 제안해서는 안되지만 어쨌든 다른 게임과 차별점을 언급해야 했으므로 어쩔 수 없이 근거 없는 편의 기능을 추가합니다.

슬슬 제안서를 완성해 팀 내 리뷰를 진행합니다. 문서에는 우리 게임에 상점 기능이 필요하다는 이유를 설명하며 시작했는데 ‘다른 게임에 상점이 있고 그걸 복제해야 하기 때문에 이 기획서를 작성했음’이라고 마음의 소리를 적는 대신 ‘몬스터가 드랍한 아이템을 인게임에서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는 화폐 모양으로 교환해 주는 매입 기능에 접근하는 매개체’라고 실은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을 멋들어지게 작성했습니다. 또 다른 게임에 비교해 상점이 가지는 차별점에는 정작 필요한지 여부조차 확실하지 않은 자주 구입하는 물건의 즐겨찾기 기능을 언급하며 다른 게임보다 편리하게 아이템을 반복 구입할 수 있을 거라고 적었고 이 과정을 통해 인터페이스를 더 빨리 조작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찬 말도 포함합니다. 일단 팀 내에서는 그럭저럭 문서의 내용에 동의하는 것 같아 보였는데 이 과정에서 몇 가지 다른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정확히는 상점을 더 그럴듯하게 만들기 위한 아이디어가 있으면 자유롭게 이야기해 보라는 주문이 나왔고 눈치도 없는 팀원 분들은 더 이상 딱히 무슨 기능이 필요할 것 같아 보이지 않는 상점에 있으면 재미있을 것 같은, 실제로는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상한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에는 실제 세계에는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상점들이 서로 같은 물건을 다른 가격으로 판매하고 있고 종종 몇 달러 싸게 구입하기 위해 두 블럭을 걸어가 도착한 다른 상점에서 물건을 구입하거나 최저가 보상 제도를 운영하는 상점에 다른 상점의 최저가를 신고하면 보상을 받는 시스템을 언급하며 설오 다른 상점에서 물건을 서로 다른 가격에 판매하고 고객들이 채팅을 통해 이 정보를 교환해 지금 포션을 가장 싸게 구입할 수 있는 장소를 교환하고 그 곳으로 이동해 포션을 구입하도록 하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니어 디자이너 입장에서 이미 이 문서는 제 의지와 관계 없는 거짓말로 가득 차 있었고 이 문서 내용으로 미루어 이런 아이디어를 거절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또한 아직 게임이 어떻게 동작할지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자주 구입하는 물건을 편리하게 구입하기 위한 즐겨찾기 기능을 제안하고 있었고 언제든지 인벤토리에 무게 개념이 생기면 무게 제한에 맞춰 아이템을 구입하는 기능을 포함할 수 있는 모양으로 제안서를 작성한 마당에 상점마다 같은 물건의 가격이 서로 다르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의견에 긍정하거나 부정할 이유도 없습니다. 때문에 괜히 의견을 부정해 부정하는 이유를 즉석에서 말하는 어려운 과제를 떠안는 대신 의견을 수용하겠다고 말한 다음 메모에 ‘좆됨’이라고 적은 다음 회의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와 상점 제안서에 서로 다른 위치에 있는 상인들마다 같은 아이템을 서로 다른 가격으로 판매하는 실제 세계의 동작과 비슷한 개념이 있을 예정이고 이를 통해 고객들이 각자 서로 떨어져 있는 상점에서 판매하는 같은 아이템의 가격을 조사해 서로 공유하고 그 결과 고객들이 조금이라도 돈을 아껴 가며 게임을 플레이 하는 경험을 하게 해 줄 작정이라는 말을 추가합니다. 여전히 개인적으로는 그런 기능이 필요한지, 또 그런 플레이가 재미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지만 회의에 나왔던 여러 의견을 받아들인 제안서가 완성되어 팀을 통과해 드디어 팀 바깥에 나갑니다.

프로젝트의 여러 높은 분들 앞에서 상점 제안을 브리핑 하는 것은 썩 유쾌하지 않았는데 이분들 대부분은 이미 실무를 하고 있지 않아 사실상 상점이 있으면 될 뿐 상점에 포함된 주요 기능이 필요할지 여부를 직접 설명하기 어려운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분들은 일단 특정 시점까지 상점 기능이 완성되어 게임의 순환구조가 최소한으로 동작하기 시작하기를 원했고 상점이 그 일부를 담당하는 것은 맞지만 상점 만으로는 순환을 완전히 만들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몬스터가 골드를 드랍할지 아니면 쓰레기를 드랍할지, 또 상점에서 포션을 구입해 끝없이 포션을 마시며 플레이 하게 할 지 아니면 몬스터가 가끔씩 체력 회복 아이템을 드랍해 플레이어가 더 공격적으로 행동하게 만들지 여부 따위를 결정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상점 제안서는 최소한의 기준을 통과하는 수준이면 별 무리 없이 브리핑을 마칠 수 있을 만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브리핑은 순식간에 이상한 모양이 되고 마는데 이 가상의 상점 제안서에는 다들 딱히 예상하지 않은, 그리고 아직 판단하기 어려운 요구사항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단 딱 봐도 인터페이스를 복잡하게 만들고 또 개발 난이도를 아주 조금이라도 올리며 아트 에셋 제작 난이도를 유의미하게 올리고 또 게임 상에서 잘 동작할지 여부가 확실하지 않고 인게임 의사소통 기능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요구사항들이 줄줄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들 각각은 아이템 즐겨찾기, 세계에 더 잘 어울리는 상인 모양, 상점마다 서로 다른 가격에 대한 요구사항이었는데 아직 게임의 나머지 부분이 구체적으로 논의되지 않은 상태에서 오직 우리 게임의 상점이 다른 게임과 달라야 하는 이유에 집중해 억지로 쥐어 짠 이 요구사항들은 과연 이 기능이 필요한지 브리핑 하는 사람, 그러니까 저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만드는 게임이 어떤 모양인지 스스로 생각해 직접 답을 말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조차 자주 구입하는 물건을 즐겨찾기에 등록하는 기능을 보고 우리가 포션을 잔뜩 구입해서 계속해서 포션을 연타하거나 이를 자동으로 사용해 주는 인터페이스에 등록한 다음 사용하며 몬스터와 싸우는 게임인지 오히려 저에게 질문했고 저는 떨떠름하게 그런 모양을 상상하고 있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은 그렇게 상상한 적 없고 그저 다른 게임과 다른 점을 억지로 만들어내기 위해 추가한 기능일분이었지만 이번에도 문서를 작성할 때와 마찬가지로 제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그 많은 높은 분들 앞에서 말하면 안될 것 같아 보입니다. 또 애초에 상인의 매입 기능은 아직 몬스터가 정확히 무엇을 드랍할지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쩌면 매입은 그 기능 자체가 필요 없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이번에도 매입 기능을 제안한 저에게 몬스터가 쓰레기 아이템, 또는 잡템을 드랍하는 모양이냐는 질문을 들었고 또 저는 그렇다고 대답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사실 몬스터가 쓰레기를 드랍할지 아니면 골드를 직접 드랍할지는 경제시스템을 설계하는 누군가가결정할 일이었고 일단 지금 이 상태에서 저는 그 역할을 하지 않았지만 이런 질문을 받고 별로 생각한 적 없는 분야에 대해 아무렇게나 답하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나아가 이번에도 다른 게임과 다른 점, 그리고 팀원들로부터 얻은 아이디어를 반영하기 위해 저도 이게 잘 동작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그냥 집어 넣은 상인마다 서로 다른 가격에 아이템을 판매하는 기능 역시 이 기능이 필요한지, 재미있을지, 아직 힌트가 별로 없는 경제시스템 기반에서 잘 동작할지, 근본적으로 여러 고객들에 걸쳐 공정할지, 고객들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을지 등등에 대한 질문을 받았고 저는 이들 대부분에 거짓말하거나 아니면 제대로 답하지 못합니다.

앞서 팀 내 브리핑 때와 마찬가지로 한참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간 끝에 다양한 수정사항을 접수하고 다음 브리핑 목표 일정을 대략 다음 주 어느 날로 예정한 채 회의가 끝났고 저는 상점 제안서를 작성하는 업무에 머물러 있었지만 업무는 이름만 같을 뿐 훨씬 확장되어 상점이 동작할 게임의 여러 정책을 함께 생각해보고 이에 맞춰 상점을 고안해야 하는 처지에 놓입니다. 먼저 즐겨찾기 기능이 정말 필요한지 여부를 설명하기 위해 아직 누구인지 확실하지도 않은 경제 시스템을 고안할 사람을 찾아가 우리가 포션을 연타하는 모양으로 동작할지 그렇지 않을지, 고객이 캐릭터의 항상성을 유지하는데 신경을 쓰는 게임인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예상을 들은 다음 이 예상에 따라 즐겨찾기 기능을 유지하거나 제거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이런 결정을 내릴 담당자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팀 내에서 이 문제로 논의 끝에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즐겨찾기 기능은 제안서에서 제거하자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다른 게임과 달리 상인이 게임 설정에 잘 어울리는 모양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요구사항은 아직 게임의 아트 풍이 확정되지도 않은 상태이니 일단 임시 에셋에 근거해 NPC 상점 기능을 만든 다음 천천히 생각하기로 하면서 기능이 빠지게 됐고 매입, 판매 기능은 그나마 어느 쪽으로 결정되더라도 대응하기 위해 일단 개발하자고 이야기하기로 했으며 상점마다 서로 다른 판매가를 책정하는 기능 역시 나중에 데이터를 그렇게 만들 수 있게 하되 당장 제안에서는 제거해 우리가 지금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만들지 않도록 하는 쪽으로 제안을 수정하기로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수정된 제안서는 다음 브리핑에서 또 다른 난처한 상황에 놓이고 말았습니다. 이번에는 앞서 제거하기로 한 즐겨찾기 기능 이야기가 다시 나왔는데 이번에는 엊그제 리니지를 플레이 해본 사람이 나타나 리니지에는 즐겨찾기 기능과 소지 중량 제한에 맞춰 아이템을 자동으로 구입하는 기능이 있는데 우리는 왜 없는지, 또 일종의 장바구니 기능이 있어 장바구니에 아이템을 담은 다음 구매 전에 총 비용과 총 중량을 검토한 다음 구입할 수 있어 좋았는데 왜 우리는 그런 기능이 없는지에 대한 질문이 마치 지난 회의 때 참가하지 않았던 것처럼 나왔고 저 자신은 확실히 지난 회의에 참여했었기 때문에 분명 지난 회의 때 자리에 있었던 그 분께 히스토리를 설명해야만 했습니다. 또 다른 분은 MMO 게임의 경제시스템이 사실상 우리가 직접 제어하는 상점이나 거래소 같은 인위적이고 또 경제시스템을 통제하는 매개 수단들에 의해 작동하는데 이런 모양이 근본적으로 올바른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어 상점에서 판매하는 모든 물건들은 다른 누군가가 실제로 생산한 물건이어야 하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했고 이는 상점이 아니라 거래소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으로 만들었습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상점이 존재할 때 상점마다 서로 다른 가격을 제시한다면 정보가 부족한 고객은 항상 실망스러운 경험을 하거나 혹은 항상 상인을 신뢰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올바르지 않지만 가격 변동 정보를 고객에게 제공한다면 그런 신뢰할 수 없는 경험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상점 간에 가격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 문제를 또 다른 기능을 통해 해결하려는 접근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 끝에 이번에는 몬스터가 직접 골드를 드랍할지 아니면 쓰레기를 드랍할지, 우리 게임의 경제시스템이 전통의 방식으로 동작할지 아니면 여러 플레이어가 생산한 실제 물건에 기반한 모양으로 동작할지 따위를 조사하거나 확정한 다음 이에 맞는 상점 기능을 제안하기로 하고 또 다음 브리핑 일정을 잡은 다음 회의를 마칩니다.

이 과정을 긴 기간에 걸쳐 여러 번 반복하며 처음에 작성하던 상점 제안서는 스코프가 훨씬 넓어져 경제시스템 전반과 인게임 경제시스템을 구성하는 일종의 철학 문제에 가까운 논의, 그리고 이를 받아들여 요구사항을 작성하는 업무로 변질됩니다. 이 상황에서도 여전히 상점이 게임에 왜 존재해야 하는지, 다른 게임의 상점과는 무엇이 달라야 하는지, 고객들이 이 상점을 통해 어떤 경험을 해야 하는지를 여전히 문서에 포함해야 했고 문서는 이미 제가 예상한 상점 범위를 한참 벗어난 제 스스로도 잘 이해하기 어려운 기능과 요구사항, 저도 잘 모르는 게임 경제시스템과 인벤토리 구조, 몬스터가 드랍한 아이템이 게임 내 경제시스템에 유통되는 과정, 고객들이 서로 아이템을 생산하고 이를 소비하는 과정에서 수요와 공급을 일치시킬 방법과 우리가 경제 상황에 개입할 방법을 준비하는 등의 처음 생각했던 상점과는 큰 관련이 없어 보이고 또 제 스스로도 잘 이해하기 어려우며 각 내용들이 근미래에 이를 담당하게 될 아직 결정되지 않은 각 담당자들의 동의를 얻지도 못한 이상한 내용으로 가득 찹니다.

시간을 들여 여러 번에 걸친 여러 내용을 모두 반영한 길고 복잡한 상점 제안서를 작성했지만 결국 이 문서에서 제가 거짓말 하지 않고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은 그저 게임에 상점 기능이 있고 이는 다른 게임과 같으며 다를 이유가 지금으로는 없고 그저 매입과 판매 기능이 필요하며 이를 NPC를 매개로 동작하게 할 거라는 정도입니다. 나머지 모든 내용은 제 스스로 결정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었으며 근본적으로 제가 하고 싶은 일도 아니어서 이를 탐구할 의욕이 생기지도 않았고 또 이를 제가 결정할 수도 없었을 뿐 아니라 이를 결정할 사람들이 아직 지정되지도 않아 사실상 결정하게 만들 수도 없었습니다. 이런 문서를 작성하는 내내 저는 계속해서 위축됐고 매 브리핑 자리는 제안을 점점 더 이상하게 만들었으며 제가 결정하거나 대답할 수 없는 질문과 답변이 오갔고 몇 주 동안 이 간단한 상점 제안은 시작 조차 하지 못한 채 방치됩니다.

문제는 중요하지 않은 일을 중요한 일 모양으로 추진한 지시 자체로부터 시작됐고 실은 이를 알면서도 아직 확정할 수 없는 게임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의문을 이를 질문해야 할 높은 사람에게 질문하는 대신 쉽게 말을 꺼낼 수 있는 적당히 만만한 사람에게 하기를 반복하고 또 이를 보면서도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상황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이런 이상한 요구사항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업무를 지시하는 입장에서 업무의 중요성에 따라 업무 시작 지점을 잘 설정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업무라면 모든 리드그룹 구성원들의 검토와 동의를 구하는 단계를 필요로 할 수도 있습니다. 이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요구사항을 둘러싼 여러 구성요소를 어느 정도는 미리 결정하거나 가정하고 이에 대한 이유 역시 설명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덜 중요한 요구사항이라면 굳이 그런 단계를 거치는 대신 좀 더 솔직하게 다른 게임에 있는 최소한의 상점 기능이 필요하다고 설명하고 이를 복제하는데 집중해 빨리 실제로 동작하는 단계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해 필요 없는 단계를 생략하도록 해야 합니다. 또 진행 중 업무 범위를 넘어서는 질문이나 요구사항을 접수하면 이를 이 업무에 포함해서 처리하는 대신 지금 시점에 질문 자체를 거절하거나 스코프를 벗어나는 요구사항 역시 무시하거나 백로그에 기입하는 행동을 취해 현재 진행 중인 업무로부터 격리하면 됩니다.

팀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브리핑 과정을 반복한 주제 두 가지를 봤고 한동안 각각의 주제가 잘못된 피드백 루프를 끊어낸 다음 스코프를 명시해 요구사항의 구렁텅이로부터 빠져나오도록 하는데 관여했는데 우리들은 이미 게임을 오랜 기간에 걸쳐 만들고 있음에도 여전히 같은 이상한 짓을 반복하고 있다는데 적잖게 실망했습니다. 우리들은 주니어님들을 케어하는 관점에서 이런 이상한 일이 일어나도록 방치해서는 안됩니다. 종종 필요한 요구사항과 이들이 쌓인 깊은 구렁텅이는 주니어님들을 성장하게 만드는 계기로 동작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으며 사람을 지치게 만들고 사기를 끌어내립니다. 특히 긴 기간에 걸쳐 의미 없는 비슷한 과정을 반복하는 상황은 사람을 소진 시키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상황에 빠지지 않는 것이 가장 좋지만 상황이 발생했다면 최대한 빨리 상황을 해소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제 눈에 띈 상황에 관여해 개선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또 앞으로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면 비슷하게 대응하거나 아예 비슷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대응하려고 합니다. 다만 이번에는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왜 그 상황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는지 글을 작성하며 생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이번 58호에도 지난 2주간 공유한 이야기를 함께 보내 드립니다.


존의 시대와 나의 시대
책 둠의 창조자들을 읽으며 이들의 전성기와 현대 사이의 연결과 변화를 돌아봤습니다. 그들의 업적 위에 현대의 가상 세계가 서 있습니다.
컨플루언스 위키의 단점
저는 컨플루언스 위키를 굉장히 좋아하긴 하지만 단점도 없지 않습니다. 오늘은 단점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종료되지 않는 모바일 앱 요구사항의 추억
기획팀은 처음으로 요구사항이 도착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만약 불가능한 요구사항이 기획팀에 도착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새로운 시대의 SEO에 대한 고민
한때 검색엔진은 검색에 대한 기여를 사용자 유입을 통한 크레딧으로 보답했지만 현대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과거와 같은 방법으로 검색엔진에 대응해야 할까요?

한동안 운동을 게을리 한 덕분에 체질이 바뀌었습니다. 이전에는 에너지를 많이 쓰는 몸이어서 마음껏 먹고 몸을 움직여 마음껏 소모하는 몸이었지만 한동안 운동하지 않으니 여기에 몸이 적응해 이제 조금만 먹어도 비축하고 또 몸을 움직이면 비축한 에너지를 빠르게 가져오지 못해 금새 배고파지는 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 배가 나오기 시작했다는 의미입니다.

자전거를 타는데는 크게 두 가지 스테이터스가 있습니다. 하나는 근력, 다른 하나는 호흡입니다. 보통 자전거 타는 것을 유산소 운동이라고 생각하지만 파워에 따라 유산소 운동이기도 하고 또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한동안은 체력이 충분해 자전거는 유산소가 아니라고 주장해 왔는데 최근 제 몸 상태로 미루어 근력은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지만 호흡은 유지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VO2MAX가 떨어져 더 낮은 강도에도 쉽게 심박이 오르게 되었는데요, 덕분에 장거리 운동 뿐 아니라 파워를 올리는데도 어려움을 겪게 되고 말았습니다. 자전거는 유산소 맞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현대를 살아가는데 충분한 체력을 유지하지 못할 것이 분명해 덥지만 실내에서라도 다시 자전거를 열심히 타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의 에너지를 펑펑 쓰던 몸에 비해서는 어처구니 없이 낮은 강도이지만 함부로 힘 쓰다가는 분명 부상 당할 것을 알기에 마치 재활 하는 느낌으로 천천히 하고 있습니다. 예상보다 오래 걸리지 않을까 싶지만 조바심 내지 않기로 했습니다.

퇴근하려고 나갔더니 폐호흡은 그만 두고 아가미 호흡을 해야 할 것 같은 날씨입니다. 건강에 유의하시고 또 2주 후에 뵙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