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이렇게 까지 해야 할까?
'굳이 그렇게 까지 해야 할까?'라는 말이 뭔가 거슬렸다면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근래 사람들과 이야기 하다가 잠깐씩 거슬리는 순간들이 있었는데 이유를 잘 알 수 없었습니다. 그저 최근에 마일스톤 초반이라 좀 신경 쓸 일이 많아서 그렇거나 컨디션이 좀 나빠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같은 표현을 들을 때 거슬려 한다는 점을 발견하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좀 더 파고 들어가 보기로 했습니다. 거슬리는 느낌을 받을 때는 제가 뭔가 이야기하거나 문서를 제출할 때 ‘굳이 필요할까?’ 혹은 ‘굳이 이렇게 까지 해야 할까?’ 라는 질문을 들었을 때입니다.
한번은 채집 기능을 넣기로 하고 기능의 명세를 준비했습니다. 채집 명세를 준비하면서 한 고민은 좀 더 현대적인 단순한 채광 모양을 선택할지 아니면 채집 기능이 있는 오래된 게임처럼 같은 대상으로부터 여러 번 채집할 수 있게 만들지였습니다. 단순한 모양은 고객에게 확실히 단순한 모양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습니다. 필드에 채집물이 있으면 채집할 수 있고 아무 것도 없으면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겁니다. 필드에 채집물이 있으면 채집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자원의 양을 대략 예상할 수 있고 이 예상에서 크게 빗나가지 않는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반면 같은 대상으로부터 여러 번 채집할 수 있게 만들면 의사소통을 단순하게 만들기 위해 자원이 더 필요합니다. 가령 채집물에 자원이 많이 남은 상태와 자원이 적게 남은 상태를 시각적으로 구분하기 위해 같은 대상에 여러 외형을 만들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또 남은 자원 양에 따라 외형이 변한다면 외형이 변할 때 자연스럽게 외형이 전환되도록 하기 위한 추가 장치가 필요합니다. 대신 같은 채집물로부터 자원 여러 개를 얻을 수 있다면 한 채집물에 여러 사람이 동시에 채집하는 상황을 만들 수 있고 멀티플레이 환경에서 다른 사람의 채집 진행 상황을 대략 파악할 수 있어 서로 대립하는 상황에서 눈치를 보게 만들 여지가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순환구조를 완성하기 위해 채집이 필요한 것 뿐 미래에 채집이 필드에서 동작할 모양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일단 미래에 좀 더 써먹을 요소가 많을 것 같아 같은 채집물로부터 자원 여러 개를 얻을 수 있는 클래식한 모양을 제안했습니다. 가령 새로 스폰된 사과나무로부터 사과 10개를 얻을 수 있고 한 번 채집마다 사과 하나를 얻을 수 있을 때 사과나무는 사과 3개가 줄어들 때마다 외형이 한 단계씩 변해 점점 더 적은 사과를 매달고 있는 모양이 되고 마지막 사과를 채집하고 나면 사과나무가 사라지는 모양을 의도했습니다. 이 모양을 만들기 위해서는 사과나무 외형 여러 개가 필요하고 자원이 감소할 때에 맞춰 외형이 자연스럽게 변하게 하기 위한 에셋이 추가로 필요했습니다. 이런 제안을 제출하고 받은 피드백 중 하나가 바로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요?’였습니다.
사실 이 질문에는 여러 가지 맥락과 단어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먼저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요?’에서 ‘이렇게 까지’는 문서에 제안한 형태가 문서를 읽은 사람의 예상과 기대에 비해 과도하게 높은 비용을 요구하는 제안이라는 의미입니다. 또 그보다 더 단순한 모양을 기대했으며 그 좀 더 단순한 모양으로 바꿔도 결과가 동일하다면 개발 비용이 더 낮은 지금은 그 사람 머릿속에만 들어 있는 더 단순한 모양으로 바꾸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질문을 함으로써 제출한 제안이 ‘이렇게 까지 해야' 하는 기대보다 과도한 제안임을 나타냄과 동시에 ‘과도한 상태’를 질문을 들은 제 스스로 정의하고 이에 따른 대안 역시 제 스스로 제안하기를 바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실 슬랙에 나타난 문구를 보고 그 의미와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저 표현이 거슬렸고 생각해본 끝에 세 번째 의미인 제안이 과도함을 제 스스로 설명하고 대안 역시 직접 제안하기를 바라는 문장이라는 점 때문에 거슬렸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제안을 보고 ‘굳이 필요할까?’ 또는 ‘이렇게 까지 해야 할까?’ 라고 덜렁 묻는 것은 제안의 과도함을 제안자 스스로 정의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 마저 제안자 스스로가 지금 말하기를 요구하는 굉장히 무책임한 발언이라고 생각합니다. 의사소통을 할 때 종종 나타나는 전형적인 ‘답정너’로 넘어갈 수 있는 화법이어서 듣는 순간 거슬린 것 같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상대와 이야기하다가 ‘답정너’ 상태가 감지되면 즉시 설명을 중단하고 ‘돌리지 말고 원하는 게 뭔지 그냥 말하세요’ 라고 말하곤 하는데 이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이 대화를 하는 상태는 제 입장에서 제안을 제시한 상태이고 제안을 본 상대는 제안에 대한 의견을 말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지금 제안에 대한 의견을 말해야 하는 것은 상대방이며 이 때 ‘굳이 필요할까?’ 처럼 문장에 아무 의미를 담지 않은 채 의문문으로 되돌리면 본인의 의견을 말해야 하는 상황을 회피하고 자신이 말할 의견을 상대인 제 스스로 말하기를 원하며 다음 말할 사람을 저로 만드는 나쁜 질문 방법입니다. 평소 상대의 질문에 항상 답하도록 훈련 받아 왔다면 이런 답변이자 질문을 받으면 당황할 수 있습니다. 저 말에 이어서 답하려면 먼저 ‘굳이 필요한 이유’를 제안자 스스로가 생각해 봐야 하고 이 문장에 포함된 ‘과도함’을 스스로 생각한 다음 과도한 이유를 말하고 스스로 그 과도함을 해결할 방법까지 제안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저 답변이자 질문은 아무런 의미 없이 그냥 다음에 말할 사람을 상대방으로 바꾸는 역할밖에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 질문에 곧이곧대로 답하려고 하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대가 ‘이렇게 까지 해야 할까?’ 라고 말한다면 이를 질문으로 인식하면 안됩니다. 이 문장은 질문도 아니고 답변도 아니며 끝을 물음표로 끝내 대화 턴을 넘길 뿐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을 한 것입니다. 때문에 이 문장을 질문으로 인식해 답변하려고 시도하는 대신 ‘이렇게 까지’의 정의를 요구해야 합니다. ‘이렇게 까지 해야 한다는게 무슨 의미인가요?’라고 물어보면 됩니다. 일단 저는 상대방의 의미 없는 문장의 정확한 의미를 다시 정의해 달라고 상대방에게 의미를 담아 질문했고 이번에는 상대가 자신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 한 아무 의미도 없었던 말을 정의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만듭니다.
사람에 따라 이 상황에서 제대로 자신의 생각을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기대했던 바, 제가 제출한 생각과 그 기대 사이의 차이, 자신이 제 생각이 과도하다고 생각한 이유를 설명한다면 이제 이 대화는 원만하고 효율적으로 진행될 수 있으며 서로 원하는 결과를 얻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사람에 따라서는 ‘아니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고요’ 같은 식으로 같은 말을 반복하기도 하는데 의미 없는 말이 두 번째 반복될 때는 이전보다 공격적인 말투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가 공격적이든 공격적이지 않든 같은 의미 없는 물음표로 끝나는 문장이 두 번째 반복되더라도 억양에 반응하지 않고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이 상황은 제가 상대 말을 못 알아들은 상황이 아니라 상대가 의미 없는 말을 했고 저는 그 없는 의미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 상황은 제가 설명해서 해결할 수 있지 않습니다. 상대가 ‘굳이 그렇게까지’의 의미와 맥락을 설명해야만 다음으로 대화를 진행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만약 상대가 여전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면 안타깝지만 친절하게 제 상태를 설명해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이는 제 설명이 부족해서가 아니고 상대방이 물음표로 끝낸 아무 의미 없는 말이 제게 아무런 의미로도 이해되지 못했음을 상대에게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설명이 필요해졌습니다. ‘굳이 그렇게까지가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어요' 라고 말하면 됩니다. 정확히는 내 생각을 맞춰봐 놀이를 당장 그만 두고 똑바로 설명하지 않으면 당신이 지금 하는 말을 완전히 무시하겠다는 의미이지만 의미를 정확히 설명하면 원만한 사회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최대한 친절하고 정중하게 마치 제가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질문하면 됩니다. 운이 좋다면 이제 상대는 자신이 생각한 기대와 맥락, 그리고 예상하는 수정된 상태를 설명할 겁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 사람과 올바른 대화가 가능할지를 냉정하게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중요한 점은 저 문장은 질문이 아니기 때문에 대답하려고 시도하는 순간 상황이 이상해지며 대답하려는 자신이 취약한 상태가 되기 쉽다는 점입니다.
애초에 맥락 없이 ‘굳이 필요할까?’ 라고 묻는 화법은 상대의 의견을 이해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는 대단히 무책임하고 공격적인 방법입니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이 표현은 상대의 의견을 이해하고 내 의도를 설명하는 대신 내 의도 자체를 상대방 의 입을 통해 나오게 만들고 나아가 상대방의 입을 통해 나온 의도에 대한 대안 마저도 상대방이 직접 생각해 설명하게 만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쁘게 말하면 저런 표현을 사용하는 사람은 의식적으로든 아니든 자기 자신은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지만 이 제안에 뭔가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있고 그 점을 제안한 상대가 직접 생각해서 직접 말하고 그 말이 내 생각과 일치할 때까지 반복한 다음 이를 해결하는 대안을 말할 때까지 이 상태를 유지하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런 표현을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경계가 아니라 이런 사람과 함께 일해서는 안됩니다. 직접 일할 상황이 일어나지 않도록 관리자와 상의해서 파이프라인을 조정해야 합니다. 만약 이런 표현을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앞에서 설명한 대로 상대가 한 발언의 맥락 없음과 의미 없음을 사회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으로 친절하고 예의 바르게 지적해 생각을 직접 말하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그렇게 유도할 수 없다면 동일하게 직접 일할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것이 최선입니다.
결론. ‘굳이 이렇게 까지 해야 함?’ 같은 화법을 사용하는 사람을 주의해야 합니다. 이 문장은 의문문이 아니며 그저 아무 의미 없이 발화자를 상대방으로 바꾸는 물음표로 끝나는 말에 불과합니다. 여기에 의미를 부여해 대답하려고 하면 상황이 단단히 꼬여 아주 취약해질 수 있습니다. 대답하지 말고 ‘굳이 이렇게 까지’의 맥락과 의미를 직접 설명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상대가 설명한다면 대화를 이어서 진행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는다면 상대와 일할 상황을 피하도록 파이프라인을 구축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