둠 이터널
이렇게 말하는 스스로가 좀 웃기긴 하지만 FPS 게임을 좋아하지만 잘 하지는 못합니다. 시대를 주름잡는 FPS를 오랜 시간 플레이하지만 멀티플레이에서는 항상 어처구니 없는 플레이를 반복해 FFA밖에 할 수 없는 인생입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여전히 FPS를 좋아합니다. FPS 장르만큼 본능적인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장르가 드물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또 FPS만큼 긴 역사를 가지고 여러 가지 표현 방법을 연구한 장르 역시 드뭅니다. 여기에 둠은 이 장르를 발명해낸 사람들의 가장 유명한 게임 프랜차이즈입니다. 그렇게 둠에 열광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둠3에서 좀 실망했고 4년 전 둠 리부트 때는 또 꽤 괜찮았습니다. 이제 이름이 같을 뿐 현대의 둠은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게임이지만 둠이 발명해냈고 또 여전히 그 플레이를 온전히 복제해낸 게임이 드문 시대에 둠이 둠 답게 이름 뒤에 불길하기 짝이 없는 접미사를 달고 나타나자 다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프로젝트 이름 뒤에 이런 불길한 단어를 달고 별 탈 없이 출시한 게임은 드물었습니다. 가령 듀크뉴캠 포에버는 흥미로운 소재와 시스템에도 불구하고 너무 오랜 기간에 걸쳐 개발했고 나중에는 개발팀으로부터 에셋이 유출되어 구직시장에 돌아다니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결국 게임이 출시됐지만 스팀에서 정가가 유지된 시간은 정말 짧았고 저 역시 할인에 할인을 거듭해 5달러가 됐을 때 구입했습니다. 게임의 여러 부분이 듀크뉴캠의 분위기에 어울렸지만 근본적으로 이건 사려깊게 만든 FPS가 아니었습니다. 엔딩은 고사하고 몇십분쯤 견디다가 - 플레이한 것이 아님 - 그만뒀고 그 후로는 도저히 손을 댈 수가 없었습니다. 이 이상은 언급하지 않겠지만 이런 이름을 게임 이름이나 프로젝트 이름에 사용한 여러 게임들의 결말은 하나같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 업계의 불길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이 불길한 이름을 소화할 수 있는 게임은 사실 둠 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불길한 단어를 붙일 게임 이름조차도 둠이니까요. 혹시나 출시하지 못하면 어쩌나 했는데 결국 게임은 출시됐고 둠 이터널은 … 그냥 최고입니다.
플레이스타일
둠 이터널은 4년 전에 출시한 둠과 비슷하지만 플레이해보면 완전히 다른 게임입니다. 이전 둠이 모던 FPS에 '둠'의 플레이를 온전히 재현하는데 성공했다면 둠 이터널은 이제 플레이어에게 슬레이어처럼 움직일 것을 강제합니다. 내가 공격적으로 플레이할 수록 게임은 내게 더 많은 기회와 힘과 탄약을 제공해줍니다. 평소에 FPS를 플레이하듯 소극적으로 플레이할수록 나는 점점 더 힘들어지고 사실상 게임을 진행할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둠과 둠 이터널 양쪽 모두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슬레이어의 헬멧을 발견하고 앞뒤로 돌려 살펴본 다음 이걸 뒤집어쓰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이 나오기 전까지는 모니터 앞에서 약간 흐트러진 자세를 하고 있었다면 헬멧을 쓴 다음부터는 의자를 좀 더 당겨 고쳐 앉고 입을 다물고 마우스를 고쳐 쥐고 지옥에서 나타난 악마를 씹어먹을 준비를 합니다. 헬멧을 쓰기 전에는 웃으며 글로리킬을 했다면 헬멧을 쓴 다음부터는 정말 슬레이어의 표정이 내 표정에 나타납니다. 진짜 슬레이어의 표정은 헬멧에 가려 눈밖에 보이지 않지만요. 스테이지를 거듭할수록 중간중간 실수는 있지만 나는 점점 더 공격적으로 플레이하고 이건 정말 신나는 경험이었습니다. 전작에서 '세상에 나만큼 조심스러운 슬레이어는 없을 거야'라고 자조하며 플레이했다면 이제는 '어디냐! 나와! 나와! 나와! 나오라고!'라며 플레이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플레이어에게 이 슬레이어스러운 플레이를 강제하는 구성이 훌륭합니다.
레벨디자인
클래식한 레벨디자인은 이제 전투 영역 하나하나를 FFA모드 멀티플레이 레벨과 비슷하게 만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밀리터리 FPS들이 나타나면서 레벨이 좀 더 수평 형태로 바뀌었다고 생각합니다. 플레이어의 움직임은 좀 더 무거워지고 보다 천천히 움직이며 장면 사이를 전환할 때 긴장감을 유지하는 장치들을 사용합니다. 이런 게임에 익숙해지다 보니 같은 게임에서 위 아래로 긴 레벨을 만날 때 잠깐 동안 여기에 적응하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둠의 시대가 지나고 퀘이크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레벨은 수직 구조가 강조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계속해서 위, 아래로 움직여야 하고 플레이어가 있는 그 층 뿐만 아니라 바로 위 아래 층, 나아가 반대쪽 구조물의 다른 층에도 동시에 신경쓰며 플레이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번 둠은 이런 레벨디자인을 더 강조했습니다. 동시에 핵심 전투가 일어나는 각 공간을 멀티플레이 레벨처럼 구성해 앞에서 이야기한 보다 공격적인 플레이에 더 어울리도록 구성했습니다.
둠 다운 기믹
여러 가지 인상적인 기믹이 있습니다. 여러 기믹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적인 규칙으로 사용되는 점은 수많은 레벨이 등장하는 MMO 게임을 만드는 입장에서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가령 점프대는 어느 레벨에서나 점프대처럼 생겼고 매달릴 수 있는 벽은 어느 레벨에서나 똑같이 생겼습니다. 올라가도 안전한 곳은 항상 녹색으로, 그렇지 않은 곳은 붉은색으로 표시됩니다. 개발하다 보면 종종 레벨마다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 같은 역할을 하는 기믹의 겉모양이나 애니메이션을 바꿔 고객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일이 자주 일어나는 세계에서 개발하는 입장에서 이 일관성있는 기믹 사용은 인상적이었고 또 부러웠습니다.
이번 둠에서 가장 인상적인 기믹은 개사 손으로 쳐서 무너뜨릴 수 있는 벽입니다. 레벨의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기믹은 여러 게임에 있었습니다. 가령 자동으로 여닫히는 문이나 엘리베이터 같은 것들입니다. 이들 각각은 게임의 장르나 상황에 따라 사용되었고 또 바이오해저드에서처럼 기술적인 한계를 게임의 일부로 풀어내기도 했습니다. 이들 모두는 공간을 연결하는 역할입니다만 이번 둠에서는 이 공간 사이를 시각적으로 차단하고 다음 공간을 내 인터랙션에 의해 개방하는 기믹을 슬레이어의 스타일로 만들었습니다. 자동문은 내가 조심스럽게 다가갈 수 있고 엘리베이터는 그 스스로 움직여 나를 수동적으로 다음 공간에 데려다주는 기믹이라면 이 부술 수 있는 벽은 슬레이어가 적극적으로 파괴해야 합니다. 둠에서 이 부술 수 있는 벽은 '이 다음엔 뭐가 있을까?' 정도로 기대를 가지는 수준이 아니라 '다음은 누구냐 이 새끼들아' 같은 느낌에 더 가깝습니다. 슬레이어는 적극적으로 벽을 부수고 다음 공간을 시각적으로 개방한 다음 플레이를 계속합니다. 다른 여러 가지 서로 잘 구분되는 기믹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무너지는 벽은 가장 둠 다운 기믹입니다.
결론
이번 둠은 그 이름이 아니었다면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인정합니다. 이건 둠이고 둠의 후속작이 맞으며 플레이어가 누구라도 이 게임에서 살아남고 나면 극도로 공격적이고 강한 슬레이어가 되어 있을 겁니다. 이젠 2018년 퀘이크콘에서 함성을 지르던 아저씨들을 이해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