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 내가 뭐라고
다들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그분들보다 훨씬 가난한 제가 열심히 일하지 않고 또 주말에 편히 쉬고 있는 건 뭔가 잘못되었습니다.
유튜브 추천에 나타난 보이스피싱 일당에 대한 뉴스 영상을 봤습니다. 이들은 처음에 중국에서 국제전화를 통해 한국에 전화를 걸어 사기를 쳤는데 시간이 지나며 국제전화로 걸려온 전화, 그 중에서도 특히 중국에서 이유 없이 걸려 온 전화는 보이스피싱 전화일 가능성이 높다는 인식이 자리 잡아 이전만큼 사기를 칠 수 없게 된 모양입니다.
그래서 전화는 여전히 중국에서 걸되 잠재 피해자의 전화번호로 바로 전화를 거는 대신 국내에 중계기를 두고 중계기에 전화를 건 다음 그 중계기가 다시 국내 잠재 피해자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 걸려온 전화번호를 보면 한국에서 걸려온 전화번호로 표시되도록 하는 방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국 경찰이 국내에 있는 중계기를 추적하기 시작해 중계기를 고정된 장소에 숨기는 방식이 잘 통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자 보이스피싱 일당은 국내의 중계기를 자동차에 싣고 이동하며 중계를 계속하거나 짧은 시간 동안만 중계기를 가동하고 계속해서 자리를 옮길 뿐 아니라 중계기의 크기를 줄여 더 찾기 어렵게 만드는 등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한 방법을 계속해서 연구합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중계기를 얼마나 작게 만들든 간에 경찰의 추적을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 수는 없었고 뭔가 다른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뉴스에 나타난 이들의 최신 접근은 추적을 위해 경찰이 큰 비용을 들여야 할 뿐 아니라 위치를 특정하기 어려운 무인도에 중계기를 두고 태양광 패널을 설치해 자력으로 동작할 수 있도록 한 다음 원격에서 장비를 켜고 끌 수 있도록 합니다. 그리고 무인도 주변의 마을 사람들에게 돈을 주고 이 주변을 살펴보다가 수상한 사람이 나타나거나 무인도에 누가 들어가는 것 같으면 연락을 달라고 해 둔 모양입니다. 그래서 경찰이 전파를 추적해 무인도 근처에 도달했지만 가까이 가면 신호가 끊겨 한동안 중계기 위치를 찾아내지 못하기를 반복했지만 결국 이렇게 뉴스에 나온 것을 보면 어떻게든 중계기 위치를 찾아낸 것 같습니다. 이미 중계기를 자동차에 싣고 이동하며 중계하는 단계에서 첩보영화에서 봐 온 정부기관의 추적을 따돌리는 멋진 첩보 요원의 모습은 이제 보이스피싱 범죄자 일당의 이미지로 대체되어 더 이상 멋지지 않게 변합니다. 이들의 이미지는 제 마음속에서 영화 레드에 나오는 폴더폰 여러 개를 겹쳐 한 번호로 전화가 걸려 오면 실시간으로 여러 번호에 전화를 걸어 맨 마지막 폰으로 전화를 받게 만든 추적이 거의 불가능한 마빈의 폰 같은 웃긴 이미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뉴스를 보고 현대 한국을 살아가는 성실한 사람이라면 보이스피싱 일당의 범죄가 저렇게 까지 발전했으니 더더욱 모르는 전화번호로부터 걸려 온 전화나 메시지에 주의해야 하고 또 통신회사가 이를 충분히 방지할 수 있음에도 이 통화 자체가 수익원이므로 이를 방조하는 사이에 경찰이 범죄자들을 끈질기게 추적하고 있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사실 현대 한국을 살아가는 나름 성실한 사람의 범주에서 아주 크게 멀지는 않다고 생각하지만 이 뉴스 영상을 보며 든 생각은 다들 돈을 벌기 위해 저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들 무슨 방법을 쓰든 돈을 벌기 위해 중계기를 차에 싣고 이동하며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고 무인도에 중계기를 설치한 다음 주민들을 감시에 활용하며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마당에 그런 뉴스를 어느 휴일 오후 따뜻한 집에 커피 한 잔 놓고 앉아 폰으로 유튜브나 보고 있으니 제 자신이 게으르고 부끄럽고 초라하고 또 가난하게 느껴집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지금 이 시간에도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마당에 제가 뭐라고 따뜻한 집안에 앉아 빈둥거리며 그 분들의 소식을 영상으로 받아 보고 있나 싶습니다.
한편 이전 인도어 라이딩의 디펜딩 챔피언 즈위프트에서 자전거는 타고 싶은데 겨울에 나가기는 귀찮아서 인도어 라이딩 장비를 마련했는데 처음에는 자전거 뒷바퀴를 뗀 다음 그 자리에 장치를 걸어 오르막 저항을 시뮬레이션 해 주는 장치를 사용하다가 자전거를 장치에 걸었다 다시 내리기를 반복하는 일이 귀찮아 완전 본격적인 자전거를 걸 필요가 없는 인도어 라이딩 장비로 바꿨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전에 사용하던 로라 - 롤러의 일본식 발음. 동호인들 사이에 인도어 트레이너를 이렇게 부르곤 함. - 를 아직 팔지 않은 채로 새 로라를 구입했기 때문에 집에는 거대한 물체 두 개가 굴러다니게 됐고 당장 이전에 사용하던 로라를 중고로 팔라는 강렬한 눈초리가 하루하루 새 로라를 타는 제 등에 내리 꽂히고 있었습니다.
사실 본격적으로 즈위프트 같은 트레이닝 프로그램의 인게임 오르막 저항을 시뮬레이션 해 주는 트레이너 - 로라 - 는 흔히 저렴한 가격대에 구입할 수 있는 야핏 같은 간이 트레이닝 장치에 비해 가격대가 훨씬 높고 사용 방법도 더 까다롭기 대문에 중고로 내놓아도 잘 팔리지 않습니다. 이 장치를 사용하려면 일단 여기에 걸 자전거를 이미 가지고 있어야 하고 바퀴를 분해할 수 있는 수준의 정비 지식이 필요하며 즈위프트 같은 트레이닝 프로그램을 사용하거나 트레이닝 프로그램을 포함한 가민 헤드유닛이 있어야 합니다. 결정적으로 이 장치와 자전거를 함께 설치할 아주 좁지는 않은 공간이 필요한데 이 마지막 조건을 포함한 모든 조건을 만족하는 사람을 찾기는 본격적인 자전거 동호회에서도 쉽지 않습니다.
이를 고려해 구입할 때에 비해 굉장히 싼 가격으로 중고 장터에 트레이너를 올렸지만 한동안 아무 연락도 받지 못한 채 다음 페이지로 밀려 가 버립니다. 한 번 끌어 올리자 첫 연락이 왔는데 이 분은 다른 조건을 모두 만족했지만 자전거가 디스크 브레이크여서 이 트레이너를 구입하더라도 바로 사용할 수 없고 디스크 브레이크가 달린 바퀴를 장착할 수 있게 해 주는 어댑터를 따로 구입해야만 했는데 어댑터를 구하기 쉽지 않아 이 거래는 불발되었습니다. 지금은 저 역시 디스크 브레이크를 사용하는 자전거를 타지만 이 때는 림 브레이크를 사용하는 자전거를 타고 있어 완전 상상도 못한 불발 사유였고 이 불발 직후 중고 판매 게시물에 림 프레이크를 사용하는 자전거여야 한다는 메시지를 추가합니다. 그렇게 또 몇몇 구입 문의가 불발 된 다음 어느 한 분과 간신히 연락이 닿아 판매하기로 했는데 다행히 이 분은 이 트레이너를 잘 알고 계신 분인 듯 주요 제약 사항에 대한 이야기를 쉽게 끝냈고 트레이너에 달려 있던 낡은 스프라켓 - 자전거 뒷바퀴에 달린 톱니바퀴 뭉치 - 을 교체할 목적으로 사 놨던 시마노 스프라켓을 함께 드리기로 합니다.
트레이너는 상자를 포함해 무게가 20킬로그램이 넘기 때문에 어디 먼 곳에서 거래 하기 어려웠는데 다행히 구매 하실 분이 아파트 단지 입구까지 와 주신다고 하셔서 저는 이 커다란 상자를 카트에 올려 조심스럽게 끌고 내려가 단지 입구까지 살살 밀고 갔습니다. 약속 시간이 가까워지자 지나가던 차량을 감시하듯 살펴보기 시작했지만 웬만한 차들이 모두 그냥 지나갔고 좀 늦으시나보다 생각하는 찰나 단지 앞 길 건너편에 반짝이는 커다란 재규어 한 대가 스르륵 미끄러져 들어와 멈춰 섭니다. 차 안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자리에 비상등을 켜고 한 30초쯤 서 있는 모습으로 미루어 혹시 저 차가 중고 거래 할 분의 차인가 싶었는데 이내 차에서 내린 분이 커다란 상자를 옆에 둔 저를 향해 직선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이 분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서로 인사했고 이 분은 상자 겉에 그려진 제품의 부속 중 자전거 앞바퀴를 올려 놓는 받침은 따로 구입하는 것인지 아니면 포함되어 있는 것인지를 물었고 저는 원래 포함되어 있으며 상자 위쪽에 있으니 보여 드리겠다고 하고 상자 위쪽을 열어 보여드립니다. 그리고 실제 물건을 보셔야 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다며 바로 입금하고 묵직한 상자를 소리 없이 비상등만 깜빡이고 있는 재규어 뒷자리에 싣고 이내 떠나갑니다.
이후 며칠 동안은 이 분으로부터 문의가 올까 약간 신경 쓰고 있었습니다. 가령 장치에 달린 낡은 스프라켓을 뺄 공구가 없다든지 - 스프라켓을 빼려면 전용 공구가 필요함 - 설치할 자전거와 스프라켓 규격이 안 맞다든지 - 시마노 105의 특정 조합 - 해서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묻는 연락이 올 수 있다고 예상했습니다. 가령 이 분이 시마노의 다른 제품, 다른 스프라켓 조합을 사용하거나 아예 스램 구동계를 사용한다면 이에 맞춰 스프라켓을 새로 구입해 장착해야 했고 이건 아예 정비할 수 없는 분이라면 난감할 수 있었고 또 장치 무게가 무겁기 때문에 샵에 들고 가서 스프라켓을 교체하기도 상당히 까다로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고 또 몇 주가 지나도 연락은 오지 않았고 이쯤 되면 제가 중고로 판 트레이너는 새 주인을 만나 그 분의 허벅지를 강화하고 또 심폐지구력을 향상시키는데 도움을 주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 때도 마치 이번에 이동전화 중계기를 무인도에 설치하고 이를 원격 제어할 수 있게 하고 또 태양광 패널을 설치해 완전히 자력으로 동작할 수 있게 만든 다음 마을 주민들에게 돈을 주고 수사 기관의 접근을 감시하게 만들며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보며 느낀 비슷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저는 새 제품 가격을 기준으로 이전에 사용하던 트레이너의 두 배도 넘는 돈을 주고 새 트레이너를 샀습니다. 심지어 이 물건은 부피가 너무 커서 집에 강제 귀속되어 이렇게 중고 거래하기도 거의 불가능할 겁니다. 한동안 자전거 가격이 엄청나게 올라갔었지만 요즘은 다시 서서히 제 자리를 찾아 가고 있는데 자전거 가격이 올랐던 시대를 기준으로 해도 새 트레이너는 입문용 자전거 한 대 가격을 상회하는 가격이었습니다.
이를 오직 집 안에서 훈련하는데 사용하는 장비를 살 목적으로 소비해도 괜찮은지 많이 고민했습니다. 이미 이번에 사용하던 트레이너 역시 구입하기 전에 많이 고민하긴 했지만 결국 구입하고 나서 프로 선수만큼은 아니겠지만 나름 본전을 뽑았다고 자신할 만큼 사용하기는 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영하 20도를 찍거나 말거나 계속해서 자전거를 탔고 덕분에 허벅지를 튼튼히 유지하고 또 심폐 역시 나쁘지 않은 수준을 유지해 적어도 동네 자전거 모임 말뚝 선두 정도는 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이런 생각을 지울 수는 없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고작 취미로 타는 자전거에 정말 본격적인 트레이닝 샵에서 사용하는 트레이닝 장비를 구입하는 것이 정말 올바른지 한참 생각했습니다. 이전에 사용하던 장비로도 자전거를 거는 수고를 하면 아무 문제도 없었고 자전거 뒷 바퀴를 탈착하는 과정도 몇 년에 걸쳐 반복한 끝에 엄청나게 익숙해져 맨손으로 손에 체인 오일을 전혀 안 묻히고도 뒷바퀴를 탈착하는 묘기를 부릴 수도 있게 됩니다. 그런 마당에 굳이 상당한 비용을 들여 새 트레이너를 구입하는 것은 돈을 낭비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 고민도 오래 하고 또 구입해서 배달을 받아 설치한 다음 제 자전거로부터 피팅을 맞추는 그 순간까지도 과연 이게 잘 하는 짓인지 자신이 없었습니다. 일단 트레이너에 올라 땀을 내기 시작하자 그런 고민은 좀 줄어들었고 어차피 산 거 이전처럼 본전을 뽑으면 된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이전 트레이너를 반 값에 중고로 구입하러 오신 분은 아주 말끔하게 세차 된 대형 재규어를 타고 소리 없이 부드럽게 나타나셨고 차 안에서는 새 차 냄새가 납니다. 모르긴 몰라도 굉장히 비쌀 것 같습니다. 이런 차를 타고 오신 분도 트레이너를 중고 거래 하시는데 이번에도 내가 뭐라고 고가의 새 트레이너를 구입했나, 다들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 이러니 내가 가난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번은 화분을 중고 거래하려고 했습니다. 사실 이건 그냥 버릴까 생각도 했는데 가족이 버리지 말고 당근에 올려 보라고 조언해 줘서 당근에 올립니다. 물론 장점이 많은 토분이기는 하지만 이걸 누가 구입할까 싶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첫 연락이 왔고 바로 거래 약속을 잡았습니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사시는 것 같았는데 약속 시간 직전에 원래는 걸어 갈 작정이었으나 아이를 픽업한 다음 오느라 조금 늦으며 자동차를 타고 나타날 작정이라는 연락을 받습니다. 이번에는 단지 근처 편의점 앞에서 화분을 담은 종이 가방을 끌어 안고 어색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서성이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골목에 진한 회색 벤츠 한 대가 들어서며 천천히 속도를 줄입니다. 그 주에 비가 내려 아주 깨끗하지는 않았지만 대형 세단 특유의 앞에서 뒤까지 아무리 걸어가도 차 뒤가 안 나오는 기다란 자체가 저를 한참이나 지나친 다음에 멈추고 차에서 거래하실 분이 내리십니다.
힐끗 보니 차 안에서 아이가 고개를 숙인 채 뭔가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그게 뭔지는 모르겠습니다. 별 거 아니니 바로 물건 확인하고 돈 받고 거래를 마무리하려는데 문득 그 분이 씩 웃으며 제가 물으셨습니다. “천 원만 빼 주시면 안돼요?” 저는 이미 10분이나 늦은 약속 덕분에 편의점 앞에 담배 사러 왔다가 카드를 놓고 왔음을 깨닫고 절망한 아저씨처럼 멍한 얼굴로 한참이나 그 앞에 서서 두리번거리며 주변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전달하고 있었는데 이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싶었지만 또 얼른 이 거래를 끝내고 집에 가고 싶어 그러겠다고 하고 천 원을 쥐어 드린 다음 자리를 떠납니다. 잠시 후 그 분은 편의점에 들어갔다가 나와 차에 타 저를 앞질러 지나갔습니다.
이 때도 비슷한 느낌이 들었는데 오늘 이렇게 타이핑 하며 정리하다 보니 저는 차가 없어 걸어 다니는 입장이어서 그런지 누군가 자동차를 타고 나타나면 그 분의 재산 수준을 자동차를 통해 판단하는 습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이런 방식으로 판단한다고 해서 이 판단 기준이 크게 틀리지 않으며 또 다른 사람들의 판단 기준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지만 이쯤 되면 어린 왕자를 다시 읽으며 생각을 바로 잡아야 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저는 그 화분을 웬만하면 그냥 버릴 작정이었는데 그 화분을 사러 오신 분은 그 화분을 중고로 구입하려고 하셨고 또 늦게 오셨으면서도 천 원을 깎아 구입하셨으며 그럼에도 차 앞에서 걷기 시작해 한참을 걸어도 차 뒤가 안 나오는 대형 벤츠를 타고 다니셨는데 어쩌면 이 분이 여기까지 오는데 쓴 기름값이 한 천 원 쯤 될 지도 모릅니다. 이번에도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작은 화분 하나도 중고로 구입하고 그러면서도 천 원 깎아 구입하려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제가 너무 방탕하게 살고 있지는 않은지, 그래서 저는 차도 없이 가난하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 한번은 주말 낮에 딱히 뭘 해 먹고 싶은 기분이 아니어서 음식을 배달 시키기로 하고 가족과 한참이나 메뉴를 토론한 끝에 주문합니다. 본격적인 주말 점심시간 직전이어서 배달이 늦어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배차가 순식간에 이루어졌고 예상보다 훨씬 빨리 배달 받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한동안 단지 입구에는 제대로 된 주차 차단 시스템이 없었는데 동네에 다른 가게에 온 사람들이 단지 내 주차장에 주차해 한동안 문제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장기수선충당금을 사용해 단지 입구에 그럴싸한 주차 차단기와 주차 관리 시스템을 도입했는데 이 시스템은 각 입주민들의 차량 번호를 모두 기록했다가 이 기록에 있는 차량만 통과 시키고 만약 이 기록에 없는 차량이 진입하면 출입 단말기에 몇 호에 방문한 차향인지 입력해야만 통과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일단 단말기에 방문 호수를 입력하면 바로 통과할 수 있지만 나중에 입주민이 앱을 통해 이를 승인하거나 거절할 수 있는데 이 때 입주민은 입차하는 차량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동차로 배달하는 사례가 늘어나자 단말기를 조작하는 대신 창문을 내린 다음 경비실 방향을 향해 큰 소리로 ‘배달이요!’ 하고 외치면 단말기를 조작하지 않아도 경비원님이 통과 시켜 주곤 합니다.
그런데 배달 차량이 단지 입구에 도착하자 이 분은 곧이곧대로 입차 단말기를 조작했고 앱으로 이를 승인할지 여부를 묻는 알림이 나타났는데 알림을 눌러 보니 앱이 실행되어 입차한 차량 사진을 보여줍니다. 사진은 자동차 운전자 기준 왼쪽 앞에 설치되어 있어 사진의 대부분은 자동차 앞면이고 옆면을 아주 조금 볼 수 있었는데 사진은 비율이 왜곡되어 앞부분은 확실히 볼 수 있었지만 옆면을 봐서는 이 자동차가 얼마나 긴지 알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자동차 앞부분만 보고도 무슨 차인지 바로 알 수 있었는데 이건 BMW 3시리즈가 분명합니다. 5 시리즈는 확실히 아니고 또 1 시리즈라고 하기에는 분명 정면의 몇 가지 특징이 다릅니다.
또 사진은 흑백에 가까워 판단하기 좀 어려웠지만 M 모델인 것도 같아 보입니다. 일단 승인 버튼을 눌러 배달 후 나갈 때 알아서 출차가 승인되도록 한 다음 폰을 내려 놓고 점심 식사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는 가족에게 말합니다. “아니. BMW 타는 분도 주말에 배달을 하며 돈을 버는데 내가 뭐라고 주말에 쉬며 배달 음식을 시켜 먹고 있나 모르겠네. 이러니 내가 가난하지.” 그렇습니다. 분명 저 차는 굉장히 비싸 제가 구입할 만한 가격이 아닐 겁니다. 그런데 그 정도 돈을 낼 수 있는 분도 저 차를 타고 배달을 다니며 열심히 살고 있는데 제가 뭐라고 주말에 느즈막히 일어나 따뜻한 집 안에서 손가락만 까닥 거리며 음식을 주문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종종 미디어에 보이는 여러 이야기들 - 설사 그 행동이 범죄라 할지라도 - 을 보며 사무직으로 먹고 사는 제가 종종 너무 게으르고 또 제조업처럼 실체가 있는 물건을 만드는데 기여하지도 않고 또 서비스업처럼 실제로 누군가를 대하지도 않으며 가상의 세계, 가상의 경쟁 구도, 가상의 물건을 만드는 일이 실체가 없어 항상 불안하다는 생각을 해 왔습니다. 만약 지구가 멸망해 소수의 의미 있는 사람들을 선별해 탈출 시킨다면 분명 저는 거기에 포함되지 못할 겁니다. 또 지구가 멸망한 다음 어떻게 살아 남았다 하더라도 실체가 있는 뭘 만들지도 못하고 강인한 체력으로 살아남을 수 있지도 않을 거라고도 생각했습니다. 다른 한 편으로는 다른 분들이 은퇴 후 택시, 배달 같은 일을 할 수 있는데 비해 저는 시력마저 약해 그런 기회도 없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일할 수 있을 때 좀 더 열심히 일해 후일을 도모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해 왔는데 이렇게 주변에 저보다 훨씬 넉넉하게 사는 것 같으면서도 저보다 훨씬 더 열심히 일하고 또 열심히 사는 분들과 마주할 때마다 대체 제가 뭐라고 그 분들이 일하는 동안 따뜻한 집에서 아무 것도 안 하고 있나 싶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제가 상대의 재산을 자동차를 통해 판단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고 또 그 일이 범죄라 하더라도 돈을 벌기 위해 머리를 짜내 이를 실행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충분히 새 물건을 살 수 있는데도 중고 거래를 하고 또 그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가격을 깎으려는 분들이 있는 세상에 제 스스로가 너무 대충 살고 있지 않은지 반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