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버스가 정확한 위치에 정차하면 저는 좋아요
서울시는 명동 근처의 버스 정류장에 시도했던 버스의 정위치 정차 정책을 일단은 철회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이 정책이야말로 버스 승차에 따른 공포를 거의 없애 주는 정책입니다.
먼 옛날 지방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집에서 조금 먼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전에는 거의 겪지도, 또 예상하지도 못한 문제를 맞이합니다. 아침에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보니 다들 바쁘게 도착하는 버스 앞으로 달려가 버스를 타는데 제 시력으로는 버스 번호가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또 버스 번호 뿐 아니라 행선지를 보고 버스를 탈 수도 있었지만 제 입장에서는 번호보다 더 작게 적힌 행선지는 멀리서 그 자리에 행선지가 적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 그 행선지가 각각 뭐라고 적혀 있는 것인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에 버스는 현대처럼 정보시스템에 의해 구동 되어 도착 시점을 예상할 수도 없었고 또 버스 각각의 행선지 정보를 볼 수 있는 곳이라고는 버스 정류장에 있던 회수권 파는 가게 옆 유리창에 붙어 있는 안내 뿐이었는데 이 안내는 버스 앞면과 옆면에 적힌 글씨보다 더더더더더더더더더 작디 작은 글씨로 인쇄되어 있어 이 역시 알아보기 쉽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인쇄물은 제가 좀 가까이 들여다 본다고 해서 갑자기 출발해버리거나 탈 건지 안 탈 건지 빨리 정하라며 저에게 화를 내지도 않았으므로 그나마 나았습니다.
버스 번호를 볼 수 없으니 제 입장에서는 정류장에 들어오는 모든 버스는 다 똑같이 생긴 버스일 뿐이었지만 그들이 서로 다른 번호를 붙이고 있고 그에 따라 서로 다른 노선으로 달린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습니다. 번호가 안 보이더라도 올바른 버스를 타기는 해야 했으니 몇 가지 전략을 사용했습니다. 처음에는 멈추는 버스마다 달려가 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하며 거기 가냐고 물었는데 매번 그럴 수도 없었고 또 질문을 받은 기사는 짜증을 내며 대답 대신 행선지표를 보라는 답변을 하기도 했는데 그래서 행선지표를 보려고 하면 버스는 출발해 버리기 일쑤입니다. 한동안은 같은 교복을 입은 사람이 정류장에 있을 때 버스 대신 그 사람의 행동을 지켜보다가 그 사람이 타는 버스를 뒤 따라 탔고 이건 성공률이 높은 전략이었습니다. 하지만 성공률이 높을 뿐 완벽하지 않았는데 종종 그 사람이 학교에 앞서 어딘가 들릴 작정으로 다른 버스를 타면 그 날 아침은 완전히 망하는 겁니다. 또 같은 교복을 입은 사람이 정류장에 없다면 그런 사람이 나타날 때 까지 기다려야 했는데 종종 제 교복을 본 버스가 백미러로 저를 쳐다보며 ‘왜 쟤는 안 타지?' 하며 기다리는 걸 모른 척 하느라 곤혹을 치를 때도 있었습니다.
여러 전략을 시도했지만 하나같이 안정적이지 않았는데 이들 중 기사에게 달려가 고함 치며 질문을 하거나 같은 교복을 입은 사람의 행동을 따라하는 등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방법도 있었습니다. 버스정류장은 동시에 버스 두 대 반 정도가 정차할 수 있는 길이였는데 버스 정류장에 버스가 하나도 없으면 버스는 달리는 속도를 거의 줄이지 않은 채 정류장에 접근해 정류장에 선 제 시점에서 오른쪽 끝까지 달린 다음 거의 급정거 하다시피 멈추곤 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버스라도 정류장 왼쪽 끝을 반드시 지나가야 했고 거의 모든 경우 이 때 버스는 가장 바깥 차선에 있었습니다. 즉 버스 정류장 왼쪽 끝에 서 있으면 버스가 지나갈 때 행선지표와 제 눈 사이를 가장 가깝게 할 수 있는 아주 짧은 순간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버스 정류장 맨 왼쪽, 그러니까 버스 입장에서는 정류장 맨 앞에 서서 버스가 빠르게 제 앞을 지나갈 때 제 눈과 버스 행선지표 사이 간격이 최소가 되는 순간 신체의 모든 능력을 눈알에 집중해 행선지표를 노려보면 순간적으로 행선지 일부와 버스 번호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제가 타야 하는 버스라면 즉시 몸을 날려 버스 정류장 맨 앞까지 달려가 버스를 탔는데 어떤 기사는 그냥 버스 정류장 반대쪽 끝에 서 있으면 될 걸 뭐 하러 반대쪽 끝에 서 있느냐며 핀잔을 줬지만 숨이 찬 상태라 상황을 설명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학교를 다녔고 또 그 다음 학교는 학교 셔틀버스가 정해진 시각 정해진 장소에 나타났기 때문에 굳이 눈을 부릅뜨고 온 몸의 집중력을 끌어올린 에너지를 눈알에 집중할 필요는 줄어듭니다. 하지만 종종 늘 셔틀버스를 운전하던 분께 뭔가 문제가 있어 운행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 운전하는 다른 버스가 나타나곤 했는데 이러면 과연 저 버스가 학교 셔틀버스가 맞는지 알아보는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버스 앞에는 한 시간 전에 휘갈겨 썼을 것 같은 학교 이름이 작게 붙어 있었지만 저는 이를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또 시력이 좋은 사람들은 그 안에 탄 사람들의 교복을 알아보고 어떤 버스가 와도 이를 알아보고 탈 수 있었지만 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 버스는 저와 같은 교복을 입은 사람을 모두 태우고 가는 것이 목적이어서 우물쭈물 하고 있더라도 시내버스처럼 매몰차게 그냥 출발하지는 않아 버스를 놓치지는 않았고 한동안 시내버스 번호를 읽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생활에서 좀 멀어집니다.
그렇게 지방에서 살다가 직업을 구하러 서울에 올라왔는데 그 시점과 크게 다르지 않은 시점에 당시 서울 시장이었던 이명박이 서울 시내버스 시스템을 크게 뜯어 고칩니다. 이 계획이 실행된 첫 날 항상 타던 버스를 타려고 정류장에서 기다리는데 아예 번호가 없는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했고 사람들은 이게 어디 가는 버스냐고 물었지만 기사도 정확하게 답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리에 익숙한 사람들은 대강 방향을 듣고 일단 버스를 탄 다음 목적지와 가까운 곳까지 이동해 그 다음 행동을 결정하려는 것 같았고 그런 이야기를 뒤에서 듣다가 일단 저 역시 버스에 뛰어 올라 목적지와 가까운 곳까지 이동하는 동안 정신을 바짝 차립니다. 버스는 번호도 없고 정류장 안내도 없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럼 그 기사님은 도대체 어디를 향해 달리고 있던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여러 뉴스에서는 새 시내버스 시스템이 졸속으로 추진되었다며 당장 되돌려 시민 피해를 최소화하라는 소식이 이어졌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자 이 시스템은 자리를 잡았고 대충 빨간 버스는 아주 멀리 가는 버스, 파란 버스는 주로 구 경계를 여러 번 이동하는 버스, 녹색 버스는 주로 구 경계 안을 이동하거나 구 경계를 한 번 정도만 이동하는 버스, 노란 버스는 좁은 원형 구간을 빙빙 도는 버스로 이해하게 됐고 결국 이 구분은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졸속 추진되었고 파행으로 치닫는다며 욕을 먹던 새 시내버스 시스템이었지만 이 시스템은 제 입장에서 굉장히 반가운 기능이 있었는데 바로 인터넷 웹사이트에서 버스 번호나 정류장 번호를 넣으면 노선도, 이 정류장에 도착하는 버스 목록, 버스들의 현재 위치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이건 정말 엄청났는데 그 전까지는 정류장에 도착하는 모든 버스 목록을 알지도 못했고 각 버스가 어디로 가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했던데 비해 이제는 버스 번호가 대략적인 규칙에 따라 정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처음 보는 버스라도 대강 어디로 갈 지 예상할 수 있었고 또 웹사이트를 새로고침 하고 있다가 제가 탈 버스가 전 정류장을 출발한 것 같으면 그때부터만 긴장하고 있으면 됐습니다.
그 전까지는 제가 탈 버스가 언제 도착할지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항상 긴장해야 했고 시력이 좋은 분들은 이미 교차로 두 개 전 신호에 걸려 정차 중인 버스를 보고 미리부터 줄을 서서 기다리는 통에 절대로 앉아서 갈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시내버스 시스템이 전면 개편된 다음부터는 가령 140번 파란색 버스는 1번 권역인 노원에서 4번 권역인 강남까지 이동하는 버스라는 사실을 알 수 있어 일단 급하게 근처까지는 이동해야 할 때 정확한 버스가 아니라도 일단 버스를 타고 이동하며 시간을 줄일 수 있었습니다. 또 정류장에 서 있는 모든 시간에 걸쳐 긴장하는 대신 제가 탈 버스가 전 정류장을 출발할 때부터만 긴장하면 됐고 이전에 비해 버스가 훨씬 편해집니다.
시간이 흘러 정류장에는 버스 도착 안내 시스템이 생겨 전광판으로 몇 번 버스가 어디 있고 언제쯤 도착할지를 시력이 썩 좋지 않은 저도 가까이에서 올려다 볼 수 있게 됐고 또 음성으로 이전 정류장을 출발한 버스와 지금 정류장에 들어오는 버스 번호를 알려줘 이전만큼 버스 탈 때 시력에 크게 의존하지 않게 됐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버스와 지하철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면 항상 지하철을 선택하는데 여전히 버스는 이전 시대에 비해 훨씬 시력을 적게 사용할 수 있게 됐지만 여전히 시내버스에 대한 약간의 공포 같은 것이 남아 있어 버스는 제 입장에서 그리 편안한 교통수단이 아닙니다. 여전히 아주 붐비는 긴 버스 정류장에서는 제가 탈 버스가 들어온다는 안내가 들렸지만 그 버스는 제가 서 있는 곳과 아주 먼 곳에 정차에 어릴 때 행선지표와 제 눈알 사이 간격을 최소화해 이를 인식한 다음 버스까지 전력 질주하던 것과 별로 다르지 않은 상황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심지어 어떤 상황에는 정류장이 버스로 가득 차 있을 때 그 다음 버스가 정류장 진입을 기다리는 대신 한 차선 밖에 정차해 버스가 두 줄로 정차한 사이사이에서 탈 버스를 알아서 찾아가야 하기도 했습니다. 또 시간이 흘러 버스가 정차한 다음 문을 열면 버스 번호가 적힌 귀여운 깃발 같은 것이 버스 방향에 수직으로 펼쳐져 버스 앞까지 달려가지 않아도 버스 번호를 알 수 있게 했는데 시도는 좋았지만 이 조그만 번호는 시력이 나쁜 제가 인식하기에는 너무나도 작아 약간 약올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뿐 전혀 도움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현대에는 버스 도착 안내가 워낙 정확해져 버스끼리 서로 추월하는 이상한 상황이 아닌 이상 버스가 정류장에 진입하는 순서마저 거의 정확해져 ‘세 번째 도착하는 버스’ 같은 식으로 인식하면 거의 정확하게 버스를 탈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서울에서 경기도로 이사하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경기도 버스는 서울 버스처럼 번호를 보고 목적지를 예상할 수 있지 않았습니다. 서울 버스가 경기도로 나온 빨간 버스는 여전히 번호를 보고 목적지를 예측할 수 있었지만 경기도 광역버스는 모두 똑같이 생겼을 뿐 아니라 정류장에 잘 정차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악명 높은 경기 버스는 단지 정류장에 서 있는 것 만으로는 절대 정차 하지 않았고 그 버스를 향해 제 승차 의지를 최대한 표현해야만 간신히 정차할까말까 한 정도였습니다. 심지어 승차 의사를 밝히기 위해 도로 쪽으로 한 걸음 나선 정도로는 기사가 못 본 척 하고 그냥 정류장을 지나쳐 버리곤 했는데 그 다음 버스는 20분 뒤에 오는 상황에서 이런 무정차를 코앞에서 당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습니다. 한번은 분명히 승차 의사를 밝혔는데도 무정차 통과한 버스가 바로 앞 신호에 걸려 멈추자 이 버스를 기다리던 저를 포함한 분노에 찬 사람들이 차가 오건 말건 그냥 큰 도로 중앙까지 나가 버스 문을 두드리며 문을 열라고 소리쳤고 문이 열리자 다들 우르르 타 자리에 앉는 대신 기사를 둘러싸고 실제 폭력이 오가지는 않았지만 언어만으로는 이미 기사를 버스 밖으로 내던졌다고 생각할 만한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나중에는 무정차를 당할 때마다 꼬박꼬박 신고했지만 교육하겠다는 회신이 돌아올 뿐입니다.
살다 보면 무엇이든 적응하기 마련이라 제 아무리 무정차의 화신인 경기 버스라도 저 멀리 버스 같이 생긴 것이 보이면 그게 몇 번이든 말든 일단 버스 정류장 가장 바깥쪽 차선에 내려서 네가 멈추지 않고 지나가려면 너는 나를 깔아 뭉개야 할 거라는 오오라를 뿜으며 버스 앞으로 달려들어 버스를 멈추게 됐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 버스가 제가 탈 버스가 아니었다면 기사에게 ‘미안~’ 하는 입모양과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멋쩍게 뒤로 물러서 그 뒤에 도착한 다른 버스로 달려갔고 경기도에서는 서울에 비해 훨씬 더 야생에 가까운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행동을 해야만 버스를 타고 서울로 출퇴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한편 유럽의 어느 추운 동네에서 본 버스 정류장에 붙어 있는 버스 번호 별 정차벨을 보고 한국에도 저런 걸 도입하면 시력이 나쁜 사람이라도, 승차 의사를 밝히기 위해 달리는 버스 앞에 뛰어들지 않더라도 버스를 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또 누군가는 아무 이유 없이 저 모든 버튼을 항상 눌러 기사를 엿 먹일 거라는 생각을 하고 보니 그 또한 만만찮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튼 여러 해가 지나며 어엿한 경기도 주민이 되어 달리는 버스 앞에 달려드는 정도로는 아무런 공포도 느끼지 않는 진정한 광역버스 승객이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 낮은 시력은 별 문제가 아니게 됐습니다.
한편 "1km 가는데 1시간"‥서울 도심 일대 버스 대란 (2024.01.04/뉴스데스크/MBC) 이라는 뉴스를 봤습니다. 서울시가 생각한 예쁜 시나리오가 뭔지도 알겠고 이 시나리오가 잘 동작할 때 버스 승객들에게 어떤 장점이 있는지도 바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버스가 어디를 향하든지 간에 버스에 치이도록 그 앞에 달려들지 않아도 지정된 자리에 서 있으면 그 자리에 버스가 곱게 와서 멈춰 준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시나리오가 이상적으로 동작하면 시력이 나쁜 사람도 버스 승하차 지점에 붙어 있는 버스 번호를 가까이에서 확인한 다음 그 줄 뒤에 서 있기만 하면 버스까지 달려갈 필요도 없고 승차 의사를 표현하기 위해 차도로 뛰어들 필요도 없으며 다른 버스를 향해 달려드는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움직이는 물체의 속도와 질량에 따른 힘의 크기를 계산해볼 필요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마치 강남역 사방에 펼쳐진 광역버스 승차위치에서처럼 각 버스가 도착할 위치 주변에 줄을 서기만 하면 됐습니다. 물론 강남역에서 광역버스를 타려면 여러 번 꺾인 줄 끝을 찾는데 시간을 보내야 하고 그 줄 끝에 가서 이게 몇 번 버스 줄인지 다시 한 번 확인해야 했으며 만약 줄 맨 끝에 선 사람이 이게 몇 번 줄인지 잘 모르면 이게 몇 번 줄인지 아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앞으로 이동하며 같은 질문을 반복해야 하기는 했지만 적어도 서울에서는 경기도에서처럼 버스 앞으로 달려들 필요는 없어 이 정도면 그럭저럭 괜찮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강남역에서는 버스를 이렇게 정차 시키기 위해 광역버스 승하차 지점을 서로 꽤 멀리 떨어뜨려 놓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 원래는 바로 옆에서 탈 수 있던 버스를 강남대로와 테헤란로가 교차하는 지점을 중심으로 서로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도 분산해 버스가 지정된 위치에 정차할 때 일어나는 문제를 줄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하더라도 여전히 출퇴근 시간대에 강남역은 엄청나게 밀리고 또 인도에 버스를 탈 사람들이 선 줄이 끝없이 늘어져 있지만 적어도 동작은 합니다. 이렇게 수많은 버스가 한 장소에 집중될 때 이들의 승차 위치를 대략 맞추면서도 정체 문제를 최소화하는 적당한 사례에는 서울역 환승센터 사례가 있습니다.
이곳의 구조를 보면 버스가 정차할 여러 플랫폼을 만들어 놓고 플랫폼 단위로 정차 할 버스 종류를 구분해 완전히 정확한 자리에 정차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플랫폼 단위로는 정차 위치를 예측할 수 있어 시각에 크게 의존하거나 버스 정류장 전체에 신경 쓰고 있지 않아도 큰 무리 없이 버스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환승센터에서 굉장히 마음에 들었던 점은 정차 예정인 버스 번호를 플랫폼 바깥쪽 전광판에 정말 거대하게 표시해 줬던 건데 이렇게 먼 거리에서도 버스 번호가 이렇게 또렷하게 보이는 경험을 처음 해 본 나머지 감격스러워 울 뻔 했습니다. 여튼 여러 버스가 정차하는 정류장에서 이들이 정차 위치를 지키게 만들려면 작정하고 널직한 시설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을 배웠는데 생각해보니 애초에 요즘은 점점 사라지고 있는 시외버스 터미널이 이런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었고 환승센터는 그런 버스 터미널 시스템을 도로 위에 만들어 둔 것일 뿐입니다.
시외버스 이용자가 줄어들어 터미널이 폐쇄되더라도 여전히 도시 사이를 오가는 버스는 남아 있기에 터미널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버스는 터미널 옆 길가에 임시 승하차 위치를 설정해 정차 하고 있는데 이는 기존 터미널에서 정해진 플랫폼에 버스가 정차하면서도 정차 위치가 도로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있어 교통체증을 일으키지도 않지만 이들이 도로 위에서 정차하며 여러 문제를 일으킵니다. 인도를 통행하는 보행자와 버스 승하차자들이 뒤엉키기도 하고 이전에 플랫폼에 예쁘게 정차할 때는 버스에 짐을 넣기도 쉬웠지만 이제는 짐을 넣으며 꾸물대고 있으면 주변을 지나는 모든 사람들의 매서운 눈초리를 받습니다. 하지만 만약 이렇게 도로에 직접 정차하는 시외버스들이 지정된 위치에라도 정차하지 않게 되면 이제는 시외까지 장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승객들이 무거운 짐을 양 손에 든 체 과거 제가 버스 정류장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전력으로 달리던 것처럼 인도 위에서 전력 질주를 허며 거의 묘기에 가까운 사람 피하기를 반복해야만 하는데 시외 버스를 주로 이용하는 분들의 연령대를 고려할 때 별로 좋은 아이디어는 아닙니다. 비슷한 관점에서 서울시가 왜 갑작스레 여러 버스를 이용하는 승객들이 많은 명동에서 갑자기 버스 승하차 위치를 고정하기로 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버스 승하차 위치가 정해져 있으면 버스 타는 사람이 버스 도착과 출발에 훨씬 덜 신경 써도 될 뿐 아니라 버스 도착 여부를 정보시스템에 덜 의존해도 버스를 탈 수 있습니다. 이전처럼 저 멀리 도착한 버스를 보고 사람들 사이를 해치며 달려갈 필요가 없고 또 시력이 약한 사람이 멀리 도착한 알 수 없는 버스가 내가 탈 버스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위해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버스 가까이까지 이동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또 버스 대 여섯 대가 한 번에 정차한 상황에서 버스끼리 행선지표를 가려 맨 앞 버스부터 맨 뒤 버스까지 달리며 행선지표를 확인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인도에 세워진 버스 번호 표지판이나 바닥에 적혀 있을 버스 번호를 보고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 번호의 버스가 정확히 그 위치에 정차하며 사람들을 뚫고 달려가거나 의도하지 않게 여러 사람과 서로 어깨빵을 하거나 시력이 나빠 줄을 서거나 버스를 찾는 단계에서부터 문제를 겪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저 정해진 자리에 가 서 있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이런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이 정책은 실행되자마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 모양인데 이미 통행량이 최대에 가까운 도로에 이전보다 더 느린 속도로 버스가 통과하는 구간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복잡한 도로 여건 상 이미 정차한 다른 버스를 추월해 정 위치에 정차하기도 어려운 환경에 이런 정책을 적용해 이용자들로부터 큰 불만을 받은 모양입니다. 심지어 이 동네 도로 통행을 마비 시킬 정도로 문제를 일으켜 이 글을 타이핑하는 현재 정책을 철회한 것 같습니다. 앞에서 버스가 정해진 위치에 정차하면서도 도로 통행에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려면 지금은 사라지는 추세인 버스 터미널 같은 모양이거나 서울역 환승센터 같은 별도의 정차 위치가 구분된 시설을 주로 사용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에 따라 버스가 정확한 위치에 정차하면 서울시의 예상 대로 사람들이 뒤섞이지도 않고 서로 어깨빵을 반복하며 병원에 실려 가지도 않을 테고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뒤섞이는 대신 적어도 승차 위치에 따라 줄을 선 모양으로 그나마 통제 가능한 모양이 되는 여러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정차 장소를 확보하지 않은 채 그냥 가장 저렴한 방법으로 인도에 버스 정차 위치 표지판을 설치하는 것 만으로는 터미널이나 환승센터와는 달리 기존 도로 통행에 무리를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 해에 걸쳐 강남역이 주요 승하차 지점을 사방으로 분산하거나 터미널, 환승센터 같은 본격적으로 돈을 들여 뭔가를 하지 않는 이상 이를 해결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여전히 개인적으로는 버스가 정해진 승하차 지점에 정차하도록 만드는 정책에 적극 찬성하는 입장입니다. 시력이 나쁜 사람 관점에서 버스가 정확한 위치에 와서 정차하면 오랜 옛날부터 버스를 탈 때마다 느끼는 여러 공포를 근본적으로 없앨 수 있습니다. 경기 광역버스를 탈 때처럼 승차 의사를 표현하기 위해 버스 앞에 뛰어들며 매번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되고 버스 번호를 정확히 인식하기 위해 눈알에 미친듯 힘을 주고 버스 번호판과 제 눈알 사이의 거리가 최소화 되는 지점에 서 있기 위해 노력하며 매번 궤도역학에 근거한 자리선정에 몰두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버스는 교통수단이고 교통수단은 사람들을 싣고 예측 가능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시력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소수일 때 그렇지 않은 다수 입장에서 버스를 타는데 별 문제가 없는데 지정 위치 정차를 통해 교통수단이 예측 불가능하게 움직이는 문제를 일으킨다면 저는 여전히 버스를 탈 수 없겠지만 그 나머지를 태운 버스는 예측 가능하게 움직일 테고 개인적으로는 안타깝지만 일단 이렇게라도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편이 나아 보입니다.
또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은 이미 도로 용량이 포화 상태일 것이 분명한 위치에 이런 정책을 시도하면서 간단한 시뮬레이션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한 상황입니다. 학교 다닐 때 잠깐 배운 산업 시뮬레이션 사례에서 플랫폼에 도착한 지하철에서 사람들이 동시에 내릴 때 이들이 최대한 빨리 플랫폼을 떠나 다른 층으로 이동할 수 있는 최적의 계단과 엘리베이터 위치를 결정하기 위해 지하철에서 내린 사람들을 동그라미로 만들어 이들이 계단으로 몰려가는 모양을 만들어 이들 사이에 일어나는 상황을 시뮬레이션 하곤 했는데 그리 복잡하지 않았습니다. 시뮬레이션을 통해 특정 상황에서 동그라미들끼리 너무 많이 부딪치면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계단 앞에 작은 기둥을 세워 사람들이 조금 돌아가게 만드는 식으로 문제를 예측하고 미리 대응할 방법을 찾곤 했습니다. 그런데 아주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실제로 이용하고 있는 버스 정류장에 아주 큰 영향을 끼칠 정책을 실행하면서 이런 문제가 일어날 거라는 예상을 안 했다는 점은 이 정책을 개인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에서도 여러 모로 아쉽습니다.
명동에서 버스를 타려다가 봉변 당한 분들께는 죄송하지만 개인적으로 서울시의 정책을 지지합니다. 시력이 나쁜 사람 입장에서 이 정책은 버스를 탈 때마다 느끼는 근본적인 공포와 스트레스를 아주 크게 줄여줍니다. 이 정책이 좀 더 넓은 지역에 퍼지면 선택할 수 있을 때 항상 지하철을 선택하는 버스 공포증 환자 입장에서 좀 더 버스를 탈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겁니다. 물론 정책을 실행하기 전에 이 정책이 일으키는 문제를 최소화할 방법을 예측해 미리 해결한 다음 시행해야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