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저것 만들다가 아무것도 똑바로 못 만든다

MMO 개발 경험은 MMO를 개발하는데는 도움이 되겠지만 다른 장르 게임을 잘 만드는데는 도움이 안 됩니다.

이것저것 만들다가 아무것도 똑바로 못 만든다

이건 제 커리어에 대한 고민입니다. 요즘 세상은 어떤지 잘 모르지만 제가 지금 하는 일을 시작한 다음에 한동안 업계 전체에서는 모두가 비슷한 장르 게임을 만들기를 반복했습니다. 처음에는 PC MMO 게임이 경제적으로 큰 성과를 이루자 여러 회사들이 앞을 다퉈 MMO 게임을 만들었는데 이런 시대는 상당히 오래 지속 되어 여러 프로젝트를 거치며 MMO 게임 여러 개를 바닥부터 만들어 볼 기회를 얻었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모두가 모바일 수집형 게임을 만들었는데 이번에도 여러 회사에서 비슷한 수집형 게임을 만들었기 때문에 같은 장르를 만들 기회가 동시에 여러 곳에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같은 시간대에 모두가 같은 장르를 만들고 있어서 그 각각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잘 몰랐습니다. 하지만 MMO 게임을 바닥부터 여러 번 만들어 보니 MMO 장르를 만들겠다는 결정이 얼마나 무섭고 위험하고 또 한편으로는 무책임한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게임 개발은 결국 소프트웨어 개발과 별로 다르지 않지만 가장 큰 차이는 개발을 시작할 때 요구사항이 명확하지 않으며 개발을 진행하는 동안에 빌드를 개발하며 겪은 시행착오에 의해 요구사항이 광범위하게 변경될 가능성이 높고 또 개발이 완료된 상태를 정의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요구사항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소프트웨어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일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게임 업계에서는 이런 상태가 당연하고 또 개발을 시작할 때 생각한 구체적인 요구사항이 개발을 마칠 때 까지 그대로 유지되는 것 역시 이 업계 기준으로는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개발하는 사이에 시장에 새로운 플레이어가 나타나고 고객들의 요구사항이 바뀌는데 적응하지 않으면 게임을 공개해야 할 미래가 되었을 때 게임은 시장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상태일 수 있습니다.

개발을 반복할 수록 MMO 장르는 고객을 정의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가령 얼마 전에 플레이 한 언처티드 시리즈는 멋진 컷씬을 구경하기 좋아하고 약간의 액션, 약간의 잠입, 약간의 탐험이 어우러진 경험을 즐기는 분들을 고객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고객들은 한 번 게임을 구입하고 나면 더 이상 비용을 지불하지 않기 때문에 시작부터 풀 프라이스로 판매해야 하며 한 번 끝까지 플레이 하고 나면 다시 플레이 하게 만들 이유가 적기 때문에 스토리가 끝까지 진행되는 동안 조금씩 난이도를 올릴 수는 있지만 게임 속 캐릭터가 더 강해지기를 요구하는 메커닉을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고객 정의와 이에 따른 제약은 시장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요구사항의 변화 범위를 예측할 수 있는 수준으로 유지해 줍니다. 시장에 아무리 다른 게임이 나타나더라도 이 장르 게임을 개발하던 어느 날 갑자기 디아블로 스타일의 액션과 성장을 집어넣거나 갑자기 멀티플레이 슈팅 모드를 제공하고 스코어보드와 레벨업을 넣을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